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Black hole approach
장례식에서 돌아온 뒤 내 생활은 몹시 단조롭게 흘러갔다. 비행이 없는 날은 열심히 운동하고 충분히 잠을 잤으며 담배와 커피를 완전히 멀리했다. 가능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으며 그 노력의 일환으로 스탠드 업 코미디 클립을 열성적으로 시청했다.
그리고 한재이의 전화를 기다렸다. 며칠간은 여전히 뒷수습에 정신없을 그의 모습을 그렸다. 아직 독일에 머물고 있을 친지들을 챙겨야 할 수도 있으니까.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땐 창백했던 어머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가 전화하지 못하는 상황을 납득하려 애썼다.
그리고 오늘, 장례식이 끝나고 2주가 지난 시점에서 더는 핑곗거리를 찾지 못하고 마지막 이유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를 생각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귀국 후 바로 몇 번의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전화 달라는 나의 메시지에도 돌아온 것은 다음과 같았다.
[미안. 지금은 상황이 좀 그래. 곧 연락할게.]
그 대답을 끝으로 우리의 대화는 완전히 단절되었고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부친상을 당해 어머니 옆에 머물고 있는 그에게 미친 사람처럼 계속 연락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기다려 주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버티는 중이었다.
* * *
“수고 많으셨습니다.”
“네. 들어가시죠.”
최근 들어 나의 비행은 단거리 일정의 연속이었다. 저녁 늦게 날아오른 오늘의 여정은 캄캄한 밤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 막을 내렸다. 회사도 계속되는 당일 왕복 일정에 미안함을 느꼈는지 오늘은 일본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레이오버가 주어졌다.
“기장님, 그럼 저 먼저 올라갑니다.”
공항 바로 옆에 붙은 호텔로 들어온 크루들은 제각기 방으로 흩어졌다. 부기장이 먼저 체크인을 마치고 다시 인사했다. 나는 일행 중 가장 마지막으로 여권을 내밀고 키를 받았다.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으로 올라와 이그제큐티브 룸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의식적으로 또 휴대폰을 확인했다.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들이 계속 쌓이고 있었지만 기다리던 사람의 것은 아니었기에 답장하기 귀찮았다.
남은 시간을 무얼 할지 고민 중이었다. 내일 다시 저녁 비행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기에 늦잠을 자도 괜찮은 여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문득 길을 잃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낯선 곳에서 오는 두려움을 느끼며 오로지 길을 찾는 행위에 집중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휴대폰이 있는 한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미아가 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었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겉옷을 걸쳤다. 지갑과 신분증만 들고 휴대폰은 그대로 두었다. 알 수 없는 공포심이 곧바로 밀려왔다. 신기한 일이다. 휴대폰을 두고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나 불안하다니. 문명의 이기에 나 역시 의존적인 인간으로 변했었나 보다.
호텔 로비로 나와 대기 중이던 택시에 올랐다. 운전기사는 짧은 인사와 함께 어디로 가는지를 물었다. 내게 목적지는 없었기에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음…… 신주쿠?”
“아! 신주쿠. 오케이.”
우리 사이에 대화가 통한 것을 기뻐한 그가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라디오도 틀지 않았고 내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택시는 정속으로만 운행하고 있었고 주변은 너무 조용해서 깜빡 잠이 들 뻔했다.
10월의 도쿄 공기는 싸늘했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퇴근을 마치고 바쁘게 걸어가는 현지인들에게 둘러싸여 정처 없이 걸었다. 휴대폰이 없었기에 도로 이정표를 보며 왔던 길을 외우는 중이었다. 시간은 분명 밤 9시가 넘었는데 전광판에서 쏟아지는 광고들 덕에 거리는 대낮처럼 밝았다.
길을 외우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다. 백 미터를 걸어가면 아까 보았던 편의점과 똑같은 편의점이 또 하나 나왔다. 이정표에 쓰인 거리 이름은 뒷자리 숫자만 바뀌고 있을 뿐 하나같이 비슷했다. 돌고 도는 느낌이 들어 큰길로만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다 구석진 통로에서 작은 술집들이 줄지어 있는 골목을 발견했다.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붉고 노란 간판들이 크고 작게 달려 있었다. 어떤 곳은 아예 상호가 없는 곳도 있었다. 과연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까 의문스러울 만큼 작은 문 사이를 손님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나가고 있었다. 북적거리는 가게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인기가 좋았다. 대부분은 생선 굽는 냄새를 풍겼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보였다.
테이블이 아예 없는 집도 있었다. 그런 곳은 카운터 한 줄이 좌석의 전부였다. 심지어는 의자가 없는 집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맥주 한 잔을 혼자 들이켜고 나가는 데까지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모든 광경을 구경하던 나는 그중 가장 크기가 큰 집을 골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고 있지 않은 듯해서 슬그머니 카운터 자리에 앉아 종업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나도 모르게 호출용 벨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는 혼자 웃었다. 여긴 한국이 아니잖아.
“주문하려고요?”
누군가 영어로 말을 걸었다. 옆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던 남자가 나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나 보다.
“큰 소리로 불러야지, 아니면 백 년이 지나도 주문 못 해요.”
그는 손을 번쩍 들어 큰소리로 종업원을 불렀다. 그제야 누군가 이쪽으로 와 주었다.
“맥주?”
“아, 네.”
그는 유창한 일본어로 나 대신 주문을 해 주었다. 자신이 추천한다는 구운 만두 한 접시와 함께.
“감사합니다. 여기 사시는 분이군요.”
“아니요, 나도 출장 왔어요. 어디서 왔어요?”
“한국계 독일인입니다. 미국분이신가 보군요.”
“음, 그렇다기보다는. 나는 미국계 한국인인데. 한국어 할 줄 알아요?”
그의 영어는 완벽한 네이티브였기에 당연히 미국 아니면 캐나다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가만 보니 눈동자 색만 다를 뿐 얼굴 형태는 아시아인에 가까웠다. 혼혈인 것 같았다.
“네. 지금은 한국에서 살아요. 막시밀, 아니, 우서진입니다.”
나는 한국어로 대답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악수를 받으며 웃었다.
“한국어 잘하시네. 반가워요. 정세연입니다.”
그는 서울에 있는 스타트 업 기업에 다니는 회사원이었다. 업무상 출장이 잦아 도쿄에도 자주 오는데 그때마다 이 골목에 들러 한잔씩 하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술집 분위기가 꼭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것 같아 자주 찾는다고.
나 역시 그에게 간단한 신상 정보를 알려 주었다. 혼자 온 손님들끼리 말을 트는 것이 흔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답게 그때부터 어색하지 않은 대화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파일럿이면 혹시 ‘플라이트에도 급이 있습니다’ 거기예요?”
그는 우리 회사가 한참 TV 광고로 쓰고 있는 홍보 문구를 따라 하며 물었다. 방금 성대모사를 한 거 같은데…… 비슷하지는 않았지만 참 열심히 한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네. 맞습니다.”
알고 봤더니 그는 오늘 내가 몰고 온 하네다행 비행기의 탑승객이었다. 말하자면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와 같은 시각 같은 곳에서 다시 마주치게 된 것이다. 우연치고는 너무 재밌다며 그는 요란을 떨었다.
원래도 말이 많은 타입인 듯 쉬지 않고 재잘대는데 딱히 싫지는 않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교성이 좋고 낯선 사람과도 금방 친해지는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게는 없는 부러운 성격이다.
“제가 오지랖이 좀 넓거든요. 가만 보니 혼자 온 거 같은데 여기 시스템을 잘 모르시는 거 같아서 말 걸었어요. 잘했죠?”
“네. 덕분에 심심하지도 않고 좋네요.”
“아, 또 내가 너무 혼자 떠들었구나. 민망하니까 건배.”
그는 스스로 내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친 뒤 남은 맥주를 원샷 했다. 곧바로 한 잔을 더 시킬 줄 알았는데 조금 쉬었다 마시겠다고 했다. 술 취해서 사고 치면 집에 있는 사람에게 혼쭐이 난다며 웃었다. 나는 그의 약지에서 빛나고 있는 링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도 술 마실 때 잔소리하던 사람이 있었다. 함께 마실 때는 내 주량을 멋대로 정해서 주문조차 하지 못하게 막아 버리던 사람이 있었다. 그런 참견까지 그리워지는 걸 보니 나도 조금씩 지치는 모양이었다.
“미국에선 오래 살았습니까? 한국 생활은 어떤가요?”
나는 왠지 그에게 동질감을 느껴 이방인으로서의 한국 생활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오래전에 서울에 정착했기에 지금은 미국보다 더 편하다고 했다. 오히려 보스턴에 있는 부모님 집에 갈 때마다 변해 가는 그곳 분위기에 이질감을 느낀다고.
“그래도 한 곳이라도 정착하셔서 다행이네요. 저는 아직 한국이 낯설거든요. 그렇다고 독일에서도 마냥 편했던 건 아닌데. 어느 곳도 진짜 고향 같은 기분이 들지는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음, 뭔지 알아요. 우리 같은 반반 인간들이 원래 좀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잖아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쯤 술에 취한 내 주정을 잘도 받아주었다.
“이게 사실 제일 곤란할 때가 축구 경기랑 올림픽 응원할 때거든요. 지금까지는 공평하게 미국 한 번, 한국 한 번 응원했었는데. 집에 있는 사람이 토종 한국인이다 보니까 이제는 한국 두 번, 미국 한 번 요렇게 응원해요. 게임 끝났죠, 뭐. 한국 완승이지.”
“어머니가 미국분이시라고 했죠. 들으시면 섭섭해하시겠네요.”
“전혀요. 거긴 인구도 많으니까 나 말고도 응원해 줄 사람이 많은데 뭘. 잔 비었네요. 딱 한 잔씩만 더 할까요?”
그의 말끔한 미소에 나도 모르게 수긍했다.
만두 한 접시를 다 비우고 맥주 석 잔을 마시는 동안 우리는 한국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 체험 수기 같은 것들을 읊으며 즐거워했다. 그의 재치 있는 농담은 나를 쉼 없이 웃게 만들었고 마치 내가 좋아하는 스탠드 업 코미디를 날것으로 보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 했다.
그렇게 2시간을 웃고 떠들었다. 서로에게 강한 호감을 느꼈지만 우리는 연락처를 교환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그는 결혼한 스트레이트가 분명해 보였고 서울로 돌아가서도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나는 그를 오늘의 기억에 가두어 두고 싶었다.
그도 같은 이유에서였을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우리는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남은 일 잘 마무리하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말 즐거웠습니다. 계산은 제가 이미 했습니다.”
“어! 언제 하셨지? 잘 먹었습니다, 그럼. 저도 반가웠어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그는 허리를 숙이며 예의 있게 인사를 하고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낯선 곳에서 만난 기적 같은 인연을 손안에서 놓아주는 그 느낌이 짜릿했다.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시간을 들여 찾아온 길이었지만 돌아가는 여정은 짧게 끝이 났다.
호텔로 돌아와 외투를 벗고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적당히 도는 취기에 기분이 좋아 눈을 감으려다 테이블에 손을 뻗어 관성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실망했다.
이렇게 억지로 휴대폰을 내게서 떼어 놓으면 기다렸던 연락이 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상황을 잊고 길을 헤매다 돌아오면 반가운 그의 메시지가 몇 시간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은 거셌다. 한재이는 정말 거짓말처럼 나를 향한 움직임을 완전히 멈춰 버렸다.
실망한 채로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려다 문득 나도 모르게 다시 휴대폰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 그와의 대화창을 열었다. 술기운에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앞뒤 설명도 없이 그에게 물었다.
[한국이랑 독일이 축구 경기를 하면 넌 어디를 응원했었지?]
정말 취했나 보다. 오늘 만난 그 남자가 한 말이 떠올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자 기대도 하지 않았던 답장이 곧바로 도착했다.
[기억 못 하나 보네.]
그는 나를 먼저 채근했다. 그 말이 맞았다.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메시지를 보니 그 이유가 납득이 갔다.
[나는 늘 네가 선택하는 쪽을 응원했었어.]
그가 조용히 내 가슴을 찢어 놓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날의 기분에 따라 자주 응원 팀을 바꿨었다. 한재이는 그런 나를 따라 팀을 바꿨었나 보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는 늘 모든 것을 나와 함께하고 싶어 했다.
고맙고, 미안하고. 또 그리운 마음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나는 한동안 멍하니 메시지만 보고 있었다.
[아직도 그래?]
한참이 지나 보낸 나의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 * *
하네다에서 돌아온 뒤 4일간의 긴 휴식을 취했다. 그사이 달력은 11월로 넘어가고 가을은 쌀쌀해진 바람 뒤로 종적을 감춰 버렸다.
첫 장거리 스케줄로 파리 비행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재이에게도 알렸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 없는 대화창을 보며 잠시 자기 연민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물리적으로는 그에게 한층 더 가까워졌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더 벌어져 버렸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엉뚱한 사람을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맥시?”
벨을 누르고 올라간 알랭의 아파트 안에서는 소란스러운 잡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라 일은 끝났겠지 싶었는데 뒤늦은 회의가 있었나 보다. 문을 반쯤 연 알랭의 뒤로 몇 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비추었다.
알랭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나를 보며 문 앞에서 눈동자를 굴렸다.
“미안. 손님이 있었나 보네.”
“어, 방금 회의 끝나고 저녁 먹으려던 중이었어. 네가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완전 놀라운데 이거?”
“그냥, 파리 비행 있어서 와인이나 할까 해서 들렀어. 역시 연락하고 올 걸 그랬지?”
나도 딱히 계획이 있어서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냥 친한 사람이 있는 도시에 온 것이 반가워 별생각 없이 찾아와 버렸을 뿐인데. 하긴, 평소의 나라면 절대 이러지 않았겠지. 그가 놀라는 것도 이해는 간다.
“너…… 무슨 일 있었어?”
알랭은 고개를 숙여 내 얼굴을 밑에서부터 지긋이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살피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손에 든 보르도산 메를로 한 병을 들어 보이며 멋쩍게 웃었다. 알랭은 혀를 쯧 차고서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열어 놓은 문을 내게 넘겼다. 그리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자, 오늘 여기까지만 해. 다들 돌아가 줘.”
나는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문을 부여잡은 채 알랭이 일행들을 쫓아내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왜? 저녁 먹자더니?”
“너희끼리 나가서 먹어. 일단 오늘은 여기서 끝내. 자자, 빨리 나가.”
“왜, 누구 왔어?”
서너 명의 무리가 알랭에게 등이 떠밀려 외투를 집어 들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그들은 입구에 와인을 든 채 서 있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씩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뭐야, 애인이야?”
“애인보다 더 귀한 사람이니까 상관 말고 빨리 나가.”
이럴 때는 차라리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편이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투덜대며 한 명씩 차례로 밖으로 나왔다.
“고마워.”
“땡큐.”
문을 잡아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도 짓궂은 시선과 미소가 몇 차례 오고 갔다. 그런 오해는 안 해 줬으면 했지만, 다짜고짜 찾아온 쪽은 나였으니 또 할 말이 없었다.
“맥시, 들어와.”
알랭은 일행이 모두 밖으로 나가자 가차 없이 문을 닫으며 내 팔을 안으로 잡아끌었다. 거실에서 프로젝트 회의라도 했는지 이동형 화이트보드에 붙은 형형색색의 메모들과 휘갈겨 쓴 마커 글씨들이 눈에 띄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야?”
“맞아, 이번에 정부 지원 사업 공모전에 응모하려고. 아예 고용할 처지는 아니라서 프리랜서 개념으로 계약했어. 원래 아는 놈들이라 편하기도 하고. 앉아. 저녁은 먹었어?”
그는 내 손에서 와인 병을 가져가 부엌으로 갔다. 나는 한재이가 쓰던 방 쪽을 쳐다보며 누군가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했다.
“아, 멜은 휴가 중이야. 덕분에 거실에 나와서 편하게 일하고 있지. 뭐 마실래?”
“그냥 물 줘.”
“스파클링 있는 거? 아님 없는 거?”
“있는 거로.”
그가 부엌에서 부산을 떠는 동안 나는 소파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알랭의 아파트는 분위기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맞은편 벽에 걸린 인물 사진들은 아마도 멜라니의 작품인 듯했다. 발밑에는 여름 방문 때 보지 못했던 겨울용 인조 양털 카펫이 깔려 있었다. 점심으로는 피자를 시켜 먹었는지 진열장 옆 구석에 빈 피자 박스들이 굴러다녔다.
알랭이 다가와 맞은편 1인용 소파에 앉으며 소다수를 건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너 얼굴 엄청 상했어. 누가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거야.”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뺨을 쓸어내렸다. 그런가.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 신기했다.
“좀, 안 좋은 일이 겹쳐서 일어났었어. 딱히 내 일만은 아니었지만.”
“재이 아버지 이야기는 들었어. 그것 때문에 그래? 너 독일에서 온 거야?”
“아니, 난 한국에 있어. 재이와는 잠시 떨어져 지내는 중이야.”
알랭은 물컵을 거머쥐고 덤덤하게 말하는 나를 가늘게 흘겨보았다.
“너희, 안 좋구나.”
나는 그저 옅게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로 온 이유를 알았다. 우리 둘을 잘 아는 사람과 편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었나 보다.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고해 성사한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희망이 있다는 말이 듣고 싶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쉽게 무너질 관계가 아니니 더 용기를 내라는 격려가 필요했다.
“얘기가 길어질 거 같은데 내가 저녁 살게. 나갈래?”
그러자 알랭은 시계를 힐끔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귀찮은데 태국 요리 시켜 먹자.”
“치우기 귀찮지 않아?”
“나가는 게 더 귀찮아.”
그는 휴대폰을 들고 근처에 있는 태국 음식점에 전화했다.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알아서 메뉴를 고르는 모습은 한재이와 닮아 있었다. 그가 주문하는 동안 나는 물잔을 비우고 벗어 놓은 외투를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
파리 비행에는 3일간의 레이오버가 주어졌다. 요즘은 오프를 받아 집에서 쉬는 것보다 비행을 하며 떠돌아다니는 것이 좋았다. 그 시간 중 반은 육체의 고단함에 지쳐 잠을 자는 데 소비했고 반은 혼자서 도시를 헤매는 데 썼다.
‘일상을 흘려보내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재미없는 챕터의 책을 넘기듯, 나는 한재이가 사라진 인생의 페이지를 제대로 읽지 않고 넘기고 있었다.
주문한 지 한 시간쯤 지나 음식이 도착했다. 거실 테이블 위에 새우를 넣어 볶은 밥과 누들 요리 그리고 닭과 코코넛 밀크를 넣어 만든 카레가 놓였다. 내가 가져온 와인으로 먼저 입가심을 했다. 밥 요리가 먹고 싶었지만, 파인애플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카레를 덜어 먹었다. 닭이 조금 딱딱했지만 맛은 꽤 괜찮았다.
음식을 먹으며 그간 있었던 일을 알랭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내 이야기를 반만 듣고 흘리는지 전혀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래서 그 부기장이란 사람이랑 잤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전혀 그런 사이 아니야. 뭘 들었어, 지금까지.”
내 채근에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어이없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아니, 그럼 잔 것도 아니고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 자식은 왜 그렇게 화내는 거야. 네가 짜증 날 만하다. 집착 아니야 그거? 병이다, 병.”
“그냥, 타이밍이 안 좋았어. 그걸 그 사람한테서 직접 들었으니 기분 나쁠 만도 하잖아.”
“아니, 그러니까. 뭘 한 게 있어야 기분이 나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야. 섹스도 안 했는데 무슨 질투를 한다는 건지 진짜. 너희 연애를 좀 숨 막히게 하는구나? 자, 이거 먹어.”
작은 볼 두 개에 밥을 나누어 담은 알랭이 그중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나 못 먹어. 열대 과일 알레르기 있어.”
“아 참, 그랬나? 잘못 시켰네.”
그가 대신 누들 요리를 내 쪽으로 밀어 주며 미안해했다. 이제 새우가 들어간 볶음밥은 알랭의 독차지가 되었다.
“아무튼 그래, 알겠어. 그게 첫 번째 다툼이었고. 또 하나는 뭔데?”
나는 두 번째 싸움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귀기 전 나와 기젤라가 만나 한재이의 감정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재단했었다는 점. 그리고 끝까지 그에게 고백하지 않았었던 당시의 내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에게 전달했다.
진지하게 듣고 있던 알랭은 또다시 중간쯤부터 내 말을 막고서 한재이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결혼한다 어쩐다 야단법석 떤 건 그 자식이 맞잖아. 누구한테 뒤집어씌우는 건데. 지젤도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그건 자기들 둘이 해결하면 끝나는 문제 아니야? 왜 너한테 찾아와서 고백하라 말라 그런 얘기를 해. 그냥 똑같은 것들끼리 결혼하게 두지 그랬어. 얼마 안 가 이혼할 게 뻔했는데.”
“알랭.”
“알았어, 알았어. 내가 원래 재이한테 가혹한 건 너도 알잖아. 아무튼 내가 봤을 때 두 개 다 지나간 일이고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인 거 같은데 그렇게 심하게 싸웠다니까 좀 이해가 안 간다.”
그는 내 빈 잔에 와인을 부어 주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이제는 진짜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우리가 자잘한 문제들로 끝도 없이 대척점에 서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 바로 죄책감에 대해서다.
이번만큼은 알랭도 내 말을 중간에 끊지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그의 반응에 나는 더 신중히 단어를 골라야 했다. 다 듣고 나서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의견을 말해 주었다.
“음…… 사실 나도 재이가 변호사 때려치우고 한국 들어간다고 했을 때는 좀 그랬거든. 뭐 대단하다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진짜 저래도 괜찮나 싶었어. 너처럼 같은 직종으로 이직한 건 아니잖아. 손해가 막심하긴 하지. 네가 느끼는 미안함도 이해가 가.”
그는 턱을 만지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이 문제는 너희 둘이 너무 다른 성격이라서 그런 것 같아. 삶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다르잖아. 맥시 네가 원래 좀 어른스럽고 진지했지. 나랑 재이는 망나니처럼 살았고. 그래도 본인이 괜찮다는데 뭘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굴었어. 그냥 모른 척 넘어가지.”
“처음엔 나도 모른 척했어. 그런데 같이 살면 그게 보여. 힘들어하는구나, 돌아가고 싶어 하는구나. 재이는 스트레스가 쌓일 만큼 쌓였고 그걸 옆에서 보는 게 너무 괴로웠어. 그렇게 자꾸 부딪히고 싸우는 와중에 재이 아버지 사고가 터진 거고. 문제는 그가 아버지와도 마지막이 좋지 않았어.”
“왜.”
“나 때문에 부모님과도 사이가 틀어졌었거든. 서로 안 보고 살자고 할 정도로 싸우고 나왔는데 그게 돌아가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되어 버렸어.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거야.”
“젠장.”
알랭은 인상을 찡그리며 와인을 들이켰다.
늘 아닌 척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한재이의 친구다. 그러니 제 친구가 괴로워했을 순간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괜히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잔을 내려놓은 그가 나를 보며 물었다.
“일단은 사과하고 싶어. 제대로 이야기해 볼 기회도 없었거든. 아직 아버지 때문에 힘들 테니까 마음 추스를 때까지는 기다려 줘야 할 거 같은데, 문제는 지금 재이가 어떤 상태인지를 모르겠어.”
“서로 연락은 해?”
“계속 시도했는데 답장은 거의 오지 않아. 장례식 이후로 통화는 못 했어. 아직 튀빙겐에서 지내고 있다면 전화하기 좀 힘들긴 할 텐데, 상황이 어떤지 잘 모르겠어.”
“어머니도 반대하셨어?”
“……찬성하진 않으셨지.”
알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나 한재이 탓을 해 대더니 마지막 이야기 이후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인다. 희망이 없나.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담배 피울래?”
그러다 갑자기 알랭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요즘 거의 끊어서 가진 게 없어.”
“멜이 남겨 둔 게 있을 거야. 기다려 봐.”
그는 멜라니의 방으로 들어가 구겨진 담뱃갑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전에 얻어 피웠던 그 멘솔이었다.
우리는 테라스로 나가 11월의 파리 야경을 감상하며 담뱃불에 불을 붙였다. 쌀쌀한 공기에 귓불이 금방 차갑게 식어 버렸다. 알랭은 무언가를 혼자 한참 생각하더니 내게 묵고 있는 호텔이 어디냐고 물었다.
“근처야. 걸어서 20분 정도.”
“잘됐다. 이틀 후에 간다고? 너 내일도 여기 와.”
“왜.”
그는 대답 대신 연기를 길게 마시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동그랗게 모아 도넛 두 개를 만들어 공중에 날려 보냈다.
“좋은 생각이 났어. 파티를 열자. 너 너무 얼굴이 우울해 보여. 내 친구들 다 동원해서 네 기분 좀 풀어 줘야겠어. 내일 7시쯤 다시 여기로 와. 아니면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되고.”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고맙긴 한데 그럴 기분이 아니야.”
“안 돼. 너 지금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 당장이라도 센강에 뛰어들 분위기라고. 와서 앉아만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뭘 다 알아서 한다는 건지 모르겠으나 알랭은 이미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입에 담배를 문 채 무언가를 빠르게 써 내려갔다. 말릴 새도 없었지만 말린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꼭 하는 성격이라 따라 주지 않으면 꽤 골치 아파진다.
“자, 벌써 내 계정에 글을 올렸어. 봤지? 이미 2명이 참가한다고 수락했잖아. 가만있어 봐. 로만한테도 초대 권한을 줘야겠다. 너 스탠드 업 코미디 좋아했잖아. 이 친구 뉴욕 아마추어 클럽에서 공연한 적 있어. 웃기는 애들 많이 데려오라고 해야지. 어, 또 수락 왔다.”
알랭은 혼자 신이 나서 한참 동안 휴대폰에 빠져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살짝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테라스에 기대어 그의 반대편으로 마지막 연기를 뿜어내고 담배를 비벼 껐다. 말려야 하나. 예전부터 알랭은 너무 흥분하면 꼭 사고를 치는 버릇이 있었다.
다음 날 저녁 7시가 넘어 알랭의 집을 다시 방문했을 때 내 예감이 적중했다는 것을 아파트 밖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건물의 공동 현관문을 여는 순간 왁자지껄한 소음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계단을 올라갈수록 그 소리는 명확하게 알랭의 집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7시까지 오라고 하더니 대체 몇 시부터 시작한 건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문을 열자 바로 옆에 서 있던 붉은 머리의 여성이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이미 좀 취한 듯한데 왜 현관문 앞에 서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알랭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선 나를 보고 손짓했다.
“맥시, 들어와! 다들 비켜, 주인공이 왔어. 맥시, 거기 서 있지 말고 안쪽으로 와.”
벌써 스무 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집 안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들어서 있었다. 알랭은 그들을 제치고 성큼성큼 걸어와 나를 끌어당겼다. 그 덕에 나는 신발을 신은 채 부엌까지 직행해야만 했다.
“걸어왔나 보네? 목말라? 소다수 줄까? 아니면 샴페인?”
“샴페인이 좋아.”
알랭은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기포가 빠르게 피어오르는 샴페인을 한가득 붓고 내게 건넸다. 그리고 우리는 가볍게 건배했다.
“왜 이렇게 사람을 많이 불렀어.”
“그러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초대 인원이 배로 불어났어.”
그때 검은색 블레이저를 입은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알랭, 근처에 친구들이 있는데 오라고 해도 돼?”
나는 속으로 그러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알랭은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 오라고 해. 대신 술 한 병씩 사 와야 해. 모자랄 거 같아.”
많이 모자랄 것이다. 그가 쌓아 놓은 와인은 고작 5병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나도 내 몫의 술을 가져왔었다.
“나도 보탤게.”
잊고 있었던 샴페인 병을 그에게 건넸다.
“역시 맥시는 센스 있어.”
그는 내게서 건네받은 모엣 샹동의 금박을 벗겨내고 곧바로 마개를 땄다. 그때 다시 현관 쪽에서 요란한 인사가 시작되었다.
“오! 파비앙, 어서 와!”
알랭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새로 온 일행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꺼번에 여섯 명이 들이닥친 덕에 소음 레벨은 한층 더 올라가 버렸다. 이걸로 오늘 밤 밑층에 사는 폴란드 노부부와 알랭의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된 듯하다.
“그 옆의 컵 좀 집어 줄래요?”
검은색 블레이저의 남자가 내 옆에 쌓여 있던 플라스틱 컵을 손으로 가리켰다. 알랭과 내가 영어로 대화하는 걸 들었음에도 굳이 프랑스어로 말을 거는 그 심리가 너무 뻔해 웃음이 나왔다.
“여기요.”
“고마워요.”
컵을 건네주다 살짝 스치는 바람에 그에게서 연한 마리화나 냄새를 맡았다. 나도 모르게 남자를 아래위로 훑어보게 되었다. 친구들끼리 하는 파티에 온 것치고는 지나치게 옷을 빼입고 온 게 아닌가. 그런 생각으로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가 웃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그쪽이 맥시구나. 알랭이 파티광이긴 하지만 누구 핑계 대면서 노는 친구는 아닌데 궁금했어요. 오늘 파티를 뭐라고 설명하며 초대한 줄 알아요? ‘누구든 맥시를 가장 많이 웃게 한 사람에게 100유로를 주는 밤’. 봐요, 여기 그렇게 쓰여 있죠?”
그는 다시 내게 다가와 자신의 휴대폰에 떠 있는 알랭의 SNS 초대장을 보여 주었다. 알아서 한다는 의미가 이거였나 보다. 너무 알랭다운 짓이어서 한숨이 나왔다.
“친한가 봐요.”
“네, 뭐. 오래된 친구긴 하죠.”
“맥시, 이리 와, 로만을 소개시켜 줄게.”
때마침 다시 돌아온 알랭이 나를 거실 소파 근처로 데리고 갔다. 그가 말했던 스탠드 업 코미디를 한다는 친구인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또 한 무리의 친구들이 집안에 들이닥쳤다. 아파트 곳곳이 터져나갈 듯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은 스스로 술을 찾아 마시고 아무 데나 앉아 아무와 이야기했다.
100유로가 걸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계속해서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 바빴다. 다들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우스운 농담을 꺼내 놓으며 내 반응을 기대했다. 웃어 줘야 하는데 그 상황이 너무 어색해서 자꾸만 표정이 굳어져 버렸다.
한참 후 로만이 필살기로 꺼낸 나치에 관한 조크를 듣고서야 나는 꽤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정말 웃겨서 웃었다기보다는 후천적으로 새겨진 독일 문화의 무릎 반사 같은 행동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나치에 관해 놀리면 가장 크게 자학하고 웃어 줘야 한다. 기대했던 반응이 터지자 그제야 모두가 만족해했다.
그때 또 한 무리의 손님들이 도착했다.
“로만, 너 대체 몇 명이나 초대한 거야. 너한테 초대 권한을 주지 말아야 했다, 진짜.”
아까부터 집주인인 알랭조차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만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다. 그 광경을 보니 언젠가 인터넷에서 보았던 ‘SNS 파티 초대의 최후’라는 사건이 떠올랐다. 친구의 친구가 친구를 불러 연쇄 작용으로 뻗어 나간 그 파티에 무려 백 명의 사람들이 도착해 버렸다는 우스꽝스러운 일화였다. 최초의 파티 주최자는 손님들 중 절반이 모르는 사람들이었다고.
“내가 이긴 거지? 100유로 언제 줄 거야?”
로만은 의기양양하게 알랭을 향해 물었다.
“아직 몰라. 끝까지 가 봐야지. 올 사람 더 있단 말이야.”
그가 입구 쪽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새로 도착하는 사람들에게 인사하러 가지 않고 있었다. 알랭의 손님은 대충 다 온 것 같은데도 아직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듯했다. 여기서 사람이 더 들어오면 정말 경찰서에 신고가 들어갈지도 모른다.
나의 이런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두 명이 아파트 문을 열었다. 아까 말을 걸었던 검은색 블레이저의 남자가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부르고 싶다던 친구들이 도착했나 보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던 그는 힐끔 이쪽을 쳐다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피하지 않고 그가 웃었다. 그래서 내가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맥시,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 봤어.”
알랭이 옆으로 와 앉으라며 소파 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가 한 ‘생각’이라는 것에 별 기대는 없었지만, 또 무슨 이상한 발상을 한 건지 궁금해서 일단 옆자리에 앉았다.
“너 그냥 프랑스에 와서 살아. 여기서 한 1년 정도 백수로 지내 보는 거야. 심심할 때마다 내가 놀아 줄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너희 둘 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생긴 일 같아. 마음에 여유를 찾고 나면 관계가 다시 회복될 거야. 독일은 지루하니까 파리에 와서 사는 걸 추천해.”
“회사는 어떡하고.”
“나중에 다시 들어가면 되잖아. 전문직인데 뭐가 걱정이야. 좀 대충 살아도 돼. 그래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
나는 비로소 알랭이 취했음을 알았다. 그의 술잔은 어느새 위스키 잔으로 바뀌어 있었다. 신기한 일은 나 역시 같은 종류의 잔을 쥐고 있었다는 점이다. 언제부터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을까. 그제야 취했다는 자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다. 술잔을 놓고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괜찮아요?”
검은색 블레이저의 남자가 일행들을 버려두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에릭, 너는 맥시 앞에 접근 금지야. 저리 가.”
그렇게 말하며 알랭은 다시 입구 쪽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찾았다.
“난 화장실 좀.”
에릭이라는 남자와 엮이고 싶지 않아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내게 길을 터 주기 위해 슬쩍 몸을 뒤로 빼 주는 척하더니 한 박자 빠르게 자세를 원상 복귀시켰다. 그 바람에 몸이 살짝 겹쳐져 불필요한 스킨십이 일어났다.
불쾌감이 확 올라오는 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쳐다보았다.
“쏘리.”
그가 웃으며 영어로 사과했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주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알랭, 네 친구 너무 귀엽다. 엄청 까칠해.”
“신경 꺼, 남자 친구 있어.”
“젠장, 게이는 맞았구나.”
등 뒤로 그들이 나누는 프랑스어가 들려왔다. 알랭이 또 술김에 쓸데없는 정보를 흘리고 있었다. 화장실로 나가려던 나는 그대로 아파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기 전에 자리를 뜨고 싶었다. 파티가 진행될수록 내 기분은 가라앉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차가운 11월의 파리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와 술기운을 깨웠다. 건물 안에서는 여전히 소음이 새어 나왔지만,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밤거리의 배경음처럼 들려왔다. 3시간 넘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떠들고 마셨지만 ‘함께’라는 감각은 없었다.
추위가 뒤늦게 찾아왔다. 외투를 가지고 나왔어야 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 둔 휴대폰을 꺼내 시계를 보았다.
몇 시까지 버텨야 알랭이 화내지 않을까. 내 이름까지 걸고 마련해 준 자리인데 너무 일찍 자리를 뜨면 섭섭해할 게 뻔하다. 날 위한답시고 일을 벌인 사람의 기분을 오히려 내가 맞춰 주고 있자니 꽤 피곤했다. 시간은 어느덧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최근 통화 목록에서 한재이를 찾았다. 요즘 버릇처럼 자주 하는 행동이다. 이제는 꽤 밑으로 밀려나 있는 그의 이름을 보니 마치 서로의 인생에서 점점 밀려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대로 기다려 주는 것만이 최선일까. 지금까지는 그를 배려한다는 명목하에 전화를 걸지 않았지만, 오늘은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여차하면 술 핑계를 대도 될 것 같았다. 때로는 용기보다 욕심이 나를 행동하게 한다.
머뭇거리던 손가락이 그의 이름 위를 스쳤다. 기계는 주저하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단호하게 흘러나오는 신호음을 들으니 나도 모르는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첫마디에 관한 몇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그중 가장 무난한 말을 고를 때까지도 신호음은 계속 흘렀다.
결국 한재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자동 응답으로 넘어가는 음성 메시지를 들으니 왠지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다시 한번 더 걸었다. 어차피 부재중 기록이 남을 테니 없었던 일로 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음성 메시지라도 남겨야지. 그런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전화를 받았다.
-응, 말해.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기에 잠시 당황했다. 방금 골라 둔 말은 하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통화 가능해?”
-뭐, 상황에 따라서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다른 말로 물었다.
“집이야?”
-아니, 밖이야.
한재이는 아무렇지 않게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주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통화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늦었는데 어디 가.”
-누구 좀 만나러.
전화기 너머로 그의 발소리가 들렸다. 큰 보폭으로 걷고 있는 듯 그의 숨소리도 조금 크게 울리고 있었다.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걸까. 아무튼 집은 아니라니 길게 통화하기 힘들어 보였다.
“나 파리에 있어. 메시지 봤어?”
-응, 알랭 집에 와 있는 것도 알아.
역시 둘이 연락이 닿았나 보다.
-알랭이 이상한 파티 열어서 네 기분 맞춰 주려다가 지금쯤은 혼자 먼저 취해서 쓰러졌겠지, 뭐.
그가 너무 정확하게 정답을 맞추었기에 나는 좀 놀라웠다.
-그리고 너는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밖에 나와 있을 거고.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코트도 없이 나온 탓에 추워서 오른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을 거야.
한재이의 말투에서 장난기가 배어 나왔다. 그제야 통화가 어렵다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구둣발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어떤 건 안 봐도 그려지는 장면이 있어.
그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돌아온 메아리처럼 하나로 합쳐지며 양쪽 귀에 닿았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어떤 건 눈앞에 보여도 믿기 힘들 때가 있고.”
그의 말이 맞았다. 밝은 갈색 코트에 검은색 머플러를 두른 한재이가 거짓말처럼 내 눈앞에 나타났다.
한재이는 휴대폰을 내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동시에 머플러를 풀어 내게 둘러 주었다. 나는 그 배려에 부응하여 한참 그를 쳐다보았다.
장례식 때 길게 자랐던 머리는 짧게 깎여 있었다. 넓은 칼라가 눈에 띄는 더플코트 안에는 단정하게 매어진 넥타이가 얇은 캐시미어 니트와 함께 보였다. 지나치게 빼입고 온 느낌이 드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인데 그에게서는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잘 어울린다, 내지는 여전히 멋있다 같은 생각을 하며 그 시간을 흘려보냈다. 짧은 감상이 끝났다.
“여긴 어떻게 왔어.”
“비행기 타고.”
그의 태평한 대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방금까지도 기를 쓰고 재미있는 농담을 짜내던 사람들이 지금 이 장면을 보면 황당할 것이다. 한재이는 나타난 지 1분도 되지 않아 나를 웃게 했다. 100유로는 그에게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왜 웃어.”
그 역시 옅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냥. 내가 참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올라갈래? 너 온 거 알면 알랭이 좋아할 거야.”
“별로. 그 녀석 보러 온 건 아니니까.”
그리고 나를 쳐다보며 볼일은 이쪽에 있다는 투로 말했다.
“코트 가지고 나올래? 여기서 기다릴게. 큰길로 나가면 바가 있어. 가서 얘기 좀 해.”
얘기 좀 하자는 그 말에 기쁨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나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시고 알랭의 아파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가. 다시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들 거 같아.”
그러자 그의 시선도 나를 따라 아파트 건물 쪽으로 향했다. 거기서 들려오는 소음을 듣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걸음을 옮겼다.
나는 어깨를 좁히며 빠르게 걸었다. 머플러가 있어 한결 따뜻해졌지만, 셔츠의 재질이 사계절용이라 피부가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한재이가 눈치를 챘는지 제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서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괜찮아. 금방 도착하잖아.”
“그럼 그냥 들고 있어. 택시 타고 내려서 뛰었거든. 그래서 열이 좀 올랐어.”
너무 그럴듯한 그의 설득에 거절할 핑계를 찾지 못했다. 한재이의 체온과 향수 냄새가 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장소를 이동하는 동안 우리는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저 파티가 어땠냐는 질문에 솔직한 감상을 들려주었다. 알랭의 친구들은 대체로 재밌었지만 너무 시끄러웠다.
도착한 곳은 레스토랑과 바를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다. 입구가 갈리는 곳에서 왼쪽으로 안내를 받고 카운터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진을 스트레이트로 주문했고 나는 럼이 들어간 옅은 칵테일을 부탁했다.
“알랭이 너한테 연락한 거야?”
그는 바로 긍정했다.
“어제 전화 받았어. 너 파리에 와 있는데 얼굴이 말이 아니라고. 준비는 자기가 다 알아서 해 놓을 테니 당장 날아오라고 협박하더라.”
“나한테는 너 불렀다고 말 안 해 줬어.”
“응. 서프라이즈니까 말없이 오라고 하더라. 하여튼 알랭은 그런 거 좋아해.”
그가 작게 투덜대며 옷소매를 살짝 걷었다.
둘이서 전화로 티격태격했을 장면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아까부터 올 사람이 있다며 줄곧 알랭이 찾던 누군가가 한재이었나 보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를 만난 뒤부터 계속 웃고만 있다.
많이 좋아해서, 그래서 많이 그리웠다. 이렇게 가까운 자리에서 둘만 있는 시간이 오랜만이라 가슴속이 묵직하게 차올랐다.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는 절제의 반대편에서는 그에게 키스하고 싶은 욕심에 마음이 흔들렸다. 아까부터 저를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을 읽었을 텐데도 그는 피하지 않고 조용히 받아주었다.
음료가 나왔다. 나는 바텐더에게서 받은 칵테일을 저으며 속마음을 내비쳤다.
“내 연락은 드문드문 받더니, 알랭이 부른다고 이렇게 쉽게 올 줄 몰랐어.”
“네 일이니까.”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누가 부르건 네 일이니까 온 거야.”
그는 아주 담담하게 말하며 카운터 위에 놓인 진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한재이는 여전히 단단해 보였다. 처음 아버지의 사고 연락을 받았던 날을 제외하면 장례식 때도 크게 슬퍼한다거나 힘들어하는 눈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더 그를 비정상적으로 보이게 했다. 자제력을 잃지 않은 남자는 굉장히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다가가기 어렵게 느껴진다.
“어떻게 지내. 어머니는 좀 괜찮으셔?”
그래서 그의 안부를 이제야 묻는다.
“응, 좀 나아지셨어. 덕분에 나도 뮌헨으로 돌아왔고. 아무 생각 없이 지내는 중이야. 지치기도 했고. 내가 요즘 좀, 계속 운이 별로였잖아.”
그는 자신의 처지에 관한 농담을 던지며 낮게 웃었다. 그리고 비어 버린 잔을 손으로 돌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바텐더가 다가와 같은 것을 권하자 그가 바로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 일…… 정말 비극이야. 너한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가슴 아파.”
나의 말에 한재이는 이쪽을 쳐다보지 않은 채 여전히 잔을 돌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맞아, 비극이지. 너와 나 사이 또한…… 비극이고.”
그 말에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한재이는 그런 내 반응을 살피지 않은 채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네 연락을 무시한 건 아니야. 그냥 생각을 다 정리하지 못했었어. 장례 끝나고 유언장 처리 때문에 바쁘기도 했고. 그래서 이래저래 시간이 꽤 흘러 버렸어. 어쨌거나 너랑은 만나서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응.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니니까.”
“너는 어땠어. 떨어져 지내는 동안 정리를 좀 해 봤어?”
“우리에 대해?”
“그래.”
나는 허망하게 웃었다. 정리라니. 아니,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게 한재이와의 관계는 재고의 여지가 없는 확신으로 들어차 있었으니까. 이 꽉 찬 마음을 어떻게 그에게 표현할 수 있는지만을 생각해 왔던 3주간이었다.
“나는, 네게 사과하고 싶어.”
그래서 그 첫발을 뗐다.
“내가 계속 이기적으로 굴었어. 감정적으로 너한테 의지만 했던 것 같아. 너도 내가 필요했을 텐데 혼자서 책임지라고 윽박질렀어. 후회해. 네 앞에서 자존심만 챙기려 했던 선택들도 모두.”
그의 앞에 새로운 진이 놓였다. 술잔을 쥔 그는 묵묵히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기젤라 만났어. 파혼에 대해 고민하고 결론 내렸던 그때의 너에 대해 궁금했었거든. 듣고 나니 네가 말한 그 확신이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더라. 그렇게 용기 내서 다가와 준 너를 너무 쉽게 취급했어. 나에 대한 네 감정을 당연하다 여기고 오만하게 굴기도 했고.”
한재이는 왼쪽 팔을 카운터에 올려놓고 비스듬히 앉아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는 나를 향해 있었지만 동시에 아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말대로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도망갈 용기는 있었으면서도, 너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미안해.”
“…….”
“미안해, 재이야.”
나의 사과는 지난 4개월간의 여정을 관통하고 있었고 마지막 파국의 장에서 잿더미가 되어 버린 우리 관계의 결론을 말해 주고 있었다. 미안함만이 남아 버린 그 장면에서 우리는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기에, 나는 오늘 적어도 다음 단계로 가는 첫 단추를 끼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한재이의 반응은 크게 일렁이지 않았다. 그저 옛 기억을 더듬기라도 하는 듯 씁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짧게 토해낸 그의 한숨을 들으며 나는 그것에 너무 큰 의미가 담겨 있지 않았으면 했다.
내게 달려왔던 그날의 결심을, 우리 관계를 뒤집었던 그날의 키스를 부디 후회하지 않기를 바랐다.
바 안은 점점 더 조용해지고 있었다. 들어오는 손님보다는 나가는 손님이 많았다. 바텐더는 잔을 닦으며 한 번씩 우리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아직 비지 않은 잔을 보고 다른 손님을 접대했다. 음악 소리가 점점 더 또렷이 들려오고 칵테일 안의 얼음은 거의 녹았다.
“괜찮아.”
한참 침묵을 지키던 한재이가 드디어 운을 뗐다. 하지만 흘러나온 다음 말은 나를 슬프게 했다.
“이제 다 상관없어.”
그는 천천히 카운터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요즘 느끼는 건, 지금까지 내가 결정해 온 모든 일의 대가를 한꺼번에 치르는 것 같다는 거야. 파혼도 그렇고 우리 관계도 그렇고. 물론 아버지 일은 사고였지만 가슴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든 원인은 내가 제공한 게 맞으니까 마음이 무거워. 아무튼 다들 나한테서 상처를 받는데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 이게 말이야, 진짜 괴로워.”
그리고 술잔을 다시 입에 가져다 댔다.
살짝 찌푸린 미간에서 이어지는 콧날이 조명을 받아 날카롭게 선을 만들었다. 그 선에서 떨어진 인중과 젖은 입술 밑으로 굵은 목울대가 출렁이며 쓰디쓴 술을 받아 마셨다. 그렇게 비워진 잔을 내려놓고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난 내가 원하는 것이 가장 옳은 길이라고 생각해 온 사람이야. 그래서 한번 결정하면 뒤도 보지 않고 달려가는 걸 좋아했어. 그 최고점을 찍은 게 너를 따라 한국으로 들어간 거였고. 다들 미쳤다고 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 같이 있고 싶다,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 그 생각만으로 내린 결정이라서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그래서 그게 우리 사이에 독이 될 거라곤 예상 못 했어.”
거기까지 말을 마친 그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말이 맞아. 나는 한국에서 행복하지 않았어. 스트레스에 절어서 정신이 나갈 정도였으니까. 근데 괴롭다고 하면 네가 실망할 것 같았어. 그러게 왜 앞뒤 재지도 않고 이런 일을 벌였냐며 채근할 거 같았거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는 비난받고 싶지 않았어. 그게 결국 터져 버린 거였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나한테 사과할 필요는 없어. 네 속을 일부러 긁으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 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명백하게 나 역시 너한테 상처를 줬어.”
한재이는 전혀 감정적이지 않았으며 놀라울 만큼 차분한 어조를 띠고 있었다. 마치 지나간 사건을 법정에서 진술하듯 객관적이고 정확한 표현을 썼다. 우리는 둘 다 잘못을 시인했고 어리석은 행동들을 후회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나는 씁쓸하게 그에게 물었다.
한재이는 반도 마시지 못한 내 칵테일 잔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바텐더를 불렀다. 자신을 위해서는 같은 것으로 한 잔 더, 내게는 물을 주문해 주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가 바 스툴을 살짝 돌려 나를 향해 몸을 틀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진 못할 거 같아. 사업은 이미 정리 중이야.”
나는 머릿속이 한번 암전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내가 충분히 반응할 시간을 주려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기다렸다. 그래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나는 바닥까지 추락한 기분을 애써 끌어 올리며 그가 주문해 준 물을 마시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내려놓은 물 잔을 보고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마치 미래의 일을 예견이라도 한 듯 정확히 내 앞에 대기시켜 놓은 것 같았다. 너무 한재이다운 행동이라 미워할 수조차 없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 물 한 잔을 준비해 주었을지 너무 뻔하게 보였다.
“이유가 뭐야. 내가 싫어졌어?”
자학하듯 미소를 띠고 던진 나의 질문에 그는 웃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돌리고 여전히 미리 준비한 듯한 말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아버지 일 때문에 따로 떨어져 있는 동안 자기 객관화를 좀 했어. 덕분에 내 한계치가 명확하게 보이더라. 나는 너와 다시 잘 지낼 자신이 없어. 더 솔직히 말하면 지쳤어. 다투고 화해하고 이해하고 노력하는 그 패턴들이 이젠 힘들어. 결국엔 친구보다 못할 사이가 될 텐데, 너와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까 우린 여기서 그만 멈춰야 할 거 같아.”
“…….”
“네 기대에 못 미치는 결론이 나와서 미안해.”
한재이는 마지막 말을 마쳤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그만하자는 말을 듣는 건 생각보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천천히 한재이의 말을 곱씹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분명 내가 싫어졌냐고 물었는데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 사이를 지키기 위해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도망가려는 건가. 확인하고 싶었다.
“질문에 답 안 했잖아. 내가 싫어졌냐고. 꼴도 보기 싫어져서 다신 안 보고 살려는 거야?”
“그러지 않기 위해서 멈추자는 거야. 우린 또 싸울 거고 그러다 서로를 경멸하게 되겠지.”
“나를 경멸할 자신은 있고?”
“…….”
나는 대답하지 않는 한재이를 찬찬히 살폈다. 그의 눈 깜빡임과 입술의 실룩거림, 동공의 확장과 어깨 움직임까지. 그 작은 증거들을 모아 내 멋대로 그의 생각을 꾸려 나갔다.
한재이는 최악의 상황만을 떠올리게 되는 저주에 걸린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며 한재이 아버지의 죽음이 그렇게 만들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길을 선택하면 누군가 상처를 받는다며 괴로워했지만, 가장 상처받고 있었던 이는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서 경멸받을 자신을 지키고자 여기서 멈춰야 한다고 판단한 듯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그런 엔딩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두지 않을 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를 경멸하지 못할 한재이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아마도 그에게 스며든 두려움이 우리 사이를 둘러싼 이런 감각들을 마비시켜 버렸을 것이다.
한재이가 가졌던 ‘확신’이 이제는 내게 와 있었다.
“글쎄,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머리를 떼며 천천히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나는 멈출 생각이 없는데.”
그의 눈빛이 옅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으면 순식간에 대화의 주도권을 잃는다. 그렇게 주도권을 빼앗긴 사람은 상대의 다음 이야기에 긴장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 너하고 나, 네가 일방적으로 시작한 관계 아니야. 오히려 짝사랑은 내가 먼저 시작했어. 그러니까 네가 멈춘다고 해서 끝나야 할 사이가 아니라고. 그런 얘기 해서 겁주고 밀어내면 내가 같이 물러설 줄 알았어?”
“서진아.”
“나도 네 기대에 못 미치는 결론이 나와서 미안한데. 찰 거면 제대로 차. 지긋지긋하니까 꺼지라고 해. 연락도 받지 말고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라고. 그럴 수 있어?”
“…….”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나 또한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조금은 떨고 있었다. 내 생각과는 달리 이미 내가 지겨워졌을 수도 있을 테니까. 말 한번 잘했다고, 지금 당장 제 눈앞에서 꺼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그런 것은 이제 무섭지 않았다. 그에게 차인다고 해서 내가 잃을 것은 고작해야 ‘자존심’ 정도인데. 이제 나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재이야, 대답해.”
나는 한 번 더 그를 코너에 몰았다.
한재이는 말이 없었지만 표정만은 솔직했다. 내가 어떻게 너한테 그래. 활자처럼 펼쳐지는 그 눈빛을 놓치지 않고 읽어냈다. 그래서 좀 더 용기를 냈다.
“아직 그 정도로 내가 싫어진 게 아니라면 기회를 줘.”
그러자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기회.”
“나한테도 네가 전부야. 내가 증명해 보일게.”
나는 기젤라가 들려주었던 한재이의 고백을 직접 그에게 돌려주었다. 근사하게 보이려고 잔재주를 부린 것은 아니었다. 너무 담담하게 말해서 큰 감동을 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냥. 그것이 내게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기에 말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오랜 시간 내 친구였고 언제나 나의 전부였다.
한재이의 표정은 크게 한번 요동쳤다. 그러나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상 밖의 결과에 당황한 듯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내가 하는 말 하나하나를 머릿속에서 정리 중인 듯했다. 그러다 작은 한숨을 쉬며 허락을 내려 주었다.
“마음대로 해.”
그는 마지막 술잔을 비웠다.
안도의 순간은 내게도 찾아왔다. 적어도 오늘은 헤어지지 않겠구나. 작은 성과에 만족하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그의 마음이 변해 내일 당장 차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오늘은 아닌가 보다.
치열했던 대화가 끝이 나고 시간이 꽤 흘렀음을 알았다. 이미 바텐더는 마지막 손님이 나간 자리를 치우는 중이었다. 그를 불러 술값을 계산하고 한재이에게 말했다.
“코트 가져올 테니까 여기서 잠깐 기다릴래?”
그는 말이 없었다. 긍정해 줄 때까지 더 기다릴 수 없어 일단 혼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밖으로 나와 알랭의 아파트로 뛰었다.
소음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황량한 빈 병들만 굴러다니는 파티의 끝물 즈음에 나타났다. 주인공이 증발해 버린 이 모든 소동을 벌인 알랭은 술에 취해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집을 치워 주며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 알랭이 계속 찾던데. 어디 갔었어요?”
코트를 찾아 나오려는데 입구에서 에릭과 마주쳤다. 그는 나를 만나 내심 반가운 듯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밖에 있었어요. 혹시 깨면 미안하다고 전해 줘요.”
물론 나는 장문의 사과 메시지를 알랭에게 직접 보내 놓을 생각이었지만, 왠지 에릭에게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뒤로 돌아 한마디 덧붙였다.
“남자 친구가 와서 얘기 중이었다고 하면 알 거예요.”
그는 알겠다는 표정을 하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서둘러 코트를 입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렇게 다시 왔던 길을 향해 뛰었다.
물론 한재이는 이미 바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다. 기다려 주겠다는 대답을 듣지 못했으니 혼자 가 버렸다 하더라도 할 말은 없었다. 그래서 1분이라도 더 빨리 도착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달렸다. 이렇게 전력으로 달린 것은 꽤 오랜만이다.
큰길로 들어서자마자 나의 불안은 사그라들었다. 한재이는 가게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밝은 브라운색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담배를 물고 있는 그 모습을 보니 살짝 울컥할 정도로 많이 기뻤다.
한재이는 내가 다가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만큼 좁혀지자 자신의 입에서 담배를 빼냈다. 그리고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연기를 날려 보냈다. 그가 물었다.
“호텔 어디야?”
낮고 짙은 톤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더 평온하게 들려왔다.
“여기서 15분 정도 걸어가면 돼.”
“데려다줄게, 가자.”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고 앞서 걸었다. 나는 멍하니 뒤에서 그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웃기네. 이게 뭐라고 아까부터 이렇게 가슴이 뛰는지 모르겠다. 서둘러 보폭을 넓혀 그를 따라잡았다.
“파티는 끝났어?”
그가 물었다.
“응, 알랭이 생각보다 빨리 뻗어 버렸던데.”
“요 며칠 일 때문에 제대로 잠 못 잤었다고 하더라. 그런데도 네 기분 풀어 준다고 난리를 친 걸 보면 성격은 그대로야. 옛날이랑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이상한 녀석이긴 한데, 착해.”
나는 그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은 알렉상드르 다리를 건너 샹젤리제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센 강변을 함께 걸었다. 한재이는 불씨가 꺼진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두 손을 코트에 찔러 넣은 채 내 옆으로 다시 다가왔다. 그의 옅은 향수 냄새가 공기를 타고 전해져 왔다.
이곳에 오면 늘 감상적인 기분이 들곤 했다. 그와 내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도시. 우리는 20대의 청춘을 파리에 가두어 두고 낭만이 부족해질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이 도시에서 내게 이별을 말하려 했던 그가 미웠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헤어진다고 한다면, 또 이곳만큼 제격인 장소도 없었을 것이다. 로마에서 시작되었던 그와 나의 열애를 끝내 줄 수 있는 유일한 도시가 아니었을까.
센강을 건넌 우리의 걸음은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멀리서 호텔 입구가 보인 뒤부터는 아예 걸음을 멈추고 싶었다.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하는 이 짝사랑의 감정은 예나 지금이나 나를 참 힘들게 한다.
이윽고 입구에 도착해 그에게 물었다.
“비행기 왕복으로 끊었어?”
“아니, 원 웨이.”
그렇게 대답하는 한재이의 눈동자는 매우 지쳐 보였다. 벌써 12시가 다 되어 가니 피곤할 것이다.
“자고 가.”
“아니. 너 올라가는 거 보고 바로 갈 거야.”
“이 시간에 어떻게 가. 그냥 자고 가. 아직 헤어진 거 아니잖아, 우리.”
그러자 그가 머뭇거리며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보였다.
“……오늘은 이야기를 많이 했잖아. 그걸로 일단 만족해 주면 안 될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자고 가라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닌데 그가 오해를 한 것 같았다. 멈추지 않겠다는 말에 마음대로 하라는 대답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섹스까지 멋대로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고 가라는 말, 그런 뜻은 아니었어. 그냥 네가 피곤해 보여서.”
당황한 내 표정을 읽은 그가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그래, 알았어.”
“진짜 괜찮겠어?”
“응. 그만 들어가. 갈게.”
그러고는 더는 내가 붙잡을 수 없도록 곧바로 뒤돌아섰다. 아쉬움이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차오름을 느꼈다.
멀어지는 한재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호텔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았다.
만나고 나면 좀 덜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참기 어려울 만큼 금세 보고 싶어지는 걸 보니 나는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파리에서 하루를 더 보낸 뒤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 뒤로는 4일간의 긴 오프가 이어졌다. 내 일상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하루에 한 번씩 한재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대개는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에 관한 짧은 전달이었고 한 번씩 물음표를 붙여 그의 답장을 유도하기도 했다.
한재이는 거기에 응해 줄 때도 있었고 일부러 피할 때도 있었다. 전화를 하면 받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부재중 음성 메시지로 넘어갈 때가 많았다. 그래서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것이 내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일부러 심각한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해, 또는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나는 친구처럼 그를 대했다. 하지만 잊지 않을 만큼 표현도 해 주었다. 많이 보고 싶다거나 그립다고 이야기해 주며 내가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잊지 않을 만큼만 남겨 두었다.
그리고 어제는 처음으로 그에게서 먼저 메시지가 왔다.
[남은 짐을 좀 부쳐 줄래?]
내용은 절망스러웠지만 나는 꿋꿋하게 버텨 내고 있었다.
* * *
다음날 나는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A350에 몸을 싣기 위해 나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이제는 완전히 겨울로 들어선 서울 공기를 폐 속에 집어넣었다.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고 회색으로 변해 가는 도시 풍경을 눈에 담았다. 하늘이 무겁게 내려온 것 같은 날씨였다. 수분을 머금은 공기가 비를 뿌릴 듯 눅눅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려 바로 옆에 마련된 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러고 나서 한나 뮐러를 만났다. 그녀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몇 년 전 실리콘 밸리로 이직했다. 나와는 김나지움 동창이었던 토비아스 마이어의 오랜 여자 친구였으며 그와 헤어지고 나서도 나와는 연락이 끊기지 않아 좋은 친구가 된 케이스였다.
사실 인간관계라는 것은 그 계기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인연이란 누군가의 적은 노력만 있으면 꽤 길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한나는 부활절과 성탄절, 새해가 될 때마다 잊지 않고 메시지를 보내 주는 사람이었다. 선천적으로 남을 챙기는 것을 좋아하고 한번 맺은 인연을 쉽게 놓지 않는 부류. 그런 사람들과는 시간이 갈수록 관계의 끈이 두꺼워진다.
“맥시!”
호텔로 나를 데리러 온 그녀가 로비 소파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한나는 작은 키에 늘 청바지와 운동화를 즐겨 신었다. 그 스타일은 오늘도 변함이 없었다. 다만 긴 머리가 짧아졌고 피부는 조금 더 그을렸다.
“반갑다, 맥시! 우리 1년 만에 보나?”
“음, 조금 더 된 거 같은데. 너 이사했다고 하던 거 기억나. 여름이었어.”
“아아, 맞아. 그 망할 팰로앨토에서 나간 게 벌써 재작년이구나. 넌 살이 좀 빠진 거 같다?”
“만날 때마다 그 소리만 하잖아. 잘 지냈어?”
“나야 뭐, 늘 잘 지내고 늘 즐겁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녀의 청량한 웃음이 내게도 전염되었다. 한나를 만나면 늘 행복해진다.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이었다.
“한국은 춥지?”
“응. 아무래도 그렇지.”
“네 옷차림을 보니 상상이 간다.”
나는 긴 소매 셔츠에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들고나온 재킷은 팔에 건 채로 입을지 말지 아직 망설이는 중이었다. 한나는 짧은 소매의 티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두꺼운 머플러를 목에 둘렀다.
반대되는 차림새는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코트 차림이었고 또 다른 사람은 반바지를 입은 채 지나갔다. 이 모든 풍경은 11월 캘리포니아의 따뜻함이 주는 재미난 광경이다.
한나는 연식이 오래된 수동 중고차를 끌고 다녔다. 그녀의 취미는 오래된 LP를 모으는 것이며 학창 시절부터 비틀즈의 광팬이었다. 그녀는 지구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IT 회사에서 머신러닝을 구축하는 개발자였지만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사람을 예찬하는 레트로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우리 집 근처로 가도 되겠지? 괜찮은 레스토랑이 생겼거든. 네가 먹을 메뉴도 내가 미리 정해 놨어. 기대되지?”
그리고 또한 미식가였다.
“그래. 네가 맛있다고 한 것치고 실패한 건 없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이 더없이 푸르고 맑았다. 구름이 뭉게뭉게 지평선 위를 떠다녔다. 포근한 11월의 공기가 이질적인 느낌을 전해 주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지만 이곳에선 여전히 태양이 물러설 기미를 보여 주지 않고 있는 듯했다.
스탠퍼드 대학과 멘로 파크 방향으로 내려가던 한나의 차는 교차로 신호에 걸려 몇 번인가 멈춰 섰다. 그럴 때마다 노숙자들이 피켓을 들고 정차한 차량 사이를 돌아다녔다.
깎지 않은 수염과 비쩍 마른 체형의 그들은 대부분 구걸한 돈으로 마약을 산다. 피켓에는 오늘 먹을 점심을 위해 5달러를 기부해 달라는 내용이 쓰여 있지만 거짓말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도 정차된 차량 중 몇 명은 창문을 내려 그들에게 지폐를 건넸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다는 부자들이 사는 이곳에 미국 전체 노숙인 중 절반 가량이 몰려 산다. 겨울에도 따듯하니 떠날 이유가 없다. 어떨 때는 저렇게 한 시간 동안 얻어 모은 돈이 한국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 시급보다 많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구걸보다 낮게 책정되는 노동의 대가는 참으로 절망적이다.
한나의 직장을 지나 서니베일까지 내려온 우리는 어느 멕시코 요리 전문점 앞에 차를 세웠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인지 빈 테이블이 많이 보였다. 허리에 짧은 에이프런을 두른 서버가 다가와 음료를 먼저 주문 받았다.
“맥시, 여기 칵테일 맛있어.”
“음, 아직 5시도 안 되었는데 술은 너무 이르지 않아?”
내가 주저하자 한나가 웃으며 놀렸다.
“잊었어? 우리 술 마시고 싶을 때는 늘 하던 변명이 있잖아.”
“지구상 어딘가에는 이미 5시예요.”
한나를 대신해 서버가 웃으며 편을 들었다. 오랜만에 듣는 유명한 농담이다. 그녀들의 권유에 따라 한 잔만 하기로 했다. 대낮에 마시는 멕시코 칵테일은 겨울과 어울리지 않는 이곳 날씨처럼 기묘한 기분을 선사했다.
식사를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사가 트레이를 밀고 와 눈앞에서 과카몰레를 만들어 주었다. 신선한 아보카도와 토마토 그리고 소고기 타코로 배를 채웠다. 한나는 치즈가 떨어지는 케사디야를 먹으며 최근 시작한 취미인 클라이밍에 관해 설명했다.
“의외네. 스포츠를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잖아.”
“그랬지. 내가 좀 작은 편이잖아. 타고난 신체 조건이 별로여도 근력으로 버티는 운동을 하고 싶어서 찾았다가 시작하게 됐어. 요즘 약간 여기 애들한테 이런 취미가 유행이거든.”
“그래. 뭐든 몸을 움직이는 건 좋아.”
“너는 어때? 요즘도 테니스 쳐?”
그녀는 취미 생활을 공유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다니는 것만 해도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며 아쉬워했다. 그래서 실패한 연애를 되살려 보고자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의 요즘 생활에는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라켓 안 잡은 지 좀 됐어. 요즘은 그냥 수영만 해.”
“아깝다. 너 테니스 진짜 잘 쳤는데. 토비랑도 테니스 때문에 친해졌던 거 아니었어? 그 잘생긴 네 친구랑 셋이서 코트 자주 다녔잖아. 토비가 너희랑 노는 거 좋아했던 기억 난다.”
“토비아스랑 요즘도 연락해?”
“아니, 몇 년 전부터는 연락 끊겼어.”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 하지 않았어?”
“그랬는데 잘 안 되더라고. 그렇게 오래 사귀었는데도 헤어지고 나니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더라. 안 보고 사는 게 서로에게 좋아. 친구는 무슨 친구야. 헤어지면 끝이야. 혹시라도 다른 사람 생기면 그쪽 상대방한테도 매너 없잖아.”
“그래.”
나는 한나의 말에 수긍했다. 다른 말은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헤어지면 끝이다. 그 말 한마디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시킨 덕에 타코 하나와 브리토가 남았다. 수다를 떠는 동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배가 부른 우리는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어 석양을 즐기고 있었다. 오후 5시의 마술이 이곳에도 찾아왔다. 해피 아워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술을 주문했다.
남은 음식을 도기 백으로 만들어 달라고 한 뒤 그녀는 화장실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 운 좋게 내가 계산할 타이밍을 얻었다. 서버에게 카드를 건네고 팁은 현금으로 남겼다.
“뭐야, 또 네가 냈어? 다음에는 진짜 내가 살 거야.”
“그래. 그렇게 해.”
“말만 맨날 그렇게 하고 또 네가 낼 거잖아. 아무튼 잘 먹었어. 호텔로 데려다줄게.”
한나가 차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 할 때 나는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전하고 주차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건너편 신호등에 외로이 서 있는 노숙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Help me’라 쓰인 꾸깃꾸깃한 A4용지를 들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다가오는 나를 향해 ‘Hi’ 하며 친근하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먹어요.”
나는 그에게 달러 대신 음식을 건넸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내가 방금 레스토랑에서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포장된 음식 봉투를 받아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따뜻한 브리토의 향기가 그의 코를 자극했다.
“고마워요.”
그는 웃으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노숙자가 도와 달라고 한 의미의 속뜻을 나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이 되었든 오늘 저녁은 꼭 한 끼를 제대로 챙겨 먹었으면 했다. 돌아서서 다시 길을 건너는 나의 등 뒤로 그가 말했다.
“신의 가호가 있길.”
그래.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나도 속으로 생각하며 길을 건넜다.
샌프란시스코 체류는 3일간 이어졌다. 오늘은 혼자서 농구 경기를 보러 나왔다. 한때 NBA에 빠져서 한재이와 쓰러질 때까지 농구만 하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공으로 하는 모든 스포츠를 좋아했다. 관심이 가는 종목이 생길 때마다 늘 내게 함께하자고 졸라 댔었다. 그 덕에 나는 지금도 농구를 좋아한다.
내가 한재이와 늘 붙어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의 취미를 흡수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끊임없이 무언가에 빠지고 몰두하는 그에 비해 나는 금방 좋아지는 것이 별로 없었다. 조금 무심한 성격이기도 했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 나의 취미는 그냥 한재이 자체였었나 보다.
경기가 끝나고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혼자 도시를 헤매고 다니는 것이 쓸쓸하게 느껴져 나 자신에게 무언가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모자와 후드 티, 손수건 같은 것들을 구경하다 구석에 놓인 바다사자 인형을 집어 들었다. 멍청하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 모습이 나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한 마리를 들고 와 카운터에서 계산했다.
호텔로 돌아와 침대 위에 누웠다. 사 들고 온 바다사자 인형을 봉투에서 꺼내 베개 옆에 두었다. 털이 북슬북슬한 인형을 내 돈 주고 산 게 오랜만이다.
“…….”
사람들이 너무 외로우면 정물에 대고 말을 건다고 하는데, 그 유혹이 너무 강해 나 역시 아까부터 고민 중이었다. 문득 무인도에서 배구공을 친구 삼아 놀던 톰 행크스의 영화가 떠올랐다. 거기까진 가지 말자. 다짐하고 있었지만 바다사자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며 자꾸 말을 걸었다.
별거 없었다. 웅웅 하고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 다였다. 사람 말은 못 하는 것이 확실해 보여 나는 마음 놓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답장이 안 오네.”
바다사자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어제 전화해도 안 받던데 다시 해 볼까?”
이번엔 말이 없었다. 하지 말라는 뜻인가 보다.
“메시지라도 보내 볼까. 농구 보고 왔다고 하면 대꾸해 주려나.”
바다사자가 웅웅거리며 긍정했다.
“사실 재이는 시카고 불스 좋아하는데.”
내가 원망스럽게 쳐다보자 그때부터 바다사자는 말이 없어졌다. 나는 스스로가 우스워서 천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음 주에 뮌헨 비행이 잡혀 있었다. 당연히 한재이와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답장을 주지 않는 통에 일정 공유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건강하게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과 질척대는 것은 다르기에 적당한 균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때 갑자기 인형의 배 밑 부분이 밝게 빛났다.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었다. 바다사자 밑에 끼워 두었던 휴대폰을 얼른 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한재이였다.
[전화 못 받아서 미안. 계속 튀빙겐에 있었어.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야.]
내용을 보니 납득이 갔다. 잠깐의 생각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응. 깨어 있었어? 한국은 아직 새벽 아닌가.
운전 중인 듯했다.
“비행 나왔어. 샌프란시스코. 많이 늦었는데 이제 집에 가는 거야?”
-응. 한번 들르면 어머니가 잘 안 놔주시거든. 요즘 착한 아들 흉내 내는 중이라서.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넋두리 들어주기.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그의 목소리는 피곤해 보였지만 톤은 밝았다. 어차피 운전해야 하면 시간은 넉넉할 테니 조금 길게 통화해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어제 한나를 만났던 일과 오늘 농구 경기를 보러 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봉제 인형에 대고 혼잣말을 중얼거린 것은 비밀에 부쳤다.
“아, 다음 주 금요일에 뮌헨 비행 있어.”
-오랜만에 잡혔네. 얼마나 머무는데?
“이틀.”
-그래…….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대화가 멈췄다. 그리고 서로 눈치를 보는 듯한 시간이 이어졌다. 너무 매달리지 않는 선에서 내가 다시 직진했다.
“괜찮으면 토요일 점심 같이할래?”
저녁이 아닌 점심을 제안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저녁보다 가볍게 응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두 번째는 지난번처럼 내가 이상한 흑심을 품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대답에 조금 뜸을 들였지만 거절하진 않았다.
-그래. 호텔 알려 줘. 데리러 갈게.
버릇같이 나타난 한재이의 친절함이 불쑥 내 마음을 찔렀다. 그 덕에 벌써 마음은 한국으로 귀국해서 다시 뮌헨 공항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렇게 십여 분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신변에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확인한 우리는 전화를 끊었다. 총 통화 시간 25분. 최근 들어 한 전화 중 가장 길었다. 누가 들으면 뭐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냐며 놀릴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알 수밖에 없는 사항이다. 다른 통화들은 모두 5분을 채 넘기지 못했었다.
천장을 향해 있던 고개를 돌려 슬쩍 바다사자 인형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입을 다문 채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녀석의 배 부분을 쓱쓱 쓰다듬었다. 잘했어. 동지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 * *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3일 정도 이어진 오프 동안 나는 열심히 운동했다. 서울의 초겨울은 독일의 혹한기처럼 추웠기에 밖으로 나가는 것에 점점 더 큰 각오가 필요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뮌헨으로 가는 A350의 조종을 맡았다. 방금 다른 한 명의 기장과 함께 5시간의 전반부 비행을 끝낸 뒤 시간에 맞춰 대기 중이던 후반부 팀에게 조종석을 내주었다.
나는 콕핏을 나와 비즈니스 클래스의 가장 뒷좌석으로 이동했다. 오늘 자리에 여유가 있어 좁은 승무원 벙커 대신 쉴 자리 한 곳을 확보해 두었다.
“기장님, 라면이라도 끓여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다른 일 보시죠.”
“네. 뭐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사무장이 여분의 담요를 가져다주고 사라졌다. 기내는 모두 점등되어 조용하고 어두웠다. 나도 잠을 자기 위해 안대 하나를 뜯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옆 좌석에 있던 승객이 나를 보고 놀란 얼굴로 말을 걸었다.
“어머, 조종하시는 분도 여기서 쉬시는구나. 몰랐네.”
그녀는 6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나는 살짝 묵례를 해 주었다.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그녀가 슬쩍 등받이를 세우고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근데 조종사가 여기 와 있으면 비행기는 누가 조종해요?”
“지금은 다른 동료가 조종 중입니다. 교대 시간이 있거든요.”
“그렇구나. 신기해라. 비행기 조종사 되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공부 열심히 했겠네. 부모님이 좋아하시죠?”
그녀는 계속 말을 걸고 싶은지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이며 내게 질문을 던졌다.
“네, 좋아하셨어요. 많이 응원해 주셨거든요.”
“아유, 그럼 좋아하지. 돈도 많이 번다 들었는데. 우리 아들은 공무원이거든요.”
“그러시군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어요. 효자예요. 전화도 자주 하고.”
낭패다. 그때부터 그녀는 묻지도 않은 아들의 이야기를 한참이나 내게 털어놓았다. 덕분에 나는 그녀의 아들이 교육청 8급 공무원에 초등학생 두 딸을 둔 인천 시민임을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 살아온 인생이 스스로 벅차서 자꾸만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게 된다던데. 그녀 역시 그런지 처음 보는 나에게 자꾸만 자신의 인생을 들려주었다.
“……그래서 한사코 내가 안 간다고 하는데도 비행기 태워 주겠다고. 엄마 죽기 전에 한 번 다녀오시라고 하더라니까요.”
“아드님은 같이 안 오셨나요. 어머님 혼자서 다니시기 불편하실 텐데요.”
“공항에 우리 딸이 마중 나와 있어요. 딸은 런던에서 직장 다니는데 내가 온다고 휴가를 냈거든요.”
“그럼 런던으로 가시지 그러셨어요. 거기가 더 볼 게 많을 텐데.”
나는 겸손하게 뮌헨을 깎아내리며 콧대 높은 영국 편을 들어주었다. 한재이가 들으면 난리를 칠 것이다.
“내가, 그…… 독일에 와 보고 싶었어요. 생각나는 사람도 있고 해서.”
“지인이 계신가 보군요.”
지인이라는 말에 그녀는 살짝 부끄러워하며 그 정도 사이는 아니라고 웃었다. 그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나는 그 사람이 아마 그녀의 첫사랑이거나 옛 애인쯤 될 거라고 짐작하게 되었다.
“처녀 때 내가 다니던 교회 선교사로 오신 분인데. 이름이 바우만이었어요. 키가 크고 목소리가 멋있었지. 두 달간 계셨는데 나중에 뮨헨으로 놀러 오라고 주소를 주고 가셨거든요.”
그녀는 갑자기 트레이 밑에 올려 두었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코팅이 된 오래된 종이 한 장을 보여 주었다.
“교회 이름이네요.”
“아, 이게 교회 이름이에요? 집 주소인 줄 알았는데. 하긴 찾아갈 것도 아닌데 상관없지 뭐.”
휘갈겨 쓴 독일어는 나조차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녀의 연배를 보아 벌써 40년도 더 된 것 같은데 아직도 메모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교회는 아직 그대로 있을 것 같은데 찾아가 보시죠. 반가워하실 겁니다.”
“기억도 못 할 거예요.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고. 우리 나이가 되면 죽어서 못 만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거든.”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주소가 적힌 종이를 다시 지갑에 넣었다. 그리고 가방을 품에 꼭 끌어안고 즐거운 상상을 하듯 소녀처럼 웃었다.
“그래도 꼭 한번 가 보고 싶더라고요. TV에서 뮨헨만 나오면 유심히 살펴보고 그랬어요. 이제 남편 먼저 보내고 3년 지났으니 가 봐도 되지 않나 싶어서. 거기는 어떤 사람들이 사나 구경도 해 보고 싶고.”
“첫사랑이시군요.”
“아유, 후후후. 내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 별소리를 다하네. 늙으면 이렇게 돼요. 부끄러운 것도 없어지고 말만 많아지고. 미안해요. 내가 조종사님 쉬는 데 방해를 했네.”
뒤늦게 자신이 너무 많은 시간을 뺏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미안해했다. 더는 말 걸지 않겠다는 듯 가방을 내려놓고 담요를 다시 올렸다. 그래서 나도 다시 안대를 쥐었다가 문득 한마디를 내뱉었다.
“저도 첫사랑이 뮌헨에 살아요.”
그러자 그녀가 담요를 쥐었던 두 손을 맞잡으며 좋아했다.
“어머나, 몇 살 때 만났어요?”
“열다섯 살 때요.”
“첫사랑 맞네. 조종사님 결혼은 아직이에요?”
“네, 아직이네요.”
거기까지 말을 마친 나는 다시 손에 들고 있던 안대를 보여 주며 웃었다. 우리의 작은 수다는 그렇게 종결되었다.
편안한 자세로 좌석에 누워 조금 전 대화를 곱씹었다. 결혼은 아직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직이라는 건 언젠가는 하겠다는 건가. 스스로에게 반문하며 눈을 감았다.
지금 잠을 좀 자 두어야 내일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다. 뻔뻔하지만 조종을 위한 체력 보충이 아닌 데이트를 위한 시차 적응이 필요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 피곤했던 터라 별다른 노력 없이도 금방 졸음이 몰려왔다. 기내를 꽉 채운 엔진소리가 내게는 자장가처럼 편안하게 들렸다.
승객 310명을 태운 A350. 우리는 지금 유라시아 대륙의 한가운데 떠 있다. 시속 1,000킬로의 속도로 70톤의 연료를 태우고 있는 비행기는 나의 첫사랑이 있는 뮌헨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 *
나는 한 시간째 호텔 욕실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샤워를 마친 지는 한참 되었는데 거울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너무 힘을 준 것 같은 옷차림은 부담스러웠지만 대충 입고 나가는 것은 더 싫었다. 그냥 맨 처음 집었던 청색 셔츠를 입기로 하고 지금 입은 옷의 단추를 풀었다.
상체를 탈의한 내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최근 운동을 열심히 한 덕인지 근육에 잡힌 선들이 살아나고 있었다. 희미해졌던 복근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처음 한국에 올 때 빠졌던 살도 다시 불어났고 8km씩 뛰던 러닝머신을 10km까지 늘리는 데 성공했다. 요즘 나는 운동 중독에 빠진 사람처럼 남는 시간 대부분을 체력 관리에 쏟고 있었다.
셔츠 단추를 잠그고 두꺼운 재킷을 걸쳤다. 그 위에 폭이 넓은 회색 머플러를 두르고 시계를 찼다. 바지 뒷주머니에 지갑을 넣은 뒤 조금 서두르기 시작했다. 빠르게 휴대폰을 챙기고 복도로 나와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갔다.
호텔 앞에는 낯익은 포르쉐가 이미 대기 중이었다. 조수석 문을 열자 한재이가 듣고 있던 라디오 소리를 줄였다. 차 안 가득 퍼져 있는 그의 향수 냄새가 가슴을 간지럽혔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차에 오르는 나를 보며 그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넌 진짜 시간 지키는 게 무서울 정도로 정확해.”
한재이가 12시 정각으로 변한 차량 시계를 손으로 가리키며 나를 놀렸다. 그야 난 속으로 늘 시간을 세고 있으니까. 그에 비해 한재이는 대부분 먼저 기다리는 편이다. 일 때문이 아니라면 약속 시각에 지각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지금도 아마 10분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안전벨트를 채우고 난 뒤 운전석에 앉은 한재이를 쳐다보았다. 가만 보니 꽤 차려입은 모습이다. 클래식한 보카시 정장을 쓰리 피스로 맞춰 입은 그를 보고 조금 의아해서 물었다.
“오늘 다른 약속 있어?”
“아, 응. 이따 저녁때.”
그렇게 말하며 그는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저녁 약속이라. 이제 겨우 12시니까 넉넉잡아 서너 시간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어쨌거나 멋지게 차려입은 한재이를 몇 시간은 독차지할 수 있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우리는 뮌헨 시내에서 외곽으로 빠져나왔다. 작은 언덕을 넘어 마을 하나를 통과했다. 그러다 평지에 펼쳐진 좁은 2차선을 한참 달려 오솔길로 들어갔다. 그 끝에 다다르자 큰 농장 하나와 레스토랑이 보였다. 지역 시장에 식재료를 대고 있는 농장 주인이 운영하는 식당이다. 내가 한재이에게 우겨 멋대로 예약한 장소이기도 했다.
“와 본 적 있어?”
내가 물었다.
“아니, 처음이야. 근데 네가 좋아할 만한 곳이긴 하다.”
그는 곧바로 후진 기어를 넣고 빈자리에 차를 주차했다.
커다란 떡갈나무가 베어진 입구를 지나 작은 홀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지나가는 서버에게 예약 명단을 확인하고 안쪽 깊숙한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50년대에 지어졌던 건물을 개조한 아주 오래된 식당이다. 옆에 있는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제철 요리만을 제공하는 곳인데 고기 요리가 아주 일품이라는 말을 들었다.
음료와 함께 한재이는 샐러드를, 나는 수프를 먼저 선택했다. 메인 요리를 고르는 와중에 서버가 토끼 요리를 권했다.
“어제 들어와서 고기도 신선하고 좋아요.”
“그렇다는데?”
한재이가 태연히 내게 토끼 고기를 밀어 넣으려 했다. 그런 그를 장난스럽게 흘겨본 뒤 서버에게 메뉴판을 돌려주며 말했다.
“돼지 목살로 할게요.”
서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한재이 쪽을 쳐다보았다.
“저는 송아지로 하죠.”
“좋습니다.”
서버는 그 말을 끝으로 메뉴판과 함께 테이블 위에 세팅된 와인 잔을 회수해 갔다. 다시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한재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과연 그는 오늘 무슨 마음으로 나와 만나고 있을까. 이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내가 지칠 때까지 기다려 주려는 걸까. 나는 아까부터 그의 반응을 민감하게 관찰 중이었다. 내게 남은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보고 싶었다.
우리 자리에는 작은 창 하나가 나 있었다. 그 너머로 농장 옆에 펼쳐진 언덕 들판이 보였다.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소소하게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보다 구름이 좀 무겁게 내려와 있는 것이 보였다.
“비가 올 거 같은데.”
나는 직업병처럼 늘 날씨를 읽는다.
“잠깐 내리다 지나갈 거야. 일기 예보 체크했거든.”
그가 걱정 말라는 듯 말하며 밀빵을 조금 뜯어 입에 넣었다. 저녁 약속 때문에 날씨를 체크한 걸까. 누구를 만나는지 궁금했지만 너무 사사건건 물어보는 건 별로일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대신 몇 시까지 가야 하는지만 확인해 두자 싶었다.
“7시 약속이라서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래? 그럼 6시까지는 나랑 계속 있을 수 있겠네.”
태연하게 욕심을 내는 내 말에 한재이가 물을 마시다 말고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포크를 들어 서빙 된 샐러드를 섞기 시작했다. 입가에는 알 수 없다는 듯 미소를 걸고 그가 중얼거렸다.
“너 좀 변했어.”
“뭐가.”
“표현 같은 거 잘 안 했잖아. 예전에는 내 앞에서도 체면을 좀 차린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있었는데. 요즘은 통화할 때도 그렇고 메시지 내용도 보면 너답지 않아서 좀 놀라워.”
“변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나는 그를 쳐다보며 동의를 구하듯 말했다.
“그래, 나쁜 건 아니지. 그래도 혹시 내가 전에 한 말 때문에 무리하는 거라면 안 그래도 돼. 나 때문에 원래의 너를 잃어버리는 건, 마음이 안 좋아.”
다시 우울해진 한재이의 목소리에는 공허함이 묻어나 있었다.
“그게 왜 잃는 거야. 그냥 표현 방식이 솔직해진 거지. 아님 없던 애교가 생긴 거라고 생각하든지.”
그와의 대화가 너무 가라앉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나는 농담을 던졌다. 여전히 불행한 서사의 한가운데서 헤매고 있을 한재이가 나를 만나서까지 그 괴로움을 복기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런 마음이 전해졌는지 그가 천천히 샐러드를 뒤적거리며 작게 웃었다.
“그래, 애교. 없던 게 생긴 것 같긴 하네.”
한재이는 내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단어를 한 번 더 곱씹었다. 그리고 이번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린 하늘은 구름이 조금 더 내려와 있었다.
나는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너 나 때문에 한국 들어와 있었을 때. 내가 아프다고 우리 집에 수프 사서 들렀던 거 기억나? 와인 잔 깨져 있었잖아.”
“응.”
“그거 내가 화가 나서 진열대 부순 거야. 기젤라가 왔다고 나한테 말도 없이 짐 싸서 나가 버린 상황이 너무 슬펐거든. 네가 결혼할 거 뻔히 아는데도 같이 여행 다니고 지내다 보니 또 혼자 착각에 빠져 있었나 봐.”
묻지도 않았던 지난 이야기를 들은 한재이가 조금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몰랐네.”
그래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나 더 꺼냈다.
“그리고 제주도 호텔에서 와인 마시고 취했던 날 생각나? 나 그날따라 네가 너무 좋아서 많이 힘들었어. 맞은편에 앉아서 계속 웃어 주는데 나한테만 그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그날 혼자 방으로 들어가는 게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나.”
“…….”
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을 지켰다.
사실 이것은 내 체면과 짝사랑의 역사였다. 이제 와 이런 고백을 하는 게 부끄럽기도 했지만, 내가 얼마나 그를 치열하게 품고 있었는지 증명해 주는 일이기도 했으니 말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현실을 살아가라고 충고했던 크리스의 훈계도 그에게 들려주었다. 우리가 심취해 있던 그 ‘완벽한 연인 놀이’의 결과를 보라고. 흠집 하나 없는 사랑만을 완성하려던 그와 나는 처참하게 실패했음을 이제 인정해야 한다. 자존심과 체면을 버린 나는 이미 많이 변했다는 걸 알려 주었다.
한재이는 포크를 놓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내게서 들은 말을 정리 중인 듯했다. 기적을 바라지는 않는다. 오늘은 다만 그중 몇 개라도 닫혀 있는 그의 마음에 문을 두드렸기를 바랐다.
지속되는 그의 침묵을 견디다 못한 내가 다시 농담으로 분위기를 틀었다.
“왜 이렇게 조용해. 내 구애가 너무 열렬했나.”
한재이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말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허공을 향해 있던 시선을 내게 향해 돌린 그가 동감한다는 듯 살짝 웃었다.
“뭐…… 듣기 좋은데.”
조금 의미심장한 그 말에 나는 물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메인 요리가 나왔다. 덕분에 우리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요즘 자주 한식을 먹고 다닌다는 나의 말에 그가 관심을 보였다. 추천하는 식당도 몇 개 알려 주었다. 이야기는 도란도란 흘러가고 있었다.
“비 오네.”
갑자기 구멍이 뚫린 듯 굵은 비가 쏟아졌다. 역시 내 예상대로 구름이 꽤 무거웠던 모양이다. 건조하게 말라 가고 있던 겨울나무들이 오랜만에 단비를 마셔 좋다는 듯 가지를 흔들었다.
창틀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남은 음식을 즐겼다. 요리의 재료는 신선했고 조리 상태도 좋았기에 점심은 꽤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우리는 디저트를 주문했다. 그는 에스프레소와 사과 파이를, 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얹은 브라우니를 먹었다.
“커피 아직도 안 마시나 보네.”
“응, 운동량을 늘리고 있거든.”
그 말에 한재이가 내 어깨부터 치골까지 빠르게 훑었다. 이미 그에게 구석구석 정복당한 몸이라 새로울 것이 없겠지만, 나는 요즘 근육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이유를 묻는 그의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자기만족 같은 거야. 운동해서 몸이 좋아지는 건 성취도가 크니까.”
하지만 더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아 보자면, 혹시라도 우리가 다시 잘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그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서였다. 남자는 시각적인 동물이라서 파트너의 몸에 쉽게 반응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몸도 훑어보게 된다.
한재이는 슈트가 어울리는 몸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알아서 가지고 있는 옷들의 대부분이 저런 스타일이다. 어깨가 매우 넓고 다리가 길어서 한 벌로 맞춰진 옷들이 유난히 잘 받는다. 그래서 오늘은 대체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걸까. 잘 빠진 그의 슈트 핏을 보니 자꾸만 호기심이 일었다.
디저트를 물리고 나니 담당 서버가 다가왔다.
“또 멋대로 계산하면 오늘은 용서 안 할 거야.”
나는 그에게 미리 경고를 날리고 서버에게 카드를 건넸다. 버릇처럼 지갑을 꺼내려던 한재이가 나의 말에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이제 네가 좀 무서워지려고 해.”
그러면서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갈까?”
“비가 많이 오는데.”
“차 바로 앞에 세워 두었잖아. 뛰어가면 되지.”
그의 말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머플러를 둘렀다. 날은 아직 밝은데 쏟아지는 비 때문에 기온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우산을 빌려주겠다는 직원의 말에도 우리는 괜한 객기를 부리며 거절했다. 매번 비를 맞고 돌아다니던 어릴 때 기분이 들기도 해서였다.
주차장까지 가는 길에 군데군데 생긴 진흙 웅덩이가 보였다. 다행히 그가 차를 세워 둔 곳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였다. 한재이는 고민 없이 먼저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를 쫓아가며 질지 않은 땅을 골라 밟았다. 앞서가던 한재이가 잠시 뒤를 돌아보며 내가 따라오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때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차량이 꽤 빠른 속도로 커다란 웅덩이를 밟고 지나갔다.
“서진아!”
그 말과 동시에 웅덩이의 빗물이 허리까지 튀어 올랐다.
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는데 문제는 내가 아니었다. 한재이의 옷이 흙탕물에 더러워졌다.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낭패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던 우리는 줄줄 내리는 빗물을 그대로 맞아 버렸다.
“젠장.”
“제길.”
둘 다 동시에 독일어 욕이 튀어나왔다. 갑작스러운 장대비에 매너 없는 차량, 나는 후자를 원망했는데 그는 어느 쪽에 한 욕설인지 모르겠다. 이러나저러나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제대로 살펴보니 문제가 꽤 심각했다. 젖은 것도 그랬지만 옷에 진흙 얼룩이 졌다. 한껏 꾸미고 왔던 우리는 처참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 호기롭게 우산을 거절했던 방금 전 일이 후회되어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호텔로 데려다줄게. 너 그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
그가 곧바로 시동을 걸며 히터를 틀었다. 거세게 들어오는 뜨거운 바람이 금세 공기를 덥히기 시작했다. 차량은 빠르게 도로에 진입했고 나는 젖은 재킷과 머플러를 풀어 뒷좌석에 던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더 큰 문제를 깨달았다. 내가 호텔로 가면 그는 집으로 돌아가겠지. 그러면 우리 데이트도 여기서 끝날 것이다. 6시가 되려면 아직 3시간은 더 남았는데. 아쉬운 마음에 속상한 기분이 되었다.
한동안 내가 말이 없자 운전 중이던 한재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콘솔 박스에서 티슈를 꺼내 주었다.
“우선 닦아. 머리도 젖었어.”
대답 없이 티슈를 받아 들고 얼굴과 목 주변의 물기를 닦았다. 나보다는 그가 더 젖었는데 몸에 손을 댈 수가 없어 답답했다. 이제 나는 날씨도 원망하게 되었다.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한재이는 매우 천천히 운전 중이었다. 빗소리와 함께 쉴 새 없이 앞 유리를 닦아 내는 와이퍼 소리만 차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물기를 닦아 낸 휴지를 동그랗게 말아 손에 쥐었다.
다시 생각해도 독일의 겨울 날씨는 정말 최악이다. 이렇게 비를 퍼붓다가도 한두 시간만 지나면 멀쩡하게 그칠 것이 뻔하다. 원망스럽게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번씩 그가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자 한재이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아니면 우리 집으로 갈래?”
나는 그를 쳐다보았고 우리는 잠깐 눈이 마주쳤다.
“혹시 갈아입을 옷 안 가지고 왔으면. 내가 빌려줄게.”
물론 나는 갈아입을 옷을 세 벌이나 가지고 왔지만, 그가 만들어 준 핑계에 두말하지 않고 올라탔다.
“응. 빌려줘.”
내 대답에 그가 조용히 차선을 이동했다.
한 달 만에 다시 돌아온 한재이의 아파트는 조금 더 사람 사는 냄새를 풍겼다. 거실 입구에는 못 보던 작은 커피나무가 놓여 있었고 아침에 물을 준 듯 흙이 젖어 있었다.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어 내고 젖은 재킷과 머플러를 한재이에게 건넸다.
“먼저 씻어. 옷 찾아서 가져다줄게.”
그는 내게서 받은 재킷을 툭툭 털어 옷걸이에 걸어 준 뒤 머플러는 넓게 펼쳐 소파 위에 늘어놓았다.
한재이의 아파트는 손님용 욕실이 따로 없어 한 사람씩 씻어야 한다. 내게 먼저 순서를 양보해 준 그가 빌려줄 옷을 찾으러 제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조용히 욕실로 들어왔다.
안에서 아무 생각 없이 셔츠 단추를 풀고 있는데 그가 갈아입을 티셔츠와 면바지를 들고 욕실로 들어왔다.
“이거, 네 옷이야. 예전에 우리 집에서 자고 갔을 때 두고 간 거. 바지는 내 건데 불편하면 다른 거로 줄게.”
“고마워. 빨리 씻고 나올게. 너도 감기 들겠어.”
“천천히 해.”
그러면서 수납장에서 타월을 꺼내 거치대 위에 걸어 주었다.
문득 함께 목욕할 때가 생각났다. 그와 욕조 안에서 이야기 나누는 것이 좋아서 물이 다 식을 때까지 머물렀던 적이 많았다. 살을 맞대고 있는 걸 좋아했던 한재이는 내가 목욕하려 하면 늘 불청객처럼 멋대로 들어왔었다. 그렇게 1시간이 2시간이 되고, 2시간이 다시 3시간이 되기 일쑤였다.
갑자기 그때 생각이 든 이유는 지금도 그때처럼 불쑥 들이닥쳐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한재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요한 것들을 챙겨 주면서도 정작 내게는 관심이 없어 보였기에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옷을 벗어 욕조 위에 걸쳐 놓았다. 다행히 꾹 눌러 참은 마음이 터지기 전에 한재이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곧바로 바지와 속옷을 벗었다. 그와 같은 공간에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체가 되어 있는 느낌이 묘했다. 뜨거운 샤워 물줄기를 맞으니 괜히 더 열이 오르는 것 같아 물 온도를 낮추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지저분한 상상을 말끔하게 씻어 낸 나는 그가 마련해 준 옷으로 단정히 갈아입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비에 젖은 옷들을 들고 욕실에서 나왔다.
“차 끓였어. 마시고 있어.”
그가 부엌에서 나를 부르며 허브티를 건네주었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을 타월로 닦아 내며 그의 옆을 스쳤다. 기분 좋은 허브 향을 맡으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러다 문득 한재이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마워.”
찻잔을 들어 고마움을 표하자 그제야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내가 와서 불편한가. 물론 나는 그의 저녁 약속 시각이 되기 전에 호텔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원래 받기로 했던 선물에 대한 주장일 뿐이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곧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그가 저 안에서 나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섹스를 나눈 지 꽤 오래되었기에 이런 종류의 분위기는 나를 다시 곤란하게 만들었다.
아예 몰랐다면 상상하기 힘들었겠지만 나 역시 그의 몸 구석구석을 알고 있다. 어디를 만지면 흥분했었는지 또 그럴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세세한 것 하나하나까지 기억하고 있었기에 생각의 나래는 멈출 기미가 없어 보였다. 허브티를 마시며 숨을 골랐다.
빗줄기는 조금 약해져 있었다. 부엌에 난 작은 창가 옆에 놓여 있는 초콜릿 상자를 발견했다. 도둑고양이처럼 멋대로 하나를 집어 먹었다. 그 옆에는 먹다 남은 파스타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고 치우지 않은 접시들도 쌓여 있었다. 혼자 사는 한재이의 흔적들이다. 나도 모르게 모두 정리한 뒤 식기 세척기를 돌렸다.
“뭐 해?”
어느새 샤워를 마친 그가 다가왔다. 한껏 차려입었었던 아까에 비하면 수수한 니트 차림이다. 나중에 다시 갈아입으려나. 그는 내 옆으로 다가와 자신의 몫의 허브티를 만들었다. 젖은 머리에서 샴푸 냄새를 풍기는 그를 태연히 무시하는 것이 힘들었다. 슬쩍 옆으로 비켜난 뒤 식탁 의자에 앉았다.
“사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다 정리했어?”
“투자금은 회수 안 하고 그대로 두려고. 최 변호사한테 미안한 것도 있고. 기존에 벌였던 수임 건들만 정리했는데 몇 개는 아직 여기서 처리 중이야.”
그가 저 멀리 거실 테이블에 흩어진 서류들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책임감 있는 사람이니 마무리는 해 주고 있을 거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정리되면 독일에서 다시 일을 하려는 걸까.
나는 궁금했던 그의 신변 사항들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물어보았다. 한재이는 담담한 투로 진행되어 가는 일들을 내게 말해 주었다.
대형 로펌으로 옮기기 전 몸담았던 곳에서 다시 계약을 원한다고 했다. 또 친하게 지내던 선배 변호사가 자신의 회사로 오라는 오퍼를 주기도 했다고. 물론 그에게는 좋은 소식이지만 나는 좀 슬펐다. 잠시 쉬어도 될 텐데. 한재이는 내가 없는 인생을 차곡차곡 꾸려 나가려는 모양이다.
비 오는 날의 티타임은 조용히 이어졌다. 그때 식탁 위에 있던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네. 메시지 받으셨나요? 그러네요, 비가 많이 오죠.”
한재이는 나를 피해 잠시 자리를 떠났다. 약속 상대인 거 같은데 혹시 내가 방해되나. 시계를 보니 벌써 6시가 다 되어 간다. 감각의 시간은 상대적 개념이라더니 오늘 정말 신기하리만큼 빠르게 흘러 버렸다. 그와 헤어지는 것은 아쉬움이 남지만, 이미 한번 억지를 부렸으니 여기서 물러나야 한다.
한재이가 전화를 끊고 돌아왔다. 먼저 서둘러 선수를 쳤다.
“지금 나가야 하지? 난 택시 불러서 가도 되니까 신경 쓰지 마.”
“괜찮아. 저녁 먹고 가.”
“주인도 없는 집에서 나 혼자 뭘 먹으라고.”
나는 웃으며 가볍게 그의 말을 넘겼다.
“약속 취소했어. 별거 아닌 일정이어서.”
순간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게나 옷을 빼입고 나가야 할 정도였으면 중요한 약속 아니었나.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밖을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비가 많이 오니까.”
그러면서 무덤덤하게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아까보다 약해진 빗줄기가 조용히 난간을 두드리며 우리의 침묵을 대신해 주었다.
“응. 비가 많이 오니까.”
나도 그의 말을 주문처럼 반복하며 바깥소리에 귀 기울였다. 후드득 때리는 빗소리가 조금이라도 더 크게 들리기를 바라며 식어 버린 찻잔에 입을 다시 대었다.
상대방이 먼저 취소한 걸까. 아니면 나와 함께 있기 위해 그가 취소한 걸까. 후자였으면 좋겠다. 아니, 그렇다고 믿어야겠다. 내가 빨리 지치지 않으려면 이런 망상이라도 마음껏 누려야 하지 않을까. 행복한 착각에 빠진 나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한식 만들어 줄까?”
갑작스러운 나의 제안에 한재이가 쳐다보았다. 두 가지 이유로 당황했을 것이다. 첫 번째 나는 요리를 매우 못 하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그 메뉴가 한식이라서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반응을 침착하게 무시하고서는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설득했다.
“근처에 아시아 슈퍼마켓 있었잖아. 부대찌개 같은 건 쉽지 않아?”
“뭐, 그렇긴 한데.”
한재이는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 조금 화색이 도는 그의 표정을 보니 제대로 먹혀들어 갔음을 알았다. 역시 한식이 그리웠나 보다. 사실 뭘 먹든 나는 아무 상관 없었다. 그냥 그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다.
“어떻게 만드는지는 알아?”
그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음. 대충.”
“재료는 뭐가 필요한지 알고?”
“음. 찾아볼게.”
계속해서 구체적인 질문을 받은 나는 슬쩍 얼버무렸다. 그러자 한재이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피식 웃었다. 재료는 제가 알아서 사 올 테니 그동안 밥을 만들어 놓으라고 했다. 그건 한두 번 해 본 적이 있었기에 문제없을 것 같았다. 역할을 분담한 우리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나는 부대찌개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모른다. 다만 며칠 전에 이와 관련된 비디오 클립을 보았는데, 거기서 하는 말이 라면 수프를 넣으면 다 맛있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대충 레시피를 따라 해 본 뒤 혹시라도 실패하면 라면 수프를 넣을 생각이었다. 플랜 B의 유무는 언제나 내게 중요하다.
한재이가 재료를 사러 나가고 나는 밥을 만들었다. 그의 집에 계량컵이 없어 눈대중으로 물의 양을 맞추어야 했다. 매우 찝찝하고 기분이 껄끄러웠다. 다음번에도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르니 계량 도구들을 사다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때?”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찌개를 한 스푼 맛본 한재이가 내 물음에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맛은 없지는 않은데 너무 익숙한 맛이야.”
그에게서 숟가락을 뺏어 들고 내가 맛을 보았다. 나쁘지 않은데 좀 싱거웠다.
“수프 더 넣자.”
나는 애초에 이미 비밀의 플랜을 들킨 상태였다. 한재이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내 계획을 꿰뚫고 있었다. 자꾸만 수프를 넣으려는 나를 그가 말리며 옆으로 밀었다.
“간장 좀 줘 봐. 저기 두 번째 칸에.”
어느새 그가 지시하는 대로 나는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에이프런을 두른 건 난데 음식은 한재이가 다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둘이서 요리를 하는 건 처음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했는데 아직 처음인 것이 있었다니 놀라웠다. 아까부터 우리는 부엌을 왔다 갔다 하며 간을 맞추는 데 열을 올렸다.
“이제 괜찮은 거 같아.”
그가 만족한 표정으로 국물을 뜬 수저를 내게 내밀었다. 그 높이에 맞춰 조심조심 김을 불어 식힌 뒤 맛을 보았다.
“음.”
완벽하다. 정말 맛있었다. 내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그가 환하게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아무것도 서려 있지 않은 말끔한 미소였다. 그 표정이 너무 좋아서 나도 같이 웃었다.
어느새 시간은 8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늦은 저녁을 해치웠다. 한재이가 너무 맛있게 밥을 먹길래 그 모습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좀 없었다. 다른 반찬은 없었지만, 찌개 안에 수제 소시지까지 썰어 넣은 덕에 딱히 모자란다는 느낌은 없었다.
다만 부엌이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나 때문에 어지럽혀진 것 같아서 그냥 가기가 미안해졌다. 먹은 그릇을 모으며 셔츠를 걷어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있어. 내가 치울게.”
“같이 해. 그러면 금방 하잖아. 치워만 주고 갈게.”
나는 더 머물 생각이 없음을 담백하게 그에게 알렸다. 이미 두 번의 행운을 받았으니 더 욕심부릴 생각은 없었다. 그릇과 수저를 겹치고 식탁을 정리하는 나를 한재이는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모른 척 내버려 둔 채 나는 계속 자리를 정리했다. 그래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좀 궁금했다.
“왜.”
그러자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냥. 우리가 뭐 하는 건가 싶어서.”
하긴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어이없을 수도 있다. 처음엔 그만두자고 했다가 다시 연락을 시작하고, 요즘엔 하루 걸러 한 번 꼴로 통화한다. 게다가 오늘은 예정보다 훨씬 더 오래 함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모든 것이 좋았는데 그는 그 모든 것이 힘들었나 보다.
“나랑 같이 있는 거 많이 불편해?”
식기 세척기 안에 그릇을 넣고 담담하게 그에게 물었다.
“그런 게 아니라, 마음이 괴로워.”
그렇구나. 그건 이해가 간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싫지 않다면, 이런 시간을 함께 보내며 제 마음을 방어하는 것이 꽤 힘들 것이다.
“그럼 그만 괴로워하고 빨리 돌아와.”
세척제를 넣고 버튼을 눌렀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다.
나는 뒤를 돌아 대꾸하지 않는 한재이를 확인했다.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해 곧게 꽂혀 있었다. 긴 침묵이 민망해질 정도로 그의 눈빛이 너무 진지했다. 농담이었는데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졌나.
“대충 치웠어.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정리하면 되겠다.”
어색한 기류를 깨고 부엌을 나왔다. 그리고 비에 젖었던 옷을 챙겼다. 현관 입구에서 굴러다니던 종이 가방 하나를 주워 그 안에 넣었다. 다행히 재킷과 머플러는 말라 있었다. 돌아갈 채비를 마칠 때쯤 한재이가 따라 나왔다.
“데려다줄게.”
나는 그의 앞을 막았다.
“비도 그쳤는데 걸어갈게. 멀지도 않은 거리니까.”
“왜.”
“뭐가 왜야. 좀 걷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갈게, 쉬어.”
“태워 준다니까.”
“그래, 고마워. 근데 진짜 좀 걷고 싶어서 그래. 간다.”
그의 표정에 스치듯 지나가는 아쉬움을 보았다. 그래서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부디 지금의 그 아쉬움이 다음에 만날 때는 더 커져 있기를. 차곡차곡 쌓여서 그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두려움의 저주를 지워 버리기를 바랐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아파트 문을 닫았다.
비는 그쳤고 날은 어두워졌다. 캄캄한 골목길을 걸으며 좋은 하루였음을 곱씹었다. 빗물에 젖은 골목이 미끄러워서 천천히 걸었다. 향하는 곳이 명확했기에 길을 헤매지는 않았다.
* * *
“매뉴얼 플라이트. 오토 파일럿 오프.”
비행기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뮌헨 공항에서 무사히 이륙한 우리는 어느새 인천 공항 영공으로 들어섰다. 나의 콜 아웃과 동시에 부기장이 바람의 방향을 확인했다. 11시간을 지치지 않고 날아온 비행기는 이제 착륙을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수동 조종으로 전환된 비행기의 펄떡임이 조종간을 타고 고스란히 내게 전해져 왔다.
인천 공항의 접근 관제소 교신 채널에 접속했다.
-Hello, Incheon control. Coreana 8334 heavy, request approach clearance. (안녕하세요, 인천. 코리아나 에어웨이 8334편 접근 요청합니다.)
-Good afternoon, Coreana 8334 heavy. Maintain 10,000 and standby. (안녕하세요, 코리아나 에어웨이 8334편. 만 피트 고도 유지하고 대기하세요.)
어쩐 일인지 공항 접근 허가를 받지 못하고 대기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잠시 당황했다.
-Coreana 8334 heavy, say intention. (이유가 뭐죠?)
그러자 같은 영공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비행기가 대답을 대신했다.
-We need to support Korean students. (우리는 한국 학생들을 응원해야 해.)
나는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부기장이 무릎을 치며 알겠다는 듯 말했다.
“아아! 오늘 수능이에요.”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는 듯 그가 웃었다. 그리고 교신 채널에 대고 응답했다.
-Roger that. Thanks guys. (맞아. 고마워.)
-Welcome to circling group. (써클링 그룹에 온 걸 환영해.)
-Still 10 minutes left. (아직 10분이나 남았어.)
-We’re already making a fifth round. (우리는 벌써 다섯 바퀴나 돌고 있다고.)
상공에서 대기 중이던 다른 비행기들도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씩 농담을 던졌다. 뒤늦게 합류한 우리 역시 웃으며 선회를 준비했다.
오늘 한국에서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이 열리고 있었다. 미국에서 하루를 벌어 쓰던 우리는 이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수능이 열리는 날은 영어 듣기 평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국의 비행기 이착륙이 30분 정도 금지된다. 연료 상황에 문제가 없는 한 시험이 끝날 때까지 상공에서 대기해야 한다.
물론 처음엔 나도 믿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중요한 시험이길래 국가 단위로 나서서 이러는 거냐고. 그러다 배경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이 하루의 시험을 위해 12년을 공부한다고 들었다.
사무장을 호출해서 대기 시간이 길어질 거라는 안내 방송을 부탁했다. 그녀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콕핏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 보니 부기장님도 수능을 보셨겠네요.”
사무장이 나간 뒤 내가 말을 걸었다.
“아오, 끔찍했죠.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지각할 뻔했거든요. 경찰차 타고 겨우 도착했어요. 입실 시간 5분 남기고 들어갔었나. 하하.”
“경찰차요?”
나는 무슨 말인가 싶어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아, 모르시는구나. 오늘은 회사 출근도 다들 늦게 했을걸요. 온 나라가 수험생들 실어 나르는 날이에요. 늦으면 경찰차 얻어 타는 건 흔한데. 사이렌 울리면서 가 주십니다.”
“놀랍네요. 그렇게까지 하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라 그러지? 이날은 한국인들 인생에서 제일 공평해야 하는 날, 그런 느낌이라고 보시면 돼요.”
듣고 보니 그의 표현이 적절한 것 같았다. 대학이라는 존재가 인생에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클 테니 적어도 오늘 하루만은 누구든 공평하게 시험을 치르게 해 주는 것이 맞겠지. 그러는 동안 우리 비행기는 벌써 영종도 상공을 한번 돌았다.
나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곧바로 회사가 제공하는 비행 훈련 코스를 시작했으며 그때부터 조종사가 되는 일과 상관없는 학문은 배우지 않았다. 한국의 수능에 해당하는 아비투어를 치르긴 했지만, 그 성적이 내 인생을 갈라놓을 만큼의 절대적 기준이 되지는 않았다. 무언가를 한 번에 정한다는 것은 내가 자란 사회에서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래서 이 단 하루 만에 치르는 시험으로 내가 조종간을 잡을 수 있을지 여부가 갈려 버린다면. 과연 나 역시 내 머리 위로 소음을 내는 저 비행기를 폭발시켜 버리고 싶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 모든 소동이 조금 더 이해되기 시작했다.
“시험이 엄청난 부담이겠네요.”
“그렇죠. 그래도 요즘은 다른 모집 전형이 있어서 좀 나은데. 저 때만 해도 정말 한 방에 인생이 결정 나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는 조금 억울하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부기장님은 그 인생이 한 방에 결정 나는 시험이 끝나고 뭘 하셨습니까?”
“저요? 저는 술 마셨죠. 답 맞춰 보고 망했다 싶어 가지고. 하하하.”
“그건 전 세계 공통 해결 방법이네요.”
우리는 웃으며 다시 한 바퀴를 더 돌았다. 사무장의 안내 방송이 나갔지만 클레임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수능이니까.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이 커다란 암묵적 룰에 모두 동의하는 것 같았다.
한동안 인천 공항을 둘러싸고 열 대가 넘는 비행기들이 관제 지시에 따라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선회했다. 마침내 시험이 끝나고 접근 명령이 떨어졌을 때 관제탑은 대기해 준 모든 민항기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또한 우리를 비롯한 다른 3대의 대한민국 국적기는 다른 외항사들에 인사를 전했다.
-Thank you for cooperation, take my turn. (협조해 줘서 고마웠다. 순번을 양보하겠다.)
-Thanks guys, good luck. (고맙다. 행운을 빈다.)
연료 상황 보고를 마친 두 대의 비행기를 먼저 보내고 우리는 조금 더 오래 상공에 머물렀다. 그리고 대기했던 비행기 중 가장 마지막으로 착륙 허가를 받았다.
-Coreana 8334 heavy, wind 310 at 17 runway 37 cleared to land. Welcome back. (코리아나 에어웨이 8334, 바람 310도 17노트. 37번 활주로에 착륙하세요. 귀국을 환영합니다.)
관제탑의 환영을 받으며 랜딩 기어를 내렸다.
* * *
관계자실에 들어와 운항 차트를 반납하고 난 뒤 비행 일정 담당자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굳어진 목 근육을 풀며 라운지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또 예정에 없던 비행을 부탁하려 하는 것 같았다.
“기장님, 제가 진짜 좋아하는 거 아시죠.”
일정 담당자가 빙그레 웃으며 태블릿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유부남에게 이런 식의 고백은 별로 받고 싶지 않은데. 소파 옆 의자에 앉는 그를 보며 나는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타박을 주었다.
“매니저님 자꾸 이런 식으로 저를 이용하시는군요.”
“진짜 마지막, 딱 한 번만 더 도와주시면 제가 다음에는 진짜 어마어마한 스케줄로 보답하겠습니다.”
그가 팔을 크게 휘두르며 과장된 몸짓으로 나를 웃겼다. 열흘 정도 오프라도 이어 주려나. 내 기준에서 어마어마하다는 건 그 정도는 되어야 할 텐데 말이다.
우리는 지난번 운항 승무원들의 모임에서 안면을 익힌 사이였다. 급하게 비행을 취소해야 할 때 도움을 청하려고 친하게 지냈더니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에 자주 놓이게 되었다. 내가 가족이 없는 싱글이라 그런지 요즘 그는 스케줄이 펑크 날 때마다 우선 내게 전화하는 버릇이 생겼다.
못 이기는 척 도착지를 물어보았다.
“어딘데요?”
“ULN, 울란바토르요. 금요일 저녁 비행이고 다음 날 아침에 바로 오시는 일정. 기장님은 또 어차피 다음 비행이 하노이시잖아요. 단거리 두 번 딱딱 뛰고 그대로 3일 오프. 어떠세요.”
“음.”
고려해 보는 듯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담당자가 기대에 찬 눈빛을 반짝였다. 뭐, 이렇게 또 환심을 사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렇게 하시죠.”
알았다고 승낙하자 그가 기뻐하며 곧바로 스케줄을 변경해 주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게 이렇게까지 애원할 사항도 아니었다.
나는 회사와 계약으로 묶인 사람이라 처우가 정직원만큼 좋지는 않다. 연봉이 높은 대신 회사가 스케줄을 변경하면 두말없이 이행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먼저 의사를 물어봐 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것이다. 또한 임시 스케줄에 투입된 사항들은 모두 기록으로 남는다. 아마 재계약 때 내게 유리한 증거들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재계약이라. 이직한 지 반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재계약에 관한 일들은 내게 회의적으로 다가왔다. 여기로 와야 했던 이유가 한번 사라졌고 이제는 머물러야 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4시간 정도 잠을 잤다. 그리고 저녁을 먹기 전 한재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곧바로 답장이 와서 통화가 되었다.
그에게 오늘 있었던 비행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수능이었네.
한재이는 날짜 지나는 것에 감각이 없어졌다고 했다. 회사에 다니지 않으니까 생기는 현상이라고. 평일과 주말의 구분이 없어지고 낮과 밤이 조금씩 밀리는 중이라 했다. 그렇게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없을 휴식이 되지 않을까.
나는 침실로 들어와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난 그런 감각을 잘 모르니까 신기했어. 넌 그래도 중학교 친구들 중에 수능 본 사람들 있지 않았어?”
-그랬지. 근데 다들 대학 가고 군대 가고 그러더니 이제는 대부분 연락 안 돼. 뭔가 그 시점을 시작으로 다들 각자의 길을 떠나잖아.
“그래도 아직 연락하는 중학교 친구가 있어?”
-응. 두 명 정도.
“나보다 더 오래된 사이네.”
나는 웃으며 질투하듯 말했다. 내가 모르는 친구일 테니 크게 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한재이의 모든 것이 욕심난다. 또한 내가 욕심내는 것을 그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다음 비행은 어디야?
그가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하노이.”
-그다음은?
“기억이 안 나네. 대만이었던 거 같기도 하고. 잠시만.”
나는 휴대폰을 스피커로 돌리고 일정표를 열었다. 그리고 남은 스케줄이 모두 아시아 지역임을 확인했다.
“유럽 비행은 이제 없어. 12월 중순쯤에 새로 스케줄이 나올 거야.”
“응…… 그래.”
그의 반응은 의외로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혹시 실망한 것일까. 하다못해 제네바, 밀라노만 가더라도 충분히 만날 수 있는 거리가 되니까. 지금까지는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나 혼자 애를 태우고 있는 줄 알았다. 어쩌면 지난번 그의 얼굴을 스쳐 갔던 아쉬움이 덩치를 조금 키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들어 볼까?”
-응?
“유럽 비행.”
-그럴 수도 있어?
한재이가 호기심을 가진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엎어져 있던 바다사자 인형을 쓰다듬었다. 털이 복슬거리는 나의 동지가 그대로 밀어붙이라며 배를 내밀었다.
“시도해 본 적은 없는데 가능하지 않을까. 대신 나도 동기 부여가 필요해.”
-무슨.
“같이 저녁 먹어.”
지난번엔 건전하게 점심을 먹었으니 이번에는 조금 더 나아가도 되지 않을까. 와인도 한잔씩 하고 가능하다면 밤늦게까지 함께 있고 싶었다.
한재이는 곧바로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래, 그러자.
쉽게 수락하는 그의 반응에 인형을 쓰다듬던 내 손길이 바빠졌다. 정말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건가. 아닌가, 이것도 그냥 거절하지 못하는 친절함의 일종인 걸까. 그렇게 살짝 의심이 들 때쯤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자고…… 가도 되고.
순간적으로 내가 주먹을 쥐는 바람에 쓰다듬던 바다사자의 얼굴이 찌그러져 버렸다. 발음을 살짝 흐리며 태연한 척 내뱉는 그의 말투에 웃음이 났다.
아직 일정 변경에 성공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된 이상 비행을 바꿔 주지 않으면 계약 파기 협박이라도 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 중이었다.
* * *
기온이 뚝 떨어졌다. 벌써 12월이다. 그동안 나는 비행 일정을 바꾸기 위해 일정 담당자와 기나긴 줄다리기를 했다. 그는 나를 위해 충분히 애쓰고 있었지만, 연말 성수기에 빡빡하게 들어찬 스케줄 탓에 함부로 여정을 변경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1주일이 가고 2주일이 넘어서야 겨우 다음 주말 독일 비행 하나를 얻어 낼 수 있었다.
레이오버는 3일. 그중 하루는 빈넨덴에 들를 생각이었다. 양어머니의 생일과 두 분의 결혼기념일이 겹친 주말이었기 때문이다. 성 니콜라우스의 날을 시작으로 크리스마스 연휴까지, 매년 12월은 슈미츠 가족에게 가장 바쁜 달이기도 하다. 아마 크리스마스는 함께 보낼 수 없을 테니 두 분의 결혼기념일을 핑계로 잠깐 들를 생각이었다.
“음, 붉은색으로 다시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내 부탁에 백화점 점원이 곧바로 다른 색의 장갑을 꺼내 보여 주었다.
오늘 종일 가족들의 선물을 골랐다. 메인이 될 큰 선물 하나와 뜯어보는 재미를 선사할 작은 선물들을 두세 개씩 준비했다. 양어머니의 생일 선물로 장갑을 고르다 색상을 정하기가 힘들어 고민 중이었다. 그런 내가 안타까웠는지 친절한 직원 한 명이 아까부터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어머님 피부가 하얀 편이시면 붉은색이 어울리실 거고요. 조금 더 중후한 느낌이 드는 걸 선호하시면 갈색이 무난하실 거예요.”
“그럼 붉은색으로 하죠.”
“네.”
그녀는 웃으며 꺼내 놓았던 다른 장갑을 정리한 뒤 내가 고른 물건들을 가지고 계산대로 향했다.
“다른 거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형님 거로 고르신 머플러는 이미 포장하고 있어요.”
양아버지에게는 스웨터를 준비했고 실비아를 위해서는 임산부에게 필요한 물건들로 잔뜩 구매해 놓았다. 그럼 이제 다 산 건가 싶었는데 아직 한 사람이 아직 남았다. 다음 비행이 언제 다시 잡힐지 모르니 한재이에게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싶었다.
구매를 마친 쇼핑백을 잔뜩 들고 다시 아래층으로 향했다. 나는 명품 같은 것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지만, 그가 좋아하는 브랜드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그곳에 들러 커프스 한 세트와 향수를 골랐다. 그러다 계산대로 가던 와중에 전시 중인 넥타이가 멋져 보여 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요 디자인은 색상이 두 가지인데, 지금 보시는 그레이하고 요기 블루 라인 두 가지예요.”
점원이 다가와 다른 색상 하나를 더 꺼내 보여 주었다. 둘 다 그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둘 다 주세요.”
나의 빠른 결정에 점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펼쳐 보였던 넥타이를 다시 가지런히 담았다. 물론 가격표는 보지도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물건을 살 때 가격을 확인하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아마 연 수입이 10만 유로를 넘어갈 때쯤부터였을 것이다. 무언가를 수집하는 취미도 없었고 쇼핑을 즐기는 편도 아니라서 월급은 차곡차곡 통장에 쌓여만 갔다. 운 좋게도 내 직업이 가져다주는 부의 크기는 보통 사람들의 평균치를 웃돌았기에 나는 소비의 자유도가 큰 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소위 말하는 재벌의 씀씀이와 비교하자는 것은 아니다. 내게 있어서 돈에 대한 욕망은 그리 크지 않아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품위를 유지할 정도의 재화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왔다. 흔히들 돈이란 건 부족해도 힘들지만 가질수록 더 욕심난다고들 하니까.
진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 내게도 그런 비슷한 느낌을 주는 존재가 하나 있긴 하다.
“다 같이 포장해 주세요. 모두 한 사람한테 선물할 거니까.”
그 한 사람의 관심이 내게 꼭 그러했다.
* * *
무사히 비행을 마치고 혼자 터미널 밖으로 나왔다. 짐이 많은 탓에 공항에서 차를 빌려야 했다. 크루들은 모두 호텔로 가는 버스를 탔지만 나는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렌터카 카운터에서 면허증을 보여 주고 중형차 한 대를 빠르게 빌렸다.
곧바로 부모님 집 쪽으로 향했다. 사실 이건 일종의 깜짝 방문이기 때문에 미리 조력자를 구해 놓았다.
“지금 가는 중인데 차가 좀 밀려. 2시간쯤 걸릴 거 같아. 몇 시로 예약했다고 했지?”
크리스 역시 퇴근 중이었는지 차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6시. 대충 맞을 거 같은데? 우리만 오는 줄 아시고 그냥 저녁은 집에서 먹자고 하시더라.
“네가 알아서 예약한다고 하지 그랬어.”
-이미 그렇게 했지. 네 자리까지 해서 5명 예약해 뒀어.
“고마워. 있다 봐.”
형과 전화를 끊고 히터 온도를 내렸다. 운전석 시트의 열선이 따듯하게 올라와 몸이 노곤해졌다. 막히는 구간에 접어든 틈을 타 유니폼 재킷을 벗고 셔츠를 걷었다. 무리하게 바꾼 일정을 소화하느라 많이 피곤하고 졸음이 몰려왔다.
앞서가는 차량의 뒷 유리에 얼굴을 들이민 커다란 강아지 한 마리가 보였다. 그 옆으로 여자아이의 머리가 천천히 올라왔다. 번호판을 보니 스위스 차량이다. 가족 단위로 어딘가 가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강아지를 끌어안은 채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서 나도 핸들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펼쳐 답인사를 해 주었다.
그러다 부모님의 제지를 받았는지 아이는 운전석을 한번 휙 돌아보았다. 그대로 강아지와 함께 뒷좌석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고맙게도 덕분에 잠이 깼다.
2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어릴 때부터 가족 단위로 자주 방문했던 레스토랑이었다. 입구에서 안내를 하던 매니저가 나를 알아보고 오랜만이라며 반가워했다.
“다들 이미 와 계세요. 코트 받아 줄게요.”
“고마워요. 케이크는 크리스가 이미 얘기했나요?”
나는 그에게 겉옷을 벗어 주며 손에 들고 있던 선물 가방들을 내려놓았다.
“그럼요. 다 준비해 두었어요. 와, 뭐가 많네요.”
“좀 맡아 주겠어요? 케이크와 같이 드리면 될 것 같아요.”
“그러죠. 이쪽으로 오세요.”
매니저가 안내하는 데로 따라갔다. 큰 홀을 지나 작은 방에 마련된 서너 개의 테이블 중 가장 안쪽에 가족들이 도착해 있었다. 내가 온다는 사실을 몰랐던 양부모님은 매니저를 따라 들어온 나를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맥시!”
“어머, 얘! 너는 말도 없이.”
나는 웃으며 차례로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양아버지는 나를 크게 안으며 반가움을 표했고 크리스와는 어깨를 두드리며 짧게 인사를 끝냈다. 양어머니는 매우 기쁜 얼굴로 두 번 세 번 내 뺨에 키스했으며 만삭의 실비아와는 가벼운 포옹만 하고 자리에 앉았다.
“어쩐지 나는 왜 자리가 하나 더 있나 했어. 온다고 말을 해 주지 너는 참.”
“가끔은 이렇게 나타나는 것도 재밌을 거 같아서요.”
“비행 있었니?”
양아버지가 채 갈아입지 못한 유니폼을 보며 물었다.
“네. 일정이 좀 빡빡해서 공항에서 바로 왔어요.”
“연말이라 바쁘겠구나. 피곤할 텐데 집에서 보자고 하지 그랬어.”
“결혼기념일이시잖아요. 크리스와 일부러 말을 맞춘 거예요.”
나는 옆에 앉아 있던 형과 살짝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가족 식사는 즐겁게 이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나의 등장에 신이 난 두 분은 결혼기념일답게 연애 시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더니 막 다짜고짜 찾아와서 결혼하자 하더라니까? 네 아버지 그땐 좀 용기 있었어.”
“아니,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하잖아. 얼른 낚아채야겠다 싶었지.”
“사귀는 사람이 있으셨어요?”
나의 물음에 양어머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지.”
그러자 크리스가 타박을 주었다.
“아니, 왜 쓸데없는 거짓말을 해? 비싼 척, 있어 보이는 척하려고 그런 거야?”
“내가 먼저 좋아한 게 들통 날까 봐 그랬지.”
“네 엄마가 원래 좀 도도한 여자 아니냐.”
큰아들의 공격에 양아버지가 웃으며 아내 편을 들었다.
“하긴 슈미츠 여사님이 콧대가 높긴 하지. 맥시도 엄마 닮아서 성격이 저렇게 됐어.”
“내가 왜.”
가만있다 불똥이 튄 나는 억울한 마음에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너도 매번 비싸게 굴잖아. 그냥 숙이고 들어가는 법을 몰라. 누구는 앞으로 고생길이 훤해.”
그러면서 모른 척 제 앞의 생선 요리 위에 레몬즙을 뿌렸다.
“재이는 잘 있니?”
크리스의 말에 생각났다는 듯 양아버지가 내게 한재이의 안부를 물었다.
“아…… 네. 지금은 뮌헨에 있어요.”
현 상황을 알 리 없는 다른 가족들이 같이 오지 그랬냐는 둥 한마디씩 말을 얹었다. 내가 곤란해하는 것을 눈치챈 크리스가 태어날 아기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해 주었다. 이 말 많은 가족 모임은 디저트가 나올 때까지도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양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의 온갖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느라 매우 바빴다.
커피를 한 잔씩 더 마시고 드디어 테이블이 정리되었을 때 나와 크리스는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멀리서 우리를 보고 있던 레스토랑 매니저에게 손을 들어 신호했다. 잠시 후 매니저가 직원 한 명과 함께 케이크와 선물을 들고 다가왔다. 그는 커다란 호두 케이크 위에 촛불을 붙여 주고 양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두 아드님이 생일 선물로 준비하신 겁니다.”
“어머나.”
그녀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죄송해요. 아직 며칠 남았는데 제가 같이 있을 때 축하드리고 싶어서 무리하게 당겼어요. 이건 선물이에요.”
나는 직원에게서 건네받은 쇼핑백을 그녀에게 안겨 주었다. 백화점에서 산 장갑 외에도 다른 작은 선물들이 함께 포장되어 들어가 있다. 갑작스러운 생일 축하를 받은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맙다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많이 좋아하시는 걸 보니 준비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어머니는 솔직한 사람이다. 감추는 것보다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다.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말실수를 할 때가 많은데 나도 어릴 때 그렇게 그녀에게서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아마 본인은 기억도 하지 못하고 있을 테지만, 아이들의 기억 저장고는 생각보다 말랑해서 한번 새겨진 자국은 평생을 가기도 한다. 그래서 나 역시 진짜 어머니도 가지지 못한 주제에 늘 그녀를 가짜 취급했었다.
사실 그 부분을 지우고 나면 사랑받았던 기억 외에 남는 게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누가 내게 시비라도 걸라치면 쏜살같이 달려와 제일 먼저 안아 주곤 했었다. 처음 입양을 결심해 준 것도, 내가 기죽지 않도록 그 콧대 높고 당당한 성격을 물려준 것도 모두 그녀였다.
생물학적인 유전자가 이어지진 않았지만 나는 그녀의 말과 행동을 배우며 자랐고, 그런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내 어머니가 맞았다.
“장갑이네. 색이 예쁘다.”
그래서 나도 이제 그만 진짜를 가져보고 싶었다.
“붉은색이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엄마는 피부가 흰 편이니까.”
그녀는 낯선 호칭에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당황하지 않으려는 듯 애써 웃으며 다른 선물 상자를 풀었다. 그런 호칭에 지금까지 연연해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 주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하는 듯 보였다.
“이건 손수건이네, 재질이 좋…….”
그러나 목이 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새로 사 준 손수건을 곧바로 써야 할 판이다. 옆에 있던 아버지가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어머니는 그 품에 안겨 잠시 감정을 추스르더니 왜 갑자기 자신을 곤란하게 만드느냐는 듯 내 팔을 가볍게 때렸다.
옆에서 크리스가 뿌듯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자신이 사람 만들어 놓았다는 듯 흐뭇한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물론 내가 부모님에게 마음을 열게 된 배경에는 그의 공이 컸다. 크리스는 내게 좋은 형이었고 늘 든든한 아군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잠시 눈을 감고 있지만,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내게 따뜻함을 불어넣어 주었던 사람. 그는 버림받았다 생각했던 조국을 잊지 않고 살게 해 주었으며 내가 가족들에게 충분히 사랑받고 있음을 알려 준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가 이 자리에 함께했으면 했다. 지금 크리스의 손을 잡은 실비아처럼, 어머니의 어깨를 안아 주는 내 아버지처럼.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을 이루는 시작점이 되는 이 관계를 다른 사람 아닌 그와 맺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모두 함께 빈넨덴 집으로 돌아왔다. 늦게까지 수다를 떨던 가족들은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삐걱거리는 작은 침대 위에 누워 휴대폰에 도착한 메시지들을 훑었다.
그중에는 한재이에게서 온 것도 있었다. 단순히 내일 몇 시쯤 올 건지를 묻고 있었다. 그러니 별 내용은 아니다. 마침내 내가 독일 비행을 얻어 냈다고 연락했을 때도 그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래도 나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로 했다. 먼저 질문을 했다는 것은 내가 궁금하다는 뜻일 테니까.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매달려 본 적이 없어서 스스로가 신기하기도 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가족들과 식사를 끝내고 곧바로 집을 나왔다. 너무 일찍 떠난다며 어머니는 섭섭해하셨지만 목적지를 듣고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사랑에 밀려 뒷전이 된 가족들을 뒤로하고 뮌헨으로 가는 아우토반에 들어섰다.
주말이라 그런지 화물 트럭들이 많이 보였다. 아우토반은 요금을 받지 않기 때문에 많은 유럽 연합의 화물 운송차들이 독일을 지나간다. 공짜로 개방된 3차선 도로에 10톤이 넘는 중량급 트럭들이 기차처럼 늘어져 시야를 막았다. 몸집이 작은 차량들은 수시로 그들을 추월하며 앞서 나갔다.
나 역시 곧바로 1차선으로 진입해 평소보다 좀 더 속도를 냈다. 빠르게 가면 2시간 안에 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자주 추월 차선에 머물렀다. 같은 생각을 하는 차량이 많았는지 끝없는 차선 변경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때 한재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은 운이 좋으려나 보다.
“운전하는 데 계기판에 네 이름이 떠서 사고 날 뻔했어.”
나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 대신 농담을 건넸다.
-무슨 소리야.
“너무 좋았다는 얘기야.”
그러자 그도 싫지 않은 듯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쯤인데?
“이제 막 에슬링겐 지났어.”
-아직 좀 더 걸리겠네.
“그래도 이 속도로 가면 1시간 안에 도착할 거 같아.”
이제 슬슬 다시 3차선으로 진입해야 한다. 분기점에서 뮌헨 방향으로 가는 다른 도로를 타야 하기에 타이밍을 보려고 사이드미러를 확인했다.
“근데 왜 전화했어? 물론 이유가 없어도 기쁘긴 한데. 용건이 있었을 거 같아서.”
-아, 점심 집에서 먹게. 돼지와 닭 둘 중에 골라 봐.
지난번 나의 찌개 요리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걸까. 아무거나 정해도 될 텐데 전화까지 해 주다니. 시도 때도 없이 느껴지는 그의 다정함에 나는 또 혼자 마음이 설레었다.
순간 옆 차선에 생긴 여유 공간을 발견했다.
“어…… 닭이 좋겠어.”
무사히 3차선에 진입하며 그에게 대답했다.
-그럼 밥 아니면 빵?
“어…….”
한재이가 다시 연이은 질문을 했지만 나는 다른 쪽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2차선에 있던 화물 트럭이 아무래도 이쪽으로 진입하려 하는 것 같은데 나는 현재 사각지대에 놓인 상태다. 트럭 운전석에서는 내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음…… 밥이 좋을 거 같긴…… 한데.”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위험을 직감했다. 트럭이 블링커도 없이 내가 있는 3차선으로 재진입하려는 것 같았다. 속도를 줄이기에는 뒤차가 너무 붙어 있었고 2차선으로 다시 틀자니 공간이 여의치 않았다. 여차하면 트럭에 밀려 옆으로 갈려 나갈 것 같았다. 순간적인 판단을 내려야 했다.
-웬일이야. 그래, 그럼 밥으로 할…….
나는 한재이의 목소리를 다 듣지 못하고 핸들을 틀었다. 깔리는 것보다는 갓길을 침범해서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편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경고의 의미로 클랙슨을 울리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가드레일에 보닛이 찌그러지며 굉음을 냈다. 다행히 자동차는 ABS 제동이 걸리고 곧바로 멈췄다. 에어백이 터졌다.
-……서진아.
나는 비상등을 켜고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일단 다친 데는 없었다. 제동 거리가 길었고 가드레일을 박은 방향은 조수석 쪽이었다. 유리가 깨지거나 기름이 샌 흔적도 없었다.
-……서진아.
그러고 보니 전화가 끊어지지 않은 채였다. 한재이가 계속해서 나를 불렀다. 확인하고 싶지 않은 공포에 눌린 공허한 목소리였다. 바퀴가 엄청난 스키드 마크를 그렸을 테니 고스란히 사고 소리가 전달되었을 것이다. 나도 놀랐지만 그는 더 놀랐을지도 모른다.
“미안. 사고가 있었어.”
나의 목소리에 그가 땅이 꺼질 듯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 차량이 서행을 시작했고 해당 트럭도 놀랐는지 100미터 앞 갓길에 멈춰 섰다.
-접촉 사고야? 안 다쳤어?
“응. 괜찮아. 트럭 피하려다 가드레일 일부러 들이받았어. 다친 데는 없어.”
-들이받았는데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어. 어디서 났는데.
“재이야, 미안한데. 경찰 불러야 할 거 같거든. 다시 전화할게.”
-어디냐고, 나도 갈게.
그가 이미 옷을 챙겨 입고 있는 듯 부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말리는 게 소용없어 보였다.
“B313에서 뮌헨으로 빠지는 분기점에 있어.”
-알았어. 다시 연락할 거니까 전화 받아.
그리고 통화는 바로 종료되었다.
터진 에어백을 정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견인차도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저쪽에서 내게 다가오는 트럭 운전사가 보였다. 뒤에서 나를 따르던 차량도 비상등을 켜고 정차했다. 증인이 필요한데 잘됐다 싶었다. 그제야 내가 사고가 났음을 실감했다.
30분이 지나 경찰 두 명이 도착했다. 사고 경위를 조사하는 동안 렌터카 업체에서도 사람이 나왔다. 자동차는 오른쪽 보닛이 심하게 찌그러졌지만 다른 곳은 멀쩡했다. 분기점으로 들어가기 위해 미리 속도를 많이 줄인 덕이었다. 다친 곳을 묻는 경찰관의 말에 크게 아픈 곳은 없다고 답했다.
경찰관 한 명이 1차선을 구간 통제하고 차량을 서행시켰다. 다른 한 명은 사고 현장 사진을 찍고 경위서를 작성 중이었다. 나는 차 밖으로 나와 견인차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10분쯤 더 지나자 한재이가 도착했다. 어찌나 빨리 왔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
“응. 운이 좋았어.”
그는 내가 다친 곳이 없는지 구석구석 확인에 들어갔다. 너무 멀쩡하게 서 있는 게 민망할 정도로 그는 계속 질문하고 내 몸을 살폈다. 그러고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사고 난 렌터카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트럭 운전사와 이야기 중이던 경찰관에게 다가갔다.
“수고하십니다. 차량 운전자 바로 병원에 데려가도 되나요?”
“아, 보호자세요?”
“네.”
“다친 데 없다고 하시는데 경위서 작성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가세요.”
경찰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뒤 다시 작성 중이던 서류에 집중했다.
“면허증 조회하셨으니 연락처 있을 텐데요. 나중에 따로 전화하시죠.”
“아, 네. 일단 10분만 좀 기다려 보세요.”
거듭된 요청이 묵살되었다. 그러자 한재이가 싸늘하고 사무적인 태도를 취했다.
“사고 차량 운전자 치료가 우선일 텐데요. 변호삽니다.”
그러면서 재킷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경찰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 네…… 뭐. 데려가세요, 그럼.”
경찰관은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이쪽을 한번 돌아보았다. 한재이는 그런 그와 트럭 운전사를 번갈아 쳐다봐 주고는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내 팔을 잡아끌며 자신의 차량으로 데려갔다.
“왜 그랬어. 나 멀쩡한데.”
“차에 타. 병원 가자.”
“진짜 멀쩡하다니까.”
다친 곳도 없는데 괜히 병원까지 가는 것이 좀 민망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그가 손목을 움켜잡고 나를 쳐다보았다.
“서진아, 제발.”
그 표정에서 나는 한재이의 공포를 읽었다.
그는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밖으로 표출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입술을 깨문 채 잔뜩 굳어 버린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조용히 조수석에 올랐다.
내가 차에 탄 것을 확인한 한재이는 다시 사고 차량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트렁크를 열어 내 짐을 모두 꺼내 자신의 차량으로 옮겼다. 빠진 게 있는지 뒷좌석까지 꼼꼼히 확인하고서는 다시 돌아와 운전석에 올랐다. 그러고는 서행하는 차들 사이에 천천히 섞여들었다. 그때부터 긴 침묵이 시작되었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할 때까지도 한재이는 말이 없었다. 운전 중 그는 가끔 손톱을 물어뜯기도 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버릇이었다. 대학 들어간 뒤로 고친 줄 알았는데 무의식중에 튀어나오는 듯했다.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수석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목이 조금 뻐근함을 느꼈다. 병원에 도착해 의사에게 그 사실을 말하자 한재이는 이제 더 숨길 수 없을 만큼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CT를 찍고 간단한 검사를 하는 동안에도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의사를 다시 만나 큰 문제가 없음을 듣고 나서야 조금씩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 사고로 목 주변 근육이 긴장해 뭉친 정도이니 푹 쉬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곧바로 나를 자신의 아파트로 데리고 갔다. 거실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는데 부엌은 조금 난장판이었다. 생닭과 돼지고기가 내팽개쳐진 조리대가 보였다. 그걸 보니 그가 얼마나 급하게 나왔는지 짐작이 갔다.
“누워.”
한재이가 침실에서 담요를 가지고 와서 소파 위로 나를 밀었다.
“괜찮아. 그냥 근육이 좀 뭉친 거라잖아.”
“그래서 푹 쉬라잖아. 왜 그 얘기는 못 들은 척해. 누워.”
그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소파에 몸을 누였다. 그러자 고개를 들어 보라며 쿠션을 쌓아 적당한 높이로 만들어 주었다. 그런 뒤 코트에서 내 휴대폰을 꺼내 오더니 손에 쥐여 주고 저는 부엌으로 향했다.
“어디 가.”
“배고프잖아. 치킨 스튜 만들어 줄게.”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게 더 좋은데 혼자 휴대폰이나 가지고 놀고 있으라는 건가. 나는 조용히 화면 잠금을 해제했다.
거기까지가 기억의 전부였다. 나는 아마도 곧바로 잠이 들어 버린 듯했다. 최근 들어 강행했던 비행 스케줄에 사고 피로감이 겹쳐 기절해 버린 것 같았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보니 벌써 밤 11시가 넘었다. 나는 속으로 맙소사를 외치며 자책했다.
한재이 아파트의 컴컴한 거실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차마 나를 깨우지 못해 그대로 두었나 보다. 치킨 스튜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잠들어 버렸으니 혼자 먹었으려나. 그에게 미안했다.
그러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따뜻하고 무거운 것이 내 팔에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소파 밑에 무릎 꿇고 앉은 한재이가 내 옆에서 팔베개를 하고 잠들어 있었다. 조용히 내쉬는 그의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서 잠들어 있었을까. 불도 켜져 있지 않을 걸 보면 오후부터 이러고 있었으려나. 불편한 자세로 자는 그를 보니 그냥 둘 수 없어 깨워야겠다 싶었다.
“재이야.”
어둠 속에서 그를 불렀다. 잠귀가 워낙 밝은 한재이는 한 번에 알아듣고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불편한데 침대 가서 편하게 자.”
내 말에 그가 긴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잠들었었다는 것을 이제야 인지한 듯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얼굴을 만졌다. 살아 있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마를 짚어 보고 광대뼈 근처도 눌러 보았다.
“나 괜찮아.”
다시 한번 그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한재이는 여전히 불안한 듯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쳐다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꾼 것 같았다.
“많이 놀랐어?”
“놀랐냐고? 하아…….”
그는 말을 말자는 듯 이마를 짚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 사실 나였으면 더한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통화하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들리는 사고 소리. 게다가 그는 관련된 트라우마가 있었다. 내가 그걸 더 건드려 버린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
“미안. 내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게다가 너 이런 일 또 겪는…….”
“바보야, 네가 왜 그런 걸 신경 써.”
한재이가 내 팔을 꽉 잡아 쥐며 말을 막았다. 그러다 스스로 무너지듯 다시 표정이 풀렸다. 화가 나고, 불안하고, 또 다행스러운 안도감이 차례로 그의 얼굴을 스쳐 갔다.
“우서진, 너는 진짜.”
이어지지 않는 말을 쥐어 짜내듯 내 팔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진짜, 너를 어떻게 해야 해.”
그리고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목소리는 조금 젖어 있었다. 예고도 없이 그에게 안겨 버린 탓에 두 손이 포박당한 것처럼 묶여 버렸다. 팔을 빼내 등을 감싸고 싶었는데 한재이는 조금의 움직임도 허용하지 않았다. 내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마치 놓칠세라 힘을 주고 더 세게 끌어당겼다.
주변은 조용했다. 가끔 골목을 지나는 행인의 소음 정도가 들려올 뿐이었다. 거실 테이블에 놓인 한재이의 휴대폰만이 말없이 빛나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그것을 제외하면 다른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한동안 정지된 공간 속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내 어깨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고 뺨을 감싸며 물었다. 배고프지 않냐고. 격했던 처음 반응과는 사뭇 다른 현실적인 질문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변한 게 하나도 없네, 한재이.
“너는 뭐 좀 먹었어?”
나도 같은 질문을 하며 그가 소파 위로 올라와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아니. 스튜 만들어 놓고 와 보니 네가 죽은 듯이 자고 있잖아. 숨 쉬는지 확인만 하고 나도 잠든 거 같아.”
그가 소파 등받이에 허리를 대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런 한재이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그러자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감싸며 정수리 근처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버릇 같은 서로의 스킨십을 느끼며 우리는 잠시 예전처럼 돌아갔다.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모르겠어. 너 베이징에서도 비행기 사고 목격했다며.”
“응, 그래도 나 멀쩡하잖아. 운이 정말 좋은 거라고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지.”
죽음이 나를 두 번이나 비껴갔다. 그러니 앞으로도 비껴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 역시 오늘 일을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한재이는 나의 대답이 꽤나 긍정적이라고 느꼈는지 조심스레 그때 기분을 물었다.
“사고 날 때, 두렵지 않았어?”
“글쎄, 위험수당을 받는 직업이라 그런지 사고는 늘 염두에 두고 사는 편이니까. 다만 혹시 일이 잘못되면 네가 힘들겠다는 생각은 했어. 우리 통화 중이었으니까.”
내 대답을 들은 그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 와중에도 제 생각을 했다는 나의 대답이 신경 쓰이는 듯 중얼거렸다.
“너는 정말, 너무 침착해서 무서울 정도야.”
물론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나의 침착함은 다른 이들에게 오해를 사게 한다. 대개는 무심함과 냉정함으로 둔갑하는데 오늘 그에게는 무서움으로 느껴졌나 보다.
“사실 내가 두려운 건 하나밖에 없어.”
그래서 비밀을 하나 알려 주기로 했다.
“뭔데.”
“너의 무관심.”
내 대답에 그가 작게 바람 빠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는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더 가까이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 모든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눈을 감았다. 평온하고 아늑한 낙원에 온 것 같다. 분위기에 취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늘 니콜라우스의 날이었어.”
“아, 응.”
“사실 어릴 때는 크리스마스보다 더 좋아했었거든.”
“네가 초콜릿을 좋아하니까 그런가.”
“그런 것도 있고. 다른 이유도 있어.”
한재이는 나의 중얼거림을 적당히 받아주면서 내 머리카락에 코를 비볐다. 간지러운 그의 숨결이 전해지자 나도 기분 좋은 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그날은 동네 어른들이 다들 초콜릿과 호두를 주잖아. 모르는 사람들이 말 걸어 주는 게 좋아서 종일 밖에만 돌아다녔던 기억이 나. 지금 생각해 보면 관심받는 게 좋았나 봐. 아무튼 크리스마스보다 더 좋아하는 날이었어.”
“몰랐네. 나한테는 그런 얘기 한 적 없었잖아.”
“왜냐면 네가 우리 동네에 이사 오고 나서부터는 챙기지 않았거든.”
“왜.”
“글쎄, 다른 사람들한테서 받는 관심에 흥미가 떨어져서 그런 거겠지. 그러니까 이제 좀 그만하면 안 되나.”
“뭘.”
“나한테 관심 없는 척하는 거.”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그에게 기대었던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말없이 서로를 주시했다.
사고 현장으로 뛰어와 무너질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던 그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놀랐냐는 질문에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올라 나를 안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를 보며 확신했다.
한재이는 나를 전혀 놓지 못하고 있었다.
관심 없는 척, 사랑하지 않는 척. 아무리 연기를 해도 이제는 다 보인다. 그러니 이런 시간 낭비를 더 지속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 이제 ‘진짜 이야기’를 좀 해.”
나의 진지한 목소리를 읽은 그가 잠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간의 시간을 가진 뒤 그 제안에 동의하듯 말했다.
“담배 피울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재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서 말보로 한 갑을 가지고 발코니로 향했다.
차가운 밤공기가 거실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밤인데 이상하게 밝은 것 같은 느낌이다. 자세히 보니 눈이 오고 있었다.
12월의 뮌헨에 눈이라. 참 낭만적이다. 마리엔 광장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이미 시작되었을 테니 내일이면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 것이다.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한번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일으켜 한재이를 따라 발코니로 나갔다. 언제 챙긴 건지 그의 손에는 두꺼운 코트가 들려 있었다. 밖으로 나온 나를 보고 그가 어깨에 둘러 주었다. 눈은 직선으로 떨어지고 있었고 바람이 불지 않아 발코니 난간에도 어느새 하얗게 내려앉았다.
건네받은 담배에 불을 붙여 아주 길게 한 모금을 빨았다. 그러다 바닥 구석진 곳에 놓여 있는 재떨이에 산처럼 쌓인 담배꽁초를 발견했다. 한재이는 이 많은 담배를 태우며 무엇을 고민했을까. 나는 살짝 타박 주듯 그에게 물었다.
“담배 왜 이렇게 많이 피웠어.”
그러자 한재이의 시선 역시 재떨이로 향했다.
“괴로워서.”
그는 물고 있던 담배를 길게 빨아들인 뒤 말을 덧붙였다.
“너를 멈출 방법을 찾지 못해서 좀, 괴로웠거든.”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를 원망하는 말은 무시한 채 그가 둘러 준 코트를 여미었다. 반면에 한재이는 추위를 잊은 듯 호주머니에 한쪽 손만 넣은 채 계속해서 담배를 태웠다. 그렇게 한 대를 다 피우고 또 다른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재떨이의 꽁초는 계속 늘어만 갔다. 그것이 쌓여 버린 그의 고뇌처럼 보였다. 한재이는 연기를 내뿜으며 혼자 감내해야 했던 외로운 싸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와 떨어져 있으니까 자꾸 자괴감이 들었어. 내가 망쳐 버린 관계가 한둘이 아닌데 그중 우리 사이가 제일 뼈아프다 느껴졌거든. 내가 가졌던 너에 대한 ‘확신’은 사실 ‘자만’이었나 보다. 그래서 멈추는 것 외에는 되돌릴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어.”
“같이 있으면 또 싸울 거고, 끝내는 서로를 경멸하게 될 거 같아서?”
“그래, 그렇게 되면 너를 완전히 잃는 거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실토하듯 말을 이었다.
“사실 파리에서의 네 반응은 의외였어. 너무 예상 밖이라 제대로 대답도 못 했던 걸 너도 알았을 거야. 그래도 뭐, 잠깐이겠지 싶었어. 그래서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한 거였는데.”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짧게 연기를 뿜었다. 그리고 애달픈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나 봐.”
뒤늦게 저를 향해 나아가는 나를 보며 그는 비켜 나간 용기의 타이밍을 원망했을까. 나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늘 그에게 뜨거웠지만, 전달되지 못한 마음의 표현은 우리 사이에 큰 힘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혼자 나아갔던 최근의 시간은 스스로에게도 의미가 깊었다.
“……실은 안 되겠다 싶어서 일부러 모진 말도 해 보고, 연락도 안 받고 그랬는데.”
그는 힘겨운 기억을 꺼내듯 미간을 좁혔다. 담배 연기는 빠르게 그의 폐를 타고 들어가 한숨과 함께 섞여 나왔다.
“오히려 너는 더 타오르더라. 그런 네가 새롭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솔직히 말하면…… 좀 설렜어.”
말하는 자신도 어이가 없는지 그가 허탈하게 웃으며 재를 털었다.
“그랬을 거야. 내가 좀 짝사랑 체질이라서.”
나도 농담을 하며 그의 말을 맞받아쳤다. 가볍게 불어 낸 입김이 담배 연기와 함께 섞여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래, 그런가 봐. 진짜 괴롭더라. 분명 머리로는 그만해야 한다고 되뇌고 있는데 내가 또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네 일정이 궁금해지고.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자꾸 핑계를 만들어.”
그랬었구나. 그 말을 듣고 보니 그의 보여 준 상반된 행동들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최근엔 현실 부정 중이었어. 애쓰는 네 모습에 맘이 약해져서 끌려가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치부하며 버티고 있었는데…… 오늘 완전 뒤통수를 맞았지.”
한재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새로 문 담배를 빠르게 빨았다. 연기를 내뿜고 다시 빨고. 마치 얼른 피우고 버리려는 듯 두세 번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그렇게 재떨이에 꽁초를 버린 후 다시 담배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발코니 벽에 허리를 기댔다. 상체를 앞으로 숙여 한쪽 발은 뒤로 빼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아주 힘든 기억을 꺼내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알아? 사고 나고 10초 정도 네가 말이 없었어.”
그의 기억은 다시 오늘의 서늘했던 순간으로 돌아가 있었다.
“계속 이름을 불렀는데 대답이 없는 거야. 그래서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나의 죽음을 가정하는 한재이의 목소리가 담담하고 슬프게 들려왔다.
“근데 이상하게 마치 내가 죽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야. 그 짧은 순간에 지금껏 살아온 세월이 머릿속에 필름처럼 펼쳐지는데, 느낌이 진짜 이상했어.”
“어떻게 이상했는데.”
“뭐랄까, 이대로 정말 너를 따라가도…… 괜찮겠다. 뭐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진짜 그래 볼까 하는 순간에 네가 대답했어.”
나는 한재이가 때마침 요리 중이었음을 상기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충분히 실행에 옮길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싸늘한 두려움이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한숨을 내쉬며 다 타 버린 담배를 손가락으로 튕겨 불을 껐다.
“바보같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
쌓여 있는 그의 재떨이 꽁초 더미 맨 위에 내 것도 하나 올려 두었다. 그러자 한재이는 별거 아닌 사실을 말해 주듯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냥. 1초도 혼자는 살아 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순간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아주 커다란 돌덩이 같은 것이 올라와 목구멍을 모조리 막아 버린 것처럼 숨이 막혔다. 가벼운 말투로 감싸고 있는 그의 고백의 실체가 정말이지 무거웠다.
그래, 한재이가 상상하고 두려워했던 그 끝은 진정한 최악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를 경멸하게 될 그 마지막보다도 무서운 것은, 그 대상이 사라져 버린 세상에 혼자 남는 것이다.
그는 이 비극으로 치닫는 동화 속에서 죽음의 엔딩이라는 키스를 받고 진리에 눈을 떴다. 이제 다 온 것 같았다. 내가 그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숨을 불어넣을 차례였다.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무서운 말로 돌려 할 필요는 없어.”
허공을 향해 있던 그의 눈동자가 내게로 내려와 시선을 부딪쳤다. 그리고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곧게 허리를 폈다. 딱 세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도 이제 알고 있을 것이다. 멈춘다고 해서 다시 친구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선을 지웠고 우정은 추억으로 박제되어 되살릴 수 없었다. 여기서 나아가지 못하면 우리 이야기는 이대로 끝이 난다.
한재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내뿜는 숨이 여기까지 따뜻하게 전해져 왔다. 남겨 둔 세 걸음의 길을 밟고, 눈을 가르며 내게로 왔다.
“그래, 여전히 사랑해.”
그리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트리고 있던 내 손을 잡았다.
“한 번도 멈춘 적 없어. 전화기 너머에서 네가 무사하다는 걸 안 순간 내가 느낀 게 있는데…… 아, 나라는 인간은 우서진 숨소리까지도 사랑하는구나.”
그는 입김을 불어 녹이듯 내 손끝에 입 맞추며 말을 이었다.
“그걸 알고 나니까 허무해지더라. 실패할 게 뻔한 이런 짓을 왜 하는지 스스로 한심해졌어. 그래서 네 말처럼 이제 그만 괴로워하려고.”
한재이에게 잡힌 손에서 찌르르한 감각이 전해져 왔다. 동시에 그와 나 사이에 내리고 있는 눈이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가로막고 있던 벽은 무너지고 시야를 가리던 커튼이 젖혀졌다. 이제 서로가 보인다.
“사랑해, 서진아. 너무 늦은 게 아니라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계속 같이 있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차마 소리 내어 대답할 수 없어 머리를 끄덕였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발끝이 몹시 시려 왔다. 나무판자를 덧댄 발코니 바닥에 녹은 눈이 조금씩 젖어 들고 있었다. 그 위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이제야 끝이 났다.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안다 여겼던 그 오만함에 싸여 사랑을 얕잡아 보았던 대가를 모두 치렀다. 그도 나도 한 번씩 심연에 도달하고서야 불신의 찌꺼기들을 모두 태울 수 있었다.
우리,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눈물이 자꾸 쏟아져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왜 우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너무 힘들었나 보다. 아니면 너무 오랜만에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 버린 걸까. 나약해서 눈물이 나는 건 아닐 거라 믿었다. 아마 눈이 와서 그런 거겠지.
“네가 우니까, 가슴이 찢어진다.”
그가 조용히 나를 안았다. 찬 공기에도 지지 않고 펄떡이던 그의 뜨거운 심장이 내게 전해져 왔다. 살아 있는 한재이가 이번에는 내게 숨을 불어넣었다. 울지 마. 가만히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스르륵 녹아 몸 안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걸치고 있던 한재이의 코트 자락을 벌려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눈이 녹아 축축하게 젖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도 사랑해, 재이야.”
조금 뒤늦은 나의 고백에 그가 웃으며 화답해 주었다.
“그래, 알아. 알고 있어.”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만이 가득 차 있었다. 눈은 점점 더 쌓였다. 코트 하나를 나눠 감싼 우리는 한동안 그대로 서로를 안고만 있었다. 한재이는 말라 버린 내 눈물 자국을 손으로 만지며 달래 주었다. 애달픔은 금방 사라지고 남은 것은 평온함뿐이었다.
나는 찬 공기에 온기를 빼앗긴 뺨을 그의 목덜미에 대었다. 따뜻한 기운이 피부를 타고 전해져 왔다. 우리는 굴속에서 몸을 비비며 체온을 나누는 포유류처럼 서로의 얼굴을 느꼈다.
코와 뺨이 닿고 귀와 광대뼈가 스쳤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두 입술이 닿았다. 나는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그러자 따뜻한 혀가 안으로 들어오며 부드러운 키스가 시작되었다.
한재이는 내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두어 번 길게 빨았다. 그러다 한 번에 깊게 삼켰다. 또다시 떨어졌다 붙어 오며 나를 애태우는 움직임에 참을 수 없어 더 적극적으로 입술을 벌렸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내 뺨을 감싸 쥐고 힘 있게 혀를 빨아 당겼다. 순간적으로 고개가 꺾인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본격적인 키스의 움직임에 어깨에 걸치고 있던 코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추위에 살짝 몸이 떨려 왔다. 그러자 그가 깊게 제 혀를 밀어 넣었다. 단단하게 힘을 준 살덩이가 비틀리듯 감겨 오더니 곧바로 강하게 점막을 빨아들였다. 키스는 조금씩 격정적으로 변해 가고 질척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한 손으로 한재이의 넓은 등을 쓰다듬었다. 곧게 뻗은 척추와 둔부를 지나 다리 근처까지 손을 내렸다. 그리고 단단하게 하체를 받치고 있는 허벅지 근육을 더듬었다.
안쪽 허벅지는 조금 더 말랑하고 부드럽다. 그곳을 지나 조금 위로 올라가면 묵직한 페니스가 자리하고 있다. 슬쩍 손으로 사이즈를 가늠해 보니 이미 반쯤은 발기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몸에 허기져 있는 상태다.
손길이 닿아서인지 그의 것이 꿀렁이며 바지 안에서 움직였다. 동시에 키스하던 한재이의 표정도 변했다.
“꽤 노골적인데.”
놓지 않을 듯 빨아 대던 입술을 뗀 그가 싫지 않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오래 참았거든.”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다시 그의 바지 위를 손으로 문질렀다. 아까보다 더 윤곽을 드러낸 그의 페니스가 단단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가볍게 그의 입술을 물었다 놓아주었다. 그러자 한 번 더 그의 페니스가 앞뒤로 끄덕거렸다.
내 키스에 하나하나 반응하는 그 움직임에 내 것 역시 가만있지 못하고 바지 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꼬아 댔다. 참지 못하고 먼저 그에게 물었다.
“들어갈래?”
“어디를?”
그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천천히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한 손으로는 발기한 내 페니스를 바지 위에서 쓸어내리며 제 하체를 슬쩍 밀어 넣었다. 그러자 그의 것이 허벅지 안쪽을 누르며 묵직하게 존재감을 과시했다. 나는 조금 더 마음이 급해졌다.
“안에, 들어가자고.”
살짝 뜨거운 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 그 사이 한재이의 손은 더 밑으로 내려가 내 회음부를 훑고 엉덩이 골을 슬며시 스쳤다. 그러다 고개를 틀어 다시 내 입술을 빨며 애널 쪽을 문질렀다.
“응, 나도 들어가고 싶어.”
이제 우리의 행위는 너무 노골적으로 변했다. 누군가 먼발치에서 보면 유사 성행위를 하는 자세로 보일 것이다. 옷은 입은 채였지만 두 입술이 붙어 질척이고 있었고 서로의 손은 엉덩이와 페니스를 만지며 주저 없이 욕정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씻어야 돼.”
살짝 입술을 떼며 내가 말했다. 그러자 한재이가 여유롭게 다시 한번 혀를 빨고서 놓아주었다. 그리고 이마를 맞댄 채 다시 입술을 물었다 떼며 말했다.
“같이 씻을까.”
나는 그의 혀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한재이는 별 반응 없이 계속 키스하는 데만 집중했다. 그러다 내 엉덩이를 세게 한번 쥐었다 놓고서는 발코니 문을 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따듯하다 못해 더운 열기가 얼굴에 올라왔다. 곧장 상체를 탈의하고 다시 한재이의 입술로 달려들었다. 폐쇄된 공간으로 들어와 더 안달 나기 시작했는지 우리는 곧바로 옷을 벗었다.
나체가 된 서로의 몸을 겹치고 허리와 엉덩이를 감싸 안았다. 곧바로 한재이가 손으로 내 맨살을 훑었다. 나는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 채 그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자 재밌다는 듯 그는 치골을 지나 다리 사이에 손을 넣었다. 슬쩍 페니스를 스치고 지나간 뒤 복부를 훑고 올라가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몸 키운다고 해서 궁금했는데.”
손가락으로 유두를 만지던 그가 잠시 입술을 떼고 속삭였다.
“상상했던 거보다 훨씬 더 근사하네.”
그러면서 다시 엉덩이를 두 손 가득 쥐고 상체를 바짝 붙여 제 페니스를 비벼 댔다.
우리는 욕실로 이동해 전희를 이어 갔다. 서로의 몸을 닦아 준다는 명분으로 계속해서 노골적인 곳을 건드리고 만졌다.
쉬지 않는 키스와 애무에 나는 흥분이 극도로 차올랐다. 참을 수 없어 스스로 페니스를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그와 떨어져 있었던 시간 동안 제대로 자위조차 하지 못했으니 몸이 반응하는 속도가 평소보다 빨랐다.
한재이는 그런 내게 쪼는 키스를 해 대며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혼자 가려 하는 내 모습을 구경 중이었다. 앞쪽으로 굵게 얼굴을 내민 제 페니스가 시야를 가리는 모양인지 한 손으로 비켜 쥐었다. 그리고 몸을 살짝 틀어 내게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같이 해.”
키스를 받으며 내가 제안했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도와줄게.”
그가 손가락 하나를 입 안에 넣어 다물지 못하게 만든 후 그대로 혀를 집어넣고 점막을 빨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딥 키스에 내게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이번엔 아랫입술을 빨며 입에 들어간 손가락으로 혀를 눌렀다. 마구잡이로 휘저어지는 그 움직임을 느끼며 정신없이 혼자 페니스를 흔들었다.
사정감이 들어 나도 모르게 고개가 꺾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한재이가 손가락을 빼내 내 입술을 한 번에 삼켰다. 서로의 혀가 빨고 빨리는 와중에도 신음은 터져 나왔다. 그 소리까지 먹어 치우겠다는 듯 그가 강하게 입을 틀어막으며 키스해 주었다. 나는 그대로 사정했다.
“하아…….”
짧고 강한 절정이었다. 샤워기를 틀어 손과 다리 사이에 쏟아 낸 정액을 씻었다. 한숨 돌린 나와는 달리 한재이는 더 흥분된 표정으로 몸을 붙이고 내 귓불을 핥았다. 그의 끈적한 애무를 받으며 나는 변명했다.
“참기가 좀 힘들었어.”
“음…… 섹시하던데.”
슬쩍 내려다본 그의 페니스는 발기하다 못해 터질 것 같은 크기로 내 하복부를 찌르는 중이었다.
“너도 할래?”
오른손으로 슬쩍 그의 것을 쥐어 대신해 줄 의향이 있음을 알렸다. 그러나 한재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만지는 건 시시해. 네 안에다 하게 해 줘.”
그가 귓속에 혀를 넣었다. 예민한 청각이 점막의 마찰 소리를 여과 없이 들려주었다. 마치 삽입 행위를 상징하듯 물컹한 혀가 꿀렁거리며 귓속을 드나들었다. 그러자 내 위에서 미간 찌푸린 채 허리를 박아 넣는 한재이의 모습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잊고 있었던 감각 하나가 깨어나는 거 같아 다시 찌릿함이 느껴졌다. 나는 아랫입술을 빨며 그에게 말했다.
“침대로 가자.”
샤워기를 잠그고 타월을 쥐었다. 그러나 제대로 몸을 닦을 새도 없이 한재이가 나를 안았다. 그에게 거의 들리다시피 해서 욕실 밖으로 나온 뒤 침대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대로 엎드린 자세가 되어 한재이에게 두 다리가 잡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머리칼이 엉덩이 근처에서 느껴지더니 그대로 다리가 벌어졌다.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도 잠시, 부드러운 혀가 뒤쪽을 핥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꽤 야했다.
그는 리밍을 좋아한다. 언제부터 생긴 취향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처음 섹스 포지션을 정할 때부터 그는 이런 행위에 거리낌이 없었다. 정말 좋아서 하는 건지 아니면 오로지 나를 흥분시키기 위한 희생인 건지 잘 모르겠다. 다만 긴 시간 반복하더라도 그의 페니스가 죽지 않는 걸 보면 거부감이 없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래서 삽입 전 내 몸을 풀어 줄 때 그는 이 방법을 늘 애용했다.
그의 혀에 충분히 적셔진 구멍 안으로 손가락 하나가 들어왔다. 동시에 한재이가 등 뒤에서 나를 안으며 어깨를 꽉 물었다. 덕분에 통각은 어깨 살에 몰려 밑에서 느껴지는 아픔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손가락은 순식간에 두 개로 늘어나고 세 개로 늘어났다.
그가 내벽을 꾹꾹 누르며 귓가에 속삭였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좀 뻑뻑해.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아.”
“음…… 괜찮아. 하다 보면 다시 익숙해져.”
그의 리밍으로 나는 다시 반쯤 발기된 상태였다. 오랜만에 하게 된 섹스라 그런지 방금 사정을 했음에도 금방 또 몸이 달았다.
나는 조금 참더라도 고통이 함께 느껴지는 걸 좋아해서 빨리 다음 단계로 나갔으면 했다. 그러나 한재이는 늘 충분히 기다렸다 넣는 편이기에 지금도 꽤 오래 공을 들이고 있다. 물론 그도 화가 난 상태에서 할 때는 그런 배려를 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런 날 오히려 더 강하게 오르가슴을 느끼곤 했었다.
나는 고통 끝에 찾아오는 쾌락의 격렬함을 좋아했다. 아프고 흥분되는 감각을 동시에 느끼다 어느 순간 한계를 뛰어넘는 열기가 몰려오면 발끝까지 짜릿한 오르가슴을 느낀다. 물론 한재이와 몸을 섞기 전까지는 몰랐던 사실이기도 했다.
안을 헤집어 놓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드디어 그가 제 페니스를 내 엉덩이 골 사이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돌려 그에게 키스하며 말했다.
“들어와, 얼른.”
자꾸 보채는 나에게 그가 달래듯 말했다.
“아직 덜 풀려서 아플 거야, 서진아.”
그러면서 감질나게 입구만을 비벼 댔다.
“나, 그런 거 좋아해.”
너무 솔직한 나의 고백에 그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알아. 그래도 너무 도발하지 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저도 한계에 다다랐는지 허리를 내려 슬그머니 구멍 끝에 페니스를 맞췄다. 그대로 끝부분을 조금씩 들이밀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뻑뻑하게 머리를 집어넣은 두꺼운 살덩이에 밑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어깨를 부르르 떠는 나를 안고 키스를 퍼붓는 한재이의 손길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가 앞을 만져 주며 흥분을 유도함과 동시에 조금씩 제 것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움직임이 더해질수록 내 숨소리도 커지고 있었다. 속도를 조절하려는 그의 인내심에 내가 물결을 일으켰다.
“읏…… 더 깊이, 하아…… 넣어 줘.”
그러자 한재이의 페니스가 안쪽 깊은 곳까지 한 번에 밀려 들어왔다. 소리를 낼 새도 없이 다시 빠져나갔다 한마디 더 깊이 침범했다. 그러다 다시 몸을 물린 페니스는 더 빠른 속도로 재차 안을 침범했다. 한두 번 그 행위를 반복하던 그가 마침내 뿌리 끝까지 제 것을 쑤셔 넣는 데 성공했다.
“윽.”
나는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져 입술을 깨물었다. 한재이는 그런 나를 끌어안고 몸을 겹쳐 마운팅 하듯 허리만을 움직였다. 엉덩이 살에 그의 하복부 살결이 닿으며 찰박찰박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나의 앓는 신음이 섞이며 침실 안은 낯 뜨거운 소리가 들어찼다.
어느 정도 길이 열렸다 생각했는지 한재이가 상체를 들고 본격적으로 제 페니스를 박아 넣기 시작했다.
“흣…….”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두 손으로 침대를 짚은 채 빠르고 강하게 삽입 중이었다. 매트리스가 움직이며 충격을 완화해 주었지만, 나의 몸은 그가 페니스를 넣을 때마다 속절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구멍은 예전보다 더 예민하게 그의 것을 물고 조이며 놓아주지 않았다. 그에게도 그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아…… 너무, 빡빡한데.”
“읏, 오랜만이라서, 그래.”
“좀 세게, 움직여 봐도 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그가 좀 더 강하게 제 것을 박아 넣었다. 치고 빠지는 속도가 빨라지고 들어올 때의 강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꽉 차 버린 내벽 안쪽의 쏠림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고통이 자꾸만 쾌감을 눌렀다.
“많이 아파?”
그가 허리 짓을 천천히 멈추었다. 그리고 손등 위에 입을 맞추며 시트에 가려진 내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감긴 눈가에 부드럽게 키스한 뒤 나를 달래며 불렀다.
“나 봐, 서진아.”
나는 한쪽 눈만 겨우 뜨고 그를 보았다.
“내 거 느껴져?”
“흐읏…….”
그가 허리를 치대며 찔러 넣은 페니스를 다양한 각도로 비비적거렸다. 그 움직임에 내가 신음을 내자 다시 짧게 키스해 주며 속삭였다.
“여기, 좋아하잖아. 눈 뜨고 나 봐, 서진아.”
그가 코끝으로 뺨을 문지르며 나를 안심시켰다. 두 눈을 뜨자 잔뜩 열이 올라 흥분에 싸인 한재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두 손을 깍지 낀 채 내 이름을 자꾸만 불러 주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허리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리듬감 있게 내려찍으면서도 한 번씩 깊게 박아 넣고 여운을 두었다. 그의 미간에 살짝 맺힌 땀이 보였다. 나의 흥분을 끌어올리려는 그의 노력이 먹히기 시작하는지 조금씩 내벽의 열상이 가라앉고 있었다.
한재이가 상체를 일으켰다. 페니스를 완전히 빼내고 손가락으로 입구를 지분거렸다. 주름에 새겨진 감각 하나하나를 건드려 주려는 듯 천천히 부드럽게 만져 주었다. 조금씩 몸이 더 풀리는 기분에 낮게 신음을 냈다. 그러자 새로 오일을 바른 페니스가 조금씩 안으로 다시 밀려 들어왔다.
한결 움직임이 나아졌다. 빡빡하게 물고 놓아주지 않았던 구멍도 조금씩 흐물거리고 있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숙여 열정적으로 키스했다. 깊게 입술을 삼키고 내 혀를 가져가 강하게 빨아 준 뒤 제 혀로 감았다. 그와 동시에 밑의 움직임도 속도를 냈다. 끊임없이 내 얼굴을 살피고 이름을 불러 주는 그의 목소리에 점점 더 흥분이 차오르고 있었다.
나는 빳빳하게 고개를 든 앞을 만져 보았다. 그리고 허리도 조금씩 돌렸다. 내가 움직이는 것을 느낀 한재이가 상체를 더 위로 들었다. 그대로 속도를 올리더니 빠르고 짧게 쳐 내리기 시작했다.
나도 거기에 맞춰 함께 움직였다. 반동의 강도가 강해졌다. 힘차게 찔러 넣은 기둥의 끝이 찌릿하게 내벽 안쪽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제 몸이 완전히 풀렸는지 느껴지는 쾌락의 양이 증폭되었다.
“흣, 아아.”
“하아…….”
키스는 멈춰지고 삽입 행위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접합된 부위가 꽉 물려 있었지만 추삽질을 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내벽 안쪽을 굵은 머리로 찔러 대는 한재이의 페니스가 느껴졌다. 저릿저릿한 느낌이 전립선을 타고 올라와 입구를 바짝 조이고 근육은 수축했다.
“하아, 서진아…….”
한재이가 거기에 반응하며 신음을 토했다. 그러면서 조금 더 빠르게 하체를 움직였다. 손등에 핏줄을 잔뜩 세운 그의 손이 내 손목을 꽉 쥐었다. 그가 흥분하면 나도 참을 수 없게 된다.
“더 빨리, 해도 돼. 흐읏.”
지금의 속도가 아직 그의 사정을 유도하기에는 모자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금 더 엉덩이를 들고 무릎을 세웠다.
“안 돼, 그러면, 후우…… 바로 갈 거 같아.”
“가도 돼, 읏, 네 사이즈 흣…… 지금 좀, 버겁거든.”
내 말에 그가 탄식 어린 숨을 토해 냈다.
“너 아까부터 자꾸, 일부러 이러는 거야?”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내 말에 마음의 동요가 있었던 듯하다. 한재이는 허리를 좀 더 빠르게 움직이며 드디어 스스로 사정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나도 이제는 그 움직임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우리의 신음은 좀 더 적나라하고 노골적으로 변했다.
“하아, 좋아?”
“흣…… 윽, 좋아.”
“나도, 하아, 나도 좋아. 바로 가 버릴 거 같아.”
“응, 흣…… 가도 돼.”
“좀 아쉬운데. 하아, 그래도 해?”
“하읏…… 응, 읏.”
한재이의 허리가 큰 각도를 틀며 깊게 내려왔다. 그러고는 그대로 포물선을 그리듯 위로 올라갔다. 팔뚝의 근육이 팽팽하게 땅겨지더니 다시 한번 더 페니스를 강하게 안쪽으로 박아 넣었다. 그리고 파열하듯 정액을 뿜어냈다.
그는 그르렁거리는 신음과 함께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다시 한번 페니스를 꽉 안으로 밀어 넣으며 아주 길게 한 번 더 사정했다.
우리는 크게 숨을 쉬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땀에 전 입술을 찾았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키스를 하며 앞쪽에서 쿠퍼액을 흘리고 있는 내 페니스를 손에 쥐었다. 그러면서 상체가 살짝 돌아가더니 나를 옆으로 눕게 했다.
아직 형상을 유지한 그의 페니스가 슬그머니 구멍 안에서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한재이는 뒤에서 단단히 내 어깨를 감아 안고 한 손으로는 앞쪽을 만져 주었다. 나를 다시 사정시키려는 것 같았다.
그가 내 뺨에 소리 나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이렇게 해 주는 거 기분 좋지 않아?”
과연 앞뒤로 자극받기 시작하니 흥분의 강도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응, 좋아…….”
“앞이 좋아, 아니면 뒤가 좋아?”
옆으로 누운 그가 허리를 더 크게 움직였다. 등에서부터 둔부까지 닿은 맨살의 체온과 질퍽거리며 아래를 드나드는 페니스의 느낌이 선명한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앞…… 아니 뒤, 흣.”
나는 제정신이 아닌 듯 아무 소리나 내뱉고 있었다. 사실 이미 꽤 흥분한 상태였기에 금방이라도 절정에 달할 것 같았다. 뒤에서 찔러 대는 그의 움직임과 열정적인 키스에 피가 몰릴 만큼 몰렸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금방 사정감이 몰려왔다.
“너 느끼는 거 너무 야해, 서진아.”
그가 못 견디겠다는 듯 혀를 넣어 다시 깊게 키스했다. 그렇게 나는 무려 세 군데에서 끝없는 자극을 받고 있었다. 입술이 빨리고 페니스가 비벼지며 뒤가 박히고 있었다. 정액을 윤활제 삼아 마음대로 내벽을 왔다 갔다 하던 그의 기둥 끝이 예민한 둔덕 부위를 건드리며 사정을 유도했다. 더 참는 건 무리인 것 같았다.
“아, 재이야. 아…….”
내가 가려는 걸 눈치챈 그가 재빨리 페니스 끝부분을 만져 주었다.
“흣…….”
나는 곧바로 몰려오는 오르가슴을 만끽하며 그의 손에 파정했다. 한재이가 숨을 헐떡이는 내 입술과 뺨에 키스를 퍼부으며 깊은 후희를 느끼게 도와주었다.
욕실에서 느낀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쾌감이었다. 만족감에 어깨가 떨리며 나도 그의 입술을 물었다. 사정 후에 나누는 키스는 너무 달콤하다.
한재이가 따뜻하게 제 몸으로 나를 감싸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러자 쾌락이 행복한 기분에 섞여 몽롱한 감각을 만들어 냈다. 마약을 한 것같이 몸이 뜨기 시작했다.
“재이야, 잠깐만. 흣.”
나는 컴컴한 거실 한가운데 소파를 짚고 서서 다시 한재이에게 안겨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장소를 바꾸어 가며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섹스에 몰두했다. 밖은 밤이었지만 그와 나는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뒤에서 해도 돼?”
그가 단단히 박아 넣은 자신의 페니스를 치켜올리며 물었다.
“응. 흣…… 키스해 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재이가 마구잡이로 입 안에 혀를 쑤셔 넣었다. 내 몸이 열릴 대로 열린 만큼 거칠고 폭력적인 움직임이 잦아졌다. 그가 사정을 꽤 오래 참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질척이는 키스를 선보여 준 한재이는 페니스를 꺼내고 나를 돌려세웠다. 소파에 손을 짚고 하체를 조금 뒤로 빼자 곧바로 그가 제 것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방금과 같은 속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뜨거운 한재이의 손바닥이 내 엉덩이를 감싸 쥐고 좌우로 벌렸다. 노골적이고 낯뜨거운 행위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런 행동에 더 흥분하는 그의 신음이 들려서였다.
그래서 한재이가 늘 하는 질문을 이번엔 내가 던졌다.
“하아…… 좋아?”
그가 힘 있게 페니스를 박아 넣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귓불을 빨며 내가 이제껏 그에게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강한 욕을 내뱉으며 긍정했다. 그 소리에 나는 곧바로 사정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