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도웅은 국자로 해물탕을 떠 어희의 앞 접시에 놔주고 나서 치즈 카나페 하나를 집어 먹었다.
“오늘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무거나로 일관하는 어희의 태도에 솔직히 짜증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짜증 이전에 걱정이 먼저 앞섰다. 새벽에 흑미 크림빵을 먹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하지 않았던가.
“일이 잘 안 풀려요? 아니면 어디 아파요?”
“…….”
볼 때마다 신기한 어희의 입술이 몇 번 뻐끔거리다가 다물어졌다. 도웅은 망설이는 어희의 모습을 보며 딸기 맛 보드카에 소주를 채웠다.
“말해봐요. 화내는 게 아니고 걱정돼서 물어보는 거예요. 제가 기분 안 좋게 한 일이 있었나요?”
해물 좀 건져 먹으면 우동 사리 넣고 또 끓여 먹어야지. 빨간 해물탕을 곁눈질로 살피며 막걸리를 마셨다.
“신경 쓰이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온몸으로 신경 써달라는 듯 굴었던 어희의 사과가 진정성 있게 와닿지 않았으나 미안하다니까, 미안한가보다 넘겼다.
“그래서 왜 그런 건데요.”
어쨌든 사과는 사과고 이유를 말한 건 아니었기에 마신 만큼 소주를 채워주었다.
“그게……. 오늘은 좀….”
말과 말 사이의 텀이 느긋한 남자는 오늘따라 느긋하지 못하고 느렸다. 인내심 있게 기다리면서 큼직한 타이거 새우 한 마리를 먹었다.
막걸리 한 병을 비우고 나서 이번에는 맥주를 마실지 와인을 마실지 작은 고민 끝에 와인 병을 잡았다. 오프너를 돌돌 돌릴 무렵 어희의 뒷말이 이어졌다.
“여러모로 우울한 날인가 봅니다.”
“왜 우울해요?”
“제가 너무 매력이 없는 사람 같아서요.”
퐁. 코르크 마개가 귀여운 소리를 내며 빠졌다.
“어희 씨 매력 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해요.”
많은 사람을 만나왔지만, 어희만큼 신기한 사람도 드문데 매력이 없다니. 무슨 소린지 영문을 모르겠다.
도웅은 조금 의아함을 느끼며 새 컵에 와인을 따라 마셨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얼버무린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이유가 없는 것인지 헷갈렸다. 뭐, 사람이 이유 없이 우울할 수도, 그간의 일이 쌓이고 쌓여서 우울할 수도 있지.
도웅은 칼칼한 해물탕을 국자로 듬뿍 퍼 앞 접시에 덜어 먹었다. 라면 끓여 먹을 때 넣어 먹으려고 사놨던 해물 믹스가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급하게 끓이긴 했어도 이 정도면 훌륭하다. 자화자찬하면서 카나페를 집어 먹다가 냉장고 과일 칸에서 한라봉을 꺼내왔다. 두꺼운 껍질을 요령 좋게 벗기고 있는데 갑자기.
“하…. 실은 새벽에 봤습니다.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속상해서 괜히 부정적으로만 생각이 이어져서…….”
어희가 술술 고민거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먹방을 찍듯 혼자서 야무지게 먹고 있던 도웅은 눈치껏 말끔히 껍질을 벗긴 한라봉을 식탁 위에 올려놨다. 칼 없이 손으로만 깐 거치고는 매우 깔끔했다.
“자기 비하까지 갔습니다. 이런 상태일 때는 거울 보는 걸 싫어합니다. 도웅 씨에게 이해나 해결을 바라는 건 아니고 그냥…, 그냥 그랬다는 겁니다.”
다음 말을 기다려도 어희는 차분히 술만 홀짝였다.
“……끝났어요?”
“예.”
확인을 받고 나서 한라봉 절반을 뜯어 어희의 앞에 놔주었다. 나머지 절반을 한 조각씩 떼어먹으며 어희가 한 말을 곱씹었다.
눈앞의 남자는 감정을 볼 줄 안다.
이런 상태, 울적한 날에는 거울을 보는 걸 싫어한다. 왜? 본인 감정을 눈으로 확인하는 게 싫어서?
차근히 진도를 밟는 학생처럼 하나씩 풀어보던 도웅은 마지막 한라봉 조각을 날름 입에 넣었다. 호록호록, 와인을 마시고 눈을 끔벅였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도웅이 술에 취해서가 아니라 어희가 키워드를 숨겼기 때문이었다. 잔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와인을 탈탈 털어 넣은 후 빈 병을 식탁 아래에 세워놨다. 어느새 어희도 잔을 비웠다. 도웅이 소주, 막걸리, 맥주, 와인까지 총 네 병을 비울 동안 고작 한 병을 비운 어희의 콧잔등은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벌써 취했어요?”
“…아뇨.”
“저는 슬슬 취기 올라요.”
주전자 모양의 유리병에 달콤한 과일주를 만들어 어희 잔에 술을 따라주며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새벽에 뭘 봤길래요?”
어희가 숨긴 키워드. 그게 궁금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목격해서는 안 될 광경이라도 본 걸까?
도웅은 조용히 새 과일주를 마시는 어희를 재차 졸랐다.
“네? 뭔데요?”
어희는 마지못해 답했다.
“감정이요.”
무얼 봤는지 담백하게 대꾸한 어희가 한라봉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우물거리는 턱을 보자 다시금 그의 입안에 손을 넣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엄청나게 취했더라면 손가락을 서슴없이 넣어 그의 입안 구조를 꼼꼼히 살펴봤겠지만, 그런 실수를 범할 정도로 취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어느 정도 마시다 보면 몸이 말을 안 들을 때도 있었으나 정신은 말짱했기에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거 같다.
“감정은 원래 보이는 거 아니에요?”
새삼스레 감정을 보고 놀랄만한 이유가 뭐가 있을까. 가볍게 마실 요량으로 소주 한 병을 더 열었다. 초록색 병뚜껑이 손안에서 까드득, 특유의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물 따르듯 잔에 콸콸 부어지는 소주에 시선을 둔 어희는 입을 열었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누가 봐도 망설이는 모습이다.
금붕어처럼 열심히 빠끔거리는 입술을 주시하며 소주를 마셨다. 꿀꺽, 꿀꺽 여섯 번의 목 넘김으로 잔을 비웠더니 꽁꽁 닫혀있는 어희의 입이 열렸다.
“도웅 씨, 감정을 봤습니다.”
“리뷰를 기다리는 제 애타는 심정을 보셨나요.”
나중에 써준다기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 절대 포기한 게 아니다. 본래 궁극의 목표인 리뷰….
도웅은 실소를 머금고 해물탕을 덜었다. 소주는 어째서 이렇게 국물을 당기게 할까? 하는 소소한 고뇌와 함께.
“아뇨. 애정을 봤습니다.”
“켁, 콜록!”
얼큰 칼칼한 해물탕이 사레들려버렸다.
허리를 굽혀 터져 나오는 기침을 참지 않고 내뱉었다. 목구멍이 간지러우면서도 무척이나 매워 절로 눈물이 고였다.
쉽게 멎지 않는 기침을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질 정도로 맞은편에 앉은 어희가 어수선하게 굴었다. 어희는 술병을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물, 물 마셔요.”
코에서 콩나물이 나올 거 같은 매움에 코를 한 번 훌쩍이고 물잔을 받았다.
“어으. 목 아파요.”
소매로 눈물을 닦고 나서 물을 천천히 마셨더니 조금은 낫다. 잔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뭘 봤다고요? 애정?”
티슈를 뽑아 손에 쥐여주고 빈 잔에 물을 다시 따라주는 어희의 행동은 매우 조심스럽고 또 섬세했다.
“애정? 애정이요?”
그에 반해 도웅은 세상에서 제일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양 되묻기 바빴다. 기침 때문인지 얼굴에 열이 잔뜩 올랐다.
“카페에 애정이 있긴 한데, 그렇게나 크진 않아요. 아마? 그런데, 흠흠! 괜히 허점을 찔린 기분이에요.”
허허, 실없이 웃으며 딸기를 집어먹었다. 올해 들은 말 중에 제일 당황스럽고 민망한 말이다.
“좋아하는 분이 생긴 모양입니다. 응원은 못 해드려도 상처는 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덤덤하게 이어진 말에 도웅은 눈을 크게 떴다.
좋아하는 사람? 내가? 그런 사람 없는데……?
의문을 담은 도웅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어희는 달콤한 과일주를 마시고 또 마셨다. 단숨에 잔을 비운 그는 과일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그게 제 우울의 이유입니다.”
어희는 마치 의사처럼 본인 상태를 정확하게 단정 지었다.
“어…, 틀리셨어요. 저 좋아하는 사람 없는데요.”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부모님과 함께 일하는 직원들, 나이 많은 건물주님부터 스쳐 지나간 대부분의 사람을 좋아했다.
앞에 앉아있는 어희도 처음엔 리뷰를 노리고 접근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함께 술도 마시고 있지 않은가.
신용 관계가 아직 쌓이지 않아 어희가 리뷰를 주는 기한을 뒤로 늘린 것이지, 목표를 달성하더라도 여전히 그와 함께 놀 궁리를 할 게 분명하다. 어희도 도웅의 ‘좋다’ 범위에 포함된 사람이다.
그러나 어희가 말한 좋아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의미일 게 분명했기에 더욱 말도 안 됐다.
“…그렇습니까.”
그다지 믿음이 없어 보이는 어희는 빈 잔을 내밀었다. 예전에 뱅쇼를 더 달라, 요구했을 때와 비슷했다. 단출하게 보드카에 레몬즙을 섞어 그의 잔과 제 잔에 따랐다.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꼴깍, 꼴깍 술을 넘기며 곁눈질로 어희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응원은 못 해도 상처는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라.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은 어희의 말을 되새겼다. 참 어희다운 말이다.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그런데 당사자한테 그렇게 직설적으로 꽂지 말아줘요. 나 너무 놀랐잖아요.”
점쟁이 효과처럼 사실이 아니어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 뜨뜻한 볼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재차 말했다.
“아. 내가 물어봤구나. 앞으로 무슨 감정이냐고 안 물어볼게요. 그러니 어희 씨도 말하지 말아줘요. 네?”
보드카를 마시고 슬며시 미간을 좁히는 어희를 보고 도웅은 찬장에서 꿀을 꺼내 한 스푼 넣어주었다. 그제야 반듯한 어희의 미간이 펴졌다.
이후 두 시간이나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이어갔고 빈 술병이 식탁 아래에 즐비했다. 어희가 얼굴 전체를 발갛게 물들인 채 술 권유를 거절하는 것으로 술자리가 끝이 났다.
술도 한 종류만 마신 게 아닌지라 잔 종류만 서너 개가 넘었다. 그릇을 싱크대로 옮기는데 취하긴 했는지 걸음걸이가 약간 비틀거렸다.
“제가 치울 테니 앉아 계세요.”
취기가 올라 똑같이 빨간 얼굴을 한 어희가 약간 어눌해진 어조로 도웅을 말렸다.
귀까지 빨개진 어희는 싱크대에 걸린 고무장갑에 손을 꿰어 넣었다. 손님에게 설거지를 시키는 게 괜찮은지, 도웅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 기울었다가 아무렴 어떤가 싶어 식탁에 빈 그릇을 모았다.
말끔하게 식탁 정리를 끝낸 도웅은 비틀비틀 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을 보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비누 거품을 헹구다 문득 거울을 봤더니 불콰하게 취기가 오른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