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90)

3. 어희둥둥

도웅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맨스 파티를 한 아름 안고 떠난 단골의 빈자리에는 커다란 하늘색 상자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때 약속했던 미니어처가 담긴 상자.

“이게 무슨 일이야 정말…….”

단골집으로 직접 배달을 다닌 지 넉 달째 되던 날. 드디어 내 정성을 알아주나 싶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이야.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 이런 오해를 산 적이 이번 처음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유치원 때부터 주변에서 고백을 받는 일이 잦았는데, 거절하면 대부분 얼굴을 붉히며 단골과 비슷한 말을 했다.

“네가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

초등학교 때까지는 단순히 잘생긴 외모 때문이겠거니, 여겼다. 그런데 중학교에 올라오고부터는 조금 달랐다.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며 학교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이 빚은 과한 친절 때문이었는지, 한 학기에 받은 고백만 세 번이었고 결정적으로 전교생이 모인 가을 축제 때 공개 고백까지 받았다.

그 모두를 거절한 뒤 도웅은 어느 순간부터 온갖 여지를 잔뜩 뿌리고 다니는 어장남이 되어있었다.

어떤 선배에게는 뺨까지 맞고 나서야 진짜 문제는 나한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자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후로는 조심, 또 조심하자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그깟 리뷰가 뭐라고 같은 실수를 저질러버린 자신에게 화가 났다.

어쩌면 은연중에 ‘같은 남자니까’라고 여겨 방심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같은 남자인 내가 자기를 좋아할 거라 오해를 할 수가 있지?

머리를 쥐고 테이블에 엎드려 낙담하던 도웅은 눈을 깜박였다.

“하…….”

당연히 그가 멋대로 오해한 것은 아닐 테다. 고작 리뷰 하나 받아내겠다고 얼마나 그의 앞을 서성였는가. 물론 도웅에게 리뷰는 중요한 원동력이지만 불쌍한 3201호는 그걸 알 턱이 없었다.

책임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 없는 불편한 이 상황 속에서 도웅은 침음에 잠겼다.

“어……. 토끼끼다.”

의자 밑으로 검은 토끼끼 얼굴이 빼꼼히 보였다. 잽싸게 주워 먼지를 털어냈다.

그 커다란 사람이 이렇게 작은 걸 만든다니, 온갖 작은 물건들로 가득한 작업실을 제 두 눈으로 봤지만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긴 단 걸 좋아하는 것도 안 어울리기는 매한가지였다.

주운 토끼끼를 상자 안에 넣은 도웅은 다시 테이블에 엎드렸다.

미니어처도 돌려줘야겠고 오해가 생긴 일에 대해 사과도 하고……. 우선 집으로 돌아가야 내일 출근을 할 텐데 마음이 무거워서 꼼짝도 하기 싫다.

도웅은 다 식은 찻잔에 무거운 한숨을 담았다.

***

“사장님?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어요?”

스페츌러를 내려놓고 짤주머니를 들 때 출근한 직원 영호가 보였다.

“어……, 왔어?”

“왔죠. 아침 드셨어요?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김밥 사 왔는데 드실래요?”

“아니…….”

케이크를 회전시키며 크림을 짜내던 도웅은 뒤에서 김밥을 까먹는 영호를 돌아봤다.

“너 나 좋아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김밥을 씹던 영호의 표정이 썩었다. 말 그대로 썩은 표정이었다. 오만상을 잔뜩 찌푸린 게 꼭 도웅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쓰는 듯하다.

“뭐……, 사장님으로서 좋냐고 물으신 거예요?”

“아니다.”

도웅은 다시 짤주머니를 들고 크림을 짰다. 영호는 그런 도웅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남은 김밥을 정리했다.

오픈 시간이 되고 나서야 도웅은 일거리를 손에서 놓았다. 혹여 토끼끼 소품이 다른 곳에도 튀었을까 봐 바닥 이곳저곳을 살펴보다, 기왕 살필 거 청소라도 하면서 살피자 싶어서 난데없는 대청소까지 한 탓에 피로가 몰려왔다.

그래도 덕분에 빙수 잔과 빵틀, 작은 몽블랑 모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엄지손톱만큼 작은 모형이었는데, 어떻게 만들었는지 신기할 정도로 디테일이 살아있었다.

“으으. 나 퇴근할래.”

오픈 시간이 되자마자 퇴근하겠다는 도웅을 영호가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오늘따라 과묵한 사장은 컨디션이 저조해도 너무 저조해 보였다.

“지금요? 슬슬 3201호 손님 주문 들어올 텐데 제가 메뉴 나갈까요?”

“…….”

“참고로 저는 사장님처럼 얼음 선별 안 해요~”

과거 고백한 이들은 거절을 당하자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도웅을 무시했다. 이번에도 별로 다를 거 같지는 않아, 도웅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제 주문 안 올 거야……. 나 퇴근한다.”

스텝 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도웅은 어깨에 스포츠 백을 멨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알아서 잘하겠지만.”

포스기 아래에 잘 보관 중인 상자를 챙기는 도웅의 머리 위에서 배달 어플 알림이 울렸다. 중독성 있는 목소리가 이제는 지긋지긋하게 들렸다.

“배달은 역시 요거요지……. 에휴.”

한숨과 피로로 지친 한숨을 내쉬며 가게 문을 여는 도웅을 영호가 불러 세웠다.

“3201호 주문 왔는데 진짜 제가 합니다? 네?”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는 상자를 놓칠 뻔했다.

“뭐……?”

“집 가서 쉬세요~ 제가 준비할게요.”

도웅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영호를 밀치고 포스기를 살폈다. 

로얄 골드 펠리스 3201호. 투샷 아메리카노 두 잔, 바닐라 오믈렛, 포근포근 치즈 홀 케익, 8구 마카롱, 크로플, 초코 머핀, 화이트 초코 쉬폰.

머뭇거리다 주문 접수를 누른 도웅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로맨스 파티로 부족했는지 평소보다 주문 양이 엄청났다. 본인은 모르는 눈치였으나 어제 카드를 내민 손이 덜덜 떨렸었는데 이렇게 단 걸 많이 먹어도 괜찮은지 걱정이 되었다.

물론 이 걱정이 기만이라는 자각은 있으나 속으로 하면 아무도 모를 테니 괜찮다 여겼다.

“사장님 지금 엄청 졸려 보이는데 배달은 하지 마세요. 괜히 킥보드 타다 사고 날라.”

“너…… 나 좋아하냐.”

“아 쫌!”

영호는 질색하며 도웅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새벽부터 무슨 행동만 취하면 ‘나 좋아하냐’라고 말하는 통에 무슨 말을 못 하겠다.

“사장님. 평소보다 오믈렛 크림이 적어 보이는데요.”

영호가 아닌 다른 직원의 지적에 일부러 적게 크림을 담은 오믈렛을 얼른 박스 안으로 숨겼다.

“……단 거 너무 먹어도 안 좋아.”

도웅은 디저트 카페 사장 답지 않은 말을 중얼거리며 흐트러지지 않게 설탕 유산지까지 채워 종이가방에 리본을 묶었다. 습관처럼 서비스를 찾아 냉장고를 둘러본 도웅은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문을 닫았다.

서비스 없이 배달 픽업대에 올라간 종이가방에 묶인 리본이 옆으로 기울어져 바로 묶었다. 

기분 좋았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무리겠지.

“준영이 오면 바로 맡겨. 3201호 또 주문 오면 나한테 전화하고.”

하늘색 상자를 안고 도웅은 가게를 나왔다. 서른한 시간 만의 퇴근이었다.

* * *

자다 깬 도웅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다섯 시.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걸 봐서 3201호의 추가 주문이 없나 보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옆으로 몸을 구부린 도웅은 탁자에 올려놓은 하늘색 상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제 리뷰는 꿈도 못 꾸겠지.

“악! 미친 도웅 새끼!”

머리를 소리 나게 내려친 도웅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다시 잠에서 깨었을 때는 완전히 어둑어둑한 밤이었다.

카페에서는 팔지도 않는 빨간색 글레이즈 도넛을 만드는데, 작은 토끼끼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훈수를 두는 꿈을 꿨다.

‘반죽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그렇게 튀기면 안 되는데!’

‘도넛 그렇게 만드는 거 아닌데!’

아무것도 모르는 토끼끼들이 어찌나 훈수를 두던지……. 그래도 귀여워서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도넛이 새카맣게 타버렸다. 형편없는 도넛 때문인지 갑자기 짜증이 밀려와서 ‘다 망쳤잖아!’ 하고 버럭 화를 냈더니 토끼끼들이 모두 벌벌 떨면서 울먹였다.

‘미, 미안해. 화내지 마.’

이게 무슨 개꿈인가 싶다가도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게 만들면 망칠 걸 뻔히 알았다. 알면서도 가르쳐 주지는 않고 되려 작고 귀여운 토끼끼한테 책임 전가나 하는 꼴이라니.

좋아. 이어서 꿈을 꾸자. 작은 토끼끼에게 사과를 하는 거야. 그리고 맛있는 도넛을 새로 만들어서 나눠 먹어야지. 

굳게 다짐한 도웅은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꿈을 이어 꾸기 위해, 작은 토끼끼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흐엉…….”

말똥말똥한 눈으로 삼십 분가량을 누워있었다. 공기가 답답해서 잠이 안 오는 건가 싶어, 환기를 시키고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아로마 향초도 켰다. 그러고도 졸리지 않아 몸에 피로를 쌓기 위해 한 시간 동안 운동한 뒤 개운하게 따신 물로 샤워까지 하는 등 갖은 노력 후 침대에 누웠는데…….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불을 돌돌 말고 앓는 소리를 내며 몸부림친 도웅은 결국 매트리스를 발로 팡팡 차며 일어났다.

“후……. 신경 쓰여서 잠을 못 자겠네!”

정확히는 12시간을 자버리는 바람에 잠이 오지 않았다.

하늘색 상자 앞에 서서 뚜껑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한 도웅은 결심하고 미니어처를 꺼냈다. 디저트 웅의 미니어처는 그의 작업실에서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개업했을 당시 빈티지한 인테리어가 미니어처에 고스란히 구현되어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짜 단골처럼 보여 웃음이 나왔다. 요거요 단골이 아닌 디저트 웅의 단골.

상자 아래에 깔린 작은 소품을 꺼내 하나씩 배치를 했다. 테이블부터 진열할 디저트까지. 익숙한 기종의 커피머신을 제자리에 놓자 검은 토끼끼 한 마리가 갈 곳을 잃었다.

빈 테이블에 혼자 앉혀 두고 조명을 켜자 주방이 환해졌다.

“아!”

창가에 세워놓은 토끼끼를 바 테이블, 3201호가 앉았던 자리에 앉히고 길쭉한 잔을 앞에 두었더니 완벽했다.

간만에 옛날 인테리어를 보자 추억이 새록새록 올라왔다.

빈티지하게 카페를 꾸미고 싶었는데 무슨 변덕인지 벽 한 면을 어울리지 않는 파스텔색으로 칠해버렸던 게 떠올랐다.

“예쁘네…….”

고정되어있는 주방의 작은 냉장고를 열어보자 몽블랑이 나왔다. 숨은 디테일이 마냥 귀여워 선반과 턴테이블이 올려진 장식용 서랍까지 열었다.

선반에는 귀여운 접시와 컵, 쿠키 틀 같은 게 나왔고 작은 서랍에는 더 작은 쪽지가 나왔다. 손끝으로 잡히지 않을 정도로 작은 크기인지라 도웅은 음식용 핀셋을 가져와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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