그러나 레오폴트는 요지부동했다. 그가 원하는 건 용병대의 칼날에 목이 잘려 죽은 선대 교황의 복수였다. 이미 죽고 없는 섭정의 목이라도 가져야 그때의 분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자 라발은 정말로 난감해졌다. 죽은 섭정은 살레르티나 황가의 마지막 공주였다. 요앙 오귀스트는 그녀의 아들 자격으로 라발의 제위를 이은 것이기에 함부로 그녀의 목을 내어 줄 순 없었다. 그의 정통성은 오직 어머니의 핏줄에 있었다.
교섭이 파투나자, 레오폴트는 기다렸다는 듯 요앙 오귀스트를 파문했다. 요앙 오귀스트는 이를 벅벅 갈면서도 유감만을 표할 뿐 별다른 제재는 가하지 않았다.
파문은 말만 거창한 것이었다. 힘없는 자들에겐 사회적 사형 선고나 다름없지만, 힘 있는 자들에겐 가끔 신경 쓰이는 날파리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그 사건으로 가장 막중한 피해를 입은 것은 라발 출신의 성직자들이었다.
하지만 파문이 20년쯤 이어지면 상황은 조금 달라지기 마련이다. 요앙 오귀스트도 어느덧 쉰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죽은 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파문당한 채로 죽는다면 교회법에 따른 장례도, 신성 제국 황제로서의 지위도 위태로워지리라. 더욱이 교국과 단교된 상태라면 훗날 그의 뒤를 이을 황태자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줄 사람이 없어진다.
만일 교황에게 손수 황제의 관을 수여받는 신성 제국이 라발 하나라면 여유롭다. 그러나 50년 전 북방을 통일한 탐보프가 교황에게 황제의 관을 내리받으며 신성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천 년간 대륙을 호령했던 라발은 젊은 늑대의 도전을 받고 있었다.
모든 나라의 존경을 받는 신성 제국의 위엄, 교회의 수호자로서의 지고한 위치. 라발은 그 무엇도 탐보프에게 양보할 마음이 없었다. 천 년을 견딘 제국은 아직 건재했다. 요앙 오귀스트는 본인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황가의 역사를 지난 천 년보다 찬란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렇기에 마귀 출현은 위협임과 동시에 호재였다.
요앙 오귀스트는 늘 교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유능한 재상이었던 클레멘스를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뒤 교국에 박아 둔 것만 봐도 그러했다. 그러니 마귀가 나타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친서를 보낸 것이고, 또 이렇게 황태자를 직접 보낸 것이 아닌가.
라발의 적극적인 태도는 탐보프를 견제하고자 하는 예후르에겐 꽤나 기꺼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30년 전의 참극을 조용히 덮고 가자는 건 곤란했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죄 없이 고통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죄를 져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런 당연한 논리를 황태자에게 설파할 생각은 없었다. 좋은 핏줄을 타고난 것만으로 지금의 특권을 당연하게 여기는 족속에겐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설명해야 했다. 피곤한 일이지만 예후르에겐 익숙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황제 폐하께선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예후르가 매끄럽게 웃었다.
“30년 전의 참극을 보상하신다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죄는 범해졌는데, 정작 죄인이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죠.”
티에리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엘피도 공작. 나는 지금 거래를 하자는 겁니다. 마귀에 대한 정보를 내어 줄 테니, 부황의 파문을 철회시켜 달라는 거죠. 내 말이 그리 어렵습니까?”
“그러는 황태자께선 진심으로 마귀에 대한 정보가 오스피나 참극을 덮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십니까?”
“…….”
“그만한 요구를 하시려거든 뱀의 꼬리라도 잘라 오셨어야죠.”
예후르는 무심하게 티스푼으로 차를 저었다.
“거래란 동등한 가치를 지닌 재화를 교환하는 겁니다. 마귀에 대한 정보 하나로는 오스피나 참극과 견줄 수 없으니, 다른 조건을 더 얹자는 거죠. 이는 교황 성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방편이기도 합니다. 아직 그분의 울분이 다하지 않았는데 이대로 참극을 덮고 넘어갔다간 우리의 합의안은 모조리 물거품이 될 거예요.”
레오폴트는 아직 진심으로 라발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마귀 사태가 중대하여 잠시 눈감아 주고 있는 것일 뿐, 다시 평화가 찾아오거든 30년 전의 분노를 되새김질할 것이 빤했다.
“성직자들의 반발도 있을 테고요.”
“…….”
“특히 원탁의 분노가 거셀 겁니다. 오스피나 참극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유야무야 황제 폐하를 복권시킨다면, 반대하지 않을 사람은 클레멘스 추기경 단 한 명뿐이에요. 같은 라발 출신인 글리체리아 추기경은 누구보다도 엄정한 성직자고, 보나벤투라 추기경은 선대 교황이셨던 제네로사 5세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모국의 일이라고 무조건적으로 편들어 줄 만한 인물들은 아니죠.”
티에리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팔짱을 꼈다. 예후르는 찻잔으로 입술을 가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탐보프도 있지 않습니까.”
티에리의 목 근육이 바짝 죄어졌다.
“라발과 단교했던 지난 20년, 탐보프는 누구보다도 충실한 교국의 우방이 되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베푼 것이 많을수록 참견할 여지도 늘어나기 마련이죠. 그들은 라발의 복귀를 반기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막으려고 훼방을 놓을 거예요.”
그렇다면 간섭할 여지를 없애면 그만이다.
“만약 라발이 오스피나 참극을 적절하게 보상한다면 탐보프도 더는 어깃장을 놓지 못할 겁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교국과 라발, 두 나라의 일. 객관적으로도 흠결 없는 합의라면 제3국으로선 쉽게 개입할 틈이 보이지 않겠죠.”
특히나 빌헬미나 3세는 누구보다도 때를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녀라면 양국의 관계 개선을 축하하는 한편, 30년 전 오스피나 참극의 잔혹함을 되새기게 하는 성명을 발표할 것이었다.
굳은 얼굴로 침묵하던 티에리가 오랜만에 입술을 열었다.
“…돌아가신 섭정의 목을 드릴 순 없습니다. 그쪽에게 30년 전 참극이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문제라면, 우리에겐 섭정이 그래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원하는 건 복수가 아닌 책임입니다.”
복수를 갈망했던 레오폴트는 제네로사를 죽인 섭정의 목을 원했다. 그러나 예후르는 라발이 공식적인 책임을 지는 것으로 만족했다. 애당초 그는 죽은 사람의 목이 정치적, 경제적 보상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티에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서명하도록 하죠.”
예후르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요앙 오귀스트는 협상 전권을 갖고 가는 아들에게 어디까지 내어주어도 좋은지 적정선을 알려 줬을 것이다. 다행히 라발의 황제는 고작 시들시들한 정보 하나로 요행을 바라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곧 모드벤나가 들어와 합의안을 작성했다. 예후르는 티에리가 제안하는 보상안의 큰 틀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반듯하게 작성된 합의안 아래 양자가 모두 서명하자, 합의안은 이제 공식적인 효력을 갖게 되었다.
“이제 마귀에 대한 정보를 알려드려야겠군.”
모드벤나가 나가자마자 티에리가 읊조린 말이었다. 예후르는 순식간에 제 목 앞으로 치달은 칼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근위대에게 몸수색을 강화하라 일러야겠군요.”
“흥.”
김 빠졌다는 듯 티에리가 심드렁한 얼굴로 검을 거두었다.
“이건 마귀에게 먹혔던 우리 병사의 검입니다. 사도께선 이 검의 이상한 점을 알아보시려나 모르겠군요.”
예후르는 찬찬히 검을 들여다보았다. 남쪽에서 자주 사용하는 세련된 형태의 세검이었다. 날이 바짝 선 것이 자칫하다간 공기도 벨 듯했다.
예후르가 검 끝을 가리켰다.
“불꽃이 남아 있군요.”
“…불꽃?”
티에리가 이상한 표정으로 검날을 보았다.
“난 검날이 깨끗하다는 걸 말하고 싶었는데.”
“…….”
“어쨌든 라발에도 마귀에 대해 전승되어 내려오는 이야기가 몇 있습니다. 그중 삼켰던 무기를 죄 토하며 죽은 마귀의 이야기가 있죠. 그 마귀가 토해 낸 무기들은 시커멓게 변색된 채였는데, 그마저 오래지 않아 재 가루로 변했다고 합니다.”
흔히 알려지길 마귀는 지옥에서 올라온 괴물.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들은 무수히 많았다. 마귀의 손에 닿은 임산부가 사산했다는 얘기, 마귀가 나타난 곳에 전염병이 돌았다는 얘기, 마귀의 숨결을 마신 자가 미쳐 날뛰었다는 얘기.
그러나 한 번 마귀에게 먹혔던 이 검은 시커메지긴커녕, 갓 벼린 것처럼 예리하게 날이 섰다. 밤새 격렬한 전투를 치루었던 검이라기엔 지나치게 말끔했다.
“영 이상해 마귀가 또 뱉어 내는 무기가 있으면 갖고 올라오라 하였는데, 유감스럽게도 건진 건 이뿐입니다. 이것도 새벽녘 마귀가 급히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빼낸 것이라 운이 좋았긴 합니다만.”
검날에 선명하게 비치는 제 얼굴을 응시하던 티에리가 검집 속으로 검을 집어넣었다.
“내 생각에 마귀는 지금껏 알려져 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근거 없이 떠도는 말들이 많았으니까요.”
“그것도 그렇지만.”
티에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애당초 그게 마귀가 맞긴 한 겁니까?”
예후르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티에리는 검을 두고 일어섰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예후르!”
안으로 뛰어 들어오던 페기가 낯선 듯 익숙한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그녀를 알아본 티에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서려는 순간, 예후르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페기?”
예후르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기, 하고 이름을 되뇐 티에리가 설마설마하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페기는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그를 스쳐 지나갔다.
“여긴 어쩐 일이니?”
예후르가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조금 망설이며 뒤를 돌아볼 듯하던 페기가 이내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레오가 깨어났어.”
레오폴트는 침대에 앉아 차라의 시중 아닌 시중을 받고 있었다.
“아, 그냥 쭉 들이켜라니까요!”
“차, 차라야. 내 이따가 마실 것이니 저기 두고 가려무나.”
“이따 언제!”
어떻게든 약을 먹이려던 차라가 왈칵 성질을 부렸다. 레오폴트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엄숙한 가면 위로 식은땀이 뻘뻘 나는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에요?”
난데없는 예후르의 목소리에 차라와 레오폴트가 화들짝 문가를 돌아보았다. 그의 등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페기가 익숙한 광경을 보고 쓰게 웃었다.
“차라. 빨대를 꽂아서 드려야지.”
“…빨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