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들어온 소베르뉴산 찻잎이랍니다. 뜨거우니 조심하셔요.”
예후르와 페기가 차례로 찻잔을 받았다. 껌벅껌벅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라가 제 찻잔에 차를 따르려는 알틴을 막아섰다.
“난 차가운 거로 줘.”
“네?”
“아, 아니다. 너무 차가운 거 말고 미지근한 거로.”
알틴이 조금 이상한 표정으로 찻주전자를 내려다보았다.
“음, 미지근하게 식혀서 드릴까요?”
“아이, 귀찮게. 그냥 물 줘.”
“네….”
알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맹물을 따라 냈다. 차라는 찻잔에 입술을 붙이며 슬그머니 페기의 동태를 살폈다. 예후르와 함께 있는 게 그리도 좋은지 만면에 미소가 한가득이다. 어쩐지 죄책감이 조금 들었다. 하지만 뭐, 쟤를 위한 일이니까.
결심한 차라가 실수인 척 찻잔을 튕겼다.
“어머, 아가씨!”
찻잔의 물이 페기의 치맛자락으로 쏟아졌다. 알틴이 득달같이 달려와 물을 닦아 냈지만, 축축함은 어쩔 수 없었다.
“미안….”
차라가 찻잔을 쥔 채로 조용히 페기의 눈치를 살폈다. 수선 떠는 알틴을 말리며 페기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괜찮아. 다친 것도 아닌데.”
“그러게요. 미지근한 물이었으니 망정이지, 뜨거운 찻물이었으면 아가씨 크게 델 뻔하셨어요.”
페기가 알틴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옷 갈아입고 올게. 예후르, 혹시 바쁘면 먼저 가.”
“아니야. 기다릴게.”
예후르가 웃으며 페기를 안심시켰다. 차라는 고개를 쭉 빼서 페기와 알틴이 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문이 닫혔다.
알틴이 조잘거리는 목소리마저 사라진 연습실엔 그저 정적만이 맴돌았다. 차라는 어색한 기분에 찻잔을 들어 올리다, 찻잔이 빈 걸 깨달았다. 슬그머니 찻주전자로 손을 뻗는데, 예후르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예후르가 길게 팔을 내뻗어 차라의 빈 잔에 뜨거운 차를 따라 주었다. 차라는 마른침을 삼키며 찻잔만 지그시 응시했다. 졸졸 물 따르는 소리가 끊겼다. 도로 찻주전자를 가져가며 예후르가 여상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니?”
“…어?”
“나한테 할 말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예후르가 미미하게 웃는 낯으로 손목을 살짝 튕겼다. 조금 전 차라가 물을 쏟았을 때의 행동을 모방한 것이었다. 속내를 훤히 내보인 기분에 차라는 저도 모르게 뺨을 붉혔다.
“무,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해 보라는 듯 예후르가 자비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미동 없던 차라가 찻잔을 탁상에 내려놓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너 약혼했다면서.”
“…그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네. 맞아, 했어.”
“약혼녀를 사랑해?”
예후르가 천천히 입술을 닫아걸었다. 마치 불가해한 생물을 마주한 학자처럼 건조하고 관찰자적인 시선이었다. 처음 보는 그의 무표정이 차라는 썩 위압적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걸 묻는 거니?”
“왜냐니. 사랑하는 사람끼리 결혼하는 게 당연하잖아.”
“당연한 건가? 몰랐네.”
예후르가 묘하게 서늘한 투로 읊조렸다.
“여긴 사랑 없는 결혼이 흔해. 사랑보단 가문과 재산, 결혼으로 내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더 중하지.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하지만 레오는 내가 원하는 사람이랑 결혼해도 된다고 했어.”
“맞아.”
예후르가 그림같이 웃었다. 차라는 어쩐지 입 안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대화가 겉돌고 있었다.
“그런데 너는 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약혼했어?”
“내겐 결혼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까.”
“약혼녀도 네가 이러는 거 알아?”
“글쎄…. 정략결혼을 못 박아 두고 시작했으니 아마 알고 있겠지?”
“약혼녀가 널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만약 바람을 피운다면?”
“마음 같아선 제발 그래 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무슨 뜻이야?”
“음, 지금은 손이 너무 많이 가서.”
차라가 설핏 미간을 찡그렸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너, 약혼녀를 사랑하려는 시도는 해 봤어?”
“내가 왜?”
되묻는 예후르가 외려 더 놀란 기색이었다. 그제야 차라는 예후르와 자신 사이에는 아주 높은 몰이해의 벽이 세워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난 네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모르겠다…. 정략결혼이 뭔진 대충 알아. 하지만 결혼을 약속했으면 상대방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약혼녀 놔두고 이 여자, 저 여자 집적거리는 개차반은 아니잖아. 오히려….”
“차라. 난 네가 날 걱정하는 건지, 나한테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다.”
“…내 말은, 넌 그런 개차반이 아닌데 왜 그렇게 애매하게 구냐는 거야! 네가 하도 자상하게 구니까 괜히 못 이룰 사랑에 슬퍼하는 애만 생기잖아! 그 마음에 보답해 줄 것도 아니면서! 그 정도면 다정도 병이야, 너!”
“아. 화내는 거였구나.”
미적지근한 반응에 차라의 기가 푹 꺾였다.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앓는 소리만 내던 차라가 갑자기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넌 진짜 나쁜 놈이야.”
“그래?”
“그래가 아니라…! 너 나중에 후회하기 싫으면, 애매한 태도 빨리 접고 네 약혼녀를 사랑하려고 최대한 노력해 봐! 어쨌든 평생 같이 살 사람이잖아!”
“평생? 아닐 것 같은데.”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예후르가 골난 차라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어. 그럼 네가 알려 줄래?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사랑할 수 없는…. 네 약혼녀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 되게 예쁘고 상냥하던데.”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난 늘 사랑하는 건 너희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왔거든.”
레오폴트와 페기 그리고 너. 하나하나 꼽아 보던 예후르가 묘하게 불쾌한 기색으로 말을 덧붙였다. 안드레아는 애매하네.
“나는 넷이 좋아. 노력해도 안 될 텐데, 굳이 다섯을 사랑해야 해?”
“왜… 우리 넷을 사랑하는 건데?”
“나랑 같으니까.”
차라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아니다. 자신은 예후르와 같지 않다. 세상에 그와 같은 사람이 더 존재하기나 할까?
“난 너랑 달라.”
“아니, 같아.”
예후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느리게 뻗쳐 오던 손끝이 차라의 눈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넌 무엇을 ‘보니’?”
“…….”
“‘들리는’ 건?”
“…….”
“아니, ‘느끼는’ 건가?”
부드럽게 허공을 유영하던 손이 거두어졌다. 예후르가 해사하게 웃었다.
“넌 ‘말하는’ 쪽이구나.”
그 순간, 차라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목구멍을 틀어막은 듯했다.
***
이른 새벽이 찾아왔다.
동쪽에서 뻗어 온 서광이 앙겔리카 성궁의 새하얀 벽면을 붉게 물들였다. 구중심처까지 구석구석 침투한 빛이 가득 고이는 곳은 여덟 대성당이 모인 성 나르세스 광장이었다.
제일의 성지답게 티끌 한 점 없이 순백한 그곳에는 다섯 대성당만이 문을 열고 있었다.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 판결의 천사 발레론, 단죄의 천사 마르쿠스, 소명의 천사 예리엘 그리고 심연의 천사 이슬라. 현재 지상에 강림한 다섯 천사를 상징하는 성당들이다.
아직 성궁의 문이 열리지 않은 이 시간대는 고요한 광장을 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때였다. 성문이 열리면 각지에서 몰려든 순례자들로 바글거려 좀체 이 아름다운 절제미를 감상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성문이 닫히기만을 기다리자니, 어둠이 내려앉은 광장에는 눈 둘 곳이 사라진다.
따라서 페기는 아침 기도를 끝낸 직후, 홀로 성 나르세스 광장을 찾는 걸 하루의 기쁨으로 여겼다. 그녀가 고독을 즐기는 걸 알아 레오폴트는 이 시간대 수도사들의 광장 출입을 금하였다. 다른 때라면 레오폴트를 말렸을 그녀도 그것만은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치솟은 여덟 첨탑을 응시하던 페기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늘 그렇듯 그녀가 향하는 곳은 성 예리엘 대성당이었다.
불의 종, 불의 사자, 성스러운 불의 뜻을 받들어 사람들의 소명을 이끄는 위대한 인도자. 그녀가 품고 있는 권능은 그토록 강고한 천사의 것이었으니, 예리엘을 찬미하는 이 대성당은 언제나 그녀를 겸허하게 만들었다.
텅 비어 더 거대하게 느껴지는 성당 안에 또각또각 발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늘어선 장의자들과 여러 소성당(Chapel), 일찍이 예리엘의 현신이었던 자들 중 유명한 이들이 묻힌 석관들을 지나 맨 앞 제대에 다다랐다.
교회의 상징인 둥근 원이 매달린 천장 아래, 그녀의 각성과 함께 지펴진 불이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성화(聖火). 저절로 불타오름으로써 천사의 현신을 알리며, 저절로 꺼짐으로써 천사의 권능이 다했음을 알린다. 근 300년 가까이 닫혀 있었던 성 예리엘 대성당은 13년 전 그녀가 나타남으로써 먼지 쌓인 문을 열었다.
페기는 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늘의 여덟 천사를 따라 마땅히 그녀도 일생토록 지켜야 하는 성스러운 불. 하지만 내가 지켜야 하는 불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저 불인가, 저 불을 지키는 여덟 천사의 사명인가, 아니면 불이 만들어 낸 지상의 사람인가.
오래 고민했으나 여전히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는 수면 아래로 깊숙이 가라앉았다. 페기는 발길을 돌렸다.
바야흐로 그녀의 스무 번째 생일을 닷새 앞둔 날이었다.
***
사도의 생일을 앞둔 교국은 손님맞이로 분주했다. 각국의 사절, 신앙심 깊은 귀족들이 몰려와 베일에 가려진 소명의 천사 예리엘의 현신을 몹시 궁금해했다. 심지어는 20년 전 교황이 일방적인 단교를 선언했던 라발에서 오랜만에 사절을 보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태풍의 눈처럼 홀로 고요하던 성궁의 내전에도 뜻밖의 손님이 찾아들었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페기는 갑작스레 달려드는 누군가에 기겁할 듯 놀랐다.
“아, 안드레아?”
눈앞을 가린 새빨간 머리칼이 어쩐지 눈에 익었다. 얼결에 입 밖으로 튀어나온 이름이 맞았는지, 그녀를 꼭 끌어안은 안드레아가 이마에 입을 쪽 맞추었다.
“요 예쁜이. 많이 컸네?”
페기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적발, 흰 피부, 화려한 벽안. 한 발짝 뒤로 물러난 페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래위로 그녀를 훑었다.
“정말 안드레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