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90)

덤덤하게 말하는 어희의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예상했어요, 도웅 씨.”

여전히 덤덤하지만, 자상함이 엿보이는 어조에 도웅은 찡그린 미간을 풀지 않고 물었다.

“알면서 왜 집까지 팔고 이러고 있어요.”

권리금이며 월세에 전세 보증금까지. 그간 모았던 돈을 탈탈 털어 넣었을 게 분명하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집까지 팔아 장사도 안되는 카페를 꾸역꾸역 붙들고 있는 어희가 미련하면서도 애잔하게 느껴졌다.

“왜 이러고 있냐고요.”

도웅은 따지듯 재차 물었다.

어희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그리고 레몬차가 완전히 식었을 무렵에야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러고 있으면 도웅 씨가 돌아올 것 같았나 봅니다.”

한숨을 흘린 도웅은 소파에 등을 깊숙이 묻었다. 말끔한 천장을 올려본 도웅은 마음이 복잡했다. 머리가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어떡할 거예요?”

“도웅 씨가 카페를 맡겠다면 드리고 싫다면 정리할 계획입니다.”

“…….”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소파에 앉지 않고 러그 위에 앉은 어희가 힐끔힐끔 도웅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하아.”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흔히 실감이 나지 않으면 그랬다. 막상 이별을 짐작했을 때는 상처가 예상보다 깊지 않았다. 한 번 잘라낸 인간관계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제 성격 덕분이라 여겼으나 어희를 앞에 둔 지금, 도웅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이제야 이별이 현실로 다가온 기분이었다.

도웅의 입술 사이로 얕은 숨이 흘러나왔다. 어느덧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상아색 천장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부모님이 다녔던 여행지를 엄마랑 둘이서 돌아다녔어요. 그 후에는 보스턴으로 이사했고요. 한 달에 두 번은 꼭 뉴욕으로 돌아가서 아버지 묘지에 꽃도 놔드리고 그랬어요. 갈 때마다 못 본 꽃이 보여서 아버지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어희 씨일 줄 몰랐어요.”

지금 이별하는 건가? 아니면 이미 우리는 이별한 건가?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슬퍼졌다. 도웅의 눈에는 스멀스멀 눈물이 고였다.

“아버지 묘에 들르고 나면 뉴욕 집에서 하루를 지냈어요. 부모님은 기존에 살던 집을 웬만하면 안 팔고 모두 갖고 계시거든요.”

“그랬군요. 집에서는 뭘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까?”

“그냥… 따뜻한 커피 한 잔 들고 문 앞에 앉아서 시간 보냈어요. 지나가는 사람 구경도 하고. 그러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들어가서 자고.”

한 일 년 정도 그렇게 보스턴과 뉴욕을 왔다 갔다 반복하다가 의욕 없이 사는 제 모습에 싫증이 나, 슬슬 일을 구하기 시작했다. 마침 오픈을 준비하는 베이커리 가게를 보고 불현듯 나윤이 떠올라 연락을 했고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그게 다예요. 짧게 일도 하고 산책도 하고, 뭐 그랬어요.”

자연스럽게 얼굴을 문지르는 척 손을 올린 도웅은 고인 눈물을 함께 쓸어내렸다.

그때, 러그 위에 앉아있던 어희의 손이 예고 없이 도웅의 발을 움켜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도웅은 움찔, 다리를 떨었다.

“뭐, 뭐해요.”

대꾸하지 않고 양말 신은 발을 마사지하듯 주무르는 손길에 도웅은 어희 어깨를 손으로 밀었다. 그러나 어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도웅은 어희를 내버려 두었다. 어희는 한참 동안 도웅의 발을 한참 주무르다가 입을 뗐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낮은 어희의 목소리에 도웅은 눈을 깜박였다.

기다린 건가? 잘 모르겠다. 뉴욕에서는 유독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고 시선은 늘 허공에 맴돌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재미없게 지내기도 힘든데, 그 힘든 일을 도웅은 해냈다.

“나야말로 무책임하게 굴어서 미안해요. 일단 카페는 나한테 넘겨요.”

“…예.”

어희의 짧은 대답을 마지막으로 거실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발을 주무르는 부드러운 손길이 복사뼈에 닿을 때마다 도웅은 눈에 띄게 발가락을 움츠렸다.

발은 간지럽기만 한데 심장은 누가 손으로 쥐어짜듯 속상함이 가득했다. 쉴 틈 없이 눈물이 고여 손으로 닦아내다 보니 아예 물기가 흥건하다.

계속 앉아있다가는 밤새 이러고 있을 거 같아서 도웅은 몇 번이나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입에 담았지만, 바깥으로 내뱉지 못하고 삼켜냈다. 그리고 이내 천장에 박힌 시선을 아래로 옮기는데 발등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또 누수가…?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린 도웅은 저와 똑같이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어희를 발견했다. 천장이 아닌 어희의 두 눈에서 누수가 일어나고 있었다.

“어희 씨….”

왼쪽 눈썹을 비대칭으로 구긴 어희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속상함이 더 커진 도웅이 그를 부르자 가로로 기다란 입술 선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다 간신히 말을 뱉어냈다.

“우리, 헤어지는 겁니까?”

헤어짐을 예상했다던 어희가 눈물 젖은 눈으로 도웅을 올려다봤다. 시선을 마주하자 도웅은 이별을 실감한 건 비단 저뿐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2년 전과 같은 질문을 들은 도웅은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을 굽혀 쭈그려 앉았다. 오히려 도웅이 묻고 싶었다.

“우리 안 헤어져도 돼요? 그러니까, 나 다시 만나줄 거예요?”

만약 어희가 저를 받아준다면 이별이라 오해한 2년이라는 긴 시간을 어희 옆에서 후회할 자신이 있었다.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것뿐이라고 자기 세뇌를 한 도웅은 문득 억울해졌다. 그렇게나 많이 뉴욕에 왔으면서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우리를 방해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예전처럼 데이트도 하고 나랑 같이 밥도 먹고… 그리고 또 내 케이크도 먹고 그래 줄 거예요?”

도웅의 말에 어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꽉 막힌 목소리로 대답했다.

“꼬박꼬박 리뷰도 달겠습니다.”

도웅의 눈물 젖은 눈이 둥글게 휘었다.

“어희 씨한테 미안한 게 너무 많네요. 멋대로 숨어 버려서 미안해요.”

도웅의 손끝이 화해를 신청하듯 어희 손가락을 톡, 톡 두들겼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고 해주면 안 됩니까.”

2년 동안 언어구사력이 제법 늘었다.

도웅은 활짝 웃음 지으며 어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예고 없이 더해진 무게에 어희의 상체가 살짝 휘청였다. 특유의 달콤한 체취와 꽃 향이 코끝을 스쳤다.

“고맙고, 사랑해요.”

조심스러운 손길로 어희의 허리를 감싸 안은 어희는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꾸준히 눈물을 만들어냈다. 오랜 시간 서로를 부둥켜안고서 그리움을 메웠다.

꽃 향을 풍기는 둥그런 뒤통수를 살살 어루만지던 도웅의 눈에 오와 열을 맞춰 서 있는 토끼끼 군단이 들어왔다.

“아. 어희 씨 나 미안한 거 하나 더 있어요.”

어희는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눈으로 도웅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빗장뼈 부근에 얼굴을 묻었다.

“괜찮습니다.”

도웅은 무엇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괜찮다고 답하는 어희의 등을 두들겼다. 도웅이 괜찮지 않았다.

“어희 씨가 준 사진이랑 미니어처 없어졌어요. 이삿짐센터에 의뢰했는데 짐을 다 풀어보니까 없더라고요…. 미안해요.”

정성이 담긴 선물을 분실해 버렸다.

도웅이 울적하게 목소리를 깔자 어희는 아무렇지 않게 괜찮다고 답했다. 그런데도 도웅이 미안해하고 속상해하자 티슈 한 장을 뽑아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았다.

“그만 울어요. 마음 아프게.”

“저도 그러고 싶은데 계속 눈물이 납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손을 잡아 침실로 향하는 어희를 따라 걸음을 옮긴 도웅은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저 오늘 자고 가요?”

“예.”

오랜만에 매운 치약으로 양치를 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희와 함께 침실로 들어간 도웅은 침대 옆 낮은 협탁에 놓인 디저트 웅 미니어처를 발견하고는 호다닥 달려가 안을 확인했다.

테이블, 의자, 디저트, 주방 기구 수까지 세어본 도웅의 입꼬리는 위로 샐쭉 올라갔다.

“사람들이 오가며 떨어트린 모양인지 바닥에 있길래 제가 주워놨습니다.”

“사진은요? 사진 못 봤어요?”

“그건 다른 방에 있습니다.”

드레스 룸으로 사용하던 방을 작업실로 바꾼 듯했다.

“작업실 보여주면 안 돼요? 오랜만에 토끼끼 하우스도 보고 싶어요.”

도웅의 요청에 어희는 난감해했다.

“안 될 건 없지만….”

어물쩍 말끝을 흐리는 어희를 돌아본 도웅은 ‘설마’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판 건 아니죠…?”

“아닙니다. 공간이 부족해서 회사에 따로 맡겨놔서 예전 건 없습니다.”

“그럼 새로 만든 건 있어요?”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않은 도웅은 침실을 나와 과거 드레스 룸이었던 방문 앞에 섰다.

“열어봐도 돼요?”

“예. 됩니다.”

촉촉하게 눈물 젖은 눈동자가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간 도웅은 정면에 놓인 깔끔한 책상을 손끝으로 쓸었다.

스탠드 조명을 켜고 끄기를 반복한 도웅은 왼쪽 벽면의 낮은 서랍장 위에 놓여있는 미니어처를 발견했다. 미니어처의 뒤에는 잃어버린 줄 알았던 사진이 아기자기하게 걸려있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조명이요. 조명 켜주세요.”

어희의 작품은 조명 색과 배치가 멋있는 걸 기억하는 도웅은 작업실 등이 아닌 미니어처 조명을 켜달라며 어희를 졸랐다. 티슈에 열심히 눈물을 찍어내던 어희는 미니어처 뒤 스위치를 순서대로 딸깍, 켰다.

“와.”

일렬로 나열된 미니어처는 모두 처음 보는 토끼끼였다.

시간을 들여서 하나씩 구경하던 도웅은 이내 눈을 깜박였다.

“어….”

헷멧 위로 길쭉한 귀가 쫑긋 선 토끼끼 한 마리가 거리에서 킥보드 위에 있었다. 토실토실하고 짧은 손은 킥보드 손잡이를 꼭 잡고 있었고 발 한쪽은 땅을 차고 있는 작품이었는데, 어희 작품 치고는 수수한 배경과 소품이었다.

외에도 꼬치집 토끼끼, 친구 집에 놀러 간 토끼끼, 기내식 먹는 토끼끼, 이전에 본 적 있는 벚꽃놀이 토끼끼, 생일 파티 토끼끼를 거쳐서 다락 포함 3층짜리 저택에 도달한 도웅은 상체를 숙여 안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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