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풀이 푸르게 일어나는 사월의 봄이었다. 햇빛 떨어지는 양지면 어디고 피어나는 봄꽃, 무성한 나뭇잎으로 몸을 부풀리는 나무들.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는 하늘은 찡그리는 일 없으니, 교국 남단의 이름 없는 들판은 일 년 중 가장 좋은 시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 좋은 시절을 쫓아, 호위병 두른 마차 한 대가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명색이 앙겔리카 성궁에서 시작된 남쪽 가도건만, 하루 지나니 폭이 좁아지고 또 하루 지나니 바닥에 깔렸던 돌이 사라졌다. 어느덧 마차는 흙먼지 날리는 시골길 위를 달리고 있었다.
“으….”
길바닥이 울퉁불퉁해질 때부터 멀미에 시달리던 차라는 이젠 아예 마차에 드러누워 신음만 흘렸다. 식은땀 나는 얼굴에 열심히 부채를 부쳐 주던 페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많이 힘드니? 잠깐 쉬자고 할까?”
“됐어, 곧 도착한다고 했잖아…. 그보다 창문 좀 열어 줘….”
차라가 핼쑥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페기는 창을 밀었다. 손바닥만 한 구멍으로 신선한 바람이 흘러들어 왔다.
다행히 차라는 바깥 공기를 맡고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페기는 긴급 상황을 대비해 안고 있던 양동이를 조심스레 내려놓곤, 창밖을 내다보았다. 잡풀만 무성하게 자라난 들판에 잎을 비단처럼 늘어트린 버드나무가 바람결에 흔들거렸다. 꼭 반갑다며 인사하는 듯한 모양이다.
그때, 붉은 꽃송이가 눈앞으로 불쑥 들이밀어졌다. 페기가 가만히 보고만 있자, 말 탄 중년 기사가 느긋하게 웃으며 살랑살랑 꽃을 흔들었다.
“선물입니다, 아가씨.”
페기는 느릿느릿 꽃을 받아 들었다. 화사하게 핀 팬지였다.
“예쁘네요.”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기사가 이번엔 노란 꽃을 내밀었다.
“이건 고생하는 도련님을 위한 선물.”
페기가 대신 꽃을 받아 차라에게 주었다. 물끄러미 꽃을 응시하던 차라가 페기의 귓가에 꽃을 꽂아 주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조금 놀란 페기가 수줍게 웃었다.
“고마….”
“머리에 꽃 단 광년이.”
페기가 충격받아 굳었다. 길게 하품한 차라가 꾸물꾸물 돌아누웠다. 페기가 우울하게 귓가에서 꽃을 빼내려 하자, 기사가 말렸다.
“아가씨, 부디 저만 머리에 꽃 단 미치광이로 남겨 두진 마십시오.”
창밖을 본 페기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투구를 벗은 기사가 듬성듬성 수염 난 얼굴에 꽃을 꽂고 있던 것이다.
“음. 이만하면 교국에서 제일가는 미치광이는 제가 되겠군요. 마음에 듭니다.”
기사가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창문에 제 얼굴을 이리저리 비추어 보았다. 페기는 질색하는 다른 기사들을 애써 못 본 척 외면했다.
“본시오 경. 다들 경비대고 혼자만 근위대 소속인데 적응하기 힘들진 않아요?”
페기가 소곤소곤 소리 죽여 물었다. 창가로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말을 경청하던 본시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본디 근위대에서도 외톨이입니다.”
“네? 하지만 부기사단장이 경을 추천했다고….”
“음, 그러니까 부단장님도 외톨이신 셈이죠.”
페기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근위대의 괴짜 기사, 마르코스 본시오에 대해선 몇 차례 들은 적 있었다.
“사실 저는 올 계획이 없었는데, 부단장님이 어떻게 두 분을 경비대에게만 맡기냐고 하도 노발대발하셔서 마지막에 꼽사리 끼게 된 겁니다. 아시다시피 경비대는 팔 할 이상이 이스파갈족이니까요. 그런데 굳이 저까지 올 필요는 없었단 생각이… 아, 물론 두 분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만, 몬틸로 백작님이 워낙 유능하시니까요.”
페기는 창밖으로 슬쩍 눈만 내밀어 몬틸로 백작의 뒷모습을 보았다. 종일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일정이라, 그동안 그와 제대로 대화할 기회도 없었다.
문득 본시오가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백작님의 별명이 무언지 아십니까?”
“…….”
“사막의 인간 도살자.”
“…….”
“장난입니다.”
장난이란 말이 무색하게 본시오는 지극히 침착한 얼굴이었다. 페기는 그제야 그가 왜 근위대의 외톨이인지 조금 이해가 되었다.
“저, 경은 우리가 왜 벨렘 성으로 가는지 알아요?”
“그거야 꽃놀이를 가시는 게지요.”
“…….”
“그렇게 빤히 쳐다보셔도 제 대답은 변치 않습니다. 몰라도 모르는 척, 알아도 모르는 척하란 명을 받았으니까요.”
“누구의 명인데요?”
“아실 텐데요.”
페기는 입을 다물었다. 오랜만에 앙겔리카 성궁을 방문한 몬틸로 백작을 찾아갔던 것이 벌써 열흘 전이었다. 당시엔 백작이 난처한 기색으로 대답을 미루기에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방안을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레오폴트가 봄나들이라도 가라며 직접 백작을 붙여 준 것이다.
페기는 순진하지만 미련스럽진 않았다. 하늘이 그녀를 도와 일이 잘 풀렸다고 믿기보단, 누군가 뒤에서 손을 썼으리라 짐작하는 것이 당연했다.
“무슨 일이신진 모르겠지만, 성하께 부탁하셨어도 괜찮았을 겁니다. 성하께선 아가씨를 아끼시니까요.”
“그래서 말하지 않은 거예요. 성하께써 아시면 성하의 책임이 되니까.”
페기는 창틀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괴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얇은 실처럼 부슬부슬한 은빛 머리칼을 잘게 흔들었다.
“만약 이 일이 탄로 나면 클레멘스 추기경이 죽어라 물고 늘어질 게 빤해요. 성하의 명령이라면 큰일이 되겠죠. 하지만 내 명령이라면, 세상모르는 계집애가 철없이 꾸민 일로 전락해요. 행여나 잘못된다 하더라도 그 정도로 그치길 바랐어요.”
지금껏 복잡한 정치판을 피해 왔지만, 그렇다고 정치를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늘 보고 듣는 게 그 모양인데 어찌 모를까. 페기는 다만 저로 인해 누군가 곤란해지길 원치 않았다. 도움도 못 주는 판국에 짐만 되다니,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다.
“그래도 경의 말을 들으니, 다행히 성하는 아닌 모양이네요.”
순간 본시오가 눈을 부릅떴다. 페기는 성궁을 떠나올 때 몸소 성문 앞까진 나와 배웅하던 예후르의 모습을 떠올렸다. 수없이 겪었어도 당최 익숙해지지 않는 부채감이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때, 저 앞으로 삐죽 솟은 성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페기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햇빛을 희게 반사하는 회색 벽돌, 꼭대기에 우뚝 서 바람에 휘날리는 교국의 백색 깃발.
“벨렘 성입니다.”
본시오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비교적 평탄했던 나흘의 여정은 차라의 토악질로 막을 내렸다. 성스러운 불의 사도를 모시겠답시고 성문 앞에서 기다리던 벨렘 성의 하인들은 시큼한 구토의 냄새, 양동이에 고갤 처박은 차라, 어찌할 줄 모르는 페기를 보고 얼이 빠졌다.
“의, 의사! 의사!”
양동이에서 딸려 나오는 차라의 낯이 시퍼렇자, 누군가 의사를 부르러 달려갔다. 본시오는 거의 혼절하다시피 한 차라를 업고 성 내부로 들어갔다. 당혹한 하인들이 그를 뒤따르는 가운데, 뒤에 남겨진 페기가 마차에 기대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머, 아가씨.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요.”
알틴이 기사의 등에 대롱대롱 매달려 말을 타고 도착했다. 페기가 조금 창백한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냥, 너무 정신이 없어서.”
“어휴, 안색이 말이 아니셔요. 혹 아가씨도 멀미하셨어요?”
“아니…. 넌 어떠니? 종일 말 타고 왔는데 어디 불편하진 않고?”
“으, 그게 실은….”
알틴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닥였다.
“허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아프고, 허벅지도 아프고, 또….”
“그렇게 불편했으면 마차로 들어오지.”
“아이참. 불편함을 감수하고 탄 거죠.”
말을 몰고 가던 검은 낯의 경비대원이 페기에게 경례했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알틴에게 윙크를 하는데, 페기는 그제야 저자가 알틴을 뒤에 태우고 온 자임을 깨달았다.
“어머, 어떡해!”
알틴이 뺨을 감싸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페기는 그런 알틴이 귀여워 소리 없이 웃었다. 하기야 평생 독신을 맹세한 수도사와 근위대 기사들만 보다가, 저리 대놓고 추파를 던지는 사내를 만났으니 정신이 혼미하기도 할 것이다.
“아가씨.”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페기는 일순 강한 역광에 눈살을 찌푸렸다. 가늘게 접힌 시야에 큰 키, 떡 벌어진 어깨가 들어왔다. 서서히 빛이 걷히며 드러나는 얼굴은 사막의 볕에 그을린 빛깔이었다.
검은 머리, 검은 낯.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을 흩트리며 페기가 살짝 미소 지었다.
“몬틸로 백작.”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지금 의사가 도련님을 진찰하고 있습니다. 별 탈이 없다면 곧 기력을 되찾으실 겁니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던 페기가 문득 그에게로 한 발짝 다가갔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길.
“그분들은 도착했나요?”
“…네.”
설명을 요구하듯 투명한 보라색 눈이 빤히 그를 담았다. 백작은 짧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난감한 기색이었다.
“지금 별채에 계십니다. 외람되오나 아가씨께서 먼저 그분들을 만나 보는 건 어떠실지.”
“내가요?”
“그분들을 모시고 온 호위병들의 말에 따르면, 도련님께서 기대하시는 만남은 아닐 듯합니다.”
페기는 빠르게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괜찮아요. 짐작했던 바예요.”
“예?”
페기는 백작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별채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차라는 이 만남을 선물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다를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차라도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다.
“내일 아침에 보는 거로 해요. 차라도 기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니.”
“…알겠습니다.”
백작이 반듯한 자세로 예를 취했다. 그만 성내로 들어가려던 페기는 좀체 절 떠나지 않는 백작의 시선을 느끼곤 어리둥절했다. 백작이 묘하게 웃는 낯으로 제 귓가를 톡톡 두드렸다.
“아름다우십니다.”
멀어지는 백작의 등을 멍하니 응시하던 페기가 더듬더듬 손을 들어 귓가를 확인했다. 맙소사. 아직도 꽃이 꽂혀 있었다.
“알틴, 왜 나한테 말 안 했….”
잔뜩 기함하여 고개를 돌리던 페기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알틴은 아까 봤던 기사와 서로 머리에 꽃을 한가득 꽂아 주고 있었다.
빨갛고 파랗고 노란 꽃을 꽂은 알틴이 고개를 길게 빼서 페기를 보았다.
“아가씨, 부르셨어요?”
“…….”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