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클레토는 습관적으로 다과를 주워 먹으려다 멈칫 손을 물렸다. 간사한 녹색 눈이 예후르의 동태를 빠르게 훑었다. 예후르가 상냥하게 권했다.
“드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그보다 저희 조카를 통해 드린 밀지 말입니다. 아직 답을 주지 않으셨더군요.”
“아. 페임하른 소공작 건이요.”
팔짱을 낀 예후르가 검지로 제 팔뚝을 두드렸다.
“성하께서 곧 성명을 발표하실 겁니다. 그럼 페임하른 공작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죠.”
“전하께선 발표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팔뚝을 두드리던 검지가 우뚝 멈추었다. 아나클레토가 느물거리며 웃었다.
“폐하께선 이 문제를 아주 중대하게 보십니다. 후계가 걸린 문제니 당연한 일이지요. 만약 전하께서 힘을 보태 주신다면, 폐하께서도 아주 흡족해하실 겁니다.”
레오폴트와 탐보프는 수십 년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라발을 적대하는 레오폴트는 탐보프를 우방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탐보프는 교국을 뒷배 삼아 라발에 비해 밀리는 정통성을 보충할 수 있었다. 레오폴트가 탐보프의 황자였단 사실은 양국의 동맹에 좋은 명분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예후르는 아니었다. 비록 레오폴트의 주선으로 바도비체 후작가의 영애와 약혼했다지만, 정작 결혼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지금까진 그저 레오폴트의 뜻에 순종할 뿐, 스스로 나서서 탐보프에 붙으려는 인상은 없었다.
“폐하께서 흡족해하신다….”
발치를 내려다보던 예후르가 문득 작게 웃었다.
“묻겠습니다, 추기경. 흡족해하는 건 폐하십니까, 아니면 바도비체 후작입니까?”
“예?”
“이해는 합니다. 바도비체 후작가는 오래전부터 폐하를 지지했던 가문이니, 만일 내가 나서 준다면 면이 서겠지요. 세도파 양과 결혼까지 한다면 후작가의 위상은 더욱 공고해질 테고요.”
탐보프의 발데마르 황가는 레오폴트란 걸출한 교황을 배출함으로써 위상이 올라갔다. 그보단 못할지언정, 차기 교황과 혼맥을 맺는다면 바도비체 후작가도 제법 대단한 권세를 누리게 되리라.
“하지만 그대는 추기경이잖아요?”
아나클레토는 땀범벅이 된 얼굴을 손수건으로 훔쳤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두가 클레멘스 추기경을 라발의 개로 알지만, 그도 사람들 보는 앞에서 대놓고 라발의 이야기를 꺼내진 못합니다. 성하께서 라발과 단교하셨으니까요. 교활하게 굴지 않았다면 클레멘스 추기경은 진작 원탁에서 내쫓겼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클레멘스는 아주 영특한 사람이다. 늘 레오폴트와 예후르의 신경을 긁으며 헛소리를 일삼지만,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라발을 대변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교착된 상태가 얼마나 더 가겠어요?”
교국과 라발이 단교한 지, 교국과 탐보프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지나치게 오랫동안 교착된 관계에는 이미 녹이 슬고 있었다. 마귀는 그저 계기에 불과했다.
“불변하는 건 없습니다. 변치 않는 사람도 결국은 늙어 은퇴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추기경도 조심하셔야지요. 도대체 언제 적 교국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군대가 죄 쓸려 나가 제 한 몸 건사하지 못했던 시절? 아니면 사도의 명맥이 드문드문 이어지던 그 시절?”
사도 한두 명이 겨우 계보를 이어 가던 지난 100년, 교회는 끝없이 쇠퇴해 갔다. 그러나 다섯 명의 사도가 지키는 지금의 교회는 달랐다. 사람들은 믿음을 회복했고, 수도사들은 희망을 되찾았다. 다섯의 불이 밝히는 교회의 앞날은 매우 밝아 보였다.
“오, 오해십니다! 저는 그저 전하께 조언을 드리는 것일 뿐!”
“조언을 하시려거든 머리를 더 쓰셨어야죠.”
예후르는 다리를 꼬고 앉아 무심히 덧붙였다.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갓 북방을 통일했던 탐보프에게 황제의 관을 내려 준 것이 누군지. 그리고 탐보프의 황제 폐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페임하른 소공작에게 훗날 관을 씌워 줄 사람이 누굴지.”
“…….”
“그대의 머리로도 충분히 답이 나오는 문제일 겁니다.”
예후르는 곁방에서 나오는 페기와 함께 떠나갔다. 아나클레토는 시뻘게진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
앙겔리카 성궁은 연회가 드물다. 수도사들의 주장대로 청빈을 몸소 본보이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교회의 세가 막강했던 100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같이 물 대신 술로 분수를 터트리던 곳이 바로 성궁이었다.
그런 성궁이 때아닌 검소의 시대를 맞은 것은 현 교황 레오폴트의 영향이 지대했다. 레오폴트는 음악과 춤, 그 모두를 망라한 사교 활동을 즐겼으나 불행히도 하늘의 저주라 일컬어지는 나병 환자였다. 명민한 그는 되도록 제 모습을 보이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을 잘 알았다. 긴 연회를 감당할 수 없는 체력도 한몫했다.
따라서 오늘 밤의 무도회는 아주 오랜만에 열리는 성궁의 연회였다. 마지막 연회가 예후르의 스무 번째 생일이었으니 벌써 4년 전이다. 그와 같은 해 안드레아의 스무 번째 생일 연회가 열릴 예정이었지만, 그녀가 감쪽같이 사라지며 흐지부지되었다.
그리해 4년 만에 열린 아그리피나 홀은 교국의 군소 귀족들, 라발과 탐보프를 비롯한 이웃 국가들의 신심 깊은 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일없이 썩히고만 있던 이 아름다운 홀이 드디어 문을 열었군요.”
교황권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 당대 최고의 미술가와 조각가들을 모아 꾸민 아그리피나 홀은 변함없는 찬란함을 과시했다. 수백의 양초를 띄운 샹들리에는 밤하늘 별처럼 빛나고 여덟 천사의 이야기를 담은 천장화는 금방이라도 살아 숨 쉴 듯 생동감 넘쳤다.
그러나 라발의 황태자, 티에리 장 오귀스트만은 홀로 심드렁했다. 천년 제국 라발의 수도 누미디아 역시 오랜 역사와 부귀를 자랑하는 도시임을 상기하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전하. 여기 계셨습니까?”
클레멘스 추기경이 자색 옷자락을 우아하게 휘날리며 다가왔다.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모두 전하만을 보고 있는데 어찌 외따로 계십니까? 어울려 춤도 추고 얘기도 나누면 즐거우실 텐데요. …아, 올리베이라 양 생각에 그러시는 거로군요. 참으로 좋으실 땝니다. 아름다운 사랑이에요.”
뜬금없이 언급되는 약혼녀의 이름에 티에리는 콧방귀를 뀌었다. 클레멘스가 우습지도 않은 너스레를 떠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엘피도 공작이 어디 있는지 아시오?”
“아마 카타리나 공작 전하와 함께 계실 겁니다. 옛날부터 유독 그분을 아끼셨으니까요.”
“카타리나 공작의 파트너는 막내 사도라고 들었는데.”
“네. 막내 도련님도 이번에 데뷔하시지요. 그래서 신경을 더 쓰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무심도 하시죠. 저기 세도파 아가씨가 혼자 계시지 않습니까?”
클레멘스가 저쪽에 있는 세도파를 가리켰다. 그녀는 숙부인 아나클레토 추기경을 비롯한 탐보프의 유력 귀족들과 함께였는데, 같이 춤추자는 제안은 들어오는 족족 거절하고 있었다.
“대단하군. 졸지에 두 제국이 모두 바람맞은 꼴이라니.”
티에리가 비웃듯 뇌까렸다. 그의 불쾌감을 눈치챈 클레멘스가 난감한 기색으로 눈썹을 매만졌다.
티에리가 여독을 핑계로 예후르와의 약속을 파투냈다가 아예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을 그는 나중에야 전해 들었다. 황태자라 대놓고 면박을 주진 못했지만 참으로 멍청한 짓이었다. 급한 쪽에서 신경전을 거는 건 대관절 누구 머리에서 나온 수란 말인가.
“오랜만에 열리는 연회이니 공작 전하께서도 신경 쓸 일이 많으신 거겠죠. 염려하지 마십시오. 연회가 무르익으면 입장하실 겁니다.”
“내가 염려하는 것으로 보였소?”
티에리가 입술을 비틀며 살짝 웃었다.
“부황의 명이라 따를 뿐 나는 엘피도 공작이든 교황이든 만남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소. 어차피 무능한 작자들이 아니오? 굳이 우리의 정보를 넘기면서까지 협력을 구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는데.”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클레멘스가 인중을 한 번 매만지곤 소리 죽여 물었다.
“송구하오나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교국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 된단 얘기요. 그들에게 군대가 있소, 아니면 마귀를 물리칠 지혜가 있소? 고작해야 겨우 국경 수비선을 이루는 이교도 무리와 낡아 빠진 옛 전설뿐이지.”
“으음… 하지만 천 년 전 뱀을 봉인한 것은 사도들이 아닙니까?”
“그때야 여덟 사도가 모두 건재했지. 지금은 저주받은 병자 하나에 이교도 하나, 망나니 하나에 성궁에만 틀어박힌 어린애 둘이 아니오? 게다가 천 년 전 뱀을 봉인했던 성검은 모게리니산에서 마귀들에게 빼앗겼는데, 그들이 무슨 수로 뱀과 마귀에게 대적하겠소?”
“사도가 달리 사도가 아니지요. 천사의 권능을 내리받았으니 분명 마귀를 퇴치할 때 도움이 될 겁니다.”
“허, 권능이라니. 클레멘스 그대는 사도들의 권능이란 것을 본 적이나 있소?”
클레멘스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사도의 힘은 그리 쉽사리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당한 신비감은 지금껏 사도들이 권력을 유지해 온 방법이었다.
“쓸 수 없으니 내보이지 못하는 것이겠지.”
“그리 함부로 단정 지을 수만도….”
“그만하시오. 그들에게 진정 천사의 권능이 있었다면, 30년 전 천한 용병대 따위에 거꾸러졌을까.”
티에리가 짜증스럽게 일갈했다. 살짝 찌푸려진 클레멘스의 낯에 못마땅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아주 잠시일 뿐, 곧 본래의 쾌활하고 명랑한 얼굴로 돌아왔다.
아그리피나 홀의 문이 열리며 두 명의 기사가 들어왔다.
“교황 성하와 엘피도 공작 전하십니다!”
드디어 납시는군. 티에리는 술잔에 입술을 붙이며 문가를 주시했다. 음악이 멈춘 사위는 고요했다. 귀부인들은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눈동자만 굴렸고, 신사들은 두어 발짝 앞으로 나와 문가를 넌지시 엿보았다.
곧 레오폴트가 예후르의 부축을 받으며 나타났다. 늘 그렇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천으로 동여매고 얼굴은 딱딱한 은 가면으로 가린 모습이었다. 교황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괴이한 차림새에 놀라 힉 소리를 냈다.
반면 예후르는 다른 의미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푸른 비단에 은사로 자수를 놓은 정복은 필시 위스누아에서 진상한 최고급일 테지만, 그의 외양 아래선 다소 빛이 죽었다. 그을린 피부와 깎아지르는 콧대, 동굴 속 귀한 보석처럼 깊숙이 자리한 호박색 눈은 이국적이면서도 기묘한 매력을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