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328)

“어떻게 할래? 내일 나랑 같이 돌아갈까?”

“어제 왔는데 내일 떠나자고? 난 싫어!”

“차라는 싫다네. 페기, 너는 어떠니?”

“너무 늦게 돌아가면 레오가 혼자 외로워하지 않을까….”

“뭐어? 우리 제대로 놀지도 못했잖아!”

“넌 어차피 성궁에서도 놀기만 하잖아.”

“끙….”

차라가 머리를 붙잡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예후르가 중간에서 페기와 차라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좋아. 그럼 내일 떠나는 대신, 차라 너는 용 태워 줄게.”

“용?”

“응. 싫으니?”

“아아니, 누가 싫대?”

“예후르. 차라는 멀미가 심한데….”

“쉿.”

***

첫 음은 미 플랫이었다.

동굴에서 울리듯 나지막했던 음은 점차 고도를 높여 나갔다. 어느새 여인들의 속삭임처럼 높은음에 달하자 현란한 연주가 이어진다. 건반 위에서 미끄러지는 열 손가락이 쉴 틈 없이 다음 음을 짓눌렀다. 검고 흰 건반들이 어지럽게 목청을 드높였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음.

“브라보!”

레오폴트가 벌떡 일어나 손뼉을 쳤다. 둥글게 싸맨 손은 부닥쳐 봤자 둔탁한 소리밖에 못 냈다. 예후르는 부드럽게 그의 손을 잡아 내려, 기다란 유리 막대를 들려 주었다.

챙챙! 레오폴트가 박수 대신 신나게 유리 막대로 와인 잔을 때렸다. 페기가 쑥스러운 얼굴로 말렸다.

“이제 그만해요, 레오.”

“훌륭한 연주를 들었으면 그에 합당한 환호를 보내야지!”

“그렇게 훌륭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릴! 내 이렇게 훌륭한 연주를 들은 적이 없는데!”

차라가 심드렁한 얼굴로 ‘과장은’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곤 레오폴트 쪽에 있던 초콜릿을 냉큼 주워 먹으며 물었다.

“있잖아. 그런 재미없는 곡 말고 다른 건 없어? 그래, ‘푸른 강 레미르 강’은 어때?”

“푸른 강 레미르… 그게 뭔데?”

“라발의 가곡이야.”

예후르가 포도를 따 먹으며 대신 대답했다. 라발 소리에 페기는 반사적으로 레오폴트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그는 손을 부르르 떨지도, 노성을 터트리지도 않았다. 별 반응 없는 모습에 페기는 속으로 의아해했다. 정말로 라발과 화해라도 한 걸까?

“자, 페기. 이번엔 보갈레프의 ‘합창’을 연주해 다오. 너도 알다시피 그 곡은 이맘때에 연주하기 적당한 것인데….”

“레오. 벌써 세 곡을 내리 들었잖아요. 페기도 좀 쉬어야죠.”

“오, 그래. 그래야지.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페기, 이리 와 앉으렴.”

페기가 피아노에서 나와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손바닥에 초콜릿 여러 알을 올려 두고 먹던 차라가 개중 몇 개를 건넸다. 페기는 동글동글한 초콜릿 한 알을 입 안에 쏙 집어넣었다.

레오폴트가 느른하게 소파에 기대었다.

“그나저나 이런 연주회도 참 오랜만이구나. 마음먹고 한번 열려고 하면 예후르가 자리를 비우고, 또 날을 잡아 열려고 하면 차라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었지.”

차라가 못 들은 척 시선을 피했다. 그런 차라가 귀엽다는 듯 레오폴트는 초콜릿 상자를 옆으로 밀어 주었다.

“그동안 페기의 연주가 많이 늘었어. 우리만 듣기 아깝구나.”

“과찬이에요. 레오의 실력에 비하면 한참 멀었죠.”

“나? 아니야, 내 연주는 그저 훌륭한 연주자들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했지. 너처럼 영혼을 불어넣는 연주는 아니었다.”

“어? 레오도 피아노 연주할 줄 알아요?”

차라가 뜬금없이 물었다. 레오폴트는 고드릭을 시켜 초콜릿이 시커멓게 묻은 차라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한때는 그랬었지. 손이 이렇게 되기 전의 얘기다만.”

“아….”

“페기의 연주가 옛날의 나보다 더 뛰어나다는 건 진담이다. 정말 아쉬워. 그림이라면 걸어 두고 자랑할 수나 있지, 피아노는 사람들 앞에서 직접 연주하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

“얘 생일에 무도회를 연다면서요. 그때 연주하라고 하면 되지.”

차라가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예후르와 레오폴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초콜릿을 오물거리던 페기가 천천히 입의 움직임을 멈췄다. 불길함이 감돌았다.

“싫어요.”

“페기.”

“싫어. 예후르, 난 분명히 싫다고 했어.”

“하지만….”

“레오.”

단호한 대답에 레오폴트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딱딱한 은 가면 너머로 시무룩한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수백 번 말해도 안 되는 건 안 돼요. 세상에, 무도회라니.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나보고 연주하란 말을…. 설마 둘 다 내가 부끄러움 먹어 쓰러지길 바라는 건 아니죠?”

“오, 페기. 우린 그저 더 많은 사람들이 네 뛰어난 연주를 들었으면 하고….”

“그건 여기 있는 사람들만 들어도 충분해요. 한 사람 더하자면 안드레아고.”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은 출 거잖아.”

예후르가 재미있다는 듯 싱글싱글 웃으며 끼어들었다. 페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요 며칠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그래, 춤은 춰야지. 이번 생일은 특별하잖니. 네 성인이 되는 날이면서, 본격적으로 사교계에 데뷔하는 날이기도 하지. 물론 이후에 어찌하든 그건 네 선택이다만….”

레오폴트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성인이 되어 작위를 받은 뒤, 어떤 행보를 보일지 누구에게도 말한 바가 없었다. 사실 페기 자신도 잘 몰랐다.

“누구랑 춤출지는 정했어?”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예후르가 넌지시 물었다. 페기는 침묵했다. 잠자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레오폴트가 뒤늦게 목청을 높였다.

“설마 아직도?”

“그게….”

“아직도 안 정했다고? 무도회가 코앞인데?!”

페기가 난처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다. 레오폴트는 어이구 소리를 내며 이마에 손등을 올렸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이지만, 가끔씩 이렇게 그의 속을 터트릴 때가 있었다.

“그걸 이제 말하면 어쩌자는 것이야. 예후르, 내가 깜빡했으면 너라도 챙겼어야지. 아니, 아니야. 다 내가 무심한 탓이지. 괜찮다. 아직 시간은 남았어. 혹 마음에 담아 둔 이가 있느냐?”

미적미적 대답을 미루던 페기가 슬그머니 눈을 들어 예후르를 보았다. 예후르는 사색에 잠긴 얼굴로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어쩐지 귓불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페기는 황급히 눈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없어요, 그런 사람….”

“누구라도 좋다. 기사든, 귀족이든, 하다못해 성직자든, 네 마음에만 든다면 누구든 못 데려올까.”

“정말이에요. 누가 있었으면 진작에 말했겠죠.”

레오폴트가 침중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쩔 수 없지. 그럼 한 사람밖에 없겠구나.”

“…….”

“차라.”

초콜릿 묻은 손가락을 빨던 차라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절 향한 시선들을 보며 어리둥절하다가, 금세 상황을 깨달았다.

“나, 나라고요? 왜!”

“왜냐니. 내 몸이 이러하지 않느냐.”

“예후르는! 예후르가 있잖아요!”

“나는 안 돼.”

예후르가 가만히 미소 지었다. 말문이 턱 막힌 차라가 입술만 벙긋거리다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도 사교계 데뷔인지 뭔지, 그거 안 했잖아요!”

“이참에 둘 다 같이 데뷔를 하면 되지. 오, 이번 무도회는 참 화려하겠구나.”

“그렇게 남 일처럼 얘기하지 말고요! 왜 내 데뷔만 그렇게 꼽사리 껴서 지나가는 건데요!”

“원래 사교계 데뷔는 네 나이쯤 하는 거야. 페기가 이상하게 늦은 거지.”

“싫은데! 나도 쟤처럼 이상하게 늦은 나이에 할 건데!”

“그럼 페기는 누구랑 춤을 춰?”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예후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차라는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저놈이 어디서 수작질이람?

“그래, 차라 네가 이번 한 번만 양보해 주렴. 페기가 그동안 사람 많은 자리를 기피해 와서 내 이번 무도회에 걱정이 많다. 적어도 네가 파트너로 곁을 지켜 준다면, 내 이리 근심하진 않겠지.”

레오폴트가 간곡하게 부탁했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던 차라가 반쯤 포기한 기색으로 웅얼거렸다.

“하지만 난 춤도 잘 못 추고….”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페기가 잘 추니까! 페기가 너를 잘 이끌어 줄 것이야! 그렇지?”

페기가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힐끗 그녀를 쳐다본 차라가 될 대로 되라는 듯 소파에 철퍼덕 엎어졌다.

“망해도 난 몰라.”

“종종 연습 봐 주러 갈게.”

예후르의 말에 차라는 물 위에 나온 물고기처럼 사지를 파닥거렸다. 그걸 재롱으로 착각한 레오폴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를 따라 웃던 페기는 문득 예후르와 눈이 마주쳤다. 늘 그렇듯 상냥한 빛을 띤 눈이 어쩐지 제 속을 훤히 읽는 듯하여 황망히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차라는 좋은 학생이다.

얼마 남지 않은 무도회를 위해 그는 종일 연습하자는 제안도 마다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춤을 춰야 한다는 부담감이 성실함으로 발현한 듯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따라붙는 전제가 하나 있었다.

그는, 좋은 춤꾼은 못 되었다.

“아야!”

오늘만 벌써 열일곱 번째 밟히는 발이었다. 페기는 검게 때 탄 구두를 우울하게 내려다보았다. 이러다간 차라가 춤을 다 익히기도 전에 그녀의 발이 너덜너덜해질지도 몰랐다.

“미안….”

한 예닐곱 번째까진 스스로에게 성질을 부리던 차라도 이젠 얌전하게 그녀의 눈치만 봤다. 페기는 가까스로 미소만 지어 보였다. 이따 알틴을 시켜 앞코에 철판을 단 구두를 구해 오라 해야겠다.

“난 진짜 몸치인가 봐.”

차라가 침울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마 아니라고 말하기엔 양심에 찔렸다. 대신 페기는 마주 잡은 손을 작게 흔들었다.

“마음이 너무 급해서 그래. 침착하게 다시 한 번만 해 보자.”

페기의 눈짓에 수도사가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음률을 따라 페기는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작게 박자를 셌다. 수없이 발을 밟힌 보람이 있어 차라도 이제 초반 스텝은 잘 따라왔다. 문제는 턴이 시작되는 구간이었다.

약간 낮은 높이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차라의 암녹색 눈이 보인다. 전염되는 불안감 속에 페기는 잡은 손을 왼쪽으로 이끌었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연이어 이어지는 턴 동작에 꼬이기 시작한 차라의 발이 결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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