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어!”
또다시 밟히려는 찰나에 페기가 저도 모르게 손을 놓아 버렸다. 스텝에만 정신이 팔렸던 차라가 휘청하며 뒤로 넘어갔다.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신명 나게 자빠진 차라가 멍한 눈을 끔벅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이 안 되는 표정이었다.
짝짝짝.
갑자기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둘이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예후르가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드디어 피하는 법을 배웠구나, 페기.”
페기가 무안한 얼굴로 차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난 차라가 여전히 맹한 눈으로 예후르를 보았다. 불길함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언제부터 본 거야?”
“네가 몸치임을 자각했을 때부터?”
“악!”
충격에 휩싸인 차라가 양손으로 허연 뺨을 짓눌렀다. 요 며칠을 미루어 보건대 예후르는 의외로 입이 저렴했다. 당장 레오한테 달려가 그의 부끄러운 몸짓을 귀띔할지도 몰랐다.
“레오한텐 말하지 마!”
“왜?”
“알면 엄청 놀릴 거야. 한 달 내내 식사 시간마다 그 소릴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흐음….”
별다른 대꾸 없이 다가온 예후르가 페기의 앞에서 멈췄다. 페기는 슬쩍 눈을 들었다. 예후르는 물끄러미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응?”
“…….”
“왜 대답 안 해 줘! 말하지 말라니까?”
“…….”
“으, 너 진짜 싫어.”
“…난 네가 좋은데, 오늘 네 발은 좀 싫다. 도대체 페기의 발을 얼마나 밟은 거야?”
묘하게 찡그려진 그의 눈이 까맣게 때 탄 페기의 구두에 꽂혀 있었다. 조금 머쓱해진 페기가 왼발 앞코로 톡톡 대리석 바닥을 두드렸다.
“몰라. 열 번 이후론 안 셌어.”
“대단하네. 개를 대신 세워도 너보단 나을 텐데.”
“예후르. 말이 너무….”
“뭐, 뭐라고? 그럼 네가 하던가!”
“말했잖아. 난 안 된다고.”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건데?”
“그거야….”
“전하.”
문득, 단단하게 옹골진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언제 왔는지, 문가에 검은 수도복을 입은 중년 여자가 반듯하게 서 있었다.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엄격한 인상에 차라가 우물쭈물 입을 다물었다.
예후르가 물었다.
“모드벤나. 무슨 일이에요?”
“이만 성하께 가실 시간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잠시 고민하던 예후르가 피아노 치듯 페기의 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내려갔다.
“먼저 가서 조금 늦는다고 전해요. 그리고 차라.”
“응?”
“한 번만 보여 줄 테니까 잘 봐.”
그의 손끝이 페기의 손바닥에 이르렀다. 페기는 영문을 몰라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만히 웃던 예후르가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당겼다. 순식간에 바짝 좁혀 든 거리에 페기가 숨을 멈췄다. 춤곡이 시작되었다.
잡힌 손이 허공을 갈랐다. 페기는 저도 모르게 자유로운 나머지 손으로 매달리듯 그의 어깨를 쥐었다. 수백 수천 번 춰 본 춤에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허리를 단단히 받친 그의 손이 부드럽게 방향을 이끌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유려한 박자를 따라 스텝이 이어졌다. 페기는 하얀 셔츠를 걸친 그의 가슴팍만을 부러 강박적으로 응시했다. 코끝으로 그의 체취가 스쳤다. 또 용을 타다 왔나. 어느 날부턴가 그의 품에선 늘 마른 바람 냄새가 났다.
어릴 적의 그는 이보단 땅에 가까운 냄새를 품고 있었는데. 팔도 이보단 가늘고 뼈대도 여렸다. 언제 이렇게 키가 훌쩍 크고 어깨가 넓어졌는지. 맞잡은 손, 틀어쥔 어깨의 단단함이 아직도 익숙지가 않다.
그걸 인지한 순간,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생각하지 않아도 물 흐르듯 전개되던 춤이 갑자기 하나하나 머릿속에 박혔다. 내딛는 발끝이, 뻗치는 손끝이 오래된 경첩처럼 뻑뻑해졌다.
그러자 굳은 몸을 달래듯, 허리를 받친 그의 손가락이 올라와 등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단단한 손끝이 등 한가운데 움푹 팬 곳을 스치자 속이 확 뜨거워졌다. 페기는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음악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손을 그가 재차 움켜쥐고, 등을 넓게 받친 손이 그녀의 몸을 더욱 바싹 당겼다. 페기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그러나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릴 틈 없이, 음악에 맞춰 그녀의 등이 뒤로 가파르게 휘어졌다.
그 찰나에 페기는 어지러운 천장화를 헤매었다. 붉고 푸르고 노란 그림들이 그녀의 시야를 빠르게 스쳤다. 길게 늘어진 줄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 그녀의 귓가에서 소란하게 윙윙거렸다.
그러다 부지불식간에 끌어당겨져 덜컥, 그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샛노란 눈이 거기에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제 얼굴 깊숙이 꽂힌 채로. 한껏 꺾인 고개가 아팠지만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기이한 빛을 띤 금안이 그녀조차 모르는 그녀의 속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었다. 도망쳐. 미약했던 머릿속 목소리가 다시금 목청을 틔운다. 도망쳐야 해.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순간, 잔잔한 피아노 음 사이로 발소리가 유독 크게 튀었다. 명백한 불협화음에 연주가 우뚝 멈추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정적이 살갗을 아프게 찔렀다.
당황한 페기가 물러난 발을 따라 나머지 발도 뒤로 물렸다. 바닥을 스치는 성급한 굽 소리가 요란했다. 내내 그녀의 얼굴에 꽂혀 있던 그의 시선이 느리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멀어진 거리만큼 다가오거나, 그녀의 몸을 당기지 않았다. 가까스로 고개를 내린 페기가 그의 가슴팍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던 손이 주춤주춤 오므라들었다. 잡힌 왼손은 이만 빼내고 싶었다.
그런데 불쑥, 그의 고개가 내려앉았다. 마치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댈 것처럼.
페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미지근한 숨결이 목에 닿았다. 하지만 그보다 지척에서 뚫어져라 절 응시하는 그의 은밀한 시선에 숨이 막혔다. 그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솜털이 낱낱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의 입술이 귓가에 닿았다.
“왜 이렇게 긴장했어.”
웃음기 섞인 속삭임에, 옥죄었던 분위기가 한순간 풀렸다. 고개를 든 예후르가 평소와 다름없이 상냥한 눈으로 웃어 주었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던 페기도 그를 따라 떨리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마도 그와 너무 오랜만에 춤을 추어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며.
그러나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라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허어….”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졌는지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 팔짱을 끼고 비딱하게 선 차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수상한데. 예민하게 날 선 감이 아우성쳤다.
***
“너 예후르 좋아하지?”
연습실로 가는 길이었다. 밝은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던 페기는 뜬금없는 차라의 물음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좋아하지? 그렇지?”
“당연히 좋아하지.”
바로 튀어나오는 대답에 움찔한 차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가족이니까 당연히 좋아한다는 그런 말을 하려는 거면….”
“왜? 가족인데 좋아하는 게 당연한 거지.”
“내가 그런 의미로 묻는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음… 모르겠는데….”
페기가 애매하게 시선을 피했다. 콧등을 일그러뜨린 차라가 자꾸만 절 피하는 페기에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야. 아무리 피 안 섞인 가족이라지만, 너 그래도 되는 거야? 레오는 알고 있어?”
“알긴 뭘 알아….”
“아. 아니다, 레오라면 모르겠다. 그 양반, 묘하게 눈치가 없으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너 성직자잖아! 이번 생일 지나면 추기경도 된다면서 그렇게 막 남 좋아해도 되는 거야? 응? 빨리 대답해!”
차라의 끈질긴 추궁에 페기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뭐부터 지적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난 예후르를 가족으로 좋아하는 거고….”
“웃기시네.”
“…그리고 사도는 남을 좋아해도 괜찮아. 결혼할 수 있으니까.”
“뭐?”
차라가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페기가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천계율 백스물두 번째 장. 불의 사도는 성직자의 의무 중 순결에서 배제된다.”
“…….”
“설마 처음 들어 보는 건 아니지?”
“처음 듣는데.”
“그럴 리가. 신학 공부하잖아. 적어도 천계율 이백 번째 장까진 외우라고 할 텐데.”
“알 게 뭐야.”
차라가 대수롭지 않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아직도 신학 수업 시간이면 선생과 치열한 숨바꼭질을 벌였다.
“그런데 사도는 왜 결혼해도 되는 거야? 사도가 애를 낳는다고 그 자식까지 사도가 되는 건 아니잖아.”
“정치적인 이유에서야. 900년 전 교황 에울부르가 2세가 라발과 긴밀한 동맹을 맺기 위해 당시 라발의 황자였던 페르난도와 결혼했거든.”
“와, 치사해. 다른 사람들은 혼자 외롭게 늙어 죽으라고 하면서, 자기들만 결혼해도 된다는 거야?”
“너도 포함되는 이야긴데…. 어쨌든 천계율에 오른 이상, 조항을 삭제하려면 역대 교황들의 과반수를 넘는 찬성표가 필요해. 하지만 혼인은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이용되는 수단이니, 교황들이 뭐하러 삭제하려 들겠어.”
차라가 마뜩잖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나중엔 다른 나라 공주님이랑 결혼하게 되는 건가?”
“…레오가 네게 그럴 리 없잖아. 결혼도 자유, 결혼할 사람도 자유랬어.”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데. 나한테 시금치 먹으라고 강요하는 사람만 아니라면야…. 넌 좋겠네. 사도끼리도 결혼할 수 있는 거지? 말이 가족이지, 예후르랑 넌 완전히 남남이잖아.”
“왜 얘기가 그렇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애당초 난 예후르랑 결혼할 수 없는걸.”
“설마 진짜로 사도끼리 결혼 못 한다고?”
“그게 아니라….”
물 흐르듯 대꾸하던 페기가 문득 말을 멈췄다.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까워진다. 차라는 경계하는 눈으로 낯선 이의 모습을 훑었다.
눈부신 금발을 늘어트린 여인이었다. 페기보다 두어 살 많을까. 페기가 새벽녘 이슬 머금은 물망초라면, 그녀는 정오의 햇살 아래 당당히 피어난 노란 장미였다. 꼿꼿한 목, 반듯하게 세운 허리, 거침없는 발걸음에는 숨길 수 없는 기품이 스며 있었다.
여인이 몇 발짝 남기고 그들 앞에 섰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짚으며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
“불의 종, 불의 사자, 우리를 인도하시는 소명의 천사 예리엘의 현신께 인사드립니다.”
“…일어나요, 세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