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90)

방금 털어낸 바지 위로 또 벚꽃잎이 내려앉았다. 어희는 물끄러미 꽃잎 수를 셌다.

여섯, 아니 일곱, 여덟.

나무에서 꽃잎이 하나 더 떨어지거나 바람에 실려 힘없이 날아갔다.

“뭐, 큰일은 아니고 그냥 소소한 일상 이야기요. 평소랑 모두 같은데, 유독 신경이 쓰이는 날이 있잖아요.”

“…….”

“그게 오늘이었어요. 우리 아빠가 자상한 성격이시긴 한데, 오늘따라 더 자상하더라구요. 그래서 되게 묘했어요. 기분이.”

어희와 썸 단계가 끝나면 바로 부모님께 인사를 드려야 하나?

“흐음.”

도웅은 길게 망설여졌다.

어희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사고도 좋았고 전화 한 통이면 일을 제치고 달려오는 착한 마음씨도 좋다. 무엇보다 참 잘생긴 특별한 사람이었다.

만약 어희가 이성이었다면 도웅은 부모님 입에서 선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먼저 자랑을 했을 게 분명했다. 신기한 사람을 만났는데, 좋은 사람이라서 오래오래 만나고 싶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희는 저와 같은 동성이었다. 아무리 간섭이 적은 부모님이라지만 어희와 저의 관계를 부모님께 밝힌다는 건 세상만사 쉽게 살려는 도웅에게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생각을 이어가던 도웅은 제 오른손에 닿는 온기에 시선을 내렸다. 저보다 큰 어희의 손이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도웅 씨 부모님은 잘 지내시죠?”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어희의 얼굴이 핀 미소는 평소보다 어색함이 더했다. 그래서 도웅은 방금 제 감정이 어땠는지 되짚어봤다.

“잘 지내시죠. 맨날 전화할 때마다 엄마 목소리도 같이 들리던데 두 분은 좀 떨어져서 지내셔도 될 거 같아요.”

아들인 자신이 봐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잉꼬부부다. 부모님을 떠올린 도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결국 도시락은 다 먹지도 못했네요.”

절반이나 남은 도시락을 아깝게 쳐다봤다. 당연히 빈손으로 올 줄 알았던 어희가 최소 3인분 이상의 식사를 가져온 것부터가 미스였다.

“그러게요.”

예상했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희 씨. 이쪽에 앉아봐요.”

도웅은 피크닉 매트 제일 끝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군말 없이 자리를 옮긴 어희 무릎을 베개 삼아 누운 도웅은 얌전히 눈을 감았다.

“아. 좋다.”

입가에 미소를 띤 도웅의 이마를 살살 쓸어 올린 어희는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희 씨. 학교는 왜 그만뒀어요?”

기분 좋게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길이 멈칫했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

“그냥….”

말끝을 흐린 어희의 목소리에 도웅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렇구나.”

하고 대답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소풍을 온다는 건 이런 거구나. 친구랑 노는 것보다 훨씬 좋다.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은 도웅은 단단한 허벅지에 볼을 문댔다.

“많이, 무서워서 안 갔습니다.”

“무서워요? 학교가요?”

“예.”

순순히 무섭다고 시인한 어희의 대답에 도웅이 눈꺼풀을 올렸다. 아래에서 봐도 굴욕이라곤 없는 잘생긴 이목구비 중 하나인 진갈색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한 도웅은 다리를 꼬았다.

“너무… 겁이 많은 걸까요.”

묻는 어희의 단정한 눈썹이 살며시 찡그려졌다.

“숨는 건 사람 본능이랬어요. 개인마다 다른데, 스트레스 한계치를 넘어서면 계속 버티고 견디는 것보다는 숨어버리는 게 더 낫긴 하죠.”

얼마나 무서웠으면 숨었겠어.

도웅의 머릿속에 ‘숨기 달인, 어희’라는 시덥잖은 농담이 떠올랐지만, 굳이 놀리지 않았다.

“어희 씨는 뭐가 제일 무서워요? 감정? 사람?”

“…제가 싫어하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 무섭습니다. 보고 싶지 않아요. 닿는 건 더 싫고.”

미간까지 좁히며 끔찍해 하는 어희의 표정에 도웅은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였다.

“어희 씨가 내 감정은 온색이랬잖아요. 아주 따뜻하다고. 그러면 만약 어희 씨가 가장 싫어하는 감정을 갖게 되면요? 감정이란 게 별자리나 혈액형도 아니고 상황에 따라서 변하잖아요.”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문 어희를 구경했다. 도웅은 어희를 볼 때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도웅은 늦게 시작한 첫 연애에 홀라당 빠져버렸다.

가지런한 속눈썹은 아래에서 봐도 참 가지런하다는 태평한 감상을 말해줄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어희가 입을 뗐다.

“도웅 씨는 괜찮습니다.”

사람을 면전에 두고 있으니 대놓고 내친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만, 괜찮다는 말은 예상하지 못했다. 어쨌든 기분은 좋았기에 눈매가 반원 모양으로 동글게 휘었다.

어희는 제 무릎에 누워있는 도웅의 머리카락을 여전히 쓰다듬으며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신용카드 한도 같은 겁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물질적인 비유에 분위기가 와장창 깨져버렸다. 대놓고 웃지 않으려 입매를 꾹 닫았더니 도웅은 광대가 슬슬 아팠다.

“처음 한도는 월급 미만으로 측정되죠. 저는 도웅 씨가 얼마나 빛나는 사람인지 아니까 좋지 못한 감정이 들더라도 기다리다 보면 돌아올 걸 압니다. 감정은 별자리나 혈액형이 아니긴 하지만 본성이랑은 닮아있으니까요.”

“그럼 제 한도는 얼만큼이에요?”

“도웅 씨는 제 카드까지 두 배로 쓸 수 있으니 기뻐하세요.”

가상의 감정 카드를 어희 몫까지 쓸 수 있게 되자 도웅은 양손을 위로 뻗어 작게 야호를 외쳤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나도 어희 씨처럼 숨어버릴까 봐요. 그래도 괜찮아요?”

“예. 기다리겠습니다.”

도웅은 위로 뻗은 양손으로 어희 얼굴을 감쌌다. 꽃 구경을 왔는데 제일 짙은 꽃 향을 풍기는 사람이 있다는 게 재미있었다. 귀 뒤로 넘긴 머리카락이 헝클어졌음에도 어희는 어색한 미소를 띤 채 도웅을 내려봤다.

“기다려요? 저를요? 왜?”

원래부터 날카롭게 올라간 어희의 왼쪽 눈매가 움찔, 떨렸다.

“많이 숨어봤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는 현실이 좀 서글펐던 거 같습니다.”

본인도 받지 못했던 호의를 선뜻 저에게 베풀어 준다는 어희의 말에 도웅은 활짝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건 최소한 키스 타이밍이라는 직감을 느꼈다. 나름 직감이 발달했다고 믿는 도웅은 감싸고 있는 따뜻한 어희의 얼굴을 슬며시 아래로 당겼다.

사나운 눈매가 눈꺼풀에 가려졌다. 이끄는 대로 서서히 내려오는 어희의 머리 위로 벚꽃잎이 함박눈처럼 떨어졌다. 언제봐도 신기한 적당히 불그스름한 입술이 가까워지자 도웅은 쿵쾅쿵쾅 미친 듯이 뜀박질해대는 심장이 곧 입 밖으로 튀어나올 거 같았다. 무려 당장은 키스를 해야 하니 심장 구토는 참기로 했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치 가까워졌을 때, 도웅은 몰캉한 입술이 아닌 단단한 감촉에 눈을 번쩍 떴다.

“음?”

“…….”

어희의 네 개의 손가락 반 마디가 도웅의 입술을 막고 있었다. 도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박였다. 진한 갈색 홍채에 도웅의 얼굴이 반사되어 보일 정도로 거리감이 없었다.

도웅은 제 입술과 어희 입술 사이를 가로막아 로맨틱한 접촉을 방해하는 손을 내려봤다. 그리고 어희 머리통을 잡은 양손 중에서 한 손을 슬며시 뗐다. 그리고 어희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내리려는데, 버티는 힘이 상당했다.

“으읍.”

“…….”

분명 방금까지 로맨틱한 분위기였고 배경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텐데, 어째서 이리 완강하게 거부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소리 없는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도웅은 나름 3D 업종 종사자인 만큼 근력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어희의 근력은 정말 의외였다. 그 무거운 도자기 화분을 혼자 옮길 때부터 알아봤지만, 힘이 세다.

작업실에서 미니어처나 만드는 양반 힘이 뭐 이리 강해…!

끝내 도웅의 입안에서 작게 이 갈리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힘겨루기가 끝이 났다.

“헉, 헉…!”

“후.”

욕망이 그득한 손아귀에서 벗어난 어희는 짧은 숨을 내쉬었다. 여유 있는 모습에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은 듯했으나 가슴이 들썩이는 걸로 봐서는 만만치 않은 상대와 힘을 겨룬 게 틀림없다.

도웅은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까부터 어희가 이마를 쓸어 만진 덕분에 앞머리가 조금 우스꽝스럽게 붕 떴다.

“방금 타이밍 완벽하지 않았어요?!”

도웅의 뻔뻔한 물음에 어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완벽했습니다.”

차라리 완벽하지 않았다고 하지!

완벽했다면서 있는 힘을 다해서 뿌리친 어희에게 답답함을 느낀 도웅은 제 가슴이 아닌 어희의 가슴을 퍽, 퍽 가볍게 때렸다.

“그걸 힘까지 써가면서 버텨야 할 일이었을까요? 예?!”

“밖이잖습니까.”

갑자기 사회화가 진행된 것 같은, 지극히 정상적인 어희의 사고에 도웅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늦은 시간이라도 도웅과 어희처럼 꽃 구경을 온 사람이 적지는 않았다. 그 한복판에서 어희에게 과감하게 키스를 하려 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고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어희가 저보다 더 주변 눈을 신경 썼다는 사실이었다.

옛날에는 주위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던 어희였는데, 어째서인지 좀 달라졌다.

삐쭉 나오려는 입술을 앙다문 도웅은 탄수화물이 당겨서 유부초밥 하나를 집어 먹었다.

우물우물, 세 개를 먹은 도웅은 김밥으로 종목을 바꿨다. 김밥이란 게 참 신기하다. 배가 불러도 간식처럼 계속 입에 들어갔다.

“무슨 생각 합니까?”

아무런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얌전히 앉아 있는 어희가 먼저 침묵을 깨고 물었다. 입안의 음식물을 삼킨 도웅은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대답했다.

“솔직하게요?”

“예.”

“첫째로 스킨십 거부당한 게 자존심 상했어요. 우리 서로 좋아하잖아요. 그리고 동시에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납득 중이에요. 어쨌든 썸 단계니까.”

“두 번째도 있습니까?”

도웅은 고개를 주억였다.

“밖이라서 안 된 거면 집에서는 되는지 생각 중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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