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90)

다들 휴가를 온 모양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로비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자 멀리서 유독 반짝이는 색을 뽐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뒷모습이었으나 확신할 수 있었다. 도웅이다.

“왔습니다.”

어희는 도톰한 가디건을 안에 받쳐입고 코트를 입은 도웅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려놨다. 도웅은 단번에 몸을 돌려 왔냐 물었다. 그의 턱 아래, 목을 돌돌 감싼 크림색과 갈색이 섞인 두꺼운 목도리는 오늘따라 요란하게 보였다. 디자인이나 패턴이 아닌 감정이. 도웅의 감정 색과 비슷하나 달랐다. 어희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도웅은 민망하지만 예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엄마가 따숩게 입고 가라 해서요. 나가서 좀 걸어야 하는데 괜찮죠? 차를 멀리 대놔서.”

“예.”

발코니에서 느꼈던 추위는 호텔을 나서자 더욱 춥게 느껴져 코트를 여몄다. 반면 도웅은 얼마나 껴입었는지 꼭 펭귄처럼 보였다.

바싹 마른 길을 걷다가 베이커리 가게를 발견하고 그의 팔을 적당한 힘으로 잡아 세웠다.

“뭐라도 사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식사 초대를 받았으니 빈손보다는 케이크라도 사 들고 가는 게 나을 텐데.

베이커리 가게와 어희 얼굴을 번갈아서 쳐다본 도웅은 이내 “핫.” 같은 이상한 숨을 내뱉었다. 몽글몽글한 입김과 함께.

“케익 먹고 싶어서 그러죠? 아빠가 케익 구워놨으니까 맨손으로 오면 돼요. 먹을 거 짱 많아요. 다 먹지도 못할걸요.”

“…….”

누가 남의 집 선물을 사 가는데 본인이 먹고 싶은 걸 사가겠는가. 아무리 디저트에 환장한 저라도 때와 장소를 가릴 줄은 안다. 

어희가 황당함에 고개를 내젓자 도웅은 웃으며 그 옆의 꽃 가게를 가리켰다.

“그러면 식물이라도 사주세요. 엄마가 식물을 좋아하셔서.”

“그럼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뭘 얼른 다녀와요? 같이 가요.”

도웅이 비서처럼 뒤에 따라붙었다.

꽃 가게에서 큼직한 화분에 꽂힌 난을 골랐더니 도웅의 고개가 옆으로 미묘하게 갸우뚱해지는 걸 보고 적당한 크기의 화분으로 변경했다.

“이거 무슨 식물입니까?”

오로지 도웅의 반응을 보고 구매한 터라 어떤 식물인지 몰라 물었더니 도웅도 모르겠다는 양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두꺼운 외투에 가려져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면 놓쳤을 제스처다.

“저도 모르는데. 잠시 번역기 한 번 돌려볼게요.”

꼼지락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도웅은 잘 포장된 화분에서 카드를 꺼내 번역기를 돌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화분과 핸드폰을 세 번이나, 무려 세 번이나 번갈아 쳐다봤다.

“뭐길래 그럽니까.”

“아니…. 이거 금전수라는데요?”

“그런데요.”

좋지 못한 식물인가? 반응이 왜 이러지?

어희가 품은 의문은 도웅이 내민 핸드폰을 보자 말끔하게 사라졌다. 품에 안고 있는 화분의 식물은 여러 갈래로 무럭무럭 뻗쳐있는 식물계 괴물 같았다면 도웅의 핸드폰에 띄워진 식물 사진은 적당한 굵기의 초록초록한 식물이 있었다.

도웅과 어희가 동시에 고개를 기울였고 이윽고 둘은 구석진 골목에서 쭈그리고 앉아 식물 잎사귀와 질감, 광택까지 비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잘 자란’ 금전수였다. 그냥 잘 자란 것도 아닌 무럭무럭 성장한……. 

금전수에 대한 회의를 마치고 도웅이 끌고 온 차의 조수석에 올라타 무심히 창밖을 지켜보던 어희는 문득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태평하게 운전하는 도웅을 황당한 시선으로 돌아봤다.

“사장님.”

비행기 안에서 제 특이 체질을 고백했을 때는 단순하게 놀라고 말더니 고작 식물 생김새로 매우 심각해지는 그의 성격은 어딘가 좀 이상하다. 신호에 차가 멈춰 섰다. 핸들에 걸쳐진 예쁜 손가락을 보며 마저 말을 이었다.

“제 말 안 믿으시죠.”

“무슨 말이요?”

도웅이 보여준 감정에 불신은 없었으나 애초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면 보이지 않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불신이 생기려면 어느 정도는 신뢰가 깔려야 가능한 거니까.

세상에 어떤 사람이 ‘사실 난 하늘을 날 수 있어!’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겠는가. 어쩌면 당연했다.

“비행기에서 말씀드린 거 있잖습니까.”

“어떤?”

부엉이처럼 열심히 좌우로 기울어지는 고갯짓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걸로 보여 괜스레 퉁명스럽게 입술을 씹었다.

“아. 그, 감정이 보인다고 했던 거요?”

“예. 그거요.”

“흐음.”

도웅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는 건지 아니면 생각 중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희도 마땅히 할 만한 말이 없었기에 차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어희는 핸들을 쥐고 있는 도웅의 손을 보다가 바깥 풍경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연찮게 녹색 자유 여신상이 보였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음에도 큼직한 녹색 얼굴이 약간 무서워 슬며시 눈을 피하자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에 흘러들어왔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냐니. 비행기에서 보인 반응과 식물을 의심하는 눈치를 떠올리면 누구라도 그렇게 여길 것이다. 아마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었으나 입 밖으로 꺼내진 말은 지극히 간결했다.

“그렇게 보입니다.”

이럴 때마다 어휘력이 부족한 자신이 너무 싫었다. 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뾰로통하게 창밖을 봤다가 다시금 자유 여신상을 보고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제가 안 믿었다는 게 보였어요? 그러면 어희 씨가 거짓말한 게 되는데.”

이건 또 무슨 말이람. 오갈 데 없이 방황하던 시선이 신경 쓰이던 차에 잘 되었다는 양 도웅을 쳐다봤다. 작게 웃음을 터트린 도웅은 힐끔 어희를 봤다가 금방 전방을 주시했다.

“믿었거든요.”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담백하지 않았습니까. 식물은 그렇게나 의심했으면서.”

“아닌데. 안 담백했는데.”

다 들리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도웅은 갑자기 끼어드는 차량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며 작게 하품했다.

“딱 말해요. 어희 씨 거짓말한 거예요?”

“…거짓말한 적 없습니다.”

“저도 거짓말 안 했어요. 거짓말해서 뭐 해. 진짜로 믿어요.”

여전히 불신 한 점 띄우지 않는 도웅은 묵묵히 운전하다 문득 “아~” 하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짧은 감탄을 했다.

“이전에 양꼬치 집에서 내 디저트가 기분 좋다고 말 한 게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 이유 때문이었구나.”

수수께끼를 푼 양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꽁꽁 덮인 목도리가 불편했는지 손을 넣어 느슨하게 만든 뒤 신호에 맞춰 차를 세웠다.

“담백한 거 싫으시면 몇 가지 더 여쭤봐도 돼요?”

대놓고 물어오니 불만이 쏙 들어간다.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 도웅은.

“감정이 어떤 색으로 보여요? 사람들이 색에 의미부여를 하잖아요. 예를 들어서 빨간색은 야한 색이라느니 노란색은 명랑한 색이라느니. 어희 씨 눈에도 그렇게 보여요?”

이런 질문은 처음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의심 없이 순수하게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대게는 ‘진짜면 어디 한 번 맞춰봐’ 같은 시험성 질의만 주고받았던 터라 낯설었다.

“아뇨. 그런 단색보다는 여러 색이 합쳐 보이는 편입니다.”

“그러면 저기 저 사람은 무슨 색이에요?”

도웅의 손은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한 남성을 콕 집었다.

“어둑한 심해를 닮은 색입니다. 고독해 보이는군요.”

“이보세요, 혹시 고독하신가요? 라고 물어보기도 좀 그렇네요. 저는 무슨 색이에요?”

“사장님은…… 난색입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난색이요. 따뜻합니다.”

그게 좋았다. 보고 있자면 어희, 자신까지 동화되어 따뜻해질 거 같아서.

도웅은 의외라는 듯 눈을 둥글게 떴다가 이내 화사하게 웃었다.

“저 사실은 별생각 없이 살아서 아무것도 안 보일 줄 알았어요. 그래도 따뜻하다니 좋네요. 아. 저기가….”

“저기가 사장님 집일까요.”

도웅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말을 숭덩 자르고 추측했다. 목에 돌돌 둘려있는 요란한 색의 목도리와 같은 색으로 범벅 된 집은 멀리서도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우와. 우리 집인 줄 어떻게 알았지? 신기하네. 그러고 보니까 비행기에서 음식 바꿔 달라고 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나요?”

다른 집보다 두 배는 큰 주택 차고에 능숙하게 주차를 하는 도웅의 모습은 어딘지 조금은 달라 보여 설렜다. 대답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가슴이 뛰어서 눈 아래가 화끈거렸다.

“어희 씨?”

시동을 끈 도웅이 다시금 어희의 이름을 부를 즈음에야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예,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음식 바꾸는 이유를 물어봤어요. 집에서도 바꿔줘야 하는 거면 최대한 티는 안 나게 해줘야 할 거 같아서요.”

어쩜 이리 사려 깊을 수가.

“실은 만든 사람의 감정이 음식에 묻어 보입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손을 대면 좋은 색으로 변해서 그랬던 겁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표정이다. 음식에 붙은 감정까지 설명한 적은 처음인지라 어희도 어려움을 겪었다. 조리 있게…, 조리 있게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사장님이 손댄 음식은 사장님처럼 색이 따뜻해져서…….”

뜻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최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싶어도 쉬이 되지 않는 상황에 답답해져 가슴이라도 퍽퍽 치고 싶다는 욕구가 들려는 찰나.

“어쨌든 바꿔주면 되죠?”

굉장히 간략하게 결론을 내린 사장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바꿔주면 된다.

안전벨트를 푸는 도웅을 따라 어희는 차에서 내렸다. 오는 길에 사 온 화분을 안아 들고 고개를 들자 다락까지 합치면 3층짜리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겉보기에도 상당히 규모가 커, 깜짝 놀랐다. 누가 봐도 잘 사는 집이다.

“그래도 초대에 응해주셔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도웅이 현관 벨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 잘 정돈된 정원을 둘러봤다. 바짝 마른 가지가 멋스러운 나무부터 덤불까지. 겨울치고 전혀 삭막하지 않은 풍경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열리고 푸근한 인상의 중년 부부가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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