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후르는 곱슬거리는 페기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드러난 귓가가 뜨거웠다. 그것이 감격 때문인지, 아니면 이름 모를 다른 감정 때문인지 페기는 짐작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을 위한 것도 내가 원하는 방식일 수 있잖아.”
“…혹시나 했는데.”
미소 띤 예후르의 낯이 미묘하게 굳었다.
“만약 네가 나 때문에 가시밭길을 택한다면 굉장히 슬플 거야. 사랑하는 페기, 부디 나를 슬프게 하지 말아 줘.”
페기는 시선을 피하듯 슬그머니 고개를 틀었다. 속을 훤히 읽힌 기분이었다.
“당장 정하라는 게 아니야. 지금부터 차근히 생각해 보라는 거지.”
예후르가 미소 머금은 입술을 그녀의 머리칼 끝에 맞추었다. 페기는 깊은 상념에 잠긴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성인이 될 뿐이다. 무엇을 할지는 나중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 고민할 시간이야 많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은 더 많이 남았으니까.
***
동녘에서 뻗어 오는 서광에 앙겔리카 성궁의 백색 외벽이 붉게 번졌다.
새벽 기도를 강조하는 교회 율법에 따라 내전은 동트기 한참 전부터 깨어나 있었다. 추기경, 시종 할 것 없이 목욕을 마친 정결한 상태로 기도를 드리곤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내전 깊숙한 곳에 위치한 페기의 방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먼 데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기도가 끝나자, 하녀 알틴이 재빨리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와, 아가씨. 하늘 좀 보세요. 오늘은 마그누스 천사께서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페기는 말없이 빙긋 웃었다. 신선한 새벽 공기를 담뿍 들이마신 알틴이 종종거리며 화장대 앞에 앉은 페기에게로 다가왔다.
“왜 아무런 말씀이 없으실까. 날씨가 화창하니 자, 아가씨 머리도 오늘은 한결 얌전하잖아요.”
“그래 봤자 정신 사나운 건 똑같은걸.”
“정신 사납긴. 이렇게 예쁜 곱슬머리가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알틴은 페기의 짧은 머리칼을 정성껏 빗겨 주었다.
“이참에 길러 보시는 건 어때요? 그러면 묶고 땋고 틀어 올리고, 하여간에 지금보다 훨씬 예쁘게 치장해 드릴 수 있어요.”
“난 지금도 감당이 안 돼.”
“감당이야 제가 하면 되죠! 어디 보자. 옛날에 주방에서 일하던 언니가 꼭 아가씨처럼 심한 곱슬머리였는데, 예쁘게 잘만 꾸미고 다녔거든요. 그 언니한테 비법을 물어봐서…. 그런데 그 언니, 지금 어디서 일하지?”
알틴이 혼자서 중얼중얼하는 동안, 페기는 보석함에서 반지를 찾아 꼈다. 자수정이 섬세하게 세공된 반지로, 어릴 적 레오폴트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선대 교황의 유품이다.
“아이참. 또 그 반지예요?”
“예쁘잖아.”
“예쁘긴 하지만 사시사철 그 반지만 착용하시잖아요. 다른 반지도 좀 끼셔야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걸고, 사파이어 귀걸이도 하고 그러시는 거지…. 아, 이거 예쁘다!”
열정적으로 보석함을 뒤지던 알틴이 귀걸이 한 쌍을 달랑달랑 들어 올렸다.
“보세요. 끄트머리가 은으로 세공되어서 아가씨가 지금 착용하신 반지랑 잘 어울리죠? 게다가 자수정 알도 보기 좋게 큼지막하잖아요. 이 정도면 까마귀도 탐내겠어요.”
귀걸이를 받아 든 페기가 아리송한 눈으로 보석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귀걸이를 알틴의 귀밑에 붙여 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예쁘다.”
알틴은 멀뚱히 눈만 끔벅였다. 얼결에 귀걸이를 받고서야 대강 상황이 파악되었다.
“진심이세요?”
“…….”
“하지만 이거, 분명 성하께서 하사하신 물건일 텐데…. 물론 그런 게 한둘이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알틴은 착실하게 귀걸이를 받아 챙겼다. 페기는 신명 나게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마지막으로 한 번 매만지곤 보석함을 닫았다.
쿵쿵!
갑자기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페기가 의아한 기색으로 창가를 돌아보았다.
“밖에 무슨 일 있니?”
“아마 차라 도련님을 찾고 있을 거예요. 또 사라지셨거든요, 그분.”
잽싸게 창가로 간 알틴이 창밖으로 길게 고개를 뺐다.
“그런데 근위대까지 나선 걸 보면 꽤 심각한가 봐요. 보통 새벽 기도 끝날 때쯤에는 찾았는데.”
“저러다 레오도 듣겠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민하던 페기가 손짓으로 알틴을 불렀다.
“가서 근위대는 제자리를 지키라고 전하렴. 괜히 일을 크게 만들었다가 레오의 귀에까지 들어가면 차라만 더 혼나니까.”
“그러다 점심 식사 때까지 그분을 못 찾으면요? 그러면 정말로 큰일 나는 거 아닌가요?”
양손을 맞잡고 선 알틴이 흘끗흘끗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걱정 말라는 듯 페기가 조금 쓰게 웃었다.
“괜찮아. 내가 찾아올게.”
***
“…기는 안 계시는 것….”
“…대체 어디로 가신….”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멀어져 간다. 벽에 귀를 붙인 채 숨죽이고 있던 차라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는 벽에 기대어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다가, 낡은 종이를 눈앞으로 올렸다. 내내 무덤덤하던 낯에 짙은 그리움이 스쳤다.
“차라.”
“으악!”
난데없는 목소리에 차라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언제 들어왔는지, 페기가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놀라 벌렁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차라가 간신히 목청을 열었다.
“깜짝이야! 인기척이라도 좀 내고 들어오든가!”
“쉿.”
페기가 검지를 입술에 붙이기 무섭게, 얇은 벽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전해졌다.
“방금 무슨 소리였지?”
“아무도 없는데…. 잘못 들은 거 아니야?”
“그런가?”
지척을 서성이던 발걸음이 다시금 멀어진다. 사위가 고요하게 가라앉을 때까지 둘은 미동도 없었다. 페기가 입술에서 검지를 떼자, 기다렸다는 듯 차라가 앓는 소리를 내며 벽에 늘어졌다.
“내가 이러다 제명에 못 죽지. 도대체 오늘만 몇 번을 놀라는… 그게 뭐야?”
“너 식사도 안 했다며. 혹시나 배고플까 봐….”
차라는 포장된 음식물을 얌전히 받아 들었다. 아무리 도도한 체해도 실상은 열다섯 어린애라, 설레는 기색을 숨길 순 없었다.
허겁지겁 빵을 뜯어 먹는 모습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페기가 그 옆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흠칫 어깨를 퉁기며 의심스럽게 그녀를 흘긴 차라가 머뭇머뭇 빵 한 쪽을 내밀었다. 놀란 듯 페기의 눈이 커졌다.
“난 먹었어.”
…그럼 그만 가지, 왜 안 가. 빵을 입에 쑤셔 넣은 차라가 중얼중얼 혼잣말했다. 페기는 제대로 빗지 않아 사방으로 뻗친 그의 잿빛 머리를 매만져 주려다가, 애써 손을 물렸다.
“이번 주에만 벌써 세 번째 사라진 거라면서. 정말이니?”
“벌써 그렇게 됐나.”
“너 이러라고 여기 알려 준 거 아니야.”
“어떻게 쓰든 내 맘이지. 이제 와 유세 떠는 것도 아니고.”
“종일 너 찾느라 온 궁전을 뛰어다닐 사람들 생각도 좀 해 봐. 다들 널 어떻게 생각하겠어.”
“어떻게 생각하긴. 성스러운 불의 사도라고 생각하겠지.”
사과를 한 입 베어 문 차라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페기가 조금 시무룩하게 물었다.
“여기가 그렇게 싫으니?”
“응.”
“우리도 그렇게 싫고?”
“우리?”
눈을 둥그렇게 뜬 차라가 뒤늦게 이해한 듯이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아, ‘너희 가족’. 당연히 싫지. 하나같이 다 이상하잖아.”
“어디가 그렇게 이상한데?”
“뭐야. 그걸 몰라서 물어?”
“응.”
어안이 벙벙하던 차라가 입술을 벙긋거리다 겨우 목소리를 냈다.
“넌 진짜, 다른 사람들이랑 얘기도 하고 좀 그래야 돼. 맨날 너희 가족들이랑만 어울리지 말고.”
“…….”
“하여간에 뭐가 이상하냐면, 다 이상해. 다들 미쳤어. 일단 교황은….”
“레오폴트.”
“…그래, 레오폴트. 그 사람은 하루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가, 하루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 같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변덕스럽지? 혹시 그 가면 속에 맨날 다른 사람이 들어 있는 거 아냐?”
“설마…. 많이 아파서 그래.”
“아프면 일 그만하고 어디 조용한 데서 요양이라도 하던가. 게다가 하루 한 번은 꼭 같이 식사해야 한다면서 자기는 아무것도 안 먹잖아. 그 답답한 가면 좀 벗으면 어디가 덧나나? 맨날 남 먹는 것만 쳐다보는데 그 시선 때문에 체할 것 같아. 가만히 쳐다만 보면 다행이게, 엊그제처럼 난동이라도 부리면….”
좋지 않은 기억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차라가 불편하게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그래. 그리고 엘피도 공작은….”
“예후르.”
이어지는 말이 없자 페기는 살며시 눈을 굴렸다. 어쩐 일인지 차라는 조금 불쾌한 표정이었다. 혹은, 겁먹은 얼굴.
“…차라?”
“난 그 사람이 무서워.”
생각지도 못한 말에 페기는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힐끗 그녀를 쳐다본 차라가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나마 너랑 있을 때는 사람같이 보이더라.”
“무슨 소리야, 그게?”
“말해 줘도 모를걸.”
심드렁하게 턱을 괸 차라가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그리고 안… 아네타?”
“안드레아.”
“그래, 안드레아. 그 사람 본 적은 없어도 유명하던데. 양아치로.”
차라가 씨만 남은 사과를 봉투 속으로 휙 던졌다.
“하여간에 말이 사도고, 말이 천사의 현신이지 다들 회까닥 돈 것 같아.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고 따르는 불의 사도가 죄다 저런 놈들이라는 걸 알까? 당연히 모르겠지? 하기야 나도 여기 오기 전까진 몰랐으니까. 사기꾼들.”
페기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살짝 오므렸다. 해끄무레한 낯에 우울한 기미가 서렸다.
“…나도 그렇게 이상하니?”
“어?”
“나도 미친 사람 같아?”
“그야 당연히….”
당연히, 그다음은 뭐지? 순간 말문이 막힌 차라가 어리둥절하게 생각했다. 하나같이 요상한 교황이나 엘피도 공작과는 달리, 페기는 딱히 거북하거나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페기처럼 순한 애들은 고향에서도 더러 보았기 때문이다.
“넌 그래도 괜찮은 녀석인 것 같아.”
괜찮은 녀석. 이미 내뱉은 말을 머릿속으로 한번 되감고서야 차라는 그 말을 온전하게 받아들였다. 그래, 페기는 괜찮은 녀석이다. 이 미친 성가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사람.
페기는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의 말을 단순한 겉치레라 받아들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괜히 나서서 설명을 덧붙이기도 뭐해 차라는 그냥 입 다물고 있기로 했다. 허기가 가시니 졸음이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