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328)

“왜 벌써 왔냐길래. 나 보기 싫은 줄 알고 섭섭해질 뻔했잖아.”

“내가 그럴 리 없다는 거 알면서….”

“알았어, 앞으론 그런 말 안 할게.”

“정말?”

페기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예후르는 대답 대신 바람결에 흩날리는 그녀의 잔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교구 순회가 끝나려면 한 달은 더 남았잖아. 아나클레토 추기경이 네가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텐데.”

“곧 네 생일이잖아.”

“한 달도 더 남았는걸.”

“한 달밖에 안 남은 거지.”

망설이던 페기가 흘끗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내 생일까지는 여기 머무는 거야?”

“물론이지.”

예후르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페기는 무던한 척하려 노력했지만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가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예후르는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틀어쥐곤 연주실로 들어갔다.

“나 없는 동안 별일 없었지?”

“늘 똑같지, 뭐.”

“레오폴트는? 차도가 좀 있었니?”

“음… 더 나빠지진 않았어.”

“그나마 다행이네. 안드레아는 여전히 집 나간 탕아일 테고.”

묘하게 무미건조한 투였다. 페기는 슬쩍 눈을 들어 예후르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긴 여정을 끝낸 탓인지, 그는 평소보다 날카로워 보였다. 아니, 조금 마른 건가?

페기는 잡힌 손을 가만히 흔들었다.

“예후르. 왜 차라는 안 물어봐?”

“…맞다, 그 애도 있었지.”

작게 중얼거린 예후르가 피곤한 기색으로 눈두덩을 문질렀다. 페기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눈앞을 가로막는 흰 커튼을 들어 올리자, 연주실 구석에 세워져 있던 긴 거울에 눈길이 갔다.

거울 속엔 나른하게 선 예후르의 전신이 온전하게 담겨 있었다. 잉크를 덧칠한 듯 새카만 머리와 사막 민족 특유의 그을린 피부. 피로감에 반쯤 감긴 두 눈은 선명한 금빛으로, 한 올 한 올 섬세한 속눈썹에 감싸여 있다.

듣자 하니 어떤 방랑 시인들은 그를 태양신의 아들이라 부른다고 했다.

신성한 사도를 감히 이교의 신에 빗댄다 하여 교단에선 엄히 다스렸지만, 기실 눈 달린 사람이라면 그 말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었으므로.

햇살 아래 빛나는 이마에는 젊음이, 태양 같은 두 눈에는 거룩함이, 서늘한 입매에는 위엄이. 이 세상 그보다 성스러운 권능에 걸맞은 사람도 없을 터.

그에 비하면 저는 초라한 여자애일 뿐이다.

페기는 거울 속 하얀 여자를 응시했다. 곱슬거리는 단발은 색 옅은 은색이요, 안색은 햇빛 한 점 보지 못한 것처럼 창백하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이 팔랑거리는 얇은 잔머리들을 우울하게 매만졌다. 꼭 허연 밀가루 반죽에 보라색 물감으로 눈만 칠해 놓은 것 같았다.

딱!

문득 손가락 튕기는 소리에 페기가 정신을 차렸다. 목전에서 예후르가 상냥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해.”

멍하니 그를 보던 페기가 고개를 흔들었다. 예후르는 여전히 미소 띤 낯으로 복도를 고갯짓했다.

“이만 점심 먹으러 가자. 늦으면 레오한테 혼날 거야.”

스물댓 명은 족히 앉을 법한 대형 식탁에 왜소한 소년 하나가 겨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페기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차라.”

포크로 빈 접시를 긁으며 무료하게 앉아 있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페기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 문가를 가리켰다.

“예후르가 왔어.”

“…….”

차라는 곁눈으로 예후르를 확인하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고작 반년 전 입적되어 새로 가족이 된 관계임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쌀쌀맞은 태도였다. 하지만 페기가 재차 말을 붙여 볼 겨를도 없이 식당 앞문이 열렸다.

갑옷 입은 기사가 들어와 창으로 쿵! 바닥을 내리쳤다.

“교황 성하 납시오!”

페기와 차라가 기립했다. 뒷문으로 들어오던 예후르는 느긋하게 식탁을 둘러 그들의 맞은편에 섰다. 잠깐의 정적. 먼 곳에서 구두 뒤축을 질질 끄는 듯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곧 기묘한 차림새의 남자가 나타났다.

제식용 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였다. 그뿐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 천으로 감싸 한 점 살결도 내비치지 않았다. 유일하게 드러난 그의 신체는 뻥 뚫린 가면 속 그림자에 덮인 연옥색 눈동자뿐이었다.

휘청휘청 식탁에 근접하자, 그를 뒤따르던 고드릭 수도사가 달려 나와 상석의 의자를 꺼냈다. 고드릭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앉은 남자, 레오폴트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러운 머리를 가다듬듯 얼마간 이마를 받치고 있더니, 짧게 명령했다.

“음식을 들여라.”

시체가 속삭이듯 쉰 목소리였다. 고드릭이 크고 명료한 음성으로 그의 말을 반복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접시를 든 시종들이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새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그러나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는 내내 포크로 빈 접시를 긁고 있던 차라조차 양손을 얌전히 무릎 위에 내려놓고 식탁보만 만지작거렸다.

고드릭이 여전히 끔찍한 두통에 시달리는 레오폴트에게로 고개를 내렸다.

“성하.”

가면 속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걷혔다.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셋을 멍하니 주시하던 레오폴트가 퍼뜩 놀라 손짓했다.

“어서들 들어라. 나는 괘념치 말고.”

차라가 즉각 스푼을 들었다. 예후르는 손을 뻗어 빵부터 집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레오폴트를 살펴보던 페기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레오. 괜찮아요?”

“…아, 그래. 괜찮단다. 페기, 너도 식사해야지.”

애써 멀쩡한 목소리를 꾸며 내는 투가 역력했다. 심려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페기가 재차 웃는 낯으로 예후르를 눈짓했다.

“예후르가 왔으니 저녁에 작은 연회를 열까요? 레오가 전에 그랬잖아요. 타지에서 고생하고 있을 내 큰아들이 돌아오기 전까진 성궁의 모든 연회를 금하겠다고.”

“멋대로 돌아와 인사도 않는 불경한 아들을 내 둔 적이 없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인사를 안 했다니….”

멀뚱히 예후르를 돌아본 페기가 설마설마하는 심정에 입술을 벌렸다.

“돌아왔다는 인사도 안 한 거야?”

“하려고 했어. 레오가 공사다망했던 거지.”

“헛소리! 난 오전 내내 침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북부 교구 순회를 멋대로 중단하고 돌아온 네가 나 앓는단 소리에 얼씨구나, 하며 페기한테 달려간 게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레오폴트가 아예 예후르에게서 돌아앉았다. 지그시 맞은편을 응시하는 페기의 눈빛이 엄했다. 그럼에도 예후르는 우아하게 고기를 자르며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내 나름대로 레오를 배려한 거야.”

“배려라니, 허!”

“레오, 그렇게 성내지만 말고 좀 들어 봐요. 그러잖아도 두통으로 못 일어나고 있던 판국에 갑자기 내가 나타나면, 당신 그 불같은 성미에 몸이 배기겠어요?”

“그걸 잘 아는 놈이 멋대로 순회를 중단하고 돌아와?”

“곧 페기의 생일이잖아요.”

…한 달 하고도 열흘이 더 남았지만. 페기가 소심하게 덧붙인 말에 레오폴트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대신 앓는 소리를 흘리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하필 순회를 빠트린 곳이 발렌트다. 하필 안 간 곳이 발렌트야. 예후르, 네 부디 발렌트의 추기경이 누군지 잊었다 하진 마라. 넌 거기 누가 있는지 알았어. 그래서 가지 않은 거고, 그래서 나한테 골치 아픈 짐을 떠넘긴 것이야.”

“설마 아나클레토 추기경이 우릴 죽이려 들겠어요.”

“봐! 누군지 알았잖아!”

“모른다고 한 적이 없는걸요.”

“알면서 이런 짓을 벌여?”

“곧 페기의 생일이잖아요.”

건너편에서 페기가 시퍼레진 얼굴로 고개를 마구 저었다. 예후르는 변함없이 우아한 손길로 칼질하며 온화하게 시선을 내렸다.

“작년 생일에는 내가 없었죠. 재작년 생일에는 자정을 넘기고서야 도착했고. 올해는 가능한 한 같이 있어 주고 싶었어요. 알잖아요, 올 생일로 페기도 성인이 된다는 거.”

예상치 못한 말에 페기는 치맛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지금껏 별 감흥이 없었는데, 한 달 하고도 열흘 뒤면 성인이 된다는 사실에 갑자기 가슴속 한구석이 못 견디게 소란해졌다.

레오폴트가 낮은 침음 끝에 명했다.

“좋다. 대신 아나클레토 추기경은 네가 처리해.”

“…….”

“대답.”

“네.”

“그리고 너 좋자고 하는 일에 앞으로 페기는 들먹이지 마라. 고얀 녀석. 어릴 적엔 안 그러더니, 버릇이 잘못 들어도 한참 잘못 들었어.”

한껏 불평을 늘어놓던 레오폴트가 고드릭을 시켜 페기와 차라에게만 양고기를 덜어 주었다. 그들을 지켜보는 레오폴트는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듯 만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때, 시종이 소리 죽여 식당으로 들어왔다. 차마 말은 못 꺼내고 안절부절 발만 동동 굴렀다. 벙어리장갑처럼 손을 둥글게 싸맨 레오폴트를 대신해 책장을 넘겨 주던 고드릭이 눈치껏 시종에게 다가갔다. 곧 돌아온 그의 표정은 과히 좋지 않았다.

“성하. 클레멘스 추기경이 알현을 청하셨답니다.”

“맙소사. 날 가만두질 않는군.”

레오폴트의 신경질적인 몸짓에 읽던 책이 떨어졌다. 책을 주워 든 고드릭이 조용히 물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라 전할까요?”

“내일도, 모레도, 아예 영원히 돌아가시라 전해!”

“네. 다음번 원탁회의에서 뵙길 고대한다 전하겠습니다.”

고드릭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레오폴트가 심드렁한 콧소리를 내며 다시 책에 눈을 박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고드릭을 대신해, 예후르가 식사하는 중간중간 책장을 넘겨 주었다.

“지난 원탁회의가 끝난 지가 언젠데 클레멘스 추기경은 왜 아직도 교구로 돌아가지 않은 거죠?”

“그 여우의 꿍꿍이를 내 어찌 알겠느냐. 이참에 직무 태만으로 해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칙령을 내릴 생각이라면 관두는 게 좋아요. 전에 고드릭이 날밤 새워 교회 법전을 뒤져 봤잖아요. 교황이 반년 이상 교구를 비운 추기경을 해임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역대 27명의 교황이 찬성, 31명의 교황이 반대. 참고로 마지막 찬성표가 당신이에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