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328)

“…아.”

갑자기 예후르가 멈춰 섰다. 모드벤나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성하께 페임하른 공에 대한 얘기를 전한다는 걸 깜빡 잊었어요.”

“…별난 일이군요. 전하께서 그런 걸 다 잊으시고.”

모드벤나의 의문에 예후르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미동 없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모드벤나. 가족을 잃은 슬픔이 어떤 건지 혹시 알아요?”

“글쎄요. 듣기론 심장이 뚫리고, 장이 끊기는 고통이라고들 합니다.”

“듣기론?”

“전 고아여서요.”

예후르는 쉬이 납득했다. 두 명의 고아가 다시금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

안드레아는 돌아온 지 하루 만에 좀이 쑤시는 모양이었다. 남들 아침 식사 끝마칠 즈음에야 일어나 늘어지게 하품하던 그녀는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페기와 차라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궁 밖으로 나가자.”

페기와 차라가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배를 긁으며 하품하던 안드레아가 그 모습에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아, 잠깐만 다녀오자고. 특히 페기 너, 어릴 때 이후론 한 번도 밖에 나가 본 적 없잖아. 나 없었을 때야 뻔하지, 뭐. 영감탱이야 제 몸 건사하느라 바쁘지, 예후르 그 새끼야 온실 속에서 예뻐해 주면 다라고 생각하지.”

“…….”

“이참에 나가서 한 바퀴 빙 돌고 오는 거야! 너도 네가 사는 도시가 어떤 곳인진 알아야 하지 않겠냐? 언제까지 이 비좁은 데만 세상인 줄 알고 살래?”

페기가 어색하게 웃었다.

“난 다음에 갈게.”

“뭐? 다음이 어디 있어?”

“정말로. 다음에 가자.”

아이를 달래듯 다정한 말씨에 안드레아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거참, 중얼거린 그녀의 시선이 휙 차라를 향했다.

“막둥이. 넌 갈 거지?”

“어, 어?”

흠칫하며 안드레아와 페기를 번갈아 쳐다보던 차라가 은근슬쩍 페기의 등 뒤로 빠졌다.

“나도 다음에….”

“야!”

“춤 연습해야 한단 말이야!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면, 그거 네가 책임질 거야?”

책임이란 말에 안드레아의 기세가 풀썩 꺾였다. 못마땅하다는 듯 연신 혀 차는 소리를 내던 안드레아가 홱 몸을 돌렸다.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

페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만취하여 돌아올 안드레아의 미래가 눈에 선했다.

둘은 안드레아와는 반대편으로 발길을 돌렸다.

“차라. 우리 오늘은 춤 연습 쉬기로 했잖아. 왜 안 갔어?”

“나 가면 너 혼자 남잖아.”

차라는 레오폴트에게 애교를 부려 받아 온 초콜릿을 반으로 잘라 하나는 페기를 주고, 나머지는 제 입에 넣었다. 초콜릿을 오물오물하느라 그의 왼쪽 뺨이 다람쥐처럼 둥글게 부풀었다.

“게다가 그 여자랑 둘이 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 줄 알고…. 으, 상상만 해도 끔찍해.”

차라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조금 놀랐던 페기가 활짝 웃으며 차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차라. 언제 그런 기특한 말을 다 배웠어?”

“내가 왜 너네 차라야?”

옥신각신하며 가던 중,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낯선 얼굴을 차라가 먼저 발견했다. 안 그래도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매가 더욱 매서워졌다.

아주 화려한 차림새의 남자였다. 금수가 놓인 비단옷에 보석으로 장식된 허리띠. 등 뒤에서 펄럭이는 진녹색 망토만 봐도 예사로운 인물은 아닌 듯했다. 게다가 적발이라니. 비록 바랜 듯 색이 옅긴 해도, 조금 전 헤어진 안드레아가 떠올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느긋하게 정원을 내다보던 사내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정면에서 보는 얼굴은 더욱 젊어 보였다. 곱게 자란 도련님인지 피부가 말끔한 데 반해, 처진 눈매 속 잿빛 눈은 권태로움이 가득했다.

그를 발견한 페기가 서서히 걸음을 멈추었다.

“내전은 출입 금지 구역인데….”

갑자기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차라가 흠칫하며 페기의 앞을 막아섰다.

“뭐, 뭐야, 너!”

차라의 외침에 사내가 눈을 끔벅이며 멈춰 섰다. 그의 뒤에서 별안간 나뭇가지처럼 마른 시종이 툭 튀어나왔다.

“너라고? 이놈, 방금 너라고 했느냐? 무릎 꿇고 인사해도 모자랄 판국에 감히 너라니…!”

시종이 염소수염을 파르르 떨며 삿대질했다. 페기가 차라의 어깨를 뒤로 당기며 조심스레 앞으로 나왔다.

“달랑 둘이서 다니는 걸 보니 어디 못 배워 먹은 무지렁이 같은데, 나중에 후회하지들 말고 얼른 예를 취하거라!”

“흥. 지들도 달랑 둘이면서.”

“뭐, 뭐야?! 이 꼬맹이가 진짜!”

손을 홱 치켜드는 시종을 사내가 말렸다. 곧이어 그의 시선이 느릿느릿 페기와 차라를 살폈다. 수수하지만 값비싼 차림. 무엇보다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성궁을 활보하고 다닌단 점에서 범상치 않은 신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교국의 귀족인가?”

“…….”

“시중드는 이들은 어디 갔지?”

차라는 우물쭈물 입을 다물었다. 안드레아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며 죄다 쫓아냈다고 어찌 말할까. 심지어 중요한 말도 아니었다.

“허락받고 들어오신 분들인가요?”

문득 페기가 물었다. 피아노의 높은음처럼 맑은 목소리였다. 검게 죽어 있던 사내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뒤로 물러나 있던 시종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당연하지! 어디서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입을 놀려!”

“그럼 근위대를 불러와 확인해 봐도 되겠죠?”

“뭐, 뭐야?!”

“당당하다면 거리낄 게 없으실 텐데.”

페기가 가만히 웃었다. 말문 막힌 시종이 어버버하자, 사내가 대신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길을 잘못 들어 모르는 곳까지 들어온 참이오. 사람을 만났으니 이제 나가는 길을 알게 되겠지.”

사내의 입가에 우아한 미소가 떠올랐다.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페기가 무미건조한 낯으로 말했다.

“따라오세요.”

얌전히 앞장서는 페기의 뒤에서 차라가 곱지 않은 눈길로 시종을 흘겼다. 시종이 콧등을 씰룩였지만, 사내가 그들의 뒤를 따르자 별수 없었다.

이어지는 복도는 한쪽 벽면이 트여 정원이 훤히 내다보였다. 화려하게 핀 장미를 무료하게 스쳐본 사내가 문득 물었다.

“이곳은 평화롭나?”

페기는 별생각 없이 대꾸하려던 차라를 눈빛으로 막았다. 그러곤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모두 성하의 은덕이죠.”

“많이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병마와 싸우며 나날이 강해지고 계신답니다.”

“강해지긴 개뿔. 교황이 저주받았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투덜투덜 중얼거리던 시종이 불현듯 말을 멈추었다. 힐끗 뒤돌아본 페기의 보라색 눈이 크게 확장된 채 그에게 못 박혀 있었다. 차마 인정할 순 없지만, 등골을 서늘케 하는 섬뜩함에 시종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베네토. 어찌 성하를 함부로 입에 담느냐.”

“소, 송구합니다.”

시종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반쯤 벗겨진 시종의 정수리를 스쳐 지나간 사내의 시선이 새파랗게 타오르는 페기의 눈빛에 이르렀다. 그가 미약한 조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네 말에 틀린 건 없지. 성하께서 저주받으신 덕분에 이런 사달이 벌어지지 않았느냐.”

페기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빙글 뒤돌아선 그녀가 그들에게로 성큼 다가서는데, 차라가 시뻘게진 얼굴로 악을 썼다.

“이게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너희 그거 신성 모독인 거 몰라? 어?!”

차라가 덥석 페기의 손을 잡아 모퉁이 쪽으로 튀어 나갔다.

“어디서 배워 먹지도 못한 놈들이 굴러들어 와서 시답잖은 소리야? 됐어! 우린 이만 갈 테니까 헤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저, 저, 저 무례한 것이!”

“멍청아, 무례는 방금 네가 저지른 거고! 다음에 만나면, 어? 내가 우리 형이랑 누나 데려올 테니까 그렇게 알아! 밤길 조심해라, 너네!”

마지막 말은 뜀박질 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행여 쫓아올까, 차라는 페기를 끌고 미로 같은 복도를 죽어라 내달렸다. 그렇게 모퉁이를 여섯 번쯤 지난 뒤에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페기의 손을 놓은 차라가 헉헉대며 콧등에 맺힌 땀을 닦았다.

“아우, 힘들어. 별 이상한 놈들 때문에…. 근위대는 대체 뭐 하는 거야? 저러다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

“너도 그래. 아까 그 남자 손 봤어? 손이 무슨 곰 발바닥 같더라. 그런 놈이 눈알 회까닥 돌아서 손이라도 휘두르면 너같이 마른 애는 종잇장처럼 날아간단 말야. 조심 좀 해.”

등 뒤가 이상하게 고요하다. 차라가 머쓱하게 목을 긁으며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야,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레오는.”

차라가 제일 먼저 본 것은 부들부들 떨리는 페기의 주먹이었다. 이를 악문 채 분을 참던 페기가 노여움에 찬 속말을 뱉어 냈다.

“레오는 저주받지 않았어. 그냥 아픈 거란 말이야. 평생을 병마와 싸우며 고군분투해 왔는데 왜 그딴 소릴 들어야 해? 자기들이 도대체 뭘 안다고.”

“…….”

“레오뿐만이 아니야. 예후르는, 피부색 좀 다르다고 그동안 무슨 말을 들어 왔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대로 아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다들 입만 놀려 대. 거짓말하지 마라, 함부로 남을 비방하지 마라! 날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으면서, 그 쉬운 걸 왜 아무도 지키지 못하냐고! 다들 머저리야? 왜 아니라는 데도 듣질 않아? 레오는 저주받지 않았어, 예후르는 하등하지 않아! 나도!”

나도 아니야.

당신들이 수군대는 그것. 내가 아니야.

페기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당황한 차라가 얼굴을 아래서 들이밀며 안달복달했다.

“야, 야, 왜 그래. 혹시 울어? 아니지?”

“…안 울어.”

흔들리는 목소리와 달리, 페기의 뺨은 눈물 자국 없이 말끔했다. 그녀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까 그 사람한테도 그렇게 말해 줄 걸 그랬어.”

“아, 안 된다니까 그러네?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너도 잔뜩 쏘아붙이고 왔잖아.”

“나야 도망가면서 퍼부은 거지!”

양손을 허리에 올린 차라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내 말 잘 들어. 너보다 크고 강한 놈이랑 싸울 땐 정면에서 맞붙으면 안 돼. 나처럼 도망가면서 약 올리거나, 함정을 파거나, 아니면 그놈보다 센 놈을 데려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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