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솔란지아가 혼란 가득한 눈을 떨구었다. 글리체리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한평생 고생하셨던 분은 이만 놓아드립시다. 이왕이면 내 어깨의 짐도 그대가 덜어 주면 좋겠고요.”
“글리체리아 추기경!”
“나 참, 이제 보니 클레멘스의 말이 맞군요. 그대는 목소리를 조금 낮출 필요가 있습니다.”
글리체리아가 혀를 끌끌 차며 솔란지아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작약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정원에는 고즈넉한 정적만이 맴돌았다.
***
예후르의 집무실은 서관 4층에 위치했다. 전통적으로 교국의 2인자인 엘피도 공작이 사용하던 곳인데, 중앙 관청에서 멀다는 이유로 수도사들의 불만이 높았다. 예후르가 추기경이 된 이후 교황의 업무 상당수가 그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하루의 절반이 서관의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허비된다는 둥, 눈썹 휘날리도록 중앙관과 서관을 오가다 보면 여덟 천사가 하늘에서 저를 맞이하고 있다는 둥. 과장 섞인 수도사들의 불만을 접한 레오폴트가 언젠가 집무실을 옮겨 줄까, 물은 적이 있었다. 예후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기도 전에 클레멘스 추기경을 위시한 반대파가 들고일어났기 때문이다.
“저 피부 검은 이교도가 중앙관으로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나오지 않을 겁니다. 장장 반세기나 이교도의 발밑에 엎드려야 할지도 모른단 얘기죠.”
사막 67민족 연맹과의 치열했던 성전이 막을 내린 지 어언 50년. 그들에게 가족을 잃고 땅을 잃은 이들은 아직도 사막의 이민족만 보면 치를 떨었다. 예후르는 그들의 분노를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와 공감은 다른 문제였다. 무슨 일만 생기면 거품 물고 달려드는 반대파가 그는 참 귀찮았다.
“어차피 교황은 내가 될 텐데 말이지.”
책상에 턱을 괴고 앉은 예후르가 작은 공을 벽에 던지고 받으며 중얼거렸다. 어두운 갈색 직모를 빈틈없이 틀어 올린 모드벤나 수도사가 서류를 내밀었다.
“아니까 더 요란을 떠는 겁니다. 사사건건 발목 잡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요.”
“너무 비효율적이에요…. 이러니까 성전에서 지고 용병대 따위에 밟히지.”
서류를 받아 든 예후르가 느른하게 일어나 햇빛 드는 창가로 향했다.
“추기경은 많이들 도착했나요?”
“만달 추기경과 글리체리아 추기경, 솔란지아 추기경 그리고 클레멘스 추기경이 도착하셨습니다. 클레멘스 추기경께서 가장 이르게 오셨고요.”
“성하의 명에 성궁에서 쫓겨난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교구로는 돌아가지도 않았던 모양이죠?”
“그동안 뒤마의 별장에서 머무셨다고 합니다.”
“모르는 척해요. 성하께서 알면 또 크게 노하실 테니, 입단속 단단히 시키고.”
“예, 알겠습니다.”
모드벤나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마침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 아나클레토 추기경의 마차를 본 듯한데 확실치가 않네요.”
“…아나클레토? 설마.”
똑똑.
둘의 시선이 마호가니 문을 향했다. 곧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이 낮게 읍하며 고했다.
“세도파 바도비체 아가씨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들어오라고 해요.”
이럴 줄 알았다. 예후르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인사하고 방을 나가던 모드벤나는 급히 들어오던 세도파와 맞닥뜨렸다. 세도파의 하얀 뺨엔 드물게도 옅은 홍조가 올라 있었다.
“아, 모드벤나.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며 정신없이 방 안을 훑던 세도파의 시선이 창가에 가 닿았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폈다. 세도파는 모드벤나의 인사도 듣지 않고 황급히 예후르에게로 다가갔다.
“전하, 저….”
골똘히 서류를 들여다보던 예후르가 불현듯 책상으로 돌아갔다. 멈칫한 세도파가 재차 웃음을 머금고 방향을 틀어 책상 앞으로 갔다.
“그간 잘 지내셨나요?”
세도파가 수줍은 기색으로 물었다. 예후르는 말없이 미소로 응하며 손짓으로 의자를 권했다. 풍성한 치마를 갈무리하며 세도파가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 성도에 도착했다더니, 저택에 들러 다시 치장하고 입궁한 모양이다.
“제가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가 작년 가을이니 거의 반년 만에 뵙는 셈이네요. 도대체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전하께선 제가 보고 싶지 않으셨나요?”
옅은 벽안이 애정을 갈구하듯 매달려 왔다. 조용히 웃기만 하던 예후르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그럴 리가요. 늘 아가씨의 빈자리를 느껴 왔습니다.”
“정말인가요? 전 저만 전하를 그리워한 줄 알고… 답장을 잘 안 주셨잖아요. 물론 공사다망하신 분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수백 장의 편지보다 한마디 말이 더 값진 법이죠. 잘 돌아왔어요, 세도파.”
그제야 세도파의 얼굴이 황홀감으로 물들었다. 마치 그녀의 귓가에만 여덟 천사의 팡파르가 터지는 듯했다. 예후르가 손수 차를 따라 주었다.
“오늘은 저택에서 쉬지 그랬어요.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을 텐데.”
“아, 아녜요. 전하를 뵙는 것이 제겐 더 기쁨인걸요. 또 상의할 일도 있고….”
“상의할 일?”
예후르가 의아하게 묻자, 세도파는 더없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번 달 말에 큰 무도회가 열리잖아요. 미리 의상을 준비해야 하는데, 대략적인 색상이나 느낌을 전하와 맞추면 좋을 것 같아서요.”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내가 문외한이군요. 모드벤나와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그러곤 세도파가 무어라 말할 겨를도 없이 종을 울렸다. 시종이 공손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하. 부르셨습니까?”
“세도파 아가씨를 응접실로 안내해 드려. 모드벤나 수도사도 그쪽으로 부르고.”
“자, 잠시만요!”
세도파가 벌떡 일어나 그의 손을 붙들었다. 가볍게 손짓하며 시종을 부리던 예후르가 문득 굳었다. 빤히 그녀를 응시하는 낯이 무표정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세도파가 뒤늦게 화들짝 손을 놓았다.
“죄, 죄송해요, 그게….”
“…….”
“의상 건은 제가 다음에 모드벤나 수도사와 얘기할게요. 사실 더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세도파가 그녀답지 않게 우물쭈물했다. 예후르는 말없이 손짓으로 시종을 내보냈다. 주춤주춤 제자리에 앉은 세도파가 남몰래 치맛자락을 쥐어뜯었다. 완벽한 모습만 보여도 모자랄 판국에 머저리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천치 같은 짓에 화가 났다.
“빨리 끝내죠. 보다시피 해야 할 일이 쌓여서.”
책상 양옆으로 가득 쌓인 서류를 가리키며 예후르가 힘없이 웃었다. 세도파는 입 안 여린 살을 깨물며 애써 미소를 지어 올렸다.
“아버지께서 서신을 보내셨어요.”
세도파가 품에서 푸른 인장이 찍힌 편지를 꺼냈다. 예후르는 편지를 받아 인장을 뜯었다. 그러곤 좀체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오랫동안 서신을 들여다보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적막에 세도파가 못내 초조한 기색으로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페임하른 공에 대한 우려가 크세요. 아시다시피 황제 폐하께선 달리 황위를 물려줄 만한 자식이 없으신데, 황가에 손이 귀해 남은 직계라곤 페임하른 공의 아드님밖에 없죠. 그런데 페임하른 공은 벌써 반년째 성문을 걸어 잠그고 폐하의 칙서를 거부하고 있고요. 폐하께선 교회가 보증하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페임하른 소공작을 양자로 선언하셨는데, 정작 그 양자를 보지 못하고 계신 상황이에요.”
“…….”
“물론 쉽사리 타국의 일에 관여할 수 없다는 교국의 입장도 이해하지만… 페임하른 공은 일찍이 교회를 등진 분이잖아요. 페임하른 공이 폐하와 황위를 두고 다투었을 때, 폐하의 손을 들어 주신 교황 성하께 험한 말을 퍼부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이번에 폐하의 손을 들어 주신다 해도 교회를 탓하는 이들은 없을 거예요.”
“…내 알기로.”
예후르가 탁, 서신을 소리 내어 내려놓았다.
“교황 성하께선 이 건에 대해 침묵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 대답이었다. 세도파가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하지만 전하께서 설득해 주신다면….”
“황위 쟁탈전이 끝난 뒤 페임하른 공은 수족이 모두 잘렸다 들었습니다. 허울뿐인 공작위만 남았는데 황제 폐하께선 무얼 그리 두려워하시는지요? 교황 성하께서 목소리를 내지 않으셔도 어차피 폐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게 아닙니까?”
“무, 물론 폐하께선 페임하른 공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페임하른 소공작께 하루빨리 차기 황제에 걸맞은 환경을 제공해 드리고자!”
예후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세도파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을 닫았다. 무표정의 가면을 쓴 그의 얼굴에는 지울 수 없는 권태감의 흔적이 역력했다.
하지만.
“엘피도 공작을 탐보프의 확실한 우방으로 만들어야 한다.”
먼 사막에서 온 예후르는 어느 나라에도 연고가 없었다. 탐보프의 황자로 태어나 라발에 대한 적개심을 몸에 새긴 레오폴트와는 달랐다.
그렇기에 그녀의 아버지와 빌헬미나 3세는 레오폴트가 뒷전으로 완전히 물러나기 전에 예후르를 확실하게 잡아 놓아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하께서 탐보프에 반기를 드신 적도 딱히 없잖아요. 저는 아버지께서 괜한 걱정을 하시는 건 아닌지 우려스러워요.”
“그거야 교황 성하께서 아직 정정하시니 그런 것이지. 성하께선 오래전부터 연고 없는 공작에게 탐보프를 붙여 뒷배가 되게끔 하셨다. 네 약혼도 그런 일환이지. 하지만 약혼이 결혼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공작의 속내를 아무도 모르지 않느냐?”
심지어는 약혼녀인 나조차.
세도파는 꽉 쥐고 있었던 치맛자락을 가지런히 놓았다. 이건 아버지와 폐하의 바람인 동시에 그녀의 바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고국에 대한 충절과 제 연심의 방향이 같아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성하께서 침묵하신다면, 전하께서 대신 목소리를 내어 주시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