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90)

“네?”

팀장이 안경 너머의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어희는 한숨을 뱉으며 제대로 말을 풀어내려 머릿속으로 문장을 정리했다. 상대방이 제 말을 한 번에 알아듣도록 조리 있게 말하는 건 어희에게 늘 어렵게만 느껴졌다. 매번 고쳐야지, 고쳐야지 하면서도 정작 고치는 방법을 몰라 곤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 설날에 항공권 두 장 주시면 광고 맡겠습니다.”

“저, 정말요? 하시겠다고요? 왜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신 “왜요? 진짜 해요?” 같은 물음을 반복한 팀장은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런데 왜 두 장이에요? 불가능하다는 건 아닌데 단순히 궁금해서요.”

뉴욕에 가족이 있는 집착 심한 사람 때문이라고 설명하기 싫어 거짓말을 했다.

“말도 안 통하는데 혼자 어떻게 갑니까.”

“아. 그러면 저희 직원 중에서 통역 가능한 사람 있는지 알아볼게요.”

“아뇨. 지인 중 가능한 사람이 있으니, 같이 가겠습니다. 다음 설날에 항공권만 끊어주시면 광고 맡죠. 설날입니다, 설날. 아니면 안 할 겁니다.”

어희는 설날을 여러 번 강조해 말한 뒤 걸음을 돌려 도웅에게로 돌아갔다. 예상대로 그는 아직도 어플을 켜놓고 새로고침을 하고 있었다. 뒤에서 멀뚱히 지켜보자 거의 1초 단위로 스크롤을 아래로 당기는 중이었다.

“사장님.”

넌지시 그를 부르자 숙인 얼굴을 들고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마치 내가 뉴욕 호텔 광고를 물고 온 걸 알고 있는 거처럼.

“어희 씨. 이 토끼끼도 작업실에 있었어요? 처음 보는 거 같아서요.”

매끄러운 손가락이 가리킨 건 한 달 전에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에 갇힌 토끼끼였다.

“가장 최근에 만든 거라 사장님은 못 봤을 겁니다.”

어희는 대답을 하면서도 내심 놀랐다. 사장이 저를 좋아한다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던 그 날, 작업실에서 딱 한 번 본 걸로 새 작품인 걸 알아보다니. 작업실에 줄지어 채워져 있는 작품 개수를 세어보면 기억력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어쩐지! 예전에 못 봤던 게 전시되어 있어서 제가 놓친 토끼끼가 있나 했어요.”

도웅이 제가 만든 토끼끼에 이렇게 지대한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다. 어희는 기분이 좋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장님. 뉴욕 항공권 말입니다.”

“네? 항공권이 왜요?”

“잘하면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가능할 거라 했으니 새로고침은 그만하셔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도웅의 둥그스름한 눈매에 갇힌 까만 눈동자가 어희와 시선을 마주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달싹이는 걸 보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말을 어렵게 했습니까?”

어희는 저도 모르게 또 이상한 말을 했는지 되뇌어봤다. 별로 이상하다거나 이해가 어려운 부분은 없다.

“어…, 그러니까 방금 이야기를 듣고 왔는데 뉴욕 호텔에서 광고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항공권도 구해준다기에, 설날 날짜에 맞춰주면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정도면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구구절절하고 자세한 설명이다. 움찔거리는 입술에서 기뻐하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도웅의 기분이 가라앉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혹 내가 괜한 참견을 한 건 아니었을까.

“저 때문에 광고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정 안되면 설날 지나고 가면 되고요.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밝았던 사장 기분이 우울감을 띄우고 있었다. 꺼진 전구처럼.

“아닙니다. 원래 하려고 했던 광고였고…….”

팟. 다시 켜졌다.

“정말요?”

전구가 켜졌다.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집에 틀어박혀 많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한 어희는 도웅의 이런 기복이 낯설었다.

이만큼 감정 회복이 빠른 사람은 처음이었기에 낯선 동시에 놀라웠다. 어제도 비슷했다. 양고기가 도저히 입에 맞지 않아, 결국 뱉어냈을 때도 사장은 울적했다가 금세 회복했었다.

“와. 고마워요. 저 밤새 새로고침할 뻔했어요. 진짜 어떻게 보답해야 하지?”

이번에도 똑같았다. 아니 이전보다 더 기쁜 감정이 동실동실 보였다. 사장을 보고 있자면 파란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 같았다.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만약 항공권 구하게 되면 저하고 같이 출국하실 텐데, 통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차피 호텔 체크인하면 나올 일은 거의 없겠지만.”

“제 신분은 통역사군요. 저야 다 좋죠. 비행기에서도 안 심심하겠네요.”

아유, 뭔들 못 해 드리겠어요? 탱탱볼처럼 튀어 오르는 신난 감정을 숨기지 않는 사장은 다시금 전시 관람에 집중했다.

이따금 다른 작가의 작품을 보고 갸우뚱거리기도 하고 귀여워하기도 했다. 전시회장의 좋은 자리는 대부분 토끼끼 시리즈가 차지하고 있는 덕분에 어딜 가든 어희의 작품이 눈에 띄었다.

한 시간가량 구경을 마치고 나서 돌아가는 길에 도웅은 굿즈 판매대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에 어희 역시 덩달아 옆에 서서 판매대를 살폈다.

갖고 싶은 거라도 있나, 살펴봐도 굿즈 또한 토끼끼 관련 상품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머뭇거리던 사장은.

“……하나 사줄까요?”

오늘의 전시회를 기념하기 위해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어희, 자신에게 물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지라 실소가 터졌다. 어희의 웃음에 도웅은 무안했는지 갖기 싫으면 말라며 혼자서 토끼끼 굿즈를 골랐다.

“집에 많습니다. 드릴 테니까 디저트랑 교환합시다.”

어희의 말에 도웅은 한 손 가득 들고 있는 굿즈를 얌전히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 왔던 대로 택시를 잡아탔다. 디저트 웅으로 네비를 부르려던 어희보다 먼저 도웅이 로얄 골드 펠리스를 불렀다.

오늘 굿즈 가져가려나 보다. 

어희는 내심 집이 더럽지는 않은지 대접할만한 먹거리가 있는지 곰곰이 기억을 되짚었다. 점심 겸 저녁은 어디에서 먹을지도 함께 고민했다.

“오늘 재밌었어요! 그럼 내일 봐요. 물물교환할 거 들고 갈게요.”

그러나 택시에서 내리기 무섭게 도웅은 인사와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 방향으로 걸었다. 어희는 허무하게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이내 시야에서 아예 없어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입 안에 맴도는 말을 내려놓았다.

“그냥 오늘 가져가면 되는데…….”

어차피 내일 또 만날 테니 꼭 오늘이 아니어도 된다. 그래도 아쉬움은 어쩔 수 없는지라 몇 번이나 돌아봤다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 * *

-띵동.

기어이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벨이 울렸다.

상자에 미리 챙겨놓은 토끼끼 관련 굿즈를 들고 현관을 열었더니.

“디저트 웅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흰색 헬멧을 쓴, 이전에 본 적 있는 라이더가 종이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놀라서 문을 도로 닫을 뻔했다.

어희는 떨떠름하게 종이가방을 넘겨받고서 문을 닫았다.

혹시 어제 내가 택시 안에서 실수해서 기분이 상했나? 싶어 디저트를 살펴봤으나 평소처럼 긍정적인 감정만 가득 보였다.

아니. 자세히 보면 더 반짝인다. 그제야 안심하고 주문한 디저트를 먹었다.

예전까지만 해도 사장이 직접 배달 오는 걸 부담스러워했던 주제에 이제는 또 보고 싶은 모양이다. 자각을 하자 조금 웃겼다. 유쾌한 기분과 설명 못 할 오묘함이 섞였다.

“맛있어.”

머핀을 먹으며 놀고 있는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토끼끼 굿즈가 담긴 상자를 사진 찍었다.

[언제?]

사진과 함께 간략하게 메시지를 보낸 후 핸드폰을 내려놨다. 부드러운 머핀을 베어 물며 조용한 집을 둘러봤다. 한적한 집은 오늘따라 더욱 평안하게 다가왔다.

가능하다면 평생 이 상태 그대로 지내고 싶다. 도웅이 만든 맛있는 디저트에 둘러싸여 안전한 집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꿈같은 생활은 무척이나 평화로워 지금 이게 꿈이 아닐까, 하는 어이없는 의심이 들었다.

“흐음.”

커피를 흔들자 컵 안의 각진 얼음이 잘그락거렸다. 굉장히 멋진 색을 가진 사장이 운영하는 카페는 얼음조차 모난 데 없이 예뻤다. 

그와 잘 되려는 마음은 진즉 접었고 이제는 노선을 틀어 그가 영원히 카페를 운영해줬으면 좋겠다.

빨대를 쭙쭙 빨며 새 디저트 상자를 여는데 테이블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곧 감!]

잘 익은 주황색 곶감이 달려오는 이모티콘을 보고 픽, 실소가 터졌다. 쫀득쫀득 달달하고 귀여운 게 꼭 도웅 같다.

세 번을 달린 이모티콘은 정지되었고 메시지 스크롤을 올렸다가 내리는 걸로 다시 달리게 했다. 어희는 나중에 도웅이 어디인지 물어보면 같은 이모티콘으로 답해줄 요량으로 구매했다.

그러면서 이것도 커플 아이템에 포함이 되는지 곰곰이 따져봤다. 그런 스스로가 굉장히, 무척이나 찌질하게 느껴졌다. 부끄러울 정도로.

곶감 이모티콘을 묻어버리기 위해 다른 이모티콘도 충동구매를 했다. 하얗고 통통한 곰, 파르페며 커피 같은 음료가 인사하는 카페 이모티콘, 쿠키 이모티콘, 하다못해 대놓고 촌스러운 큼직한 폰트 이모티콘까지.

평소에는 쓰지도 않는 이모티콘에 거진 오만 원을 소비하고 나서야 물 쓰듯 누르던 구매를 멈췄는데, 고작 오만 원에 부끄러움이 옅어져서라기보다는….

-띵동. 띵동.

집 전체에 울리는 차임벨 소리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근래에 택배를 시킨 기억도 없고 그렇다고 가스 점검을 온다는 통지도 받지 못했다. 무시하려다 문이 열릴 때까지 벨을 누를 기세였던지라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현관문을 열었다.

“…….”

“잤어요? 아직 점심도 안 됐는데.”

디저트 ㅇㅜㅇ 로고가 새겨진 종이가방을 들고 말갛게 웃는 도웅이 서 있었다. 

어희는 영문을 몰라 눈을 끔벅였다.

누락된 디저트는 없었는데 여기는 웬일인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어희둥둥’이 떠올라 납득했다. 오늘 쇼핑가기로 했지, 참.

“잠깐 들어갈게요.”

문을 짚고 있는 팔 아래로 머리를 쑥 숙여 집 안으로 들어온 사장은 제법 뻔뻔했으나 폴폴 풍기는 단내에 얌전히 현관문을 닫았다.

머리에 쓴 헬멧을 벗지 않고 곧장 소파로 직행한 사장은 테이블에 올려진 디저트와 커피를 구석으로 밀어 놓았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본인이 가져온 종이가방을 떡하니 올렸다.

“왜 멀뚱히 서 있어요?”

“…아파트에 공동 현관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호출도 안 누르고 잘 들어오시는군요.”

내 말에 사장은 칭찬이라도 들은 양 쑥스러워하며 특유의 개구진 웃음을 지었다.

“이 아파트에 아는 사람이 생겨서요. 뇌물로 사탕을 바치고 들어왔어요.”

원래 알던 지인이 이 아파트로 이사 온 건 아닐 테고 그새 주민하고 친해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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