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328)

그 말에 모드벤나가 작게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예후르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왜요. 내가 칠십 먹은 노인 부려 먹는 악덕 상사 같아요?”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이걸 어쩌나. 난 모드벤나 수도사도 일흔 살까진 놓아주지 않을 건데.”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소리에 모드벤나가 질색을 표하려던 찰나,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이 겸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전하. 라발 황태자 전하의 시종이 알현을 청합니다.”

“황태자가 아니라 황태자의 시종이?”

모드벤나와 의아한 시선을 주고받은 예후르가 들라 명했다. 꼬챙이처럼 마른 남자가 종종거리며 들어와 교회 예법에 따라 절을 했다.

“불의 종, 불의 사자, 시작을 여시는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의 현신을 뵙습니다.”

“일어나라.”

허리를 든 시종이 빳빳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모드벤나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재미있다는 듯 예후르는 웃으며 턱을 괴었다.

“네 주인은 어딜 가고 너만 왔느냐.”

“황태자 전하께선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아 거처에서 쉬고 계십니다. 불가피하게 오늘자 약속을 미루고자 하시니 부디 양해해 주시지요.”

모드벤나가 짧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정말로 몸이 미편하여 약속을 미루려거든 아침 일찍 시종을 보냈어야지, 예정된 시간이 다 되어 약속을 무르는 건 어느 나라 예법인가. 변두리 귀족에게도 이런 대우는 무례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후르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할 뿐이었다.

“저런. 전하께서 많이 편찮으신 것이냐? 의사를 붙여 주랴?”

“전하의 주치의가 대동하였으니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하여 황태자 전하께선 내일 다시 약속을 잡고자 하시는데, 시간은 언제가 좋으실는지요?”

“내일? 누미디아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만 마차로 한 달이 걸린다고 들었다. 고작 하루로 여독이 풀리겠느냐.”

“예…?”

예상치 못한 대답에 시종이 당황했다. 예후르가 상냥하게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되었으니, 연회 날 뵙자고 전하거라.”

“예?!”

“연회까지 앞으로 나흘. 네 주인께서 조속히 건강을 회복하셨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한 대화에 시종이 황급히 말의 꼬리를 물었다.

“구,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모레, 모레로 약속을 잡으시지요! 전하께선 타고나길 강골이시니, 모레까진 충분히 몸을 회복하실 겁니다!”

“모레는 내 바쁘구나.”

“하오나!”

간곡히 매달리는 시종을 다소 심드렁하게 보던 예후르가 모드벤나에게 눈짓했다.

“모레 일정이 어떻게 되죠?”

“아침 8시에 근위대 보고, 8시 30분에 각 부서의 보고가 있을 예정이고, 9시에는 솔란지아 추기경께서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더 말씀드릴까요?”

“어때. 더 듣겠느냐?”

부드러운 목소리에 시종이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예후르는 흥미가 가신 표정으로 손바닥에 괴었던 턱을 들어 올렸다. 그의 지루함을 읽은 모드벤나가 엄하게 명령했다.

“그만 물러가라. 전하께선 한가로운 분이 아니시니.”

시종이 비틀거리며 집무실에서 나갔다. 일찌감치 시종에게서 눈길을 거둔 예후르는 눈으로 서류를 훑고 있었다. 책상 옆에 서서 서류를 정리하던 모드벤나가 힐끔힐끔 그를 내려다보았다.

“왜요.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넌지시 묻는 목소리가 자못 권태로웠다. 모드벤나는 입술을 오므리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황태자와 한 번은 꼭 만나셔야 합니다.”

“음.”

“지금 교국에서 마귀에 대한 정보를 가장 빠르게 보고받는 사람이 황태자입니다. 듣기론 전서구가 하루에도 서너 마리씩 그의 마차를 오갔다고 하고요. 전하께선 지금 마귀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귀는 절대 예삿일이 아니다. 마귀의 등장은 곧 뱀의 부활이니, 낡은 전설 말고는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교회로선 하루빨리 정보를 긁어모아 대책을 세워야 했다.

“맞아요. 지금 가장 급한 문제는 마귀죠.”

“…….”

“그런데 그건 라발도 마찬가지 아닌가?”

예후르가 빤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모드벤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금 황태자와 줄다리기나 할 때냐는 외침이 목구멍으로 치달았다.

“…라발의 황태자가 명석하지 못한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 아닙니까. 전하께서 이번 한 번만 눈감아 주세요. 라발과의 국교가 정상화되는 것은 전하께서도 오랫동안 바라시던 일이었잖습니까.”

“눈을 감아 준다….”

나지막이 중얼거린 예후르가 깃펜을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탐보프의 만행을 수없이 눈감아 주었죠. 레오의 고국이고, 라발과 척진 상황에 탐보프마저 적으로 돌릴 순 없으니까. 그런데 그들이 내 자비를 어찌 알아듣던가요?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어쩌면 내가 수없이 감았던 눈이 그들을 교만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

“애당초 시작부터 잘못된 관계였어요. 라발은 그렇게 만들지 않을 겁니다. 더구나 지금 뭐가 시급한지도 모르는 우둔함이라니. 황태자는 똑똑히 알아야 해요. 유린당하는 건 라발의 땅이지, 교국이 아니란 걸.”

“전하!”

경악한 모드벤나가 비명처럼 외쳤다.

“지금 이 시간에도 라발의 백성들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도대체 무슨 죄가 있나요? 그들을 보살펴야 하는 의무는 라발의 황제뿐만 아니라, 전하께도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은 언젠가 죽어요. 그보단 남은 사람들을 살릴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마귀를 잡는 일입니다!”

“아니요. 그 머리를 잡아야죠.”

멍하니 그의 눈을 들여다보던 모드벤나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뱀을 잡겠다는 말씀이신가요?”

“…….”

“그걸, 어떻게…. 천 년 전에도 여덟 성인이 모여 간신히 봉인한 괴물입니다. 사도가 많이 늘었다 하나 그때에 비하면 빈자리가 많은데….”

예후르가 피식 웃었다.

“모드벤나. 내가 누군지 잊은 거예요?”

노랗던 그의 왼쪽 눈에 하얀 표식이 서서히 떠올랐다. 세 개의 직선이 끝에서 모이는 그것은, 어느 밤 새로 분한 천사가 찍고 간 권능의 상징.

정면에서 성흔을 목격한 모드벤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힘 빠진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

“죽여 주십시오!”

오래전, 아름다운 소년이 부렸던 권능을 기억한다. 누이동생을 웃게 하기 위하여 장난삼아 틔웠던 불씨가 산 하나를 송두리째 불태웠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로라하는 옛 성인들도 그러한 경지에 이르진 못했었다.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예후르가 책상을 돌아 나와 그녀의 앞에 섰다. 바닥에 낮게 읍한 채 모드벤나는 눈을 가늘게 떨었다. 숭배와 공포는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녀는 몸의 떨림이 어떤 감정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죽여 달라니.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요.”

예후르가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다 간신히 그의 손끝을 붙잡은 모드벤나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예후르는 어느새 성흔을 깔끔하게 감춘 채로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아까 말했잖아요. 난 당신이 칠십 먹은 노인이 될 때까지 부려 먹을 거라고.”

긴장됐던 분위기가 풀렸다. 그러나 모드벤나는 여전히 경직된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토해 냈다.

“…제가 나이를 많이 먹어 다행이군요. 칠십까진 이제 스무 해밖에 남지 않았으니.”

예후르가 맑게 웃었다. 의자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모드벤나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칠십까진 제 심장이 못 버틸 것 같단 생각을 하며.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아, 싫다니까요! 내가 왜 춤추는 걸 보여 줘야 해!”

“어차피 내일이면 볼 것이 아니냐? 하루 먼저 보는 게 무슨 큰 문제라고.”

“그럼 내일 보면 되죠!”

“어이, 막내. 그냥 입 다물고 하자?”

어깨에 턱 팔을 걸치며 음산하게 속삭이는 안드레아에게 차마 차라는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막내의 투정은 그저 귀여운 재롱 거리라. 차라가 들어오기 전까지 10년 넘게 막내였던 페기는 누구보다 그 난감한 심정을 잘 알았다.

하지만 누나의 눈으로 보자니, 차라의 심통이 귀여운 것도 맞았다.

고드릭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춘 둘은 레오폴트에겐 성대한 환호를, 안드레아에겐 성대한 야유를 들었다. 예후르는 그 중간의 열기로 손뼉을 쳤다. 칭찬과 조롱 속에 얼굴이 시뻘게진 차라는 초콜릿 열여섯 개를 먹고서야 부끄러움을 풀었다. 마음을 활짝 연 차라는 아주 단순한 아이였다.

그렇게 차라가 한 곡 무사히 춤출 실력을 갖추자, 생일까지 남은 시간 동안 페기는 시녀들과 수도사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되었다. 그녀를 두고 시녀들은 미모를 가꾸셔야 한다 말했고, 수도사들은 추기경 임명식을 대비해 예식의 순서를 철저히 익혀야 한다고 했다.

기 싸움하는 두 무리 사이에서 페기는 한 번은 시녀들의 손을 들어 주고, 다른 한 번은 수도사들의 손을 들어 줬다. 어쨌든 둘 다 필요한 일이었다.

“아가씨. 가발을 쓰시는 건 어때요?”

맞춤 제작한 드레스를 입고 장신구를 가져다 대어 볼 때였다. 자꾸만 미련이 남는지 그녀의 짧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던 알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페기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턱선을 겨우 감싸는 길이의 짧은 은발. 머리를 길게 길러 늘어트리거나, 틀어 올리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아는 세간의 풍조에는 걸맞지 않은 길이였다. 하지만 페기는 열 살이 되기도 전부터 단발만을 고집해 왔다. 그 이유를 잘 아는 레오폴트도 그녀의 머리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얹는 법이 없었다.

“난 지금이 좋아.”

“하지만….”

“어차피 추기경 임명식에선 모자를 쓸 거고, 무도회에선 어떻게 하고 나가든 말이 나올 거야. 난 신경 안 써.”

단호한 대답에 알틴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페기는 거울에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신경 안 써. 다짐하듯 속으로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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