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문도 닫지 않고 집을 뛰쳐나가 버린 도웅 덕분에 어희는 멀거니 서서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발을 떼었다.
하필이면 당 징크스에 시달리고 있는 요즘 갑자기 도웅이 들이닥칠 게 뭐란 말인가. 안전하게 현관까지 힘겨운 걸음을 한 어희는 문에 손이 찍힐세라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띠리릭, 도어락 소리가 나고 나서 이번에는 식탁까지의 여정을 시작했다. 집에서만 이렇게 다쳤는데 이건 당 징크스가 아니라 저주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만족스러운 당을 섭취하지 못했더니 열흘도 못 가 이 꼴이 나버렸다. 사뿐사뿐, 가까스로 식탁에 도착한 어희는 자신의 핸드폰을 살폈다.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소리였는데, 의외로 멀쩡했다.
핸드폰은 소중한 물건 중 하나였다. 한 손에 들어오는 직사각형 기계가 없으면 모바일 전용 배달 어플인 요거요를 이용하지 못했다.
당 징크스를 극복해보기 위한 시도였으나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소중히 다뤄야 했다.
괜히 계속 손에 쥐고 있다가 핸드폰까지 아작날세라 조심히 내려놓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도웅의 카페에 변심이 생긴 건 아니다. 그저 너무 의존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해 홀로 극복하려 했을 뿐이다.
결과는 이리 부딪치고 저리 넘어지고 얻은 상처뿐이었지만. 도웅을 만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극심한 당 징크스다.
“흐음.”
골절을 입은 손목이 시큰거렸다. 어희는 낮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작업실로 향했다. 어떻게든 맡은 일은 기한 안에 끝내야 편히 잠이 들 수 있다. 평소라면 개인 소장까지 동시 작업을 진행했겠지만, 이번만은 예외로 뒀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일단 호텔 측에 보낼 상품을 우선 제작하기로 했다. 그동안 일을 미루고 도웅과 탱자탱자 놀았던 업보가 돌아온 셈이라, 탓할 사람도 없었다.
디테일한 장식을 넣는 섬세한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도망쳐버린 도웅이 떠올라 손을 멈췄다. 습관처럼 등받이에 기대려는 몸을 앞으로 당겨 앉았다.
괜히 기대다가 또 넘어질라….
도웅이 찾아오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어희를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못 본 사이 불안과 울적함을 가득 안고 방문한 도웅을 달래주기 위해 꾸준히 원하던 리뷰를 달아주려는 찰나 갑자기 도망쳐버린 게 이해되지 않았다.
“으음.”
깔끔한 목제 서랍장에 금속 손잡이를 마저 달았다. 매끄럽게 잘 열리는지 확인 후 다치지 않은 오른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황급히 부랴부랴 도망치는 뒷모습에는 여전히 불안과 울적함이 보였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다. 감정이 보이기에 어떤 생각인지 더 짐작되지 않아서.
전화나 해볼까.
하필 핸드폰을 식탁에 그대로 두고 왔다. 전화를 걸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화장실도 조심히 가는 마당에 전화하겠다고 부엌까지 가야 하나….
짧은 망설임이 들었으나 이미 몸은 작업실을 나와 식탁을 향해 성큼 걷고 있었다. 전화를 걸고서 스피커로 돌렸다.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클래식이 부엌에 잔잔하게 울렸다.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 봉투를 뜯었다. 냉수와 함께 삼키자 도웅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로는 색이 보이지 않았지만 단번에 울적한 상태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아. 도웅 씨?”
-네.
“…….”
전화하긴 했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하지?
일순할 말을 잃은 어희는 느릿느릿 물을 마셨다.
-…어희 씨?
“예.”
-전화를 걸었으면 용건을 말해줘야죠.
초등학생도 다 아는 기본적인 전화 예절을 가르치는 도웅의 목소리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음. 괜찮습니까?”
-무… 뭐가요?
“확 뛰쳐나갔잖습니까.”
무슨 인간 로켓 같았다. 도웅이 그렇게 재빠른 사람인 줄 미처 몰랐다.
-집에 가스 불을 안 끄고 나온 게 생각나서요.
“인덕션 아닙니까?”
-카페랑 착각했어요.
“그렇군요.”
식탁 의자를 모조리 구석으로 치워 놓은지라 앉을 곳이 마땅히 없었다. 식탁에 가만히 서서 통화를 이어갔다.
“걱정돼서 전화해봤습니다.”
-…….
“그런데 막상 도웅 씨 목소리를 들으니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웅이 만든 디저트 없이 버티려다 다치기만 한 본인이 정작 누구를 걱정할 처지는 아니다. 그걸 알면서도 걱정이 돼서 위험을 무릅쓰고 전화를 걸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어희는 그걸로 멈추지 않고 위험천만하게 서슴없이 행동했다. 바로 식탁에 걸터앉은 것.
식탁에서 미끄러진다거나 식탁 다리가 빠져 크게 다칠 수 있는 재수 없는 징크스를 잊은 듯 굴었다.
“영 서툴러서.”
-네에. 알아요.
“도웅 씨. 리뷰는 언제 달아줄까요.”
-…….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끊겼나, 핸드폰을 내려봤더니 여전히 통화 중이다.
-이만 끊을게요. 고민하느라 바빠서.
“예.”
깁스를 하지 않은 손가락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아예 핸드폰을 챙겨 들고 작업실로 들어간 어희는 몽실몽실한 도웅의 감정을 상상하며 미소 지었다.
-띵동.
다음 날 현관을 울리는 차임벨 소리에 담요에 꽁꽁 싸 새우잠을 자고 있던 어희가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무시하고 잠을 이어가려 했으나 바로 어제 끈덕지게 벨을 누르던 도웅이 떠올라 몸을 일으켰다. 괜히 뭉그적거려서 도웅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
어깨에 담요를 두른 상태로 현관문을 열었더니 아무도 없었다. 문 뒤까지 샅샅이 살핀 후 문을 닫으려던 어희의 눈길을 잡아끄는 물체가 있었다.
문 옆에 놓인 디저트 웅 종이가방에 눈을 깜박이다 들고 안으로 돌아왔다.
종이가방 안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과 각종 과일 타르트, 로맨스 파티 케익이 있었다. 굳이 의심하지 않아도 도웅이 두고 간 디저트가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제 봤던 그의 불안과 똑같은 색이 디저트에 묻어나오지 않을 테니까.
어희는 전화를 걸며 이로 빨대를 뜯었다. 얼마 만에 먹는 도웅의 디저트인가. 커피에 빨대를 꽂고 한입 쭉 빨았다. 시원하면서 풍미 깊은 원두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미치겠다.”
순식간에 커피 절반을 마신 후 생딸기 타르트를 쳐다봤다. 좋은 감정이 묻은, 만족스러운 디저트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만큼 불안이 베여 있었다.
짜증이나 불안, 속상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보이는 음식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물론 눈앞의 디저트는 도웅이 만들었다는 걸 알기에 대뜸 손으로 집어 한 입 크게 물었다.
“…맛있네.”
감정이 전달할 수 있는 물건 같은 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도웅이 근심과 걱정을 실어 디저트를 보내면 모두 먹어 치워 줄 수 있을 텐데.
-……이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일이 바쁜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도웅에게 맛있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본격적으로 한쪽 팔을 걷어붙였다.
앉은 자리에서 두 개의 타르트를 먹고서 로맨스 파티를 뜯었다. 오랜만에 보는 로맨스 파티는 더욱 달콤해져 있다.
스푼으로 한 입, 두 입 떠먹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전에 벌어진 일이 떠올랐다. 도웅의 리뷰 어필을 사랑으로 착각하고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가 대차게 차인 날.
그날도 지금이랑 비슷했다. 실망감과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도웅의 감정 색이 듬뿍 묻은 디저트로 마음을 달랬었다. 그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도웅이 불안하고 우울해했다.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도웅을 떠올리며 디저트를 차근차근 먹고 있는 그때 어희의 손이 우뚝 멈췄다.
“으음.”
어쩌면 도웅의 불안 원인을 알 거 같기도 하다. 이전에 그를 봤을 때 잠시나마 애정이 보이지 않았던가. 보기만 해도 마음이 벅찰 정도의 그 감정이 오롯이 자신에게 보인다는 걸 깨달은 어희는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도웅이 자신을 좋아하는 걸. 본인은 극구 부정했지만, 아직 자각하지 못한 게 분명했기에 시간을 두고 알아채기를 바랐다.
잔뜩 당황해, 빨개진 얼굴로 말도 안 된다며 도리질 치기에 도웅에게는 충분히 고민하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론 내렸다. 웅 카페 의존도를 극복할 겸 며칠 도웅을 보지 않았을 뿐인데, 아직도 헤매고 있었다.
어희는 종이가방 구석에 앙증맞게 숨어있는 마카롱을 발견해도 미소 짓지 않았다.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의 불안은 마음 아프다.
앓는 소리를 낸 어희는 다시금 도웅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카페에 있으려나.
디저트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난 어희는 겉옷을 챙겨 입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순간 당 징크스가 걱정되었으나 오래 가지 않았다.
먹은 본인이 만족했는데도 다치면 이건 더 이상 징크스가 아니고 부주의로 인한 사고였다.
도웅의 집에 초대받아 외출한 게 마지막 바깥나들이였으니, 열흘 만에 집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옛날에는 비가 오는 날만 간간이 나가 산책을 하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도웅과 함께라면 일단 나가고 봤다. 나름 달라진 점을 꼽으며 공동 현관으로 나온 어희는 얇은 부슬비에 눈을 빛냈다.
운이 좋은 건가.
빗줄기가 굵지도 않으니 그냥 맞고 가는 것도 좋은 선택 같다.
평소였다면 느긋하게 산책을 즐겼을 터다. 그러나 오늘은 도웅이 걱정되어 나온 만큼 목표가 있었다.
어희는 길쭉한 다리를 뻗어 도웅이 늘 머무는 카페로 향했다. 빨리 걷는다고 걸었는데 5분이나 걸렸다. 바깥에서 안쪽을 기웃거렸다. 정작 도웅은 보이지 않고 손님만 가득 보여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흑미 크림빵을 얻어먹은 날, 도웅과 함께 새벽부터 나와 있는 직원은 늦은 오후에도 있었다. 오더 테이블 앞에 섰다.
“사장님 어디 계십니까.”
직원의 굵직한 눈썹이 위로 쑥 올라갔다. 그리고는.
“아? 사장님 친구분 맞죠?”
아는 체를 해왔다. 도웅이 그렇게 소개했다면 그런 것이기에 어희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