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을 제외하면 원탁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자는 페아노라의 대주교인 클레멘스였다. 윗 서열들이 부재할 시 그에겐 원탁회의를 주재할 권리가 있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얘기였다. 아나클레토와 솔란지아를 위시한 탐보프 측 추기경들이 그리 호락호락 휘둘릴 인물도 아니거니와, 클레멘스도 마냥 떳떳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몰랐다고 하지 마십시오, 클레멘스.”
솔란지아가 안경 너머로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을렀다. 묘하게 꺼림칙한 사이던 아나클레토도 오늘만은 솔란지아와 합세했다. 편 들어주는 이 하나 없는 원탁에서 클레멘스가 짐짓 외롭고 슬픈 척 읊조렸다.
“고국의 일입니다. 내가 몰랐을 리 있나요.”
“뭐가 그리 잘났다고 당당하십니까! 마귀예요! 당신이 허구한 날 들먹이는 이스파갈족이나 엘피도 공작 전하의 출신과는 완전히 결이 다른 문제라고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솔란지아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피로한 기색으로 이마를 짚고 있던 글리체리아가 매섭게 말을 보탰다.
“맞는 말입니다. 그대에게 생각이란 게 있었다면 적어도 원탁의 참가자들에겐 미리 언질을 주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가 지금껏 이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놀랍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무래도 라발의 황제 폐하께선 클레멘스 추기경을 대단히 아끼시나 봅니다. 지근거리에 계신 글리체리아 추기경이 아니라, 그 멀리 계시던 클레멘스 추기경께 먼저 소식을 전하신 것을 보면요.”
아나클레토의 빈정거림에 글리체리아는 대놓고 불편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라발의 수도 누미디아를 교구로 삼은 추기경이었다. 라발인임에도 정치를 멀리한다는 이유로 누미디아를 맡을 수 있었지만, 이런 중대사까지 본국에서 소외당하는 현실이 흡족할 리 없었다.
클레멘스가 억울한 얼굴로 항변했다.
“나라고 원탁의 동료들에게까지 함구하고 싶었겠습니까? 어찌 윗선에서 내 입을 막았다고 생각해 주는 분이 아무도 없으실 수가 있나요.”
“당신이 그렇게 얌전히 명령을 따른 걸 보면, 그 윗선이 라발의 황제 폐하라도 되시는 모양이죠? 왜요. 탐보프의 추기경들에겐 알리지 말라 하시던가요?”
“오, 솔란지아.”
제발 그만하라는 듯 클레멘스가 넌더리를 냈다. 울컥한 솔란지아가 재차 노성을 터트리려는 찰나, 회의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싸늘한 바람을 몰고 들어온 사람은 예후르였다. 득달같이 달려들어 진상을 캐물으려던 몇몇 추기경들이 그의 가라앉은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또 다른 몇몇은 머뭇거리며 뒤늦게 들어오는 페기를 발견하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후르는 가장 상석인 교황의 자리를 비워 두고 그 왼편에 착석했다. 서열에 따라 그 옆자리는 차례로 안드레아와 페기였다. 안드레아의 빈자리를 조금 속상한 듯이 쳐다본 페기가 말없이 제자리에 앉았다.
추기경들은 서로들 눈치를 보느라 침묵에 잠겼다.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던 만달 추기경이 때마침 깨어났다. 멍하니 눈을 껌벅이던 그가 예후르를 발견하곤 환한 얼굴을 했다.
“오, 전하. 성하께선 무사하신가요?”
“…예. 조금 놀라셨을 뿐 건강에는 이상이 없으십니다.”
예후르는 건조한 눈으로 좌중을 훑어보았다.
“빈자리가 있군요. 다른 분들은 어디 계십니까?”
“보나벤투라 추기경은 어젯밤 돌아가신 샤미소 백작 부인의 친지들을 위로하고 계십니다.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으셨으니까요. …그리고 다른 두 분은.”
솔란지아가 슬쩍 아나클레토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나 아나클레토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양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죽은 백작 부인을 위한 기도나 드릴 뿐이었다. 솔란지아는 속으로 이를 박박 갈며 내키지 않는 말을 꺼냈다.
“교구가 걱정되시는지 이른 새벽 성궁을 떠나셨습니다.”
“마귀가 무서워서 도망친 겁쟁이들을 참 아름답게 포장해 주시는군요.”
클레멘스의 빈정거림에 솔란지아가 도끼눈을 떴다. 그들을 중재하듯 글리체리아가 나섰다.
“두 분의 처사는 다음에 논하면 될 일입니다. 지금은 더 시급한 문제가 있으니까요.”
“…….”
“전하. 지금까지 마귀의 출현을 숨기신 건 성하의 뜻입니까?”
글리체리아의 녹안이 엄정한 빛을 뗬다. 예후르는 선선히 대답했다.
“네. 성하께선 원탁의 혼란을 우려하셨습니다.”
“유감스러운 말씀이군요. 원탁은 교국과 교회의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 마귀의 출현이 세수 부족이나 타락한 주교의 처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평소 원탁에 오르는 안건과 마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지요. 부족한 세수는 원탁의 논의를 통해 더 나은 방안을 강구할 수 있지만 마귀는 아니지 않습니까.”
“…….”
“아니면 이곳에 마귀를 죽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아는 분이 계신가요?”
마귀는 오직 성스러운 불에만 타 죽는다. 그렇지만 성화는 대성당의 성화대를 떠날 시 금방 사그라들기 때문에 전 대륙을 아우르는 방안이 될 순 없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마귀를 해치울 수 있는 건 성화의 가호를 받아 성화의 힘을 빌려 쓰는 사도뿐이었다.
추기경들은 불편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어젯밤 수많은 마귀들을 썰어 내던 예후르의 모습을 그들도 두 눈 똑똑히 목격한 참이었다. 어릴 적부터 유독 강한 권능을 선보이던 그이기에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자신들의 무능함을 되새기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빠르게 눈알을 굴려 좌중을 훑은 아나클레토가 느물거리며 말했다.
“물론 성화의 가호가 없는 저희는 마귀를 죽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전략을 함께 논의할 수는 있지요. 원탁이 미리 모여 머리를 맞댔다면, 마귀가 성궁에 나타나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요. 불가능합니다.”
예후르는 엷게 웃기만 했다. 클레멘스가 눈치껏 말을 받았다.
“라발에서 처음으로 마귀가 발견된 곳은 세르판테로스 가도 남쪽입니다. 잠시 남하하다가 돌연 방향을 돌려 모게리니산에 들렀고, 이후로는 계속 북상했어요. 마지막으로 발견된 곳은 산타나 인근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누미디아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요. 계속 북상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마귀의 다음 출몰지는 누미디아가 되리라 짐작하고 있던 참입니다.”
누미디아에서 성도 오스피나까진 마차를 타고도 한 달이 걸린다. 아무리 마귀의 이동 속도가 빨라도 며칠 만에 당도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솔란지아가 아연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가능이나 한 얘깁니까? 전조도 없이 마귀가 성궁에 나타났단 말이잖아요, 지금.”
“이론적으로 가능은 하죠.”
클레멘스가 그답지 않게 망설이는 기색으로 말끝을 흐렸다. 예후르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라발에서 출몰한 마귀의 목적은 본디 모게리니산이었을 겁니다. 그곳엔 천 년 전 뱀을 봉인한 성검이 잠들어 있으니까요. 일차적인 목적을 이루자, 교국의 시선을 계속 라발에 붙잡아 두기 위해 누미디아로 진군했겠죠.”
마귀를 부리는 건 뱀이다. 정말로 뱀이 깨어난 것이라면, 자신을 봉인시킨 성검을 최우선적으로 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덕분에 교국은 지금까지 누미디아에만 온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함락된 적 없는 천년 도시가 철저하게 무장한 채 마귀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예요. 보기 좋게 당한 셈이지만.”
“라발에서 출몰한 마귀는 눈속임이고, 진짜 목적은 성도였단 말씀인가요? 하지만 어떻게 마귀가 성궁에 나타날 수 있었던 건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솔란지아가 멈칫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연해졌다. 있을 수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예후르가 차분하게 단언했다.
“아마도 연회장에 뱀이 숨어들었던 모양입니다.”
원탁은 찬물 맞은 듯 고요해졌다. 어젯밤 페기의 생일 연회는 고위 성직자와 타국의 고위 귀족들만이 초대받은 것이었다.
만일 고위 성직자가 뱀으로 밝혀진다면 교국의 명예는 땅으로 떨어지리라. 그러나 타국의 귀족인 경우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제각기 권세와 재물을 틀어쥔 자들이니, 교국이 수사를 시작하는 데만도 난항을 겪을 것이었다.
“이미 성궁에 출입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원탁에 앉은 여러분을 포함한 성궁의 모두가 수사를 받을 겁니다. 새벽에 성궁을 떠난 이들에겐 교국의 수사관이 따라붙을 거고요.”
어려운 일이라곤 하나, 손 놓고 방치할 수만은 없었다.
“그대들은 당분간 성궁에 머무십시오. 마귀를 죽이는 성화가 이곳에 있으니 더는 뱀도 성궁에서 마귀를 불러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뱀의 진짜 목적이 성도라면 몸을 피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나클레토가 난색을 표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예후르가 툭 말을 내뱉었다.
“난 뱀의 목적이 성도가 아닐 거란 예감이 듭니다.”
“어째서죠?”
“근거는 없습니다. 개인적인 느낌이니까요.”
예후르가 아나클레토를 돌아보았다.
“성궁이 불안하다면 안전하다 생각되는 곳으로 떠나셔도 됩니다. 다만 만일을 대비해 수사는 받고 가십시오. 그대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훗날 그대의 명예가 실추될까 저어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나클레토가 못내 불편한 기색으로 웃어 보였다. 솔란지아가 예리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전하께선 앞으로 뱀이 어떻게 움직이리라 예측하십니까?”
“뱀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알지 못하니 예측은 무의미합니다. 다만 성궁에서 패퇴했으니 다른 곳에서 마귀가 나타날 여지가 있지요.”
“비로소 사도가 나설 때로군요!”
클레멘스가 명랑하게 외쳤다. 침중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클레멘스. 그대는 정말이지….”
솔란지아가 노여움 서린 얼굴로 부들거렸다. 예후르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클레멘스 추기경의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성화가 온존된 성궁은 마귀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니, 성화의 가호가 미치지 않는 곳에는 사도가 가야겠지요. 운이 좋다면 뱀을 붙잡을 수도 있을 겁니다.”
“막중한 임무로군요. 그런데 사도들 중 어느 분이 가셔야 하는 건지….”
추기경들은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병자인 데다 교황인 레오폴트는 성궁을 떠날 수 없다. 차기 교황인 예후르 역시 가능한 한 안전한 곳에 머물러야 했다. 아직 나이가 어린 아뎃사의 차라를 제하면 두 명이 남았다.
이멘바흐의 안드레아와 카니나의 페기.
“전하께서 가셔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