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 올리겠는가. 교회가 답답하다며 뛰쳐나간 탕아를 내세우겠는가, 베일에 가려진 수수께끼 소녀를 올리겠는가, 아니면 이제 막 열다섯 먹은 사내애를 올리겠는가. 결국에 교황 자리에 앉을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러나 시대를 막론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는 늘 존재하는 법이다. 어딜 가나 차기 교황에 대한 논쟁은 발에 차이는 돌멩이만큼이나 잦았다.
교국은 그런 곳이었다. 내로라하는 성직자들이 모이는 곳이요, 수십 개국 대사들이 기세등등하게 진을 친 곳. 사교 모임을 빙자한 물밑 다툼이 판을 치는 곳이니 더 말해 무엇할까.
“하늘 아래 가장 정결해야 하는 곳이 가장 더러운 구정물로 타락했구나.”
어느 날 지체 높은 추기경이 한탄했을 때, 자칭 교국의 논객들은 침묵했다. 아마도 역사상 교국이 가장 고요했던 순간일 것이다.
***
페기는 깃펜 끄트머리를 살짝 물었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악상이 손아귀에 잘 잡히지 않았다. 이게 다 집중을 흩뜨리는 딴생각 때문이다.
피아노 의자에 앉은 채 페기는 윗몸을 뒤로 기울여 슬그머니 소파를 훔쳐보았다. 예후르는 소파에 느른하게 파묻혀 서류를 넘겨 보고 있었다.
“왜?”
귀신같긴. 페기는 저를 보지도 않고 시선을 알아챈 예후르를 조금 떨떠름하게 흘겼다.
“궁금한 게 있어서.”
“뭔데?”
“이걸 물어도 될지….”
“페기. 네가 물으면 안 되는 건 없어.”
예후르가 서류를 턱 아래로 당기며 찡그리듯 웃어 보였다. 그에 용기를 얻은 페기가 조심조심 말을 꺼냈다.
“어제 클레멘스 추기경이 무슨 편지를 보냈길래 레오가 그렇게 길길이 날뛰었던 거야?”
“…….”
“…역시 물으면 안 되는 거였구나.”
“아니, 아니야. 그냥 조금 놀라서. 네가 웬일로 그런 걸 다 궁금해하나.”
“그야 나도 이제 곧 어른이니까.”
페기가 쑥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던 예후르가 포도 한 알을 느릿하게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신맛이 톡 퍼지듯 만면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기특하네, 우리 페기.”
“알려 줄 거야?”
“물론이지.”
예후르가 여상하게 서류를 한 장 넘겼다.
“클레멘스 추기경 말론, 참담하게도 최근 교국 내 피부 검은 이교도들이 늘고 있으니 나를 추방해서 본보기를 보이라던데. 그럼 그네들도 알아서 여길 떠날 거라고.”
페기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당황할 때면 나오는 습관이었다.
“어떻…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장난을 걸듯 예후르가 짓궂게 웃었다. 페기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손끝만 내려다보았다.
클레멘스 추기경이라면 그녀도 공식 행사에서 몇 차례 목격한 적이 있었다. 레오폴트 연배의 고상한 남자였다. 분명 예후르와도 웃으며 인사 나누는 것을 보았는데, 편지로 그런 험한 말을 쓴다는 게 이해되질 않았다.
조용히 서류를 내려놓은 예후르가 피아노 쪽으로 다가와 페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고개를 낮게 기울여 울적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게 그렇게나 속상하니?”
“당연히 속상하지. 넌 화도 안 나?”
“화?”
예후르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페기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자, 그는 맑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화가 난다기보단… 조금 성가시지. 귀찮기도 하고.”
“겨우?”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 그런 말 들을 때마다 속상해했으면 지금쯤 내 속은 다 문드러져 없어졌을걸.”
“하지만 레오는.”
“레오는 다르지. 나도 만약 너나 레오가 얼토당토않은 말로 지탄받는다면 화가 아주 많이 날 거야.”
예후르는 가는 실처럼 부슬부슬한 페기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렸다.
“애당초 그 편지는 내가 아니라 레오가 목적이었어. 알현을 거절당하니 속이나 긁어 보자는 심산이었겠지.”
“속이나 좀 긁어 보잔 마음으로 추방 운운했다고?”
“그쪽도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한 소리야.”
“그냥 홧김에 한 소리구나.”
“음. 그렇다기엔 클레멘스 추기경은 끊임없이 나와 레오를 방해하던 사람인데.”
“…….”
“더 놀라운 게 뭔지 아니? 그 사람, 실은 나를 꽤 좋아해.”
어떻게든 사태를 이해하려 노력하던 페기는 끝내 침묵에 잠겼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 얼굴에는 미약하게나마 싫증의 흔적이 묻어났다.
“천계율 스물두 번째에 그런 말이 있잖아. 말과 행동과 마음을 일치시켜라. 명색이 추기경씩이나 되어서 그렇게 함부로 계율을 어겨도 되는 거야?”
“그는 추기경이기 이전에 라발의 귀족인 사람이야. 허무맹랑한 천계율보단 라발의 법전이나 황제의 말이 더욱 가치 있을 테지.”
“너를 견제하는 게 황제의 뜻이라고?”
“레오가 라발의 황제를 파문시켰잖아.”
십수 년 전의 일이었다. 어느 날 파문당한 라발의 황제는 자신의 유일한 흠결을 같잖게 여겨 돌보지 않았다. 졸지에 두 거함 사이에 낀 조각배 신세가 된 라발 출신의 성직자들만이 환속하거나 라발의 작위를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섰다.
“클레멘스 추기경은 그때 라발의 재상과 단돌로 공작의 작위를 포기하고 성직자로 남았어. 하지만 말이 포기지, 그는 뼛속까지 황제의 심복이야. 공작위와 재상직을 물려받은 사람이 아마 그의 이복동생이라지.”
“그럼 추기경은 황제의 명대로 움직이는 거야?”
“정확히는 세력을 대변하는 거지.”
예후르가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정치는 세력의 싸움이야. 클레멘스 추기경은 라발의 대표로서 자국의 이익을 대변해야만 해. 교회와 라발의 반목은 오래되었으니, 그들이 레오가 하는 일마다 족족 어깃장을 놓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하지만 어제의 편지는 단순한 어깃장이라기엔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 있어. 이를테면 추기경은 왜 하필 사막의 이민족을 언급했을까. 레오의 속을 긁기엔 사고뭉치 안드레아가 더 적합할 것 같지 않니?”
페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같은 사도이며 함께 자란 동기 안드레아는 레오폴트가 앓는 두통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답은 반백 년 전의 성전(聖戰)이야. 그때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국가가 바로 라발이니까. 그들로선 원수 같은 사막의 이민족들이 교국의 경비를 맡는다는 게 탐탁지 않을 거야.”
“세상에나. 원래 교국을 지키던 경비대를 몰살시킨 게 누군데…. 30년 전 라발의 용병대가 우리 경비대를 몰살시켜서 레오가 어렵사리 이스파갈족과 계약한 거잖아.”
“그렇게 따지면 라발에도 교국을 침략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있어. 누구에게나 자기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어린애처럼 건반을 뚱땅거리던 예후르가 마지막으로 가운데 도를 지그시 눌렀다.
“요는 당분간 라발과 화해할 일은 없단 거야. 이스파갈족 문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해. 그보단 라발에 대한 레오의 적개심, 혹은 레오가 탐보프 황손이라는 게 더 큰 문제지. 가족의 정은 없다지만 탐보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
물끄러미 페기를 쳐다보던 예후르가 불현듯 입술만으로 웃었다.
“…말하면 혼날 것 같은데.”
“얼마나 못된 생각을 품고 있는 거야.”
페기가 밉지 않게 그를 흘겼다. 목으로 웃던 예후르가 부드럽게 페기의 어깨를 감싸곤, 곱슬거리는 머리칼 사이로 코를 파묻었다.
“성인이 되면 추기경으로 임명되는 거 알지?”
“…응.”
“그다음에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니?”
페기는 하얀 건반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악상은 아직도 잡히질 않았다. 사실 요 며칠 계속 그러했다.
“잘 모르겠어.”
“…….”
“넌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
추기경은 교황 다음가는 품계다. 교회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원탁회의에 참여할 수 있고, 교황이 부재할 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모름지기 모든 성직자들이 꿈꾸는 자리였다.
하지만 성인이 됨과 동시에 추기경으로 임명받는 사도에 한해선 조금 다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주어지는 자리였다. 일찌감치 레오폴트의 후계자로 점쳐졌던 예후르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받아들였지만, 안드레아는 그러지 않았다. 페기에게도 딱 그만큼의 길이 열려 있었다.
“내 생각이 중요하니?”
“듣고 싶어.”
실은 깊게 생각한 적 없다. 성인이 되든 말든 여기, 이 피아노 앞이 제 자리라고 여겼기에. 앙겔리카 성궁의 가장 깊숙한 곳, 추기경들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이 심처야말로 평생 벗어나지 않을 나의 둥지라고.
“옳지, 페기. 네가 예후르 옆에 있다가 알려 주면 되겠구나.”
하지만 어제 레오폴트의 말에 문득 깨달았다. 훗날 예후르가 레오폴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되거든, 그의 곁을 과연 누가 지켜야 하는지. 방랑을 즐거움으로 아는 안드레아가 그때라고 돌아올까. 지금도 겉도는 차라가 그때는 살가워질까. 헛된 기대다. 결국엔 저밖에 없었다.
“네가 옆에서 날 도와주면 편하기야 하겠지.”
예후르가 변함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페기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예후르가 너무나도 소중했다. 어린 나이에 교황의 자리에 올라 홀로 외세와 싸워야 했던 레오폴트의 과거를 아는데, 예후르를 똑같은 구렁텅이로 빠트릴 수는 없었다. 밀실에 틀어박혀 혼자서만 안락한 평화를 즐길 순 없었다.
“하지만 고작 몸이 편한 것뿐이야. 그걸 위해 네 마음을 꺾을 필요는 없어.”
귓가로 그의 따스한 손길이 와 닿았다.
“종교도 결국엔 정치판이야. 추기경으로 오래 살아남으려면 성직자이기 이전에 정치가여야만 해. 아까 말한 스물두 번째 천계율을 기억하지? 말과 행동과 마음을 일치시켜라. 우리는 그렇게 가르치지만, 정작 추기경은 그렇게 살 수 없어. 클레멘스 추기경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듯, 나 역시 그러하니까.”
“…….”
“그렇지만 페기,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니야. 내가 이 길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안드레아는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 것처럼, 너는 네가 원하는 방식을 택하면 돼. 그건 오직 너만이 찾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