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 놈…?”
“예후르나 안드레아나…. 음음, 안드레아는 확실히 그놈보다 셀 것 같아.”
차라가 몹시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쨌든 막 들이대면 너만 손해란 말야. 이래 봬도 나보다 덩치 큰 골목대장들한테 맞으면서 익힌 전략이니까, 똑똑히 귀담아들어. 알았지?”
“응.”
페기가 착실히 대답했다. 겸연쩍어진 차라가 뒤통수를 긁었다.
“넌 진짜 여태 별일 없었던 게 신기하다…. 됐어, 간식이나 먹으러 가자. 뛰었더니 배고파.”
차라가 고양이처럼 쭉 기지개를 켰다. 조금 전 달려왔던 복도를 찬 눈으로 응시하던 페기가 늦지 않게 차라의 뒤를 따랐다.
장미 기사단의 부단장 티베리오 왈테르는 올해로 쉰하나였다. 비록 10년도 전에 하얗게 새어 버린 머리와 깊은 주름살 때문에 본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많아 보이지만, 기사로서는 한창의 나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일흔을 앞둔 단장보다야 훨씬 젊지 않나.
단장의 종자로 들어가 수도사이자 기사로서의 삶을 시작한 것이 열세 살. 온갖 진창에서 구르며 아득바득 부단장까지 올라왔지만, 10년 가까이 그의 승진은 지체되고 있었다. 단장이 은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장! 그 생각만 해도 왈테르는 치가 떨렸다. 맞으면서 컸던 어린 시절의 앙금이야 풀린 지 오래라지만… 아니, 실은 손톱만큼 남아 있지만, 일흔 다 된 노인네의 꼴이란 참으로 처량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젊을 적 호리호리했던 몸은 비쩍 곯았고, 허리가 굽어 키는 작달막해졌다. 온몸에 근육이 튼실한 왈테르에겐 이제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몸이었다.
실제로 단장은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지병 때문에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젊은 시절 무쇠 같던 몸도 나이는 이기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추기경 임명식을 사흘 앞둔 마당에 근위대의 단장이 공석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곰같이 눈치 없는 왈테르도 알았다. 이번이야말로 장미 기사단의 우두머리가 될 절호의 기회라고!
“안 됩니다.”
그렇기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책상에 앉아 빙긋 웃고 있는 예후르의 입에서 나온 말을.
“송구합니다만, 방금 무어라 하셨는지….”
“안 된다고요.”
“정말로 송구합니다만, 왜 안 된다 하시는 건지….”
“미란테 경이 필요하니까요.”
물론 왈테르 경도 필요하고요. 덧붙인 예후르가 상냥하게 웃었다. 말과 어울리지 않는 표정에 왈테르는 제 귀가 고장 났나 의심할 지경이었다.
“하, 하지만 곧 중요한 일정들이 있는데….”
“만약 미란테 경이 그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면, 지금처럼 경이 단장 대리를 맡으면 되겠죠.”
“그, 그, 그건 그렇지만 역시 단장 대리보다는 정식 단장일 때 기사단을 통솔하기 수월하지 않을까 싶어….”
예후르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경의 통솔력이 부족하단 뜻인가요?”
“아닙니다! 설마요!”
“그럼 문제없겠군요.”
예후르가 산뜻하게 손뼉을 짝 쳤다. 왈테르는 그만 황망해졌다. 차마 나가지도 못하고 말을 더 꺼내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데, 시종이 정중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하. 미란테 경이 알현을 청하십니다.”
왈테르의 귀가 쫑긋했다. 마침 잘되었다는 듯 들어오라 권하는 예후르의 목소리가 느리게 귓전을 스쳤다. 그리고 시종의 안내를 받아 들어오던 백발노인의 엄정한 눈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히끅! 왈테르는 솟구치는 딸꾹질을 간신히 참아 냈다.
“신, 알레그라 미란테. 영명하신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근위대의 하얀 제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미란테가 지팡이를 짚은 채 예를 취하였다. 키나 몸집은 옆에 선 왈테르의 반 토막이나, 그 작은 몸에서 나오는 카리스마는 여전했다.
예후르는 깍지 낀 양손 위로 턱을 올렸다.
“일어나요, 미란테 경. 허리는 많이 좋아졌나요?”
“아직 온전치 않으나, 곧 중요한 일정들이 있는데 자리보전하고 누워 있을 수만은 없지요. 심려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에 왈테르는 주춤주춤 시선을 피했다. 미란테는 살짝 굽었던 허리를 애써 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나 기사 된 자로서 감히 지팡이를 짚고 전하의 앞에 선 죄,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죄라 할 것도 없지요. 지팡이가 많이 낡은 듯한데, 사람을 시켜 좋은 지팡이를 새로 보내겠습니다.”
“이리 아량이 넓으실 수가.”
미란테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부디 성화의 가호가 함께하시기를.”
정석적으로 인사를 마친 미란테가 지팡이를 짚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곤 따라 나오라는 듯 왈테르에게 무시무시한 눈빛을 쏘았다. 나, 나는 아직 전하께 못 드린 말씀이…. 애처롭게 중얼거리던 왈테르는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복도였다.
“아이고, 우리 단장님. 어디로 모실까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본시오가 불쑥 튀어나와 미란테를 부축했다. 순간 눈이 대접만 해진 왈테르가 본시오를 마구 삿대질했다.
“이, 이이이 박쥐 같은 놈을 봤나!”
“박쥐라니요? 허리 아프신 단장님 부축 좀 해 드리는 것 가지고.”
“네놈이 엊그제 그랬잖아! 성하께 단장직을 달라 부탁드려 보라고!”
“거참, 단장님 오해하시겠네. 부단장님께서 하도 절 붙잡고 ‘말해 봐도 되겠지?’, ‘괜찮겠지?’ 하고 물으시길래 마음대로 하시라 했던 거죠. 맨날 부단장님께 붙들려서 똑같은 말만 듣는 제 입장도 좀 헤아려 주십쇼.”
본시오가 처진 눈을 싱글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왈테르는 뻣뻣해진 목덜미를 부여잡으며 어이쿠 소리를 냈다. 당장이라도 저 박쥐 같은 놈 모가지를 비틀고 싶어 팔 근육이 꿈틀거렸다.
쿵! 미란테가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그만.”
복도는 순식간에 정적으로 휩싸였다. 마른 어깨가 들썩일 만치 깊은 한숨을 내쉰 미란테가 흘끗 왈테르를 쏘아보았다. 집채만 한 왈테르를 메치던 젊은 시절과 한 점 달라지지 않은 눈빛이었다.
“왈테르 경. 경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겠나?”
“자, 잘못 말입니까…?”
미란테의 분노를 수도 없이 뼈에 새겨 봤던 왈테르는 조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눈빛만으로도 벌써 등짝이 쑤셨다.
“감히 단장님을 제치려 했던 죄…?”
“아니다.”
“전하의 시간을 낭비한 죄…?”
“그것도 맞지만, 더 큰 죄가 있다.”
“에잇, 제가 무능력한 죄라도 된답니까!”
“맞다.”
욱해서 던진 말에 긍정하는 말이 돌아오자 왈테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전공을 세운 기사였다. 부단장 직위만 해도 미란테가 직접 준 것이다. 저 꼬장꼬장한 늙은이가 어디 무능력한 작자를 제 보좌로 임명했을까.
영문을 모르겠단 왈테르의 얼굴을 보고 미란테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은 오늘 몇 시에 일어났지?”
“늘 그렇듯 새벽 5시에 일어나 새벽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다음엔?”
“식사를 하고, 간단히 아침 수련을 한 다음에 전하를 뵈러 이곳으로 왔습니다.”
“무언가 빼먹은 것이 있지 않나?”
그저 의문만 가득하던 왈테르의 낯에 균열이 갔다. 미란테는 지팡이를 짚은 손 위에 다른 손을 올리며 조곤조곤 말했다.
“그래, 경은 기사들의 수련을 돌보지 않았어. 그뿐인가, 아침 조회도 건너뛰었지. 오늘 아침에 별일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사고라도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그, 그건….”
“나는 기사로서 자네의 능력을 높이 사네. 천방지축 망아지 같던 옛날보다 많이 나아진 것도 알아. 자네도 노력했겠지.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이리 나를 실망시키나?”
“단장님!”
“내 이번에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것은 지병 탓도 있지만, 자네가 내 공백을 얼마나 잘 메우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어. 처음엔 이대로 은퇴해도 괜찮겠다 싶었지. 오래 담금질한 만큼 자네도 이젠 완벽히 준비가 되었으리라 여겼건만… 내 부질없는 소망이었나 보군.”
미란테가 지팡이를 짚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내 공백을 메우느라 수고 많았네. 오늘은 가서 쉬고, 내일부터 다시 나오게나.”
미란테와 본시오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 갔다. 그들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던 왈테르가 문득 코를 킁! 하고 먹었다.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는데, 뒤에서 유쾌한 발소리와 함께 젊은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단장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왈테르는 슬며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젊은 기사가 눈치 없이 그의 팔꿈치를 찔렀다.
“그런데 들으셨습니까? 할머니 돌아오셨다면서요! 허리는 괜찮으신지 모르겠다니까요. 역시 할머니도 나이를 먹으니까….”
“할머니라니! 단장님이시다, 단장님!”
왈테르가 귀신 같은 얼굴로 벌컥 화를 냈다. 눈까지 붉어진 낯을 보고 젊은 기사는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하, 할머니가 할머니라고 불러도 된다고….”
“이이이이 고얀 놈! 그거야 사석에서의 얘기고! 네가 그 갑옷을 입고 있을 땐 단장님이란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화내실 필요는 없잖아요….”
“뭐야?!”
왈테르가 으르렁대며 다가가자, 젊은 기사가 줄행랑을 쳤다. 못마땅하게 그 뒷모습을 노려보던 왈테르가 양손으로 짝! 뺨을 쳤다. 단장은 쉬라 했지만, 어찌 그런 말을 듣고 편히 쉴 수 있으랴. 훈련장으로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결의로 가득 찼다.
“왈테르 경은 또 크게 깨지겠군요.”
방금 전 넋 놓은 듯 나간 기사를 떠올리며 예후르는 작게 웃었다. 모드벤나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서류를 정리했다.
“미란테 경도 은퇴가 머지않은 나이죠. 비슷한 나이대의 다른 기사들은 진작 은퇴했으니까요”
“은퇴하고 싶어 은퇴한 게 아니죠, 그건. 절반은 죽고, 절반은 부상으로 더 이상 기사직을 수행할 수 없는 몸이 된 건데.”
“하지만 미란테 경도 지병으로 자리를 비우는 날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슬슬 그분의 후임을 생각하셔야지요.”
“글쎄요….”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며 예후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직 이 성궁엔 미란테 경이 필요해요. 외곽 경비를 맡은 이스파갈족의 위치가 불안정한 마당에 근위대마저 구심점을 잃으면 군사력에 문제가 생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