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90)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나란히 집을 나선 도웅과 어희는 카페 앞에서 헤어졌다. 오픈 시간 직전에 출근한 도웅은 직원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았다.

“사장님 몸은 괜찮아요? 점심에 죽 사다 드릴까요?”

“어이쿠! 사장님, 그거 제가 할게요. 무거우니까 내려놔요.”

걱정이 너무 과해 도웅은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바람이 불면 옆으로 쓰러질, 무척이나 가벼운 플라스틱 컵이 무거운 물건이라도 된 듯 뺏어간 직원을 멀뚱히 쳐다봤다.

“뭐야. 왜들 이래?”

먼저 묻고서 도웅은 뒤늦게 이틀 전, 카페 앞에서 어희와 크게 다툰 일을 떠올렸다. 직원도 모두 보고 있었을 게 뻔했다. 민망함에 목덜미를 주물렀다.

“사장님 아프셨다면서요. 더 안 쉬어도 되는 거예요?”

어희도 비슷한 걱정을 했다.

“어. 완전 괜찮아.”

하루간 침대 신세를 지고 일터로 복귀한 도웅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냈다.

평소와 똑같이 로얄 골드 펠리스 3201호에서 주문이 들어왔고 평소와 똑같이 도웅이 배달했다. 어희와 악수를 나누고 카페로 돌아온 도웅은 골목길 한쪽에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풀에 물도 주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일을 하고 마감을 마친 이후 직원 모두가 퇴근한 불 꺼진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며 차분히 차를 마셨다.

홀짝, 홀짝 따뜻한 차를 마시던 도웅은 찻잔이 깨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세게 잔을 내려놨다. 중간에 놓쳤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날카로운 소음이 났다.

“허어.”

어희의 태도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평소랑 같았다. 달라진 건 어희를 좋아하는 마음을 자각했다는 것 하나였다. 아니. 둘이다.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아니까, 둘로 쳐줘도 된다.

도웅은 지극히 평범한 오늘의 일상이 불만이었다. 갑자기 죽고 못 사는 연인처럼 구는 것까지는 자신도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이건 마음을 자각하기 전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좋아한다는데, 왜, 왜…….”

꼭 좋아하는 마음에 응답해달라는 게 아니었다.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인데 어째서 어희가 미적거리는지 모르겠다.

“이게 바로 역지사지인가…?”

악의 없이 열심히 그의 앞에 얼쩡거렸던 자신을 떠올리자 어희도 비슷한 감정이었겠거니, 흥분이 가라앉았다. 찻물이 튄 테이블을 하얀 냅킨으로 닦자 연분홍색으로 물들었다.

혹시 복수인 걸까?

도웅의 손이 멈췄다. 복수, 그럴싸하다. 그러나 어희의 성격을 미루어보면 어울리지 않았다. 덩치만 컸지, 계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옅은 한숨을 내쉰 도웅이 자리를 정리하려 할 때 테이블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길게 진동했다.

보이스 톡이었다. 핸드폰을 힐끔 본 도웅은 발신자가 <아버지>인걸 확인하고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우고 설거지했다.

“아빠?”

와이파이 상태가 좋지 않은 건지,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도웅은 다시금 불렀다.

-내 아들 잘 지내냐.

한 박자 늦게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도웅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늘 똑같이 잘 지내죠. 웬일이세요?”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도웅이 먼저 전화를 걸면 늘 일 때문에 바쁘다거나 어머니와 데이트를 해야 한다며 먼저 전화를 끊었던 아버지였기에 무슨 일이 있는지 묻는 건 그리 쌀쌀맞지도 이상하지도 않았다.

-아들한테 꼭 일이 있어야 전화를 하는 거니?

스피커 폰인 듯 옆에서 어머니의 목소리도 함께 들렸다. 손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도웅은 웃음을 흘렸다.

“거긴 아침일 텐데 갑자기 아침부터 전화를 주시니까, 걱정돼서 그렇죠.”

-아빠 걱정은 하지 말고. 밥은 먹었니?

“시간이 몇 신데요. 진작 먹었죠. 아빠는요?”

근황 주고받다가 어제 아팠던 이야기까지 나오자 안쓰러워하는 아버지의 걱정과 혼자 살아서 그렇다는 어머니의 핀잔이 이어졌다.

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카페 문을 잠그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우연히 지나가다 마주친 건지 몰라도 어희를 발견하고서 손을 흔들었다. 핸드폰 너머로 아버지의 사촌의 팔촌 소식이 들리고 있었다.

-하도 자랑을 하기에, 네 딸은 뭐 하는지 물어봤지. 웅이, 너도 기억나지? 왜, 초등학생 때 자주 놀았던 지수.

“기억이 날 듯 말 듯 해요. 저 노는 거 좋아했잖아요.”

어희가 자연스럽게 옆에 서서 나란히 걸었다. 도웅의 걸음 속도는 느려졌다.

“아. 아빠, 나 지금 친구 만나서 이따가 다시 걸어도 괜찮아요?”

전화를 끊지 않아도 된다며 어희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걸 필요는 없고…, 웅아. 다음에 올 때는 둘이 오렴.

“둘이요? 어희 씨랑요?”

어희는 자신의 이름이 도웅의 입에서 나오자 슬쩍 곁눈질했다. 핸드폰이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넘어갔는지, 약간 거리감 있게 들렸던 어머니 목소리가 또박또박 크게 잘 들렸다. 옆에서 터진 기침 소리까지.

-얘는. 여자친구랑 오라는 거지.

“에이, 제 나이에 무슨….”

느리게 걷던 도웅의 걸음은 아예 멈췄다. 눈앞의 어희를 빤히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핸드폰 버튼을 눌러, 볼륨을 줄였다.

-네가 집이 없니, 돈이 없니, 그렇다고 직업이 없니. 부족한 게 없을 때는 빨리 결혼하는 게 좋지.

“지금 저 전세 살잖아요. 하하.”

어머니에게는 통하지 않는 실없는 소리를 흘린 도웅은 뒤통수를 문질렀다. 아예 해외로 거처를 옮긴 부모님이 한국에 있는 본가 명의를 도웅에게 남겼으니 집이 없다고 하기도 모호했다.

“하하, 여튼 제가 다시 전화드릴게요.”

빠져나갈 곳을 찾지 못한 도웅은 말을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었다. 머쓱한 미소와 함께 멈춰 선 발을 다시 움직였다.

“어희 씨, 어디 가는 길이에요?”

“음.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편의점 가는 길이었습니다.”

로얄 골드 펠리스 정문 바로 앞에 편의점이 있는 걸 아는데 굳이 여기까지 걸음을 한 어희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그럼 내 집으로 갈래요? 아이스크림 있는데.”

어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씩 미소를 지은 도웅은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이스크림이 집에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한 블록을 더 지나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샀다.

어희는 불만 없이 도웅의 집까지 따라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뜯었다. 그때, 어희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도웅이 궁금한 듯 바라보자 어희가 입을 열었다.

“비밀번호는 바꾸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핸드폰 번호를 그대로 도어락에 쓰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도웅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어희 씨는요. 공육공육이 뭐에요. 생일?”

“…예, 뭐. 제 생일 아는 사람 몇 없어서 괜찮습니다.”

“진짜 생일이었나 보네…. 어희 씨가 저한테 잔소리할 부분은 아닌 거 알죠?”

길쭉한 아이스크림을 말없이 먹었다. 하나로는 아쉬움이 남아서 새 아이스크림을 뜯어 입에 넣었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 널브러진 도웅의 눈에 느슨하게 묶여있는 머리카락이 띄었다. 예전에 한 번 만져보려다, 실패한.

“어희 씨. 저 어희 씨 머리 한 번 만져봐도 되나요?”

갑작스러운 요청에 어희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손 씻고 올게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욕실로 들어간 도웅은 꼼꼼히 손을 씻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는지 모르겠다. 타올에 물기를 닦으며 도웅은 심호흡을 하며 입에 문 아이스크림을 으적으적 씹어 막대를 버렸다.

어희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서 도웅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렌지 맛 과즙 막대 아이스크림을 새로 뜯는 어희의 앞에 선 도웅은 조심스럽게 왼손을 내밀었다.

어희가 앉아 있어서, 머리를 만지기에 편한 높낮이였다. 도웅의 손가락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감겼다. 꽃 향이 진동하는 머리카락을 천천히 만지며 손을 움직였다. 새끼손가락에 말랑하면서 딱딱한 귓바퀴가 닿자 어희의 어깨가 움찔했다. 뒤통수로 움직일수록 느슨하게 묶여있던 머리끈이 뒤로 밀려났다.

“그런데, 머리는 왜….”

“그냥요. 만져보고 싶었어요.”

어희는 간지러운지 자꾸만 슬쩍슬쩍 아래로 머리를 숙였다. 집요하게 머리카락에 손을 넣고 마음껏 두상을 만지던 도웅의 손길에 머리카락 끝에 아슬아슬하게 달린 머리끈이 소파에 떨어졌다. 긴 머리카락이 하얀 목덜미를 덮었다.

“…이제 됐습니까?”

“조금만 더요.”

손가락을 감싸는 머릿결과 동그란 두상이 마음에 들어, 도웅은 꾸준히 만졌다.

어희가 새로 뜯은 아이스크림을 거의 다 먹어갈 때쯤 도웅은 머리카락에 파묻힌 왼손을 빼냈다.

아이스크림 막대를 물고서 머리를 묶는 어희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피부가 하얘서 더 티가 났다.

“아이스크림 잘 먹었습니다. 이만 가볼게요.”

막대에 붙은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넣은 어희가 소파에서 일어나는 걸 어깨를 잡아 도로 앉힌 도웅은 눈매가 곱게 접힐 정도로 활짝 미소 지었다.

“저 하고 싶었던 거 하나 더 있어요.”

“…예. 하세요.”

어희는 또 머리카락인 줄 알았는지, 기껏 묶은 머리끈을 도로 풀었다. 머리카락에 닿지 않았던 도웅의 오른손이 어희의 까만 머리칼을 무시하고 눈 아래를 매만졌다. 비교적 말랑한 볼을 지난 도웅의 손은 적당한 크기의 얇은 듯 보이는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

“…….”

당황한 듯 살짝 벌어진 어희의 입술 틈으로 검지와 중지를 집어넣었다. 방금 아이스크림을 먹어서 그런지 입안이 차가웠다. 말캉한 혀를 손끝으로 꾹, 꾹 누르기도 했다가 입천장을 긁어보기도 했다. 볼 안쪽을 살살 문지를 때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예전부터 입 구조가 궁금했다고 말을 꺼내려던 도웅은 새빨갛게 상기 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는 어희를 보자 덩달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거, 마치 불건전한 짓을 한 거 같지 않은가. 어희의 입안을 희롱한 손가락을 빼려 할 때, 어희가 도웅의 손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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