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90)

“이거…….”

다른 하우스와 달리 정원까지 예쁘게 꾸며놓은 저택 안에는 총 네 마리의 토끼끼가 진수성찬이 깔린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작은 사이즈의 깜찍한 가구와 음식 메뉴를 본 도웅이 뭐라 묻기도 전에 어희가 먼저 고백했다.

“그리워서 하나씩 만들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2, 3층은 올라가 보지 못해서 미완인 채 뒀어요.”

미니어처는 뉴욕에 있는 도웅의 집을 그대로 옮긴 모습이었다.

도웅은 가슴이 찡해져 한 쪽 눈썹을 찡그렸다.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그리움이 느껴져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어희 씨는 어떻게 지냈어요? 어떻게 혼자서 뉴욕까지 올 생각을 했대요?”

도웅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어희는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 잘 지내지는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약속했으니 가는 게 당연했고 도웅 씨 이웃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는 어떻게든 옆에 있어 주고 싶어서 계속 갔습니다.”

어희는 서랍장을 열어 가벼운 잠옷을 꺼내 내밀었다.

“속옷 사 올 테니 씻고 계세요.”

“괜찮아요. 어희 씨 입던 거 줘요. 어차피 빨았을 텐데, 뭐.”

개의치 않아 하는 도웅이 손을 내밀자 어희는 머뭇거렸다.

“혹시 속옷도 팔았어요…?”

장난스러운 어조에 어희는 맨 아래 서랍을 열어 검정 드로즈를 도웅의 손에 쥐여줬다.

“가지세요.”

빨갛게 충혈된 눈처럼 얼굴을 붉힌 어희가 홱 몸을 돌렸다. 그대로 곧장 작업실을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기세였으나 어희는 몸만 돌릴 뿐 도웅만 두고 나가지 않았다.

무슨 일 있나?

가만히 어희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힐끔힐끔 돌아보기까지 한다. 마치 도웅이 어디 가지 않고 잘 있는지 확인하는 듯한 행동에 도웅은 뒤에서 어깨를 감싸 안았다. 키 차이가 있어, 까치발을 들고 불편한 자세로 매달린 채 도웅은 손깍지를 끼웠다.

“왜 가지라고 그래요? 내가 입던 건 찝찝해서 입기 싫어요?”

“그만 놀리세요.”

깍지 낀 도웅의 손에 제 손을 겹친 어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작업실을 나왔다. 제 등에 붙어 있는 도웅을 짊어진 채로 한 발, 한 발 움직인 어희는 욕실 문을 열어 선반을 뒤적였다.

“이 닦게요?”

“예.”

새 칫솔을 뜯은 어희는 치약을 짜 뒤로 건넸다.

발꿈치를 들고 나무늘보처럼 매달려있던 도웅은 어희가 내민 칫솔을 앙, 물고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변기 뚜껑을 덮어 앉아 빠르게 칫솔질을 시작했다. 매운맛이 훅 올라오기 전에 아랫니를 닦아야 했다.

반면 느긋하게 치약을 짜, 칫솔을 문 어희는 신속하게, 최선을 다해 양치를 하는 도웅을 보고는 느리게 슥슥 칫솔질을 하며 걱정했다.

“잇몸 상해요.”

도웅은 뭉개진 발음을 듣고 똑같이 뭉개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어희 씨가 고쳐야 할 단점이 있다면 그건….”

치약일 거예요.

도웅은 말을 끝맺지 않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혀끝으로 칫솔을 살짝 훑었다.

“…….”

맵지 않았다.

“예. 제 단점이 있다면?”

어희는 궁금해하며 도웅의 뒷말을 따라 했다.

“…아니에요. 치약 바꿨어요?”

“도웅 씨가 너무 매워하는 거 같아서 무난한 치약을 사 놨습니다.”

유일한 단점을 넘치는 배려로 커버한 어희는 여전히 느긋하게 양치를 했다. 혼자 전투적으로 칫솔질을 한 게 민망해진 도웅은 실없는 웃음을 흘리곤 마저 이를 닦았다.

함께 이를 닦고서 셔츠 단추를 풀은 도웅은 벨트를 풀며 멀뚱히 구경하는 어희를 바라봤다. 찬물로 세수한 어희의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이 또옥,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희 씨도 씻을 거예요?”

“아뇨. 아까 씻었습니다.”

“그렇구나….”

바지 지퍼를 내린 도웅은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어희를 힐끔 올려봤다.

“안 나가요? 옷 벗는 거까지 구경하게…?”

도웅의 말에 어희는 짧게 탄식을 뱉더니 후다닥 욕실 밖으로 나갔다. 어찌나 급하게 나갔는지 욕실 슬리퍼 한 짝이 뒤집혔다. 발로 슬쩍 밀어 슬리퍼를 제대로 둔 도웅은 주섬주섬 옷을 벗고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도웅은 기장이 긴 잠옷 바지 밑단을 접는 대신에 가슴 아래까지 쑥 올렸다. 침실로 들어가자 침대 아래에 이부자리를 준비하고 있던 어희가 고개를 돌렸다.

“씻으니까 엄청 졸리네요.”

“주무세요.”

가볍게 침대 위를 두들기는 어희 어깨를 옆으로 슬쩍 밀었다.

“비켜야 자죠.”

이별이며 재회며 눈물을 잔뜩 뽑고 나서 온수로 샤워하고 난 직후인지라 나른함이 몰려왔다. 어희의 손이 또 침대를 두들겼다.

“같이 자요?”

그럼 이불은 뭐하러 깔았대.

침대에 누운 도웅이 벽면으로 눕자 어희는 침실 불을 끄고 이불에 누웠다.

깜깜해진 방 안에서 핸드폰 불빛으로 침대 아래를 비추자 눈을 감고 있던 어희가 눈을 떴다.

“왜 아래에서 자요? 그냥 올라오지.”

“따로 자는 게 편할 거 같아서요.”

“그러면 내가 바닥에서 잘 테니까, 어희 씨가 침대에서 자요.”

“그것도 제가 불편할 거 같아서요.”

온몸이 불편 세포로 도배된 듯한 어희의 말에 도웅은 얌전히 핸드폰 불빛을 거두고 가장자리에 누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뭐 하고 지냈어요? 친구는 좀 사귀었고요? 그, 징크스는 어떻게 됐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피곤해 보이기만 할 뿐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이냥 저냥 못 지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무슨 옷을 입었고 어떤 걸 먹었으며 직원들과는 어떻게 지냈는지 일일이 묻고 싶은 걸 축약한 거였는데, 의외로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작은 일에 소소하게 서운해진 도웅이 입술을 삐죽였다가 담아놨던 질문들을 묵히지 않고서 우르르 쏟아냈다.

“이냥 저냥 어떻게 못 지냈는데요? 자금이 휘청여서 가사도우미는 부르지 못했을 테니 뭘 먹었는지 궁금해서요. 새로 옷 산 건 없어요? 어디 아픈 곳은요? 카페는 어떻게 운영하고 있어요? 요거요 별점 떨어진 건 알고 있어요? 토끼끼 신작이 안 나온 건 그동안 개인 작품 만드느라 그런 거예요? 어희 씨 아버지하고는 어떻게 됐어요?”

줄줄이 소시지처럼 늘어난 질문을 가만히 듣고 있던 어희는 도웅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입을 뗐다.

“하나씩 답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음식은 카페에서 영호 씨가 만들어 준 샌드위치를 먹었습니다. 가끔은 인스턴트 밥과 반찬을 사서 먹기도 했고요. 새로 산 옷은 없습니다. 도웅 씨랑 산 옷이 마지막이에요. 아픈 곳은 없습니다. 카페는… 좀 힘들게 운영 중입니다. 요거요 별점 떨어진 건 알고 있습니다……. 다음 질문이 뭐였죠?”

“영호보다 내가 샌드위치 더 잘 만들어요. 내일 만들어줄게요. 다음은 토끼끼 근황이랑 어희 씨 아버지 근황이요.”

“아…. 토끼끼 신작은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슬럼프인지 생각나는 게 없어서요. 그런데 지금은 만들고 싶은 게 생겨서, 조만간 신작 나올 겁니다. 아버지는 이후로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한 걸 보면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겠죠.”

“흠… 그랬구나…. 평소에는요?”

침대 아래에서 무거운 한숨 소리가 들렸다. 도웅은 눈을 깜박이며 허공을 응시했다.

“다음에는 언제 뉴욕에 갈지, 가면 만날 수 있을지만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짐을 풀지 않게 되고 항공권을 서너 장씩 예약할 때부터였습니다.”

“…….”

“헤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건. 그래도 보고 싶었습니다. 매일, 항상, 늘 보고 싶었어요.”

어희처럼 감정을 볼 수는 없어도 진심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모르기가 더 힘들었다.

어희는 간신히 눈물을 멈췄지만, 이번에는 도웅의 눈가가 시큰해졌다.

“저는 도웅 씨가 여전히 좋습니다. 도웅 씨는요?”

애정을 확인하는 듯한 물음에 도웅은 눈물 젖은 눈을 깜박였다. 이전보다 어희를 더 사랑했으면 사랑했지 애정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불 켜고 한번 보실래요?”

침대 아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 도웅은 옆을 돌아봤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는 형체만 구분이 되었다. 상체만 일으켜 앉은 어희의 얼굴이 보여 도웅은 손을 뻗었다. 말캉하고 따뜻한 체온이 손에 닿았다. 어희는 제 왼뺨에 갖다 댄 도웅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리운 온기였다.

“보이니까 더 모르겠어요. 저 때문에 속상한 건지….”

아버지가 떠올라 속상한 건지.

어희는 마지막 말을 삼켰다. 힘들었을 도웅의 곁에 있어 주지 못한 자신이 그 일을 입에 담아도 될 자격이 없다 여겨진 탓이다.

도웅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어희를 마주했다.

“어희 씨 고생시킨 거 미안해서 그래요. 하루 이틀 머무는 게 아니라 끈기 있게 일주일을 집에 붙어 있었으면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같은 후회도 들고….”

어희의 손끝이 도웅의 눈 밑에 조심스럽게 닿았다가, 이내 커다란 손이 도웅의 뺨 한 면을 감쌌다.

“돌아왔으니 괜찮습니다. 미안해하지 말아요. 저도 그날이 아니라 다른 날에 갔으면 도웅 씨를 만날 수 있었을 겁니다. 제 탓이에요.”

도웅의 후회까지 꾸역꾸역 자신에게로 돌린 어희는 눈을 감았다, 떴다.

“자기 전에 적합하지는 않지만, 키스해도 됩니까?”

어희가 허락을 구했다.

앞으로 묻지 말고 하라는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자 느닷없이 어희가 입술을 겹쳐왔다. 적극적인 태도에 작게 놀라 동그랗게 떠진 도웅의 눈매는 이내 곱게 휘었다.

능동적인 어희의 모습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입술 선을 할짝대다, 진득하게 엉켜오는 말캉한 감촉에 눈을 감았다. 잔잔했던 숨결이 조금 거칠어질 즈음 물기 어린 소리를 내며 어희가 뒤로 물러났다.

“음. 앞으로는 물어보지 말고 그냥 해요.”

갑자기 덮쳐온 어희 때문에 꺼내지도 못하고 꿀꺽 삼켜버린 말을 뒤늦게 입에 담은 도웅은 축축한 윗입술을 핥았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주무세요.”

“어희 씨도 잘 자요.”

어희가 도로 이불에 누웠다.

침대에 가로질러 누운 도웅도 제대로 몸을 누였다. 씻고 나온 직후에는 분명 눕자마자 잘 수 있을 정도로 나른했는데, 방금 키스로 각성이라도 한 것인지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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