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어희둥둥도 많이 해줬고 이 정도면 오래 기다려주지 않았나?
기대에 차서 옆을 돌아본 도웅은 리뷰로 가득한 머릿속이 잠시간 말끔하게 비어짐을 느꼈다. 손에 커피를 들고서 살짝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는 어희의 모습은 주변 풍경과 어우러지지 않고 도드라졌다. 아픈가, 싶을 정도로 하얀 얼굴에 혈색이 돌아 보이는 게 달빛을 받아서가 아니라 조경 등 때문이란 걸 알면서도 마치 토끼끼 미니어처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어희가 만든 미니어처는 하나같이 포근하고 따뜻한 색의 조명을 배치해놔서 그럴 가능성이 컸다. 막연하게 위를 바라보고 있던 어희의 시선이 도웅에게로 옮겨갔다.
“피, 피곤한데 이만 들어가요.”
갑자기 눈이 마주쳐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 듯 놀란 도웅이 급히 걸음을 옮겼다. 돌연 씩씩하게 걷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본 어희는 어색하면서도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집주인을 뒤에 두고 당당하게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눌러 도어락을 해제한 도웅은 벌컥 현관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왠지 모르게 어색한 기류를 눈치챈 탓이다. 왜 어색한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어색했다.
“그럼 먼저 씻어요. 저는 이따가 씻을게요!”
말을 남기고 후다닥 방으로 들어왔다. 따끈한 방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도웅은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갑자기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던데, 나 죽나?
산책로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왜 이렇게 당황스럽고 어색했는지 모르겠다.
…말이 없어서?
어희는 원래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평소와 같았다. 어희는 달라진 점이 없었다.
“어어….”
그럼 달라진 건 나란 말인가?
화살을 본인에게 돌려도 뭐가 다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타인에 대한 눈치는 빨라도 정작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는 둔한 도웅이 얇은 겉옷을 꼬물꼬물 벗으며 차분히 하루를 되짚어봤다.
어제처럼 출근하고 싹에 물을 주고 일했다. 영호한테서 직원의 속사정을 엿듣고 퇴근했다.
어제랑 뭐가… 다른가?
골똘히 어제와 오늘을 비교한 도웅은 바닥에 기대고 있던 손가락을 움찔, 오므렸다.
어희. 어희가 카페에 찾아왔다. 다른 손님이 있을 때는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어희가 찾아왔고 나를 기다렸다. 함께 귀가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십 분 동안 산책을 했다.
카페에 온 건 놀랍긴 한데, 이게 이유가 되나?
뜨뜻한 방바닥에 볼을 대고 누운 도웅은 몸을 웅크렸다. 역시 특별히 사이가 어색해질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기우였겠거니, 나른함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새 보금자리, 최고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얕은 잠에 빠졌다.
-똑, 똑.
양팔을 다리 사이에 끼워 한껏 몸을 웅크린 도웅은 약간의 텀을 두고 들리는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벌떡 일어났다.
“네, 네?”
엉금, 무릎으로 기어 문을 열었다. 머리 위에 얹은 타올을 비비던 어희의 손이 멈칫했다. 시선이 지나치게 높아 엉거주춤 일어난 도웅은 눈을 끔벅였다.
“그새 자고 있었어요? 욕실 쓰시라고 말하러 온 건데 괜히 깨웠군요.”
멈췄던 어희의 손이 사부작, 타올을 문질렀다. 물기가 남은 얼굴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고마워요. 씻고 자야 했는데 저도 모르게 깜박 잠들어버렸어요.”
잠이 덜 깨서 그런지 멍하다. 몸을 돌린 도웅은 눈을 비비며 짐가방을 뒤져 속옷과 잠옷을 챙겼다. 손에 들고서 터덜터덜 어희를 지나쳐 욕실로 향했다.
맵디매운 치약으로 양치를 하자 잠기운이 확 가셨다. 샤워하고 나온 도웅은 익숙하게 드라이 룸에서 복숭아 향 로션을 챙겨 발랐다.
D-4
저녁 시간이 되자 어제처럼 어희가 카페에 일거리를 들고 찾아왔다. 도웅은 모든 일을 직원에게 맡기고 맞은편에 앉아 그를 구경했다.
연필을 잡은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선을 몇 번 긋고 커피를 마시는지, 케익은 어느 타이밍에 먹을지 같은 시시콜콜한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봤다.
시간이 흘러 얇은 눈꺼풀 아래에 달린 기다란 속눈썹 개수를 세고 있을 때 문득 테이블에 올려놓은 손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았다.
“지금 도웅 씨 상태가 이래요.”
토끼끼 한 마리가 턱을 괴고 침을 흘리는 작은 그림이었다. 도웅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가를 닦았다.
“진짜 흘렸다는 건 아니고.”
어희가 빙그레 웃었다. 눈매가 둥글게 휠 정도로 웃는 모습은 변함이 없는데 왜 이렇게 어색할까. 어희는 다시 머리를 숙여 많은 사각형을 그렸다. 숫자도 함께 표기해놨는데, 아마 제작할 때의 규격 길이 같았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멍하니 어희를 구경하고 있는 도웅을 흔들어 깨운 건 직원 영호였다.
“사장님, 저 퇴근할게요?”
“뭐?!”
시간을 보니 어느덧 마감 시간을 훌쩍 지나있었다. 도웅은 자신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서 눈앞의 남자를 구경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세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
탁. 어희의 노트가 덮어지고 나서야 도웅도 집에 갈 준비를 했다.
D-3
아무 생각 없이 일했다. 매일 같은 일을 3년째 하다 보니 거의 반복 노동 수준이었다. 그런 잔잔한 흐름에 돌멩이를 퐁당 던진 건 영호의 가벼운 물음이다.
“오늘은 친구분 안 와요?”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 영호의 말을 들으니 미친 듯이 궁금해졌다.
오늘은 안 오나?
안 오면 안 오는가보다, 넘기면 될 일을 도웅은 여덟 시를 지나, 아홉 시. 라스트 오더까지 어희를 기다렸다.
직원들 퇴근을 배웅하는 순간까지도 도웅은 카페 출입문만 노려봤다. 하루, 이틀 어희와 함께 퇴근했다고 홀로 귀가하는 길이 심심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1층 꼬마를 만났다. 엄마 손을 꼬옥 붙잡은 손을 방방 흔드는 걸 보고 인사를 드렸고 어희 주려고 가져온 회심의 딸기 롤 케익을 건넸다.
나중에 카페에 들르겠다는 인사치레 같은 말에 방긋방긋 웃으며 서비스를 약속했다.
어희의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욕실로 향하다가 소파에 길게 누워 잠들어있는 어희를 발견했다.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소파가 아니라 관에 누운 것 같았다. 큰 키 때문인지 소파 밖으로 발이 툭 튀어나와 있어 불편해 보였다.
낮은 테이블에는 도안이 그려진 노트와 색연필이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소파 옆, 도웅이 어희에게 추천해준 러그가 깔린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도웅은 색연필을 몇 개를 케이스에 조심히 꽂아 넣었다.
모양새가 꼭 색칠 놀이를 하다 잠이 든 어린아이 같았다. 곧 몸을 틀어 소파에 죽은 듯이 자는 어희를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렇게 큰 애가 있을 리 없으니까.
일정하게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가슴을 물끄러미 지켜본 도웅은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 후에도 어희는 깨지 않았다. 그 자세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자는 게 신기했다.
이불이라도 덮어 줄까.
어희의 침실에 들어간 도웅은 자신에게 내어준 이불과 같은 회색 이불을 보고 “으음.” 하고 작게 감탄했다.
짧은 기간이라도 같이 살다 보니 자연스레 어희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어희의 소비 습관이었다.
그는 마음에 드는 제품이 있으면 여러 개를 구매했다. 치약 같은 소모품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추천해준 러그를 열 개나 구매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반사적으로 ‘왜…?’ 하고 물었다. 이 이불도 어희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다. 아마 이불 수납함을 열어보면 같은 회색 이불이 세 세트 이상은 나올 게 틀림없다.
어희의 냄새가 나는 이불을 끌어안고 나왔다. 소파 위에서 잠이 든 어희의 위에 이불을 덮어주고 방으로 돌아온 도웅은 핸드폰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어희는 아직도 리뷰를 달아주지 않았다.
D-2
새벽에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분명 어제까지 소파에서 잘 자고 있었던 어희는 사라진 뒤였다. 도중에 깨서 침대로 돌아간 듯했다.
씻고 냉수를 한 잔 마시는데, 마침 침실에서 나온 어희와 마주쳤다. 도웅은 멈춰선 어희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잘 잤어요?”
잠기운이 가득한 어희를 처음 본 것도 아닌데 풀어져 있는 안면 근육이며 반쯤 감겨 있는 눈은 묘하게 섹시했다.
짝!
도웅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이게 뭔 미친 생각이야. 같은 남자인 어희를 선정적으로 느끼다니. 말도 안 된다. 아무래도 자다가 머리를 크게 부딪친 게 틀림없다.
난데없는 도웅의 자해에 놀란 어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하하, 하…. 봄이라 그런지 날파리가 있네요.”
도웅은 황급히 물을 마신 컵을 씻어서 올려놓고 방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어희가 생각이 아닌 감정만 볼 수 있다는 게 어찌나 다행인지 몰랐다.
출근 준비를 끝마치고 밖으로 나왔더니 신발장 앞에서 어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해괴한 생각을 들킨 건가, 일순 어깨가 긴장으로 살짝 굳어졌다.
“저도 나가봐야 해서, 같이 나가지 않을래요?”
어희의 눈길이 정확히 도웅의 벌게진 뺨으로 향했다.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들키지 않은 것에 안도의 한숨을 삼킨 도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발을 신고 나와서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새벽의 아파트는 고요했다. 1층 버튼을 누른 도웅은 마음속으로 열렬히 엘리베이터를 재촉했다.
“원래……, 자주 그럽니까?”
문이 닫히고 서서히 줄어드는 층수를 멀거니 올려 보고 있는데 옆에서 어희가 입을 뗐다. 주어를 제외했으나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뭐를요?”
그래도 일단 모른 체하며 되물었다.
“그, 뺨 때리는 거요. 자해 같은 종류인지 걱정이 들어서요.”
“아아, 날파리 때문이었어요.”
“음…. 하.”
황당해하는 게 명백한 숨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어이가 없는 건 도웅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뺨이 얼얼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있는 힘을 다해서 싸대기를 갈길 줄은 몰랐다.
부모님을 제외하고 누구보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도웅이, 본인 뺨을 세게 때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