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328)

“아니, 아니에요…. 갑자기 그림자 속에서 괴물이 나타나서….”

하녀가 헐떡헐떡 말을 내뱉었다. 알틴이 재차 캐물으려는데, 페기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그림자 속에서 괴물이 나타났다고?”

되묻는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희었다.

“레오는?”

“…예, 예?”

“성하는 어떻게 됐냐고!”

하녀는 입술만 뻐끔거렸다. 대답을 기다리던 페기가 갑자기 홀 쪽으로 튀어 나갔다. 기겁한 차라가 그녀를 따라가려는데, 하녀가 끈질기게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안 돼요, 가시면 안 돼요. 눈물 줄줄 흘리는 얼굴에 말로 다 못할 공포가 가득했다.

페기는 정신없이 달렸다. 홀에 가까워질수록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귀를 찔렀다. 그녀는 휘청휘청 끄트머리 방으로 들어가 붉은 융단을 홱 거뒀다. 눈부신 샹들리에 불빛에 구겨졌던 얼굴이 서서히 황망함으로 젖어 들었다.

성화와 여덟 천사들의 천지창조가 담긴 천장화 아래,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펼쳐져 있었다. 우아하게 담소를 주고받던 귀족들이 서로를 밀치고 밟으며 나가려 들었다. 창검을 잃은 기사들은 무력했다. 우후죽순 피어나는 검은 연기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끔찍한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온몸을 뒤덮은 검은 비늘, 훤칠한 기사도 가슴 아래로 내려다보는 큰 키, 척추를 따라 머리까지 돋아난 가시. 밖으로 드러난 송곳니는 짐승의 것처럼 날카로우며 눈알은 마치 파충류처럼 기괴하다. 실로 본 적 없는 생김새였다. 그러나 페기는 그것의 이름을 알았다.

그림자 속에서 자라며,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괴물.

“마귀….”

아랫입술이 덜덜 떨렸다. 천 년 전 소멸되었던 마귀가 어찌해 여기 있나. 저들을 부리는 뱀은 분명 성검에 찔려 봉인되었을 터인데.

그때, 단 아래 축 늘어져 있는 레오폴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졸도한 레오폴트를 끌어안고 뒷걸음질하던 고드릭이 계단에 발이 걸려 철퍼덕 엉덩방아를 찧었다. 저 앞에서 기사 두엇을 해치운 마귀가 느릿느릿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페기는 본능적으로 달려 나갔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에 잡힌 촛대를 무작정 집어 던졌다. 퍽! 뾰족한 촛대가 마귀의 몸통에 꽂혔다. 순간 고드릭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도망쳐요!”

퍼뜩 정신 차린 고드릭이 레오폴트를 안고 전력으로 달렸다. 그들의 모습이 붉은 융단 너머로 사라지고서야 페기는 겨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레오폴트는 괜찮다. 죽지 않을 것이다.

크르릉….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섰다. 페기는 달달 떨리는 아래턱에 힘주며 애써 고개를 틀었다. 시커먼 마귀의 눈알이 그녀를 똑바로 비추고 있었다. 시선이 맞닿자, 마귀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모로 기울어졌다.

성큼, 그것이 다가온다. 페기는 스멀스멀 뻗치는 검은 연기에 진저리 치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두어 발짝 뒷걸음질하기 무섭게 등 뒤로 막다른 벽이 닿았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공황에 빠진 머릿속이 어지럽게 돌았다. 마귀는 뱀이 부린다. 뱀은 성검으로 봉인된다. 하지만 성검은 모게리니산에 꽂혀 있는데. 나는 이대로 죽나. 사도가 되어서 고작 뱀이 부리는 사역마 따위에 먹히고 마나.

어느새 바짝 다가온 마귀가 서서히 아가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페기는 엄습하는 어둠을 멍하니 지켜만 봤다. 뼛골 시린 냉기가 마구잡이로 속살을 파고들었다. 흉측한 송곳니가 금방이라도 뺨에 닿을 듯 가까웠다.

별안간 강한 힘이 그녀의 어깨를 채었다.

넘어질 듯 끌려간 페기가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 페기는 발작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익숙한 바람 냄새가 났다.

먹이를 빼앗긴 마귀가 분노하듯 길게 울었다. 한 팔로 페기를 끌어안은 예후르가 이 나간 검을 내던지곤 거침없이 마귀에게로 손을 뻗었다. 네발짐승처럼 달려온 마귀가 그의 손을 삼키려 아가리를 찢었다.

그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끼익! 끼아악! 마귀가 울부짖었다. 아가리에 붙은 백색 불꽃이 순식간에 마귀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 마귀가 허리를 접고 고개를 뒤로 꺾으며 마구 울었다. 귀청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에 다른 마귀들의 이목이 하나둘 이쪽으로 쏠렸다.

페기를 꽉 끌어안아 귀를 막아 준 예후르가 서서히 사선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좀체 잦아들지 않는 마귀의 비명 틈새로 맑은 소리가 퍼져 나갔다.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것처럼.

그 순간, 유리창이 깨지며 거대한 백룡이 난입했다. 용은 순식간에 마귀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마귀의 비늘을 꿰뚫었다. 포악한 꼬리 질에 마귀 두엇이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뒤이어 검은 용들이 홀 안으로 뛰어들었다. 용들은 마귀를 때려잡으며 포효하듯 울부짖었다. 굶주린 짐승처럼 날뛰었다. 거친 날갯짓에 돌풍이 일어 페기는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다만 소리만이 낭자했다. 예후르의 손으로도 막을 수 없는 마귀의 울음소리, 용의 울부짖음, 찢기고 밟히고 부서지고 부러지는 오만 가지 소리들. 차라리 귀를 잘라 내고 싶어지는 끔찍한 소리들에 절로 울음이 북받쳤다. 페기는 저도 모르게 흐느꼈다.

그러자 예후르가 부드럽게 속삭여 왔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페기는 눈을 질끈 감고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카니나의 뒷골목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어린 날 그러했듯, 오직 그의 목소리에만 귀 기울이며. 영원을 버텨 나가는 기분으로 찰나를 견뎠다.

“가져왔습니다!”

기름통을 주렁주렁 매단 기사들이 반파된 창문 밖에서 고함쳤다.

예후르는 페기를 데리고 유유히 홀을 빠져나왔다. 그들의 등 뒤로 달려들던 마귀가 용의 발톱에 채이고, 그 용의 날개를 찢던 마귀는 다른 용에게 처참히 뜯겼다. 낭자한 피 냄새와 울부짖음으로 페기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홀 밖에선 미란테가 긴장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명령을 재고해 달라는 듯 절박한 눈빛을 보냈으나, 예후르는 짧게 명할 뿐이었다.

“시작해요.”

떨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미란테가 비통함을 삼키곤 근위대에게 손짓했다. 기다렸다는 듯 근위대가 홀 안팎으로 기름을 뿌리기 시작했다. 위기를 감지한 마귀들이 더욱 포악하게 날뛰었다.

그때였다.

챙그랑! 용의 거친 날갯짓에 마지막 샹들리에마저 산산조각 부서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 순식간에 사방을 집어삼켰다. 아주 잠깐의 정적. 어둠에 기생하는 마귀들이 환호하듯 길게 울기 시작했다. 마귀가 역병처럼 퍼져 나갈 징조였다.

그러나 저 멀리, 횃불을 들고 달려오는 기사가 있었다. 그것은 사도의 재림을 알리는 종이요, 어둠 속에서 저절로 피어올라 이 세상을 창조한 성스러운 불꽃.

마지막 희망을 우러르듯 간절한 눈빛들이 불빛 위로 얹혔다. 근위대가 뒤로 물러나며 길을 만들자, 기사가 숨이 턱에 닿도록 그사이를 꿰뚫었다.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횃불을 내던졌다.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횃불이 흥건한 기름 위로 떨어졌다.

마치 뱀이 기어가듯, 불이 기름을 따라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열기에 마귀들이 끼아악 목청을 찢으며 울었다. 용들은 불길을 피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용을 따라 창밖으로 나오려던 마귀들은 기사들의 창검에 가로막혔다.

불길에 갇힌 마귀들이 끔찍하게 울었다. 다시 어둠 속으로 기어들려던 마귀조차 냉엄한 성화에 발목이 잡혀 꼼짝없이 타들어 갔다. 고통 속에 죽어 가는 마귀들의 비명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페기는 극도의 공포로 전율했다.

하늘과 땅에서 불이 타오르듯, 지옥에도 불이 타오른다 하였다. 하늘과 땅의 불이 생명을 퍼트리듯, 지옥의 불은 죄인을 벌하고 심판한다 하였다.

그러니 이제야 알겠다. 마귀들을 참하는 저 불길이야말로 지옥 불이 아니겠나.

불은 오래도록 타올랐다. 그 엄숙한 심판을 경배하는 것처럼 용들이 불길 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불길 속에서 어른어른 비치던 마귀들이 하나둘 스러지고, 마침내 잿더미 위에 남은 것은 지옥에서 올라온 짙은 유황 냄새뿐이었다.

***

아그리피나 홀은 완전히 전소되었다.

그 자체로 귀중한 예술품이었던 건축물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으나,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른 문제도 아닌 마귀였다. 오히려 홀 하나로 마귀의 확산을 막을 수 있어 다행인 상황이었다.

성도 오스피나는 즉시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미란테의 지휘에 따라 근위대가 철통같이 성궁을 엄호하고, 몬틸로 백작이 휘하의 경비대를 동원하여 성도의 시가지를 순찰했다. 영문을 모르는 시민들은 혹 30년 전의 참극이 반복되나 싶어 두려움에 떨었다.

그날 밤은 고요히 지나갔다.

가장 위험한 때를 넘기자 성궁에는 안도의 한숨이 맴돌았다. 태양이 떠 있는 낮은 어둠을 틈타 이동하는 마귀들에게서 비교적 안전한 시간이었다. 밤새 죽은 듯 움츠러들어 있던 이들이 하나둘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 괴물이 정말 마귀인지, 천 년 전에 사라졌던 마귀가 왜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원탁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거기에 라발에선 이미 몇 달 전 마귀가 출몰했었다는 속삭임이 얹히자, 원탁을 향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니, 그럼 알면서도 이딴 연회나 열었단 얘기요?”

“도대체 원탁이 하는 게 뭡니까? 이 중요한 정보를 여태 숨기고 있던 저의가 대체 뭐냐고요!”

“마귀가 갑자기 왜 부활한 걸까요? 혹 성하께서 저주받으셨기 때문은 아닐까요?”

근거 없이 떠도는 말들은 곧 비둘기 다리에 묶여 사방 각지로 날아갔다. 성궁이 가장 위험하다며 동트자마자 허겁지겁 달아난 이들도 있었다.

근위대는 그들을 통제하려는 것을 애당초 포기했다. 연회를 위해 모였던 이들 대부분 고위 성직자나 타국의 유력한 귀족이었다. 근위대가 함부로 다루기엔 하나하나가 모두 거물이었다.

그런 거물들이 성토하는 목소리가 빗발치는데도 원탁에선 답이 없었다. 기실 원탁회의는 열리지도 않고 있었다. 근위기사들의 철통같은 보호 속에 밤을 지새운 원탁 추기경들은 동이 트자 슬금슬금 원탁으로 모여들었는데, 정작 회의를 주재할 자가 없었다.

홀에서 졸도한 레오폴트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다음 서열로 교황을 대신할 수사의 예후르는 밤새 기사들의 보고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멘바흐의 안드레아는 아예 성궁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며, 카니나의 페기는 갓 추기경이 된 병아리에 불과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