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히 종이 가방을 양손에 받쳐 든 도웅은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슬며시 열리는 현관문을 확 잡아당긴 도웅은 놀란 눈을 떴다.
“어, 어엇?”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도웅은 아버지뻘 되는 6, 70대 남성을 보고서 현관문에 붙은 호수를 확인했다.
3201호.
어희 집 맞는데….
“당신 뭐요? 어디 배달원이길래 문을 서슴없이 열어!”
“디저트 웅입니다.”
태연하게 대답한 도웅은 눈을 끔벅이며 남자를 살폈다. 얇은 무테안경을 쓴 남자는 흔히 드라마에서 보던 깐깐한 교수님 같은 이미지였다. 눈앞의 남자는 누구길래 어희의 집에 있는 걸까, 샅샅이 살핀 도웅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아버지인가? 부모님이랑 연 끊고 산다고 들은 거 같은데…? 인사를 해야 할지, 어희의 도움 요청을 우선으로 처리해야 할지 헷갈리던 도웅은 둘 다 하기로 결정했다.
“아버님이신가요? 안녕하세요.”
인사와 동시에 현관문을 비집고 들어간 도웅은 제집처럼 신발을 벗고 익숙하게 집안을 돌아다녔다.
“이봐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남의 집을 함부로…!”
어희 이 양반은 배달을 시켰으면 재깍재깍 나와서 받을 일이지 어디 숨었담.
도웅은 뻔뻔하게 뒤따라오는 남성을 무시하고 침실과 드라이, 드레스 룸, 한때 신세를 졌던 빈방까지 순서대로 둘러봤다. 욕실까지 일일이 문을 열어서 확인한 도웅은 마지막으로 작업실 문을 열었다.
“오….”
불 꺼진 작업실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어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뒤에서 남성이 어깨를 붙잡은 억센 손길을 손쉽게 쳐낸 도웅은 작업실 문을 잠그고 어희에게 다가갔다.
“어희 씨? 무슨 일이래요? 밖에 저 사람은 누구예요? 목도리는 뭐하게.”
뉴욕에서 도웅이 준 목도리를 얼굴에 칭칭 감고서 숨어있는 모습을 보자 어딘가 마음이 뻐근해졌다. 옛날 같았으면 다 큰 사람이 숨는 법도 모른다며 헛웃음을 지었을 만큼 어희는 몸을 최대한 작게 웅크리고 있었다.
“어희 씨?”
목도리를 풀고 어깨를 잡아 흔들자 그제야 어희가 고개를 들었다. 왼쪽 눈 아래부터 뺨까지 길게 붉은 자국이 남아있었다. 눈살이 찌푸려지려 할 때 어희가 돌연 도웅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어희의 어깨를 도닥이며 도웅은 천장을 올려봤다.
이게 다 무슨 일일까….
작업실 문을 열려는 듯 문고리를 잡고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어희 씨. 혹시 빚졌어요? 밖에 있는 사람 사채꾼이에요? 빚이 얼만데요?”
남의 얼굴을 때릴 정도면 억 단위는 되나?
심호흡하는 어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떨림은 여전한 걸 보면 아직 진정되려면 먼 거 같았다.
“그럼 밖에 있는 사람은 누구예요? 나 너무 놀랐잖아. 어희 씨 보러 왔는데 웬 아저씨가 나와서.”
“…….”
이 순간에도 꽃 향을 풍기는 어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도웅은 매우 자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거 문고리 반대편에서 뾰족한 거로 툭, 누르면 바로 열리는 거 알죠? 밖에 아저씨, 누구예요? 아는 사람?”
“아…, 아버지예요.”
한숨처럼 흘러나온 떨리는 어희의 말에 도웅의 표정이 묘해졌다.
“얼굴 안 보는 사이라면서요. 왜 오셨대요?”
빈말이라도 아버지한테 제대로 인사드릴까요?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뭐 도와주면 돼요?”
“…그냥, 이대로…, 있어 주시면 됩니다.”
썩 마음에 드는 대답이 아니었다.
밖에서는 계속 문고리를 잡고 흔들고 있는데 숨을 곳도 마땅찮아 보이는 이 작업실 안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자니.
“…….”
마음에 들지 않아도 도웅은 제 배에 얼굴을 묻고 있는 어희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목덜미부터 등허리까지 쓰다듬어 주었다. 다섯 차례 다독여 주자 어희의 떨림이 멈췄고 진정된 듯 보였다. 그때 작업실 잠금장치가 퉁, 하고 열렸다.
“어희 씨. 작업실 문 열린 거 알고 있어요?”
“예. 압니다.”
당장 들어와서 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씩씩거리는 남성은 정말 의외로 작업실에 한 걸음도 들어오지 않았다. 보이지 않은 선이 그어진 것처럼.
“당신, 누구길래 함부로 들어오는 거예요? 큰일 나고 싶어요?!”
대신에 남자는 핸드폰을 들고 세 자리 숫자를 눌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긴급 번호였다.
“저 썸 타는 사람인데요!”
부러 능청스럽고, 씩씩하게 대답하자 배에 얼굴을 묻고 있던 어희가 실소하는 게 느껴졌다.
“…어희 씨. 웃지만 말고 설명 좀 해봐요.”
“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같이 살자고 찾아오신 거라….”
도웅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거 같아서 귀를 한 번 후볐다. 지난번 어희가 귀 체온계를 깊게 넣어서 고막을 다친 게 틀림없었다.
“어희 씨. 저한테 같이 살자고 한 건 아니죠?”
“예. 잘못 들은 거 아닙니다.”
어희의 아버지는 정말로 경찰서에 신고 중이었다. 가택 침입으로. 도웅은 이런 일로 변호사를 사야 하나, 잠깐 망설였다.
외국에서는 가택 침입이 엄청난 중죄였지만, 한국에서는 원만하게 합의가 되는 부분 같았다. 게다가 집주인이 제 편이지 않은가.
“나 참…. 어희 씨. 혹시 이 집 살 때 부모님이 돈 빌려줬어요? 얼만데?”
“…….”
“아. 들어갔어도 자식한테 뭐, 집 한 채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 더 해주고 싶어도 못 해주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데.”
도웅은 복잡한 심정으로 떨어질 생각을 않는 어희의 머리통을 내려봤다.
“…안 들어갔습니다.”
“한 푼도?”
“예.”
그런데 왜 같이 살자고 갑자기 찾아왔을까….
자연스럽게 어희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도웅이 생각에 잠겼을 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저기, 어희 씨. 경찰이 와서 잠깐 나가봐야 할 거 같아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큰 한숨을 내쉰 어희가 마른세수를 하고는 드디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갓 태어난 송아지가 스스로 걷는 걸 지켜보는 농장주 마음이 이런 걸까. 도웅은 감동했다.
어희가…, 일어났어…!
“제가 집주인입니다.”
* * *
옛날 텔레비전에서 하는 프로그램은 자극적인 게 많았다. 형사 다큐라거나 폭력 솔루션 프로그램이 대부분 그랬다. 도웅은 그런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생각보다는 인간이 어디까지 추해질 수 있는지 알게 되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지금이 딱 그랬다.
경찰 손에 붙잡혀 바깥으로 끌려가면서도 어희를 향해 버럭버럭 언성을 높이는 아버지뻘의 남성을 물끄러미 소파에 앉아 구경했다. 배달 온 종이 가방에서 텀블러에 당당히 빨대를 꽂아 마셨다. 주머니에서 긴 진동이 느껴져 핸드폰을 꺼내 봤더니 영호였다.
“어, 영호야.”
-사장님? 그대로 안 들어오시나요?
사장이 가게에 없는 게 제일 편하다던 영호의 목소리가 대놓고 들떠있었다.
“아니, 모르겠다. 어떻게 굴러가는지, 원.”
-네? 굴러가요? 사고 났어요?
사고라면 사고다.
도웅은 다른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어희를 보고 커피를 마셨다.
“오늘 마감할 때 문 잠그지 마. 나 가게 열쇠 캐비닛에 있어.”
통화를 종료하고서 마카롱을 꺼내 먹었다. 당분을 섭취하자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경찰까지 모두 가고 나서 현관문을 닫은 어희가 도웅이 있는 거실로 걸어왔다.
마카롱 한 입, 커피 한 모금을 반복한 도웅은 어희가 어떻게 행동할지 지켜봤다. 목에는 여전히 자신이 준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터벅터벅 걸어온 어희는 도웅의 왼쪽에 앉더니 그대로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허어. 앉아요.”
단호한 도웅의 어조에 어희가 벌떡 일어나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았다. 왼쪽 뺨은 여전히 불그스름했다. 그게 눈에 밟힌 도웅은 제 허벅지를 손으로 가볍게 두들겼다.
“그냥 누워요. 얻어맞은 거 보기 싫네.”
말을 잘 듣는 어희가 다시 누웠다. 가려지니까 좀 나았다. 도웅은 먹고 있던 마카롱 반쪽을 어희 입에 갖다 대주었다. 냠, 받아먹길래 다른 마카롱을 뜯어 입에 대주자 저금통처럼 야금야금 받아먹기는 잘도 받아먹는다. 애초에 어희의 것이었으나 오늘은 도웅도 당이 떨어졌다.
너 한 입, 나 한 입 나눠 먹다가 도웅이 먼저 입을 뗐다.
“왜 숨어있었어요?”
또 숨고 싶은 듯 얼굴을 깊이 묻는 어희의 어깨를 잡아 밀었다.
어디서, 소중한 남의 소중이에 얼굴을 묻으려고….
“이거 먹고 말해봐요.”
급히 메뉴를 챙기는 와중에 서비스로 챙겨온 마들렌을 밀어 넣었다. 우물우물 먹는 걸 보고 재차 같은 질문을 했다.
“하나만 더 주세요.”
두 개를 겹쳐서 입에 넣어줬다. 꿀꺽 삼키고는 어희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숨는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당연히 무서워서 숨죠.”
“키도 덩치도 어희 씨가 더 큰데 뭐가 무서워요?”
물론 아버지를 때릴 수야 없겠지만, 그렇다고 숨을 정도로 무서워하는 게 이해 가지 않았다. 어희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마들렌 하나를 입에 넣어준 도웅은 커피를 마셨다. 벌써 텀블러의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트라우마 그런 거예요?”
“음. 그런가 봅니다. 부모 얼굴만 보면 속이 메슥거려서….”
“그렇구나.”
도웅은 마들렌 봉투를 내려놓고 초코 휘낭시에를 꺼내 어희의 입에 밀어 넣었다.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거뿐이었다. 자판기처럼 디저트를 입에 밀어주는 것.
“아버지가 작업실까지 들어왔으면 아마 소리도 질렀을 겁니다.”
항상 사근사근하고 덤덤한 어조로 말하는 어희가 언성을 높이는 게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그걸 알아서 그의 아버지도 들어오지 않은 듯했다.
도웅은 빨대를 물고 커피를 마셨다.
“흐음.”
낮은 탄식을 흘린 도웅은 오리지널 휘낭시에를 넣어줬다. 꾸준히 반복 작업을 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미니 케익을 들어서, 이건 포크로 떠먹여 줘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 어희가 슬며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목메는데 저도 커피 좀 주세요.”
도웅은 부쩍 가벼워진 텀블러 뚜껑을 열었다. 어느새 밑바닥에 얼음만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