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 무사한 겁니다. 이것 보십시오. 내 팔다리 죄 멀쩡하지 않습니까? 그대가 아무리 날뛰어도 성하께선 날 함부로 벌하실 수 없음을 이제는 그대도 인정…. 아니, 전하!”
갑자기 클레멘스가 반색하며 문가로 달려갔다. 자색 추기경 의복을 걸친 예후르와 페기가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째 더 훤칠해지셨습니다. 세도파 아가씨가 꽤나 마음 졸이시겠어요.”
클레멘스가 기꺼이 예후르의 반지에 입 맞추며 말했다. 멀리 구석에서 아나클레토가 홱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모른 척 예후르는 상냥하게 대꾸했다.
“클레멘스. 우리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겨우 넉 달 전입니다.”
“오… 저도 이제 나이 먹어 기억이 깜빡깜빡합니다. 부디 실언을 용서해 주시지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클레멘스가 어색하게 서 있는 페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이는 들었되, 여전히 청년처럼 총기 반짝이는 올리브색 눈이 매끄럽게 휘어졌다.
“불의 종, 불의 사자, 우리를 인도하시는 소명의 천사 예리엘의 현신께 인사 올립니다.”
클레멘스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녀의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지나치게 과한 인사에 페기가 당황하여 그의 손을 잡아 올렸다.
“일어나세요, 클레멘스 추기경.”
“…전하께선 상냥하시군요.”
싱긋 웃은 클레멘스가 예후르와 페기를 번갈아 보았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클레멘스가 기다렸다는 듯 총총 방을 나갔다. 팔짱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솔란지아는 분기에 얼굴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전하! 저 방약무인한 자를 언제까지 가만 놔두실 겁니까!”
“어머나? 혹 두 분 전하께서 오셨나요?”
지팡이를 짚고 일어난 산딜라가 자유로운 손으로 허공을 헤치며 조심조심 걸어왔다. 페기가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안녕하세요, 산딜라 추기경.”
“어머… 새로운 전하시군요. 어쩜 이리 손도 보드라우실까.”
산딜라가 희맑은 얼굴로 물었다.
“전하. 혹 괜찮으시다면 곁방에서 잠시 저와 한담을 나누실 수 있나요? 앞으로 성궁을 찾을 일이 줄어들어 언제 또다시 전하를 뵐 수 있을지 가늠 잡히질 않네요.”
아직 무도회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다. 예후르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페기는 산딜라를 부축하여 곁방으로 들어갔다.
“송구합니다. 제 몸이 불편해 전하를 고생시키는군요.”
“심려치 마세요.”
페기는 자리에 앉아 조용한 눈으로 산딜라를 살폈다. 그녀는 산딜라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캄페지오를 교구로 둔 추기경 그리고 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 정도.
“…저 때문에 원탁에서 물러나신다고 들었어요.”
원탁의 자리는 열둘.
교구의 서열순으로 원탁 추기경의 자격이 주어지는데, 그중 교국의 교구들이 우선권을 가졌다. 교국의 땅을 교구로 삼을 수 있는 추기경은 오직 사도들뿐이니 사실상 사도들은 원탁 추기경의 자리를 무조건적으로 보장받는 셈이었다. 문제는 하나가 들어옴으로써 빠질 수밖에 없는 말석의 원탁 추기경이다.
만약 클레멘스나 아나클레토처럼 권력욕 강한 사람이라면 절 원망하리라. 그러나 산딜라의 얼굴엔 그늘진 구석이 없었다. 쉰에 다다르는 나이에도 여전히 소녀처럼 말간 인상이었다.
“예. 전하 덕분에 드디어 원탁에서 물러난답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페기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산딜라가 호호 웃었다.
“어머나, 설마 제가 전하를 원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나요? 괜한 걱정이세요. 어차피 저는 원탁의 말석. 캄페지오의 서열이 오르지 않는 이상, 제일 먼저 물러날 사람인걸요.”
“네….”
“오히려 저는 반갑답니다. 이제 골치 아픈 원탁회의에서 벗어나 교구에만 전념할 수 있잖아요? 아이들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고요.”
산딜라가 무언가를 찾듯 허공에서 양손을 헤매었다. 페기가 머뭇거리며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산딜라는 웃으며 페기의 손을 토닥여 주었다.
“그러니 저는 괘념치 마시고, 전하 본인의 걱정을 하세요. 원탁 추기경의 자리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랍니다.”
“…원탁 추기경은 정치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들었어요.”
페기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녀는 추기경 자리도, 원탁회의도 전부 글로만 알았다. 하지만 정치는 그마저 몰랐다.
“어머, 누가 그런 소리를….”
“…….”
“엘피도 공작 전하신가요?”
산딜라가 보지 못할 걸 알면서도 페기는 가까스로 입술만 끌어 올렸다. 산딜라는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선 현명하신 분이죠. 원탁회의에 참여하는 추기경은 일정 부분 정치에 관여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실제로 정치인으로 살아가는 추기경들이 저 밖에 있잖아요?”
“…….”
“하지만 전하, 추기경이 정치인이라면 왜 정치인이 아니라 추기경이라 불리는 걸까요? 추기경의 예복은 단순히 겉치레에 불과한 걸까요? 우리는 추기경이고 정치인이기 이전에 한 명의 수도사가 아니었나요?”
수도사의 세 가지 서원은 정결, 청빈, 순명.
그렇지만 이 모두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원탁에 앉은 고귀한 추기경들이라고 한 점 부끄럼 없을까.
“클레멘스 추기경은 교회의 뜻보다 본인의 신념이 더 중한 사람이에요. 솔란지아 추기경은 성하보다 탐보프의 황제를 더 따르고, 아나클레토 추기경은 물밑에서 도는 추한 소문이 많지요. 만달 추기경은 재물을 좋아해요. 그 청렴결백하다는 글리체리아 추기경조차 본가와의 연을 완전히 끊지 못해 저지른 실수가 많고요.”
“…….”
“저 역시 떳떳하지만은 않답니다.”
산딜라가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외람되오나 성하와 엘피도 공작 전하도 마찬가지이실 거예요. 때로는 시간이 죄를 부여해요. 원탁에서 가장 깨끗한 사람은 전하시며, 온 교회를 통틀어 가장 정결한 사람은 갓 서원한 수도사예요. 그리고 저와 저 바깥의 추기경들이 그러했듯, 전하께선 앞으로 깊은 고뇌의 밤을 지새우셔야 하겠죠.”
교회법은 엄하며 천계율은 세세하지만 모든 인간사를 포괄하진 않는다. 법전 바깥에는 옳고 그름을 가름할 수 없는 문제들이 산재했다. 원탁에는 그런 문제들이 아주 많이 올라왔다.
“괴로우실 거예요. 차라리 기권을 던지고 싶으실지도 몰라요. 하지만 모든 문제를 그런 식으로 처리할 순 없잖아요. 결국 전하께선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밀고 나가셔야 해요. 어느 길을 택하든 반대하는 사람들은 나오기 마련이니.”
처음엔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차 괜찮아질 것이다. 비난하는 목소리에 무뎌지고 도리어 그들이야말로 그르다며 손가락질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가장 위험했다.
“무뎌지지 마세요. 달콤한 말을 멀리하시고, 쓴 말을 가까이하세요. 진정 약이 되는 간언이 듣기 좋을 리 없어요. 올바른 간언을 멀리하는 순간,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는 모사꾼으로 전락하는 거예요.”
일개 수도사라면 한낱 모사꾼이 된다. 그런데 그것이 추기경이라면, 성스러운 불의 사도라면 어찌 될까.
“한 점 부끄럼 없이 사시란 얘기가 아니에요. 애당초 불가한 말씀은 드리지도 않아요.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상 세파에 더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다만, 한 걸음이 중요할 때가 있다.
“완전히 타락하느냐, 아니면 사람의 길로 돌아오느냐.”
“…….”
“그 기로에서 부디 올바른 걸음을 내디디시길, 간곡히 바라겠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길로 돌아온 이가 건네는 위로였다. 페기는 산딜라의 손을 꼭 쥐며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그녀의 경건함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어찌 추기경이란 작자가 저리 불경할 수 있는지… 전하?”
노여움에 부들부들 떨던 솔란지아가 문득 인상을 구겼다. 곁방으로 들어가는 페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예후르가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그의 말이 맞아요.”
“…네?”
“지금 당장 클레멘스를 건드릴 순 없습니다. 그러니 솔란지아 추기경도 이만 자중하세요.”
솔란지아의 갈색 눈이 설핏 떨렸다.
“그건… 라발의 황태자가 온 것과 관련 있습니까?”
곁방의 문이 닫혔다.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솔란지아는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라발의 황태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나흘 전이었다. 심심하면 도는 말이라, 으레 중요한 행사마다 도는 뜬소문이라 여겼다. 라발을 향한 교황의 증오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황태자를 맞닥뜨리자 솔란지아도 더는 희망 속에 머무를 수 없었다. 지난번 원탁회의가 끝난 지 고작 반년이었다. 그녀가 자리를 비웠던 반년 동안 도대체 성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갓 추기경이 된 솔란지아는 성궁에 깊은 연이 없었다. 들려오는 건 죄다 터무니없는 헛소문뿐. 가장 먼저 분노해야 할 아나클레토가 조용한 걸 보면 무언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에게 묻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솔란지아.”
아나클레토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죠.”
솔란지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곤 방을 나가 버렸다. 아나클레토는 예후르의 반지에 입을 맞추며 정중히 인사했다.
“강녕하셨습니까, 전하.”
예후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살이 뒤룩뒤룩 오른 아나클레토의 안색이 병자처럼 창백했다.
“…그러는 추기경은 강녕하지 못하신 듯한데.”
“괘념치 마십시오. 아침에 먹은 것이 탈이 났을 뿐입니다.”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은 아나클레토가 예후르에게 자리를 권하곤, 자기도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라발에 마귀가 나타났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탐보프의 황제 폐하께선 모르시는 게 없군요.”
“폐하의 눈과 귀는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마귀를 무찌르기 위해서라면 탐보프도 물심양면으로 도우리라 하셨습니다.”
예후르는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얹었다.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다. 행여나 마귀 사태로 교국과 라발의 관계가 개선되기라도 할까 몹시도 저어되는 모양이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직은 탐보프의 손까지 필요하진 않습니다. 다만 마귀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으니, 탐보프에서는 국경 경비에 더욱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