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328)

“도대체가 내 맘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군. 예후르, 네 교황이 되거든 그 건에 대하여 찬성 기록부터 명해라. 아니야, 네 요즘 하는 꼴을 보니 도대체가 믿을 수 있어야지…. 옳지, 페기. 네가 예후르 옆에 있다가 알려 주면 되겠구나. 그럼 백 년쯤 뒤의 교황은 좀 더 속 편하게 지낼 수 있겠지!”

레오폴트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페기는 말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백 년 뒤만큼이나 예후르가 교황이 될 날도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 갈 무렵, 고드릭이 돌아왔다. 빈손으로 나가더니 돌아올 때는 편지를 들고 있었다.

“저, 성하….”

고드릭이 드물게 난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레오폴트가 의아한 기색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일찌감치 상황을 눈치챈 예후르와 페기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클레멘스 추기경께서 대신 서신을 전해 달라며 이것을 주셨는데….”

고드릭의 손에 들린 편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레오폴트가 읽던 책을 덮었다.

“미천한 저의 사견입니다만, 아무래도 읽지 않으시는 편이….”

“이리 다오.”

“성하. 몸을 생각하셔야지요.”

“내 몸은 열 살부터 내리막이었다. 이제 와 생각한다고 썩은 몸에 새살이 돋기라도 하겠느냐?”

할 말을 찾지 못한 고드릭이 머뭇머뭇 편지를 내밀었다. 레오폴트는 오랫동안 편지를 읽었다. 폭풍 전야 같은 정적이었다.

“추기경은 지금 어디 있지?”

편지를 내려놓은 레오폴트가 차분하게 물었다.

“거처로 돌아가신다고 했으니… 아직 성궁 내에 계실 겁니다.”

“잘되었군. 가서 잡아 와.”

“예?”

“잡아 오라고.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되묻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페기는 불안한 마음에 그만 포크를 놓쳤다. 쨍그랑! 울리는 파열음에 이어 고성이 오갔다.

“내 오늘이야말로 그 여우를 파문시키고 말 것이야!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런 망발을 일삼아!”

“서, 성하! 진정하십시오!”

“이거 놔라, 고드릭! 밖에 아무도 없느냐! 누구든 들어와 명을 받들라!”

고드릭을 밀어내던 레오폴트가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풀썩 주저앉았다. 그의 손을 동여맨 두꺼운 천 위로 붉은 핏물이 점점 번지고 있었다.

“이런….”

페기가 황망히 식당을 뛰쳐나갔다. 공황에 빠진 고드릭을 대신해, 예후르가 익숙하게 레오폴트를 안아 진정시켰다.

“레오, 조금만 참아 봐요.”

“아니야, 못 참아, 못 참겠다. 아파. 너무 아파. 고드릭, 거기 있느냐? 차라리 내 손을 잘라 다오. 어차피 곧 썩어 문드러질 것, 그냥 지금 잘라 없애자꾸나.”

“죽여 주십시오! 비천한 소인이 감히 성체에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이 죄를 어찌 갚을 수 있단 말입니까!”

“…고드릭. 당신까지 그러면 어쩌자는 거예요.”

한심하단 눈으로 고드릭을 쳐다보던 예후르가 문득 들리는 쇳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식탁에 앉은 차라가 기계적으로 샐러드를 입에 집어넣고 있었다. 포크를 든 손이 어찌나 파들거리는지, 샐러드를 집을 때마다 연신 접시 긁는 소리가 났다.

머잖아 페기가 온몸으로 문을 밀며 들어왔다.

“곧 의사가 올 거야!”

“들었죠, 레오? 의사가 곧 온대요. 약 먹고 좀 쉬면 다시 괜찮아질 거예요. 당신도 그렇게 믿어야죠. 나한테 그랬잖아요. 성좌(聖座)가 안정될 때까진 결코 내려오지 않겠노라고.”

“…오, 예후르.”

예후르의 품에 몸을 기댄 채 레오폴트는 혼곤히 눈을 깜박였다. 완전히 탈력한 듯 손끝 발끝엔 미동조차 없다. 그의 발아래 낮게 엎드린 고드릭은 숫제 목 놓아 흐느낄 기세였다.

그때, 벌떡 일어난 차라가 저벅저벅 뒷문으로 나가 버렸다. 레오폴트에게 다가가던 페기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크게 열렸다 닫혀 흔들거리는 문 사이로 차라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망설이던 페기가 그를 쫓아 복도로 나갔다.

“차라!”

목 높여 절 부르는 소리에 차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페기는 가쁜 숨을 삼키며 저보다 눈높이가 조금 낮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늘 그렇듯 차라는 뚱한 표정이었다.

“왜?”

그런데 정작 되묻는 소리에 대답할 말이 없다. 페기는 백지장 같은 머릿속을 더듬었다. 하지만 벙긋거리는 입술 사이론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차라가 한숨을 폭 내쉬며 몸을 돌렸다.

“빨리 돌아가 봐. 레오폴트가 곧 찾겠다.”

멀어지는 차라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페기는 그 뒷모습을 망연자실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

어느 날 불이 있었다.

불에서 일어난 아지랑이가 어둠을 몰아내니, 그것이 바로 빛이었다. 빛은 사방으로 퍼져 곳곳에 고였다. 빛이 고인 곳에서 새로운 빛이 날개를 펼쳤는데, 훗날에 이름 붙여지길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였다.

빛 한가운데 천사가 우뚝 섰다. 그의 눈은 세상의 끝을 내다보았지만 정작 자신의 발치는 보지 못했다. 천사의 유일한 사각지대를 멀리 달아났던 어둠이 탐냈다. 천사가 그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 어둠은 이미 천사의 발뒤꿈치를 잡고 늘어져 기나긴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분노한 천사가 발목을 자르려 칼을 높이 쳐들었다. 그런데 그때, 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천사가 날개를 펼쳤다. 새로운 천사는 미할리나와 똑 닮았지만, 발뒤꿈치에 어둠을 매달고 있었다. 그림자는 계속해 또 다른 천사를 잉태했다.

그렇게 천사의 그림자 속에서 다른 천사가 태어나길 여러 번 반복하니, 총 여덟의 천사가 있었다. 여덟 천사는 생명의 불을 지키겠노라 맹세했다. 그들의 가호 속에 불은 비로소 완전했다.

어느 날 불씨가 떨어졌다.

겹겹이 쌓인 어둠을 거쳐 마침내 불씨가 나뒹군 곳은 땅이었다. 하늘의 천사들은 외따로 떨어진 불씨를 안타깝게 여겼다. 하늘에서 그러했듯 불은 시작을 잉태하리니, 지상에도 불을 수호하는 자들이 있어야 마땅했다.

하여 어느 밤, 새로 분한 천사들이 성흔을 남기고 간 자들은 천사들과 같은 사명을 지니게 되었다. 그들은 천사의 권능을 이어받아 신비로운 이적을 다루었으므로, 지상의 사람들은 그들을 신처럼 받들었다. 천사의 현신, 혹은 불의 사도라 불리는 그들은 곧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다.

수천 년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사도를 모시는 궁전이 들어서고, 사도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가 세워졌다. 사도들 중 하나가 교황의 자리에 올라 교국을 다스렸다. 사람들은 사도와 교회와 교국의 영광이 무궁하리라 믿었다. 무상하게 스러지는 세속 국가와는 다르다고, 굳건히 믿었으나….

지난 수백 년, 제국의 황제들과 교황 간의 암투가 치열했다. 때로는 교황이 황제를 파문하고, 때로는 황제가 교황을 교체하기도 했다. 교국의 중심인 성도 오스피나는 현 정세의 축소판이자, 온 대륙을 통틀어 가장 치열한 정치판으로 변질됐다.

암투의 절정은 한 갓난아기에게서 움텄다.

아기는 북방 제국 탐보프의 황자였다. 황후의 몸에서 난 적통이며 신체에 아무런 흠결이 없어 후일 제위를 두고 다툴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태어난 지 백일 만에 성흔이 찍힌 사도이기도 했다.

교회법에 따라 황자는 속세와의 연을 끊고 교국으로 보내졌다. 모든 사도는 성가(聖家)로 입적되어 사도의 계보에 오르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 아기가 바로 미로의 레오폴트였다.

당시의 교황 제네로사 5세는 레오폴트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남방 제국 라발을 견제하기 위해 탐보프를 비롯한 각지의 나라들과 연맹을 맺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연맹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탐보프에서 고귀한 황자가 사도로 태어났으니, 그만한 경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상황은 그녀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갓 열 살을 넘긴 레오폴트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살이 썩어 들어가는 피부병이었다. 곧 죽을 병은 아니었지만, 보기에 대단히 흉측하여 그가 저주받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이를 놓칠 라발이 아니었다.

라발의 군화가 평화롭던 교국의 땅을 짓밟았다. 수천 년의 역사를 쌓아 온 성도 오스피나가 화염에 먹혔다. 성스러운 불씨가 온존된 앙겔리카 성궁의 성벽이 무너지고, 교황 제네로사가 무자비한 칼날 아래 무릎 꿇었다.

끔찍하고 끔찍한 밤이었다.

하늘 아래 가장 신성한 도시가 절도와 강간과 학살의 장으로 곤두박질쳤다. 시체로 산을 이룬 성궁에선 홀로 살아남은 어린 레오폴트만이 오래도록 울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교국이 그토록 비참하던 때가 없었다.

성도를 집어삼켰던 화염이 가라앉고, 참혹한 칼날이 거두어지기까지 일 년이 걸렸다. 레오폴트는 제네로사의 뒤를 이어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고작 세속 군주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다.

완전한 고립 속에 레오폴트는 간절히도 가족을 바랐다. 사도의 가족은 사도뿐이었다. 사도를 이해할 수 있는 자 역시 사도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때, 이미 사도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었다. 동시에 셋 이상의 사도가 존재하던 것은 어느덧 백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져 그는 제법 많은 아이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첫째는 머나먼 사막에서 만난 아이였다. 둘째는 구린내 나는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이였다. 셋째는 환락의 도시에서 찾은 아이였다. 넷째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그리하여 지금 성도 오스피나에는 레오폴트를 제외하고도 네 명의 사도가 더 있었다.

수사의 예후르.

이멘바흐의 안드레아.

카니나의 페기.

아뎃사의 차라.

각자의 고향을 이름 앞에 매단 그들은 오스피나 부흥기의 상징처럼 자리매김했다. 한바탕 추락했던 교회가 분연히 일어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국제 정세는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교황 레오폴트는 해묵은 복수심과 냉철한 판단력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반복했다. 지독하게 병든 그의 몸은 30년 넘은 치세에 헐떡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묻기 시작했다. 당신의 뒤를 이을 자는 누구입니까?

레오폴트가 답했다. 나의 첫째 아이가 나의 뒤를 이을 것이다.

피부 검은 이민족이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다는 사실에 수많은 고성이 오갔다. 그러나 반대하는 자들도 마땅히 내세울 명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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