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328)

둥글게 말린 페기의 등을 발견한 알틴이 화들짝 달려왔다. 그녀는 들고 있던 횃불을 경비대원에게 떠맡기곤, 페기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가씨, 왜 아직도 여기 계셔요! 어머, 손 좀 봐. 손이 얼음장이에요.”

알틴이 페기의 양손을 쥐곤 따뜻한 입김을 불어 넣었다. 머리 위에서 어른거리는 불빛에 페기는 슬그머니 눈썹을 찌푸렸다.

“차라는?”

“예? 아, 맞다! 도련님께서 갑자기 별채를 뛰쳐나가셨어요. 들어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마 본관으로 가셨을 거예요. 함께 가 보시겠어요?”

알틴이 그녀의 망토에 묻은 나뭇잎을 탁탁 털어 주었다. 페기는 쇄골까지 풀린 알틴의 단추를 손수 잠가 주었다. 무릎을 펴고 일어서는 페기의 뒤에서, 알틴이 벌게진 얼굴로 경비대원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본관은 이미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였다. 잠긴 방문 앞에서 어찌할 줄 몰라 하던 하인들이 페기를 발견하고 단걸음에 달려왔다.

“아, 아가씨! 도련님께서 방금….”

“내가 알아서 할게. 다들 들어가 봐.”

“네?”

어리둥절하여 가만히 선 하인들을 알틴이 눈치껏 데려갔다. 어느새 휑하니 빈 복도에서 페기는 물끄러미 잠긴 문을 쳐다봤다. 그녀는 노크하는 대신, 망토를 여미며 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밤이 온전히 내려앉은 이슥한 시간이었다. 문가를 밝히는 둥그런 불빛 너머 복도는 암암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 카니나의 뒷골목이 숨어 있는 듯했다. 스멀스멀 발치로 몰려드는 쓰레기 악취에 구역질이 났다.

“차라. 거기 있니?”

페기는 문에 가만히 고개를 기대었다. 방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짤막한 침묵 끝에 그녀는 다시 입술을 열었다.

“네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 모르겠다. 떠도는 소문이 많으니 그중 몇 개는 들어 봤겠지.”

베일에 가려진 사도. 신도를 돌보지 않는 천사. 페기는 제 이름 뒤로 따라붙는 별명들을 떠올렸다. 기실 죄다 비꼬는 말이었다. 사람의 소명을 관장하는 천사 예리엘의 현신이 규중에 박혀 음악에만 몰두한다고 성토하는 자들이 많았으므로.

하지만 나라고 그러고 싶었을까.

“어릴 때는 이러지 않았어. 교외로 나가 며칠씩 별궁에서 머물기도 하고, 미레 강변을 걷기도 했어. 너 미레 강변에 가 봤니? 난 그곳을 참 좋아했는데, 마지막으로 가 본 게 벌써 10년 전이야. 성궁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곳인데. 참 우습지.”

그녀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어릴 때는 이러지 않았다. 처음 보는 양지의 세상이 즐거워 매양 그런 곳에서 뛰놀고 싶었다.

“여덟 살인가 아홉 살인가…. 어떤 여자가 찾아왔어. 카니나의 창부였는데, 자기 고향에서 사도가 났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대. 내가 자기 딸이라고 했어.”

그땐 몰랐다. 아주 특별하거나, 아주 평범한 것이 아니라면 비밀로 감추어 두는 편이 좋다는 걸. 상자를 열었을 때 어떤 진실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레오는 탐보프의 황자야. 안드레아는 마차 사고로 죽은 몰락 귀족의 딸이고. 예후르는 사막에서 왔다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어. 누구는 그를 두고 사막 왕국의 왕자라 하고, 누구는 노예의 자식이라고 해. 그럼 나는? 카니나의 뒷골목에서 부모 없이 자란 아이에게는 여러 상상을 덧붙일 수 있지만, 창부의 아이는 그렇지 않아. 아무것도 몰랐을 때 사람들은 내게 친절했지만, 내 친모라는 사람이 나타나자 순식간에 돌변했어. 그리고 카니나에선 내가 자기 딸이라 주장하는 여자들이 줄을 이었지.”

혼란도 그런 혼란이 없었다. 카니나에서 난 사도는 하난데, 사도의 어미라 주장하는 여자는 매일같이 늘어만 갔다.

“레오는 모두 부정했어. 하지만 그럼 뭐 해. 사람들은 날 창녀의 아이라 손가락질하고, 그런 날 비호하는 레오를 비난했는걸. 노예의 자식도 교황이 되는 판국에 그게 뭐가 중요할까 싶지만, 레오는 적이 많아. 교국에선 티끌만 한 죄가 산처럼 변하는 덴 반나절이 걸리고, 없던 죄가 만들어지는 덴 하루가 걸린다지. 우린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우릴 깎아내리려는 사람이 많았을 뿐이야.”

내가 없으면 그치려나. 내가 보이지 않으면, 우릴 가만히 두려나.

“그래서 내전에 틀어박혔어. 사람이 싫고,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내가 싫어서. 이제는 내가 사람을 돌보지 않는다며 비난하지만 난 여전히 그들이 싫어. 그들이 어떤 눈으로 날 보는지 아니까.”

사도로 볼 때는 경외심이, 창부의 자식으로 볼 때는 경멸감이. 나중에 깨우치길, 둘 다 사람으로 보는 눈이 아니었다.

“네가 겪은 일을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려는 게 아니야. 부모 없는 난 네 심정을 몰라. 많이 괴로우리라 짐작하지만 그 고통은 차마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깊이겠지.”

십여 년을 살 붙이고 살아온 가족이었다. 만일 레오폴트나 예후르, 혹은 안드레아가 자신을 부정한다면 페기 역시 숨도 못 쉴 만큼 슬플 것이다. 온몸이 조각조각 부서질 것이었다.

“다만 말해 주고 싶었어. 사람들은 우릴 이해 못 해. 그들에게 우리는 두려워 경외하는 대상이지, 이해의 대상이 아니야. 남들과 똑같이 두 눈, 두 손, 두 발 다 가졌는데도 그래. 천사가 찍고 간 발자국이 그리 중하대.”

그러니까 우릴 이해할 수 있는 건 우리뿐이라고.

“알아. 네가 우릴 이상하게 보는 거.”

어디 하나 부러지고 비틀린 병신들끼리 모여 서로 핥아 주는 꼴이리라. 평범한 부모 밑에서 평범한 형제자매들과 어울려 자란 사람 눈엔, 어디 하나 부족한 것들끼리 모여 가족 행세를 하는 게 우스웠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린 꽤 잘 살아왔어.”

가족이란 게 뭔진 모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구색은 맞추었다. 차마 아빠 소리는 못 해도 레오폴트는 그녀의 아버지였고, 오빠 소리는 못 해도 예후르는 그녀의 오라비였다. 핏줄로만 가족을 이룰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너도 사랑해. 설령 네가 우릴 싫어한대도, 안드레아처럼 뛰쳐나간대도 그 마음만은 변치 않을 거야. 이 세상에 우리 같은 사람은 고작 다섯뿐인데, 미워하며 헐뜯기엔 너무 적은 수잖아.”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은 많은데,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이렇게나 적다. 어쩌면 다들 비슷하게 사는 걸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나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사람을 사랑하며.

페기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가 볼게. 내일 다시 올 테니까….”

머뭇거림 끝에 그녀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내일은 문 열어 줬으면 좋겠어.”

야밤의 한기에 몸서리치며 페기는 어두운 복도로 들어갔다. 또각또각 멀어지는 발소리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무렵,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차라는 눈물이 흥건한 얼굴로 텅 빈 복도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이튿날.

페기는 아침 일찍 일어나 후원으로 갔다. 화훼 애호가인 벨렘 성주가 심혈을 기울여 가꾼 곳인데, 마침 형형색색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장관이었다.

“아가씨. 도련님께 가 봐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품에 한 아름 꽃을 안은 알틴이 물었다. 꽃밭이 상하지 않게끔 조심스레 앉은 페기가 노란 붓꽃을 꺾어 알틴에게 넘겼다.

“응. 몇 송이만 더 꺾고….”

“도련님 말이에요, 어제 별채에서 나가실 때 표정이 말이 아니셨는데. 그렇게 금방 나오실까요?”

“그럼. 늦어도 점심때까진 나올 거야.”

“어떻게 아세요?”

“그 애, 어제부터 굶었잖아.”

알틴이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페기는 붉은 튤립과 하얀 수선화 중에서 고민하다가 수선화를 꺾었다. 그러곤 알틴에게 꽃을 건네려는데, 저 멀리 마차에 탑승하는 일가족이 보였다. 알틴이 그녀의 시선을 쫓아 뒤를 돌아보았다.

“도련님 가족분들이 떠나시나 보네요. 음, 가족이라 해야 하나….”

“가족이지. 저분들 덕분에 차라가 있는 건데.”

일가족이 모두 오르자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기는 마차 뒤꽁무니에 시선을 매단 채 알틴에게 꽃을 넘겼다. 꽃을 고쳐 들며 알틴이 투덜거렸다.

“뭐가 그렇게 찔려서 이런 꼭두새벽부터 떠나는 걸까요? 이왕 떠나는 거, 도련님께 인사라도 하고 가면 어디가 덧나나. 하여간에 이해를 할 수가 없… 어머, 도련님?”

멀리서 차라가 잠옷 바람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당황한 페기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난 가족들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난감하여 고민에 빠진 사이, 차라가 숨을 헐떡이며 어느새 그녀의 앞에 섰다.

페기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차라. 네가 원한다면 다시 불러올….”

“왜 안 와!”

난데없는 고함 소리에 페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족들이 왜 안 오냐고? 그건 제게 물을 것이 아니다.

“…사람을 보내 다시 불러올게. 방금 떠났으니 멀리 가진 않았을 거야.”

“뭐?”

“네 가족들 얘기하던 거 아니니?”

차라가 얼빠진 얼굴로 입만 벙긋거렸다. 그는 갑갑함을 못 참겠다는 듯 성급히 발을 내딛다 그만 기다란 가운을 밟고 기우뚱 넘어지고 말았다. 바람 먹고 화려하게 부풀어 오른 옷자락이 넘어진 몸뚱이 위로 조촐하게 내려앉았다.

“차라!”

페기가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엎어진 그의 몸을 일으키며 괜찮으냐 물으려는데, 차라가 먼저 빽 소리를 질렀다.

“너 말이야, 너! 너 왜 안 왔냐고! 오늘 온댔잖아! 기다렸는데 왜 안 와!”

페기가 놀란 눈 그대로 그를 바라봤다. 차라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우물쭈물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너 온대서 미리 문도 열어 두고 있었는데…. 거짓말쟁이. 앞으로 네가 하는 말은 하나도 안 믿을 거야.”

“…날 기다렸다고?”

“네가 온다며!”

미동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만 보던 페기가 벌떡 일어나 알틴의 품에서 꽃을 받아 왔다. 그러곤 차라의 앞에 쪼그려 앉아 꽃다발을 한 아름 내밀었다.

“아니야, 그런 거…. 난 그냥 너한테 꽃을 주려고….”

“…….”

“꽃 좋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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