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328)

페기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인, 세도파가 옅은 벽안을 사근사근하게 접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지요?”

“네. 고향에 다녀왔단 얘기는 들었어요. 아나클레토 추기경은 잘 지내시나요?”

“너무 잘 지내셔서 탈이죠. 실은 몸이 더 불어나셔서 아가씨께선 못 알아보실지도 모르겠어요.”

고상하게 웃던 세도파의 눈길이 미끄러지듯 차라에게 닿았다. 페기가 몸을 틀어 차라를 소개했다.

“이쪽은 차라예요. 심연의 천사 이슬라 님의 현신이죠.”

“어머, 세상에. 미리 알아 뵙고 인사를 드리지 못한 점, 부디 용서해 주세요.”

세도파가 당혹한 기색으로 재차 인사를 올렸다. 차라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됐어요. 처음 본 사이에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안다고.”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탐보프의 방패, 바도비체 후작가의 장녀 세도파라고 합니다.”

움찔한 차라가 슬그머니 페기의 등 뒤로 숨었다. 페기가 미미하게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먼저 실례할게요. 부디 성화(聖火)의 가호가 영애와 함께하기를.”

떠나는 그들의 뒤에서 세도파가 깊숙이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녀에게서 최대한 빨리 멀어지고 싶다는 듯 도도도 앞으로 튀어나온 차라가 소리 죽여 물었다.

“페기. 바도비체 후작가의 장녀면 아나클레토 추기경의 조카란 거지?”

“응.”

“으, 진짜 싫다. 설마 그 할배도 지금 여기 와 있는 건가?”

“세도파가 온 걸 보면 그렇겠지.”

“아니, 추기경은 할 일들도 없나? 왜 맨날 교구에 안 박혀 있고 성궁에만 들락날락하는 거래?”

“곧 내 생일이니까…. 다른 추기경들도 하나둘 도착하고 있을 거야. 왜, 아나클레토 추기경이 너한테 뭐라고 했었니?”

“그런 건 아닌데 좀 이상했어. 머리가 약간 이렇게 된 것 같아, 그 사람.”

차라가 검지를 머리 옆으로 들어 빙빙 돌렸다. 작게 웃은 페기가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냥 좀 괴팍하신 거야. 너무 그러지 마.”

“괴팍한 것도 그 정도면 병이지…. 그런데 저 여자는 왜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추기경 조카면 이렇게 내전까지 막 들어올 수 있나?”

“예후르를 보러 왔겠지.”

묘하게 건조한 대답에 차라가 눈만 끔벅였다. 그의 당혹한 표정을 읽은 페기가 담담히 웃었다.

“예후르의 약혼녀야.”

차라가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었다. 그의 눈앞으로 페기가 스쳐 지나갔다.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차라가 애벌레처럼 등을 둥글게 말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클레멘스 추기경!”

눈부신 볕 아래 날카로운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정원에서 붉은 작약꽃을 구경하던 클레멘스가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녹음에 둘러싸여 생기 있던 얼굴에 곧 반가움이 떠올랐다.

“오, 솔란지아.”

그는 씩씩거리며 걸어오는 여인에게 다가가 뺨에 입을 맞추었다. 기겁하여 물러난 여인, 솔란지아가 당혹한 기색을 감추듯 안경을 고쳐 썼다.

“내가 분명 그렇게 인사하지 말라고…!”

“이런, 미안합니다. 고국의 인사법이 몸에 익어 미처 떠올리지 못했군요.”

“그 고국에 얼마 머무르지도 않잖아요, 당신!”

“마음만은 언제나 그리운 고국과 함께하고 있지요.”

클레멘스가 한 손으로 가슴팍을 짚으며 고상하게 선언했다. 본인이 성실하다 주장하는 베짱이를 보듯 아연하던 솔란지아가 얼른 표정을 관리했다.

“어쨌든! 내가 오늘 입궁하면서 아주 이상한 소릴 들었어요. 당신이 몇 주 전에 감히, 가암히! 전하를 추방하라는 서신을 올렸다면서요!”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온 솔란지아가 음산하게 물었다. 바짝 붙은 그녀의 얼굴을 껌벅껌벅 바라보던 클레멘스가 문득 실망한 기색으로 그녀를 지나쳤다.

“만나자마자 그런 재미없는 얘기라니…. 그러지 말고 나랑 차나 한잔 마시는 건 어떻습니까? 마침 본가에서 보내 준 소베르뉴산 찻잎이 아주 싱싱한데….”

“클레멘스!”

“시끄러워라. 내 비록 그대보다 늙었어도 귀는 정정합니다. 체통을 지켜야지요, 솔란지아 추기경.”

서부 앙페르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답게 클레멘스는 빈정거림조차 우아하게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솔란지아가 이를 빠득 갈았다.

“내 이 일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페기 아가씨의 추기경 임명식이 끝나면, 성하께 임시 원탁회의를 청해 당신의 처벌을 논하겠어요!”

“으음… 또 그렇게 재미없는 소릴….”

“어디 한번 그렇게 마음껏 여유를 부려 보세요. 그 재미없는 소리가 언젠가 당신의 그 잘난 목을 날아가게 할 테니.”

솔란지아가 그의 면전에다 손가락질하며 쐐기 박듯 고했다. 클레멘스의 미간에 설핏 주름이 졌다. 드디어 저 여유만만한 작태가 가시나. 솔란지아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려는 순간, 클레멘스가 미끈한 턱을 매만지며 침음을 흘렸다.

“이렇게 보니 당신이 꼭 누군가를 닮은 듯한데…. 누구였더라….”

“…….”

“맞아, 아나클레토 추기경! 당신 말하는 것이 꼭 그분을 닮았군요!”

“뭐, 뭐라고요?”

솔란지아가 비명처럼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나를 그런 변태 늙은이와 비교해요!”

“맙소사…. 아나클레토 추기경을 내심으로 그리 여기고 있었던가요?”

“이봐요, 클레멘스!”

“물론 그대의 개인적인 의견은 존중합니다. 같은 원탁에 앉는 동료를 그런 식으로 여긴다는 것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요. 오, 마침 저기 변태 늙은이의 조카분이 오시는군요! 세도파 양,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클레멘스가 솔란지아의 어깨 너머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경악한 솔란지아가 정신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등 뒤엔 아무도 없었다.

“클레멘스! 어딜 도망가요!”

그녀가 뒤돌아본 틈을 타 클레멘스가 재빨리 정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등 뒤에다 빽 소리를 질러도 그는 그저 머리 위로 손만 흔들 뿐이다. 솔란지아가 분을 못 참고 씩씩대자, 정원 한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 명의 노인이 혀를 차며 다가왔다.

“솔란지아. 클레멘스 추기경에게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어찌 아직도 그리 성을 못 참습니까.”

인자하게 늙은 글리체리아 추기경이 딱하다는 듯 책망했다. 솔란지아가 수치심에 낯을 붉혔다.

“하지만 글리체리아, 아시잖습니까. 언제까지고 저 여우 공작을 가만 놔둘 수만은 없다는 것을요.”

“클레멘스를 심판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만일 그가 죄를 범했다면 성하께서 직접 벌을 내리시겠지요.”

“그게 성하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성하께서 저 여우와 라발의 잔당들을 얼마나 몰아내고자 하시는지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잖아요!”

“지금 그대 앞에 있는 저 역시 라발 태생입니다.”

순간 말문이 막혔던 솔란지아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글리체리아 추기경은 상황이 다르죠. 오래전 본국과 연을 끊고 오직 신앙에만 매진하셨잖아요.”

“종교는 세속 정치에서 멀어질수록 좋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 제 눈엔 클레멘스 추기경이나 그대나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글리체리아!”

솔란지아의 만면에 억울함과 섭섭함이 동시에 떠올랐다. 글리체리아가 고단한 한숨을 내쉬었다.

“솔란지아. 그대는 아직 새파랗게 젊어요. 빌헬미나 3세와 어떤 밀담을 나누었는지 내 알 바 아니나, 부디 그대가 성직자로서 바른길을 걷길 바랍니다. 정치는 성직자의 일이 아니에요.”

“이건… 황제 폐하와 관련 없는 일입니다.”

“난 그대의 말을 믿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그럴까요.”

“정말이에요! 애당초 클레멘스 추기경의 서신이 말이나 되는 얘깁니까? 아무리 이교도의 땅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전하께선 누구보다 빛나는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의 현신이십니다. 한데 고작 경비 서는 이민족을 내쫓기 위해 그분을 추방하라니요!”

“확실히 그건 클레멘스가 지나쳤어요. 하지만 그도 당신처럼 고국의 압박을 받고 있겠지요. 마음에서 우러난 얘기는 아닐 겁니다.”

글리체리아가 불편한 기색으로 혀를 찼다. 솔란지아는 분한 마음에 입술을 씰룩였다.

“그자에게 마음이란 게 있던가요? 늘 라발과 요앙 오귀스트의 말을 대변하기 급급했죠. 기실 여우가 아니라 앵무새라 불려야 하는 작잡니다.”

“솔란지아.”

“…죄송합니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던 글리체리아가 즐겁게 관망만 하는 노인을 돌아보았다.

“내 이래서 솔란지아 추기경에겐 소식이 늦게 들어가길 바랐는데…. 만달 추기경, 그대가 흘린 거지요?”

“허허. 면구스럽습니다. 늙으니 입이 방정인 게지요.”

백발성성한 초로의 노인이 사람 좋게 웃었다. 글리체리아가 밉지 않게 그를 흘겼다.

“어째 원탁이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는 느낌입니다. 페기 아가씨께서 추기경이 되시면 산딜라 추기경이 원탁에서 빠지게 될 터인데…. 원탁에 불어닥칠 폭풍이 벌써부터 눈에 선해요.”

“원탁을 채우는 사도가 많아지는 건 반길 일이지요. 잘될 겁니다.”

“그대야말로 우리 중에 가장 원로가 아닙니까? 그리 관망만 하지 마시고 지혜를 베풀어 주세요.”

“허허. 다 늙은 이의 지혜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젠 젊은이들이 이끌어 나갈 시기지요.”

만달 추기경이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무성한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글리체리아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무래도 만달 추기경께서 곧 은퇴하시려나 봅니다.”

“예?!”

솔란지아가 기겁할 듯이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 여든셋이 된 만달 추기경은 그 자체로 교국의 산 역사나 다름없었다. 지지부진했던 성전의 마무리도, 선대 교황 제네로사 5세의 즉위식도, 끔찍했던 오스피나 참극도, 병든 소년이 교황의 자리에 올라 30년 치세를 펼친 것도 모두 그의 기억 속에 담겨 있었다.

“기실 오래전부터 고향으로 내려가 작은 교회만을 돌보길 원하셨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성하께 직접 청하신 적은 없지만, 이제 원탁에 앉는 사도만 넷이 되니까요. 본인의 사명을 끝마쳤다고 생각하시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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