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무덤에서 시작된 이야기
카니나의 페기가 죽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신성을 모독한 죄, 결코 가볍지 않으므로.
그러나 신심으로 그녀를 따르던 이들에겐 놀라 까무러칠 일이었다. 카니나의 페기, 소명의 천사 예리엘의 현신으로 태어나 길 잃은 어린양들을 인도하시던 그분께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세간의 혼란이야 어떻든, 카니나의 페기는 이미 죽었고 동강 난 그녀의 시신은 추레한 공동묘지에 묻혔다. 거리에서 동사한 거지들이나 묻히는 곳이었다.
좌우 묘비에 이름이 적히지 않았듯 그녀의 묘비 역시 썰렁하였는데, 멋모르는 자들이 거지의 무덤이라며 신랄한 비웃음을 던지곤 했다.
그러나 달 없는 밤이면 몰래 그녀의 무덤을 찾는 이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무덤을 찾아온 이는 한여름 불볕조차 감히 얼굴을 비출 수 없는 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천으로 동여맨 그는 무덤 앞에 엎드려 한참이나 울곤 했다.
“너 혼자만 차가운 땅에 눕게 하여 미안하구나. 내 곧 너의 뒤를 따를 터이니, 다시 만나 너에게 용서를 구하겠다.”
그의 얼굴을 가린 은 가면 속에선 설운 눈물이 끓어 넘쳤다. 이마를 땅에 찧으며 비감을 삼키던 그를 노기사가 받아 침중하게 묘지를 떠났다.
두 번째로 무덤을 찾은 이는 불타듯 새빨간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린 여자였다. 그녀는 마치 원수를 보는 것처럼 살벌한 눈으로 묘비를 노려보았다.
“…멍청한 년.”
짓씹듯 중얼거린 말이 행여 땅속으로 스밀까, 여자는 제풀에 놀라 달아났다. 급히 멀어지는 발소리 뒤로 묘지는 변함없이 고요했다.
다음으로 찾아온 이는 잿빛 머리가 헝클어진 소년이었다.
“네가 없으니까 앙겔리카 성궁이 너무 고요해. 참 이상한 일이지. 너는 성궁에서 가장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는데.”
한기 올라오는 땅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소년은 부서질 듯 낡은 묘비를 만지작거렸다.
“…보고 싶다.”
오랫동안 무덤가를 서성이던 소년은 동트기 직전에야 발길을 돌렸다. 묘지로 드리워지는 서광이 주인 모를 발자국만 조용히 비추었다.
그러곤 어느샌가 무덤을 찾는 발걸음이 뜸해졌다. 산 자에겐 각자 할 일이 많을 것이니, 할 일 없는 죽은 자들에게만 무료한 시간이었다. 모든 이름 있는 자들이 그러하듯, 카니나의 페기 역시 이름 없이 죽은 거지들과 함께 흙으로 돌아갈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이 점점 잊혀 가던 때에 한 남자가 무덤가에 나타났다. 까만 머리, 까만 낯. 맹수의 털가죽을 어깨에 두른 남자는 마치 영원한 밤을 몰고 온 사신 같았다. 다만 유일하게 검지 않은, 오만한 군왕의 눈만이 형형한 빛을 발할 뿐이었다.
과연 그는 죽은 자에게 무어라 속삭일까. 이어질 목소리를 고대하듯 메마른 낙엽조차 몸을 사렸다. 그러나 남자는 입을 여는 대신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맹세하듯 썩은 내 나는 땅에 기꺼이 입술을 맞대었다.
이후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누군가는 잊을 만하면 찾아오고, 누군가는 완전히 잊은 듯 다신 찾아오지 않았다. 다시 찾지 않는다 하여 나무랄 이도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므로.
여러 번의 계절을 거쳐 다시 찾아온 것은 겨울이었다.
새벽이면 묘비에 서리가 내리고, 저녁이면 땅이 차게 굳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어느 날 내리기 시작한 것은 때아닌 빗줄기였다. 부슬부슬 흩날리던 안개비는 날이 어두워질 즈음 세찬 장대비가 되어 무덤가의 흙을 쓸어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깊은 땅속에 파묻혀 있던 것이 슬쩍 모습을 드러낸다 하더라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리라. 기껏해야 오래전 밑동이 잘린 나무뿌리나, 이름 없는 거지들이 눕혀진 관밖에 더 되겠는가. 비로 파헤쳐진 흔적은 또 언젠가 내릴 비로 덮일 것이었다.
하지만 억센 빗줄기가 할퀴고 지나간 곳에 드러난 것은 나무뿌리도, 썩어 들어가는 관의 모서리도 아니었다. 정체 모를 것은 희고 고왔다.
그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나가 꿈틀거리고, 둘이 꿈틀거리고, 셋이 꿈틀거리고, 넷이, 다섯이. 미친 듯이 꿈틀거리던 다섯 손가락이 마침내 흙바닥을 콱 쥐었다.
성한 곳 하나 없는 손끝이 자갈흙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 반쯤 들린 손톱은 나가떨어지고, 진작부터 손톱이 없던 여린 속살엔 핏방울이 맺혔다. 비명을 내지르듯 빳빳하게 펴진 손이 허공에서 마구 허우적거렸다. 잡아 주는 이 하나 없는 손은 끝내 묘비에 가 닿았다.
필사적으로 내뻗은 손이 처량하게 묘비의 표면을 훑는다. 악을 쓰듯 휘두른 손끝이 드르륵, 묘비를 세게 긁으며 마지막 남은 손톱이 날아갔다. 그럼에도 피투성이 손은 악착같이 묘비의 모서리를 찾아 쥐었다.
그렇게 하나뿐인 구명줄처럼 묘비를 부여잡곤 힘들게, 힘겹게 기어올라 왔다. 숨이 모자란 잠수부가 수면 위로 솟구치듯 머리가 먼저 튀어 오르니, 몸뚱이는 그다음이었다.
무덤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흙 속에 파묻혔던 이가 분명한데, 움직이는 꼴이 꼭 산 사람이었다. 산 채로 묻혔던 것인가. 아니면 죽은 자가 되살아난 것인가.
가까스로 기어올라 온 여자는 초점 없는 눈으로 암암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달 뜨지 않은 밤. 축 늘어진 몸뚱이엔 무수한 빗방울들이 부딪혔다. 허망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흐르는 것은 과연 웃음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그마저 요란한 빗소리에 묻혀 사라질 뿐이지만.
카니나의 페기는 죽었다.
이것은 그녀의 무덤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1부. 몰락하는 천사
‘음악은 천사들의 언어다.’
페기에게 이 말을 들려준 건 사피르(saphir)란 우스운 이름의 남자였다. 사피르는 그쪽 나라말로 사파이어를 뜻하는데, 정작 그는 타오를 듯 붉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처음 그를 소개 받고 물끄러미 올려다보고만 있었을 때, 그는 낯을 붉히며 이렇게 우물거렸다.
“압니다. 저한테는 루비가 딱이겠죠.”
안타까운 유머 감각을 갖고 있던 그에겐 다행히도, 사피르는 그럭저럭 괜찮은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가르치는 재능은 한결 나았다. 덕분에 그는 귀족들을 가르치며 승승장구하다가, 끝내 레오폴트의 눈에 띄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당시 페기는 모든 학문을 양아버지나 다름없는 교황 레오폴트와 호적상 오라비인 예후르에게서 배우고 있었다. 그들은 어린 페기를 무릎에 앉히고 손수 글자와 숫자, 더 나아가 고차원적인 신학과 수사학까지 가르쳤는데 안타깝게도 음악은 가르칠 수 없었다. 예후르는 음악을 즐길 줄만 알고, 레오폴트는 더 이상 악기를 연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고민 끝에 초빙한 사피르는 꽤나 훌륭한 선생이었다. 그는 3년 전 제자가 자신의 경지를 넘어섰다며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페기는 요즘도 가끔씩 그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가 열성적으로 토로하던 말을.
과연 그의 말대로 음악은 천사들의 언어일까? 음악적 광신도였던 사피르는 출처도 불분명한 어구에 신앙처럼 매달렸지만, 페기는 좀 더 단순하게 생각했다. 누군진 몰라도, 저 말을 한 사람은 십중팔구 저와 같은 ‘사도’가 분명하다고.
실제 그녀는 천사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적 있다.
그녀가 아직 카니나의 더러운 뒷골목을 헤매고 다닐 때였다.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장엄한 음악 소리를 듣고 지레 놀란 그녀는 무작정 쓰레기통에 들어가 벌벌 떨기만 했다.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것이야말로 천사들의 엄숙한 음성이었다. 그녀는 그날에 소명의 천사 예리엘의 현신으로 다시 태어났다.
“모두에겐 각자의 소명이 있단다. 너의 소명은 다른 이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지.”
언젠가 레오폴트는 어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해 준 적이 있다. 페기는 그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자신이 정한 소명대로 살고자 했다. 그녀가 정한 소명은 그날에 들었던 것처럼 아름다운 음악을 제 손으로 연주하는 것이었다.
오늘도 페기는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희고 고운 손이 피아노 건반 위에서 우아하게 노닐었다. 숲의 요정들이 속삭이듯 가느다란 고음과 이어지는 환희의 전개. 봄날에 어울리는 산뜻한 곡조가 살랑거리는 흰 커튼을 넘어 발코니로 번져 갔다. 쏟아지는 햇살 속에 찬란한 절정이 일어났다.
한바탕 몰아쳤던 곡조는 다시 온순하게 잦아들었다. 마지막 건반을 지그시 누르며 페기는 속에 뭉쳐 놓았던 숨을 토해 냈다. 잔음에 따라붙는 적막이 싫어 바로 다음 곡을 연주하려는데, 갑자기 느긋한 박수 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페기는 깜짝 놀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연주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애당초 그녀가 옆에 사람 두길 싫어한다는 걸 익히 잘 아는 하녀들이 허락 없이 누군갈 들였을 리 없다.
페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흰 커튼을 젖히며 발코니로 나가자, 맑은 햇살이 눈을 찔렀다. 페기는 손차양을 하고 난간 앞에 섰다. 2층까지 올라오는 칠엽수의 무성한 나뭇잎들이 쏟아질 듯 발코니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정원사에게 가지치기를 하라고 전해야…. 뻗은 손끝에 나뭇잎이 닿은 순간, 잎을 매단 가지가 슬그머니 옆으로 젖혀졌다. 동시에 난간 너머, 굵은 나뭇가지에 올라타 있던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페기가 놀라 손끝을 떨었다.
“예후르?”
황망한 혼잣말에 그가 영롱한 호박색 눈을 가늘게 접어 웃었다.
“안녕, 페기.”
페기가 당혹하여 머뭇거리는 사이, 예후르가 가볍게 난간으로 넘어왔다. 그러곤 익숙하게 그녀의 뺨을 감싼 뒤, 허리를 굽혀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잘 지냈니?”
코앞에서 반짝이는 금안을 멍하니 보고만 있던 페기가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앞머리를 매만지는 손길 사이로 붉게 물든 귓가가 얼핏 드러났다.
“왜, 왜 벌써 온 거야? 분명 다음 달은 되어야 돌아올 거라고….”
“내가 일찍 와서 싫어?”
“그런 게 아니라!”
황급히 고개를 들던 페기는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고 있는 예후르를 발견했다. 저도 모르게 더듬더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빴어. 맨날 그렇게 놀리기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