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흰 도대체가!”
욱하여 역정을 냈던 레오폴트가 빠르게 목소리를 수습했다.
“됐다, 됐어. 너희 철들기 전에 내가 먼저 화병으로 죽겠구나.”
“성하, 어찌 그런 말씀을!”
“고드릭, 너도 다 보지 않았느냐! 저것들이 만나자마자 어떤 말들을 주고받았는지! 쯧쯧, 철없는 것들. 다 큰 녀석들끼리 어린애들 앞에서 그 무슨 추태야!”
소파에 나란히 앉은 예후르와 안드레아가 뚱한 표정으로 서로를 외면했다. 골 아프다는 듯 레오폴트는 이마를 짚었다.
“너희들이 이러니 내 어찌 편하게 눈 감을 수 있겠느냐. 어릴 때야 자라면 나아지겠거니 했는데, 어째 클수록 더해!”
“어차피 영감님 돌아가시면 저 새끼랑 볼 일도 없는데요, 뭐.”
“안드레아!”
“내가 틀린 말 했나. 이번 일만 끝나면 나 여기 족보에서 완전히 지워 주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럼 난 새 인생 사는 거고, 저 새끼야 여기서 평생 썩든지 말든지.”
긴 다리를 방만하게 꼬고 앉은 안드레아가 심드렁히 말했다. 순간 할 말을 잃었던 레오폴트가 침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그래. 네가 원하는 게 그런 거라면야….”
“아, 됐고. 용건이나 빨리 해결하자고요. 영감님이 시킨 대로 모게리니 산에 다녀오긴 했는데, 거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던데.”
“이상한 낌새는 없었어?”
예후르의 질문에 안드레아는 그만 얼이 빠졌다.
“네가 웬일로 나한테 질문을 다 하냐?”
“안드레아.”
“아, 알았어요. 영감탱이 하여간에 잔소리만 늘어선…. 딱히 이상한 낌새라 할 건 없었어요. 짐승 울음소리 하나 안 들리더만.”
심각한 얼굴로 고심에 잠겨 있던 예후르가 문득 레오폴트에게 말했다.
“생각보다 이동 속도가 빨라요.”
“남쪽으로 이동한 건 아닐까?”
“그랬으면 진작 토랄 협곡에서 발견됐겠죠. 이 속도로 북진하다간 누미디아도 곧이에요.”
“지금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혼자만 어리둥절하던 안드레아가 물었다. 예후르는 레오폴트를 보며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레오폴트는 그를 외면했다.
“뱀이 나타났다.”
“뭐, 뭐가 나타나요? 뱀?”
경악한 안드레아가 늘어져 있던 몸을 순식간에 일으켰다. 예후르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헛소리…. 뱀은 천 년 전에 죽었잖아요. 여덟 성인이 성검을 꽂아 넣었다면서.”
“죽은 게 아니라 봉인됐던 거야.”
예후르가 조용히 읊조렸다. 어지러운 생각을 가다듬듯 안드레아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뱀은 그거잖아. 성화의 반절을 몰래 훔쳐 먹은 도둑. 그를 벌하고자 천 년 전 여덟 성인들이 뱀을 죽인… 아니, 봉인한 거고. 근데 천 년이 지나 그게 다시 부활했다고? 산을 그렇게 망쳐 놓으면서?”
“모게리니 산뿐만이 아니다. 첫 시작은 세르판테로스 가도 근방의 작은 마을이었어. 만약 모게리니 산을 이미 지난 거라면 산타나도 멀지 않았을 게야.”
“뱀이 그런 짓을 한다고요…?”
“정확히는 뱀이 아니라 뱀이 부리는 사역마다.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갑자기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새카만 괴물들이 마을을 습격했다고 하니까. 전설 속 마귀와 비슷하지.”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여덟 성인과 뱀의 싸움은 몹시 치열했다고 한다. 뱀이 부리는 사역마, 이른바 마귀가 군대를 이루어 산과 들을 뒤덮어 나갔다고 했다.
마귀, 하고 뇌까린 안드레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서성이기 시작했다. 긴 팔다리를 정신없이 휘적거리며 분별없이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모게리니 산을 그 모양 그 꼴로 만든 게 마귀고, 영감님은 날 거기로 보냈다…. 이 양반이 미쳤나, 진짜! 마귀가 거기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건… 내가 무어라 할 말이 없구나. 정말로 미안하다. 경로를 보아 남쪽으로 이동하리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 무슨 소용이냐고! 아니, 부리려면 기사들이나 부릴 것이지 왜 애먼 날 끌어들여요?!”
“네가 그때 모게리니 산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으니까.”
예후르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멈칫한 안드레아가 자못 살벌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
“또 나한테 사람 붙였냐? 어?”
“네가 사고 치면 뒷수습하는 건 난데, 네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정도는 꿰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이 미친 새끼가!”
“안드레아!”
안드레아가 주먹을 치켜들자, 레오폴트가 기겁하여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짜증스럽게 그의 손길을 털어 내려던 안드레아가 부들부들 떨리는 레오폴트의 팔을 보고 순간 착잡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분을 참듯 얼굴을 두어 번 쓸어내렸다.
“…내가 영감님 때문에 참는다. 한 번만 더 내 뒤에 사람 붙이면, 그땐 네 손목부터 잘라 갈 거야. 명심해.”
사납게 뇌까린 안드레아가 성큼성큼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쾅! 닫히는 문소리에 레오폴트는 눈을 꽉 감았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싸늘한 정적 속, 레오폴트가 참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후르. 네 정말 안드레아에게 사람을 붙인 것이냐?”
예후르는 말이 없었다. 고단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레오폴트가 무겁게 고개를 내저었다.
“모두 내 탓이다. 내 몸이 성치 않아 너에게 너무 많은 짐을 건넨 탓이야.”
“…자책하지 마요. 안드레아가 모게리니 산 근처에 있지 않았다면, 나라도 거기에 갔어야 했다는 거 알잖아요.”
“그래. 모게리니 산의 성유물은 아주 귀하니까…. 이미 늦은 것 같지만 말이다.”
가면 속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엔 쓴맛이 가득했다. 예후르는 조용히 눈을 내리떴다.
“곧 라발의 사자가 더 많은 정보를 갖고 도착할 거예요. 그럼 앞으로의 대책을 세우기도 한결 수월하겠죠.”
예후르가 조금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레오. 이번에 사자로 오는 사람은 라발의 황태자예요.”
“…뭐?”
소파에 고달프게 고개를 기대고 있던 레오폴트가 별안간 목덜미를 바짝 세웠다. 예후르는 그의 연옥색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요앙 오귀스트가 자신의 장남을 보냈어요. 무슨 뜻인진 당신도 알겠죠.”
“…….”
“황태자 앞에서 적의를 드러내지 마요. 끊겼던 국교를 회복하고 그들과 협력해요. 마귀가 나타난 뒤로 사실상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연옥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가면의 입술 사이론 노여움에 찬 숨결이 계속해 쏟아졌다.
“나보고, 내 손으로 끊었던 국교를 다시 회복하란 말이냐?”
“언제까지 이 상태일 순 없잖아요.”
“아직도!”
레오폴트가 일갈했다.
“난 아직도 그날을 꿈에서 본다! 제네로사가, 내 유일한 가족이었던 제네로사가! 내 눈앞에서 목이 떨어졌어!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단 말이다! 라발의 그 미친 섭정이, 벌레만도 못한 용병들이 감히! 감히 제네로사를!”
“서, 성하! 진정하십시오!”
“이거 놔라, 고드릭! 제네로사가 죽고 성도는 불타 재만 남았는데, 라발은 뭐 하나 갚은 것이 없어! 허, 요앙 오귀스트가 제 아들을 보내? 진정 죄를 용서받고 싶다면, 어미의 목을 잘라 보냈어야지!”
마지막 숨을 토하듯 쏟아붓던 레오폴트가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고드릭이 사색이 되어 그를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이마를 받친 채 한참이나 신음을 흘리던 레오폴트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넌, 내가 얼마나 참담한지 모를 게다. 그때 내 나이 고작 열둘이었어. 그리고 십 년을 라발의 개로 살았다. 아직도 처참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어. 제네로사의 목이 날아가던 걸 떠올리면 아직도 난…. 넌 평생 모를 게야. 알아선 안 되지. 몰라야 해.”
레오폴트가 반쯤 정신을 놓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예후르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미안해요.”
문득, 레오폴트의 혼잣말이 멈추었다. 그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마치 대단히 이상한 것이라도 본 듯한 눈빛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그런 건 위로가 안 돼.”
예후르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레오폴트는 탈진한 듯 고개를 뒤로 꺾어 소파에 기대었다. 이제는 옛날처럼 분노를 표출할 힘도 없었다.
예후르에게 다가온 고드릭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권했다.
“송구하지만 전하.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어떨지요.”
당장이라도 의사를 부르고 싶다는 듯 안달복달하는 기색이었다. 예후르는 말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알현실 밖에는 우람한 체격의 노기사가 투구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꼿꼿이 서 있었다.
“전하!”
“…왈테르 경.”
예후르가 미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백발이 성성한 기사 왈테르는 근위대를 맡은 장미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나중에 다시 찾아오는 편이 좋을 겁니다. 성하께서 몸이 미편하시니.”
“아니, 그런 변고가…. 성하께선 무사하십니까?”
“네.”
그대로 지나가려던 예후르를 왈테르가 눈치 없이 붙잡았다.
“그렇다면 기사 왈테르, 감히 전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단장님께서 요통으로 자리를 비우신 지 어언 한 달입니다! 페기 아가씨의 추기경 임명식과 생일 연회가 고작 닷새 남은 이 시점에서….”
“경. 내가 급한 일이 있는데 먼저 실례해도 될까요?”
묘하게 짜증이 섞인 투였다. 왈테르는 미소가 가신 그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늘 상냥해 뵈던 낯에 서늘한 날이 서 있었다.
피로한 듯 눈두덩을 매만지던 예후르는 왈테르의 놀란 얼굴을 뒤늦게야 발견했다. 그가 습관처럼 미소를 지어 올렸다.
“내일 내 집무실로 오세요. 이야기는 그때 듣죠.”
“예, 알겠습니다….”
얼빠진 왈테르를 남겨 두고 예후르는 먼저 발길을 옮겼다. 구석에서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던 보좌관 모드벤나가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연륜 깊은 수도사는 상관의 기분을 헤아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