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지요, 전하.”
클레멘스의 권유에도 티에리는 그들의 뒷모습만 눈으로 좇을 뿐 미동도 없었다. 클레멘스가 다시금 부드럽게 권했다.
“폐하께서 명하신 일이 아닙니까.”
티에리는 그제야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섰다. 클레멘스는 총총 그를 뒤따르며 기민하게 예후르의 주변을 살폈다. 욕심쟁이 아나클레토가 벌써 제 조카와 함께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세도파 양!”
클레멘스가 재빨리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당혹한 세도파를 노련하게 낚아챘다.
“변함없이 아름다우시군요. 실은 저기서 오는데 천장의 샹들리에가 떨어진 줄 알았습니다. 영애가 너무 빛나서 말이지요!”
“예, 예? 감사합니다만, 전 이만 전하께….”
그때, 티에리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앞으로 끼어들었다. 예후르와 인사를 주고받던 아나클레토가 표정을 구겼다. 티에리는 개의치 않으며 입을 열었다.
“엘피도 공작.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습니까?”
낮은 목소리엔 우아함과 거만함이 공존했다. 사람들은 부채로 시선을 가리며 남몰래 그들을 주시했다. 20년 전 교국에서 내쫓겼던 라발이 돌아왔다. 어쩌면 탐보프가 주도하던 교국의 정세가 뒤바뀌는 순간일지도 몰랐다.
예후르는 자신을 둘러싼 미묘한 대치를 여유롭게 관찰했다. 세도파는 초조한 기색으로 아나클레토와 시선을 주고받는 반면, 티에리는 꼭 라발의 궁정에 있는 것처럼 느긋해 보였다. 거절을 들으리라곤 추호도 생각지 않는 얼굴이었다.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예후르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세도파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입장도 못 해 줬으면서 첫 춤까지 미루는 약혼자가 될 순 없죠. 유감이지만 대화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합시다.”
라발을 다시 끌어들인 건 그다. 오만한 천년 제국에게 재갈을 물려 길들이는 것 역시 그의 몫이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입술을 깨물던 세도파의 얼굴이 맑게 갰다. 반면 티에리의 얼굴은 돌처럼 굳었다. 익숙지 않은 모멸감에 그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아닌 척 그들을 주시하던 눈들은 삽시간에 흩어졌다. 아직은 그래도 탐보프인가. 혹 모욕을 주기 위해 초대한 것은 아닌가. 그래도 명색이 라발의 황태자인데….
웅성거리는 속삭임들을 들으며 아나클레토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클레멘스의 곁을 지나치며 슬쩍 비웃음을 던졌다.
“꼴좋군.”
그러거나 말거나,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서 있던 클레멘스가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렸다. 단 위에 지친 듯이 앉아 있던 레오폴트와 눈이 마주쳤다.
“할 말이 있으면 엘피도 공작에게 하시오. 내 연회 도중에 쓰러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느릿느릿한 목소리에는 진득한 피로감이 얹혀 있었다. 쓰게 웃은 클레멘스가 단 위로 올라가 하얀 천으로 동여맨 레오폴트의 손등 위로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그저 인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지상에 태양이 떠올랐는데 어찌 고개를 돌리고 서 있을 수만 있을까요?”
“…비위도 좋아. 여기서 내 손에 기꺼이 입 맞추는 사람은 그대뿐일 거요, 클레멘스.”
레오폴트가 힘없이 손을 거두었다. 클레멘스는 다시 한번 정중히 인사하곤 단을 내려갔다.
아그리피나 홀 뒤쪽으론 내전과 이어지는 비밀 복도가 있었다. 정식 통로가 아닌 만큼 평상시엔 하인이나 하녀들이 자주 이용했지만, 오늘처럼 연회가 있는 날엔 내전의 거주자들이 오가곤 했다. 내전의 거주자란 당연히 성가에 입적된 사도들이다.
그중 차라는 비밀 복도 한편에 마련된 방 안에서 초조하게 다리를 떨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익숙지 않은 정복 차림에 숨통이 꽉 옥죄는데, 페기는 올 생각을 안 했다. 지척인 아그리피나 홀에서 가감 없이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그를 재촉하는 듯했다.
“얘는 왜 아직도 안 와.”
목 끝을 여민 단추를 슬그머니 풀며 투덜거리는데, 방문이 활짝 열렸다.
“야! 너 왜 이렇게 늦었….”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난 차라가 눈만 끔벅끔벅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려하게 치장한 페기가 어색하게 멈춰 섰다.
“미안. 예후르가 이것저것 더 꾸며 보자고 자꾸 고집부려서….”
“…….”
“차라?”
“…….”
“음, 많이 이상하니?”
페기가 머쓱한 얼굴로 목덜미를 매만졌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 차린 차라가 조금 경계하는 기색으로 그녀의 주변을 빙 돌았다.
“이야. 옷이 날개라더니, 너 오늘 좀 예쁘다?”
그도 그럴 것이, 늘 수수한 단색 드레스만 입던 페기가 이렇게나 화려하게 꾸민 모습은 처음이었다.
큼직한 다이아몬드 귀걸이와 꽃잎 모양으로 섬세하게 세공한 팔찌를 구경하던 차라가 그녀의 발치에 쪼그려 앉았다. 채도 다른 연분홍빛 비단을 여럿 겹쳐 풍성하게 만든 치맛자락엔 작은 보석 알갱이가 한 땀 한 땀 수놓아져 있었다.
“이게 대체 다 얼마야….”
멍하니 중얼거리는 그의 눈앞으로 가느다란 손이 내밀어졌다. 페기의 손을 잡고 일어나려던 차라가 멈칫하며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너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바삐 치맛단을 정리하던 알틴이 페기의 반대쪽 손을 잡았다.
“어머, 진짜네? 손이 완전히 얼음장이세요!”
“어디 아파?”
양손을 잡힌 페기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차라가 왈칵 성을 냈다.
“거짓말! 자세히 보니까 안색도 별로 안 좋네.”
“그냥 긴장해서 그래.”
“긴장…?”
문득 잊었던 긴장감이 되살아난 차라의 낯빛이 시허옇게 죽었다. 페기는 손을 뻗어 차라의 목에 풀린 단추를 잠가 주었다.
“넌 괜찮아?”
“아니….”
우울하게 중얼거린 차라가 갑자기 후다닥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아, 안 되겠다. 나 한 바퀴 돌고 올게!”
쿵쾅쿵쾅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페기는 숨죽여 웃었다. 페기의 양손을 마사지하듯 문지르던 알틴이 초조한 눈으로 그녀의 짧은 머리를 살폈다.
“그냥 모자를 쓰시는 편이 나을까요? 에넹(hennin 뾰족한 원뿔형 모양의 모자)에 베일을 달면 지금 입으신 드레스랑 잘 어울릴 거예요.”
“무거워서 춤추기 힘들 거야. 아까 예후르도 모자를 안 쓰는 편이 더 낫다고 했잖아.”
“그분이야 아가씨가 뭘 하든 다 예쁘다고 하시잖아요…. 아마 거적때기를 입으셔도 그분 눈엔 요정이 따로 없으실걸요?”
“과장은.”
“어머나? 이따 차라 도련님 돌아오시면 한번 여쭤보세요!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아가씨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어쩜 아가씨만 모르….”
두두두 말을 잇던 알틴이 돌연 입을 가렸다.
“내 정신 좀 봐. 이젠 아가씨가 아니라 전하신데.”
카타리나 공작의 작위를 받은 페기는 이제 정식으로 귀족 사회에 편입되었다. 호칭도 마땅히 바뀌어야 옳았다.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실감도 별로 안 나는걸.”
“그래도 전하는 전하시죠. 송구해요. 앞으론 조심할게요.”
알틴이 그녀의 눈치를 보며 웅얼거렸다. 페기는 그저 쓰게 웃기만 했다.
사도는 신분이 아니다. 그 특수성 때문에 만인의 존경을 받긴 하지만 사도가 된다고 신분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탐보프의 황자로 태어난 레오폴트나 몰락 귀족인 안드레아와 달리, 예후르와 페기, 차라는 따로 작위를 받기 전까진 평민이었다.
이 같은 맹점을 해결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교국에선 성인이 된 사도들에게 추기경 직위와 함께 교국의 공작위를 내렸다. 영지의 크기는 작지만, 합법적으로 귀족 신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니 알틴의 말처럼 귀족은 귀족이다. 페기는 더 말을 얹는 대신 발걸음을 돌렸다.
“잠깐 홀을 살펴보고 오자.”
텅 빈 복도에는 아그리피나 홀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꽝꽝 울렸다. 페기는 스멀스멀 차가워지는 손끝을 비비며 복도 끄트머리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 걸린 두꺼운 융단을 거둬 내면, 아그리피나 홀을 전면에서 훔쳐볼 수 있었다.
페기는 마른침을 삼키며 붉은 융단 위로 손을 올렸다. 예후르는 마지막에 들어와 춤만 추고 나가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게 어찌 말처럼 쉬울까. 연회가 무르익어 갈수록 그녀의 심장은 곤두박질쳤다.
융단을 살짝 들어 올리자, 눈부신 샹들리에 불빛과 세 박자 춤곡이 어지럽게 새어들었다. 페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레오폴트가 앉은 성좌의 후면이었다. 그림자처럼 레오폴트의 뒤를 따르는 고드릭이 곁에 딱 달라붙어 시중을 들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자 아그리피나 홀의 드넓은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늘 텅 비어 싸늘하던 공간이 숨 막힐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 귀청 째지는 바이올린 소리, 박자에 맞추어 쿵쿵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구두 굽 소리, 사람들의 웃음소리, 귓전에 입술을 붙이며 수군대는 소리, 소리, 소리.
“이 더러운 것! 썩 꺼지지 못해!”
페기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언젠가의 환청이 송곳처럼 귀를 쑤셨다. 저 웃고 떠드는 이들과 기억 속의 성난 군중이 겹쳐졌다. 되살아나는 지난 밤 악몽 속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전하?”
휘청거리는 그녀의 몸을 알틴이 황급히 부축했다. 페기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틀어막았다.
“…속이 안 좋아.”
“맙소사. 의사를 불러올게요.”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야.”
페기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알틴의 팔을 움켜쥐었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달달 떨렸다. 잠자코 그 모습을 응시하던 알틴이 단호하게 그녀의 손을 떼어 놓았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알틴은 그녀를 제법 오래 모셨다. 이럴 때 어찌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다른 하녀와 기사들에게 방문 앞을 잘 지키라 신신당부한 뒤, 알틴은 사용인들이 이용하는 통로로 아그리피나 홀에 들어갔다. 채일 듯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단연코 눈에 띄었다. 알틴은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전하.”
세도파와 두 번째 춤을 마치고 나오던 예후르가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알틴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예후르는 더 듣지 않고 말을 끊었다.
“세도파. 잠시 용무가 생겨 자리를 비워야겠군요.”
봄바람처럼 부드럽던 세도파의 입꼬리가 빳빳하게 굳었다. 예후르는 그녀의 손을 놓고 성큼성큼 아그리피나 홀을 빠져나갔다. 알틴이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끄트머리 방에 계세요. 잠깐 홀의 상황을 엿보셨는데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지셔선….”
바람같이 복도를 가로지른 예후르가 방 안으로 들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예후르는 천천히 방문을 닫았다. 방문 뒤, 가장 후미진 곳에 숨어 있는 페기의 모습이 그제야 드러났다. 페기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무릎에 파묻은 얼굴이, 힘껏 귀를 틀어막은 양손이 간헐적으로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