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말고! 당신, 나 좋아하잖아!
상상만으로 겁이 나는 말이 튀어나올 새라 어희는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폐쇄적인 성향의 산물로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어깨를 간지럽혔다.
“왠지 부끄럽네요. 티 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과하다. 눈앞의 사장은 무엇이든 과했다.
디저트가 과하게 맛있었고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직접 배달을 와주는 거나, 설레는 감정까지. 그의 모든 행동이 과하게 느껴졌다. 딸기 요거트처럼 귀여운 색을 홀라당 뒤집어쓴 사장의 앞에서 느리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티……, 많이 났어요.”
“불편하셨으면 죄송해요. 그런데 저도 많이 참고 또 참은 터라. 티가 나는지는 전혀 몰랐어요. 그래도 알아주시니까 마음은 편하네요.”
참고 참아? 그러고 보니 디저트 카페를 이용한 지 벌써 3년이다. 사장이 나를 연모한 지 못해도 반년은 넘었을 거라 예상하고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언제부터였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네? 뭐가요?”
선뜻 입이 떼어지지 않았으나 그래도 확인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날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언제부터.”
나를.
“원했는지.”
내 질문에 사장은 “음~” 하고 길게 목울림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이내.
“개업했을 때부터, 3년 동안 쭉 기다렸어요. 좀 징그럽죠? 하하. 제가 집요한 성격이라서요.”
어희는 딸꾹질이 올라오려는 것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끽해야 몇 개월 정도를 가늠했는데, 3년이라니. 동시에 그렇게나 오래 나를 봐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동도 살짝 밀려왔다.
그러나 지금은 정신을 차려야 할 때다. 괜히 이 기분 좋은 감정 색과 분위기에 휩쓸려 성급하게 굴면 나에게나 사장에게나 못할 짓이다. 깊게 고민해보고 또 고민해본 뒤, 두 번은 아쉬우니까 마지막의 마지막 고민까지 마친 후 서로에게 좋은 방향으로 선택해야 한다.
어희는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잘… 알겠습니다. 어쨌든 고민해보고 알려드릴게요. 제가 결정할 때까지는…… 배달은 사장님이 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그게, 서로에게 나을 거 같으니까.”
“아……. 손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인가 봐요. 그러면 나쁜 생각 안 하고 기다릴게요! 로맨스 파티는 요청사항에 써주시면 배달해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물론 서비스니까 입금도 괜찮고요. 감사합니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집을 나가는 사장의 뒷모습을 보자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 그럼 사장, 당신은 사랑이 쉬워? 무려 3년이나 나를 지켜봤으면서.
어희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도웅이 가져온 레드벨벳 티라미수를 떠먹었다. 그의 표정이 곧 온화하게 변했다.
역시 미치게 맛있다.
* * *
지구가 도는 것처럼 생각은 돌고 돈다.
마카롱 먹고 싶어.
사장은 같은 성별인 내가 좋은가?
왜 좋지? 원래 그쪽인건가……?
나는 처음인데.
쿠키 먹고 싶어.
“아.”
결론이 자꾸 먹고 싶은 디저트로 향한다. 어린 사장에 대해 생각을 하고 그가 품은 짝사랑을 느껴보려 애써도 자꾸만 디저트가 당겼다. 평소보다 더욱.
궤도를 이탈하는 생각의 흐름을 집중하기 위해 스케치 노트를 펼쳤다. 파리의 토끼끼를 마지막으로 넉넉하게 삼 개월 정도는 쉬려 했는데 가만히 생각만 하려니까 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손을 움직이는 게 고민 해결에 더 가까워질 거 같다.
푹신한 머랭 침대, 마카롱 쿠션, 무화과 요거트 욕조, 바닐라 오믈렛 소파, 푸딩 탁자. 조명은 체리로 걸고 머핀 벌레가 있으면 귀엽겠는데……. 결국은 또 디저트다. 다른 장으로 넘겨서 새로 스케치를 했다.
파워 몽블랑 수배범 토끼끼.
“몽블랑 수배범이 뭐야…….”
아무래도 당이 부족한 모양이다.
어희는 핸드폰을 들어 요거요를 켰다. 평소보다 많은 양의 디저트를 시키고 연필을 잡았다. 내키는 대로 선을 슥슥 그었다. 그러다 띵동,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퍼뜩 놀라 연필을 놓쳤는데.
“사장?”
어린 사장이 스케치 노트에 담겨 있었다.
당신이 왜 내 노트 안에 있어? 당이 부족하면 기억도 날아가는 건가?
혼란스러움을 겪는 와중에 연이어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급히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더니 처음 보는 라이더가 서 있었다. 새하얀 헬멧뿐만 아니라 무릎, 팔꿈치 보호대까지 착용한 라이더는.
“디저트 웅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어딘지 심심한 인사와 함께 종이 백을 건넸다. 안을 꼼꼼히 살피자 주문하지 않은 말차 마들렌과 체리 타르트가 들어있었다.
“저기.”
“네!”
종이 백을 건네주고 엘리베이터에 타려던 라이더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습관처럼 주문 외 상품을 돌려주려던 어희는 손을 멈췄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온 어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몽블랑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 있던 날. 사장은 주문 외 상품은 모두 서비스였다고 말했던 게 떠오른 탓이다.
나는 그가 표현한 마음을 매몰차게 라이더에게 돌려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는 법을 몰랐다. 계속 서비스를 보내고 이제는 직접 얼굴도장까지 찍기 위해 가게를 빠져나와 배달까지 왔다.
이 얼마나 용기 있는 사람이란 말인가. 그에 비해 나는 집에 숨은 겁쟁이나 다름없었다. 가만히 앉아 핸드폰으로 달달구리나 시켜 먹는.
크림이 잔뜩 얹어진 머핀 케이크를 먹으며 작업실로 들어갔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디저트 토끼끼. 그의 가게를 완성하고 싶었다.
* * *
나무 벽과 장식품까지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접착 건조까지 끝냈다. 3년 전 첫 방문 이후로 재방문은 처음 한 터라 새로 바뀐 인테리어가 완벽하게 기억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테이블 개수, 걸려있는 잔 모양까지 완벽하게 그려졌다. 기억력이 뛰어난 편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 가게의 모습은 쉽게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긴. 처음 개업했을 때부터 눈에 띄긴 했다. 심플한 외관이나 내부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서 오픈과 동시에 들렸던 적이 있다. 첫 주문은 배달이 아닌 포장이었고 당시에는 너무 어려 보여서 사장이 직원인 줄 알았다. 빗속을 뚫고 잔돈을 주기 위해 달려오던 어린 사장이 떠올라 소리 없이 웃었다.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사장의 색은 따뜻하다. 디저트도 마찬가지로 그가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보였다. 오직 어희, 본인만 알 수 있었다.
“음. 역시 지금도 좋지만 그때 그 동화 같은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지.”
기껏 붙인 벽타일을 뜯어내고 기억을 되짚었다. 옅은 파스텔 톤이었는데 하늘색과 비슷한 연보라색으로 나무 타일을 칠했다. 구조는 지금이랑 그대로였으니 크게 손 볼 건 없었다.
“……완성인가?”
2, 3층. 단층일 때는 다락이나 비밀 장치로 공간까지 몰래 숨겨놓는 어희에게 1층 디저트 카페 만들기는 식은 죽 먹기다. 심지어 실제 장소를 참고한다면 더더욱 쉽다.
의자에 등을 기대어 커피를 마신 어희는 자신이 만든 디저트 가게를 내려다봤다. 나무 간판에 난 작은 흠집까지 디테일하게 구현했는데 왜인지 불만족스럽다. 어떤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알지 못해 더 답답했다.
“흐음.”
빨대를 잘근 씹은 어희는 커피를 내려놓고 가까이 미니어처를 들여다봤다.
찬찬히 살펴보니 완벽하긴 한데, 어딘가 심심해 보인다. 그렇다고 홀에 토끼끼를 여럿 놓고 파티를 만들면 주방에서 혼자 빵 반죽을 하는 토끼끼가 불쌍하지 않은가. 게다가 지금 잡아놓은 소박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다.
고민하던 어희는 주방과 붙어 있는 바 테이블에 토끼끼 한 마리를 만들어 앉혔다. 뱅쇼가 들어있는 기다란 잔과 각설탕까지 놓자 이제야 만족스럽다.
어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 등을 모두 끄고 미니어처의 조명만을 켰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어희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원두 향이 짙게 베인 가게와 단내를 풍기는 사장. 따뜻한 뱅쇼를 얻어 마시는 본인까지. 정말 완벽하다.
사장에게 고민해보겠다며 말한 지 어느덧 닷새가 흘렀다.
고민은 길면 길수록 좋지 않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신중해야 할 사항이었기에 어희는 미니어처를 만들면서 밤새 고민했다. 오늘까지도 망설였던 마음은 우습게도 바테이블에 토끼끼를 한 마리 앉히는 순간 결정이 났다.
뭘 만들든 개쩌는 디저트 장인 사장과 진득하게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아니 좋다. 오히려 집에만 박혀있는 자신에게는 뜻하지 않은 인연이지 않은가.
낯을 가리는 본인과 달리 그는 언제나 다정하고 밝은 사람이다. 태풍이 몰아치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좋은 감정만 보여준. 그러니 3년이라는 세월 동안 꾸준히 봐줬겠지.
그쪽은, 아니. 연애 자체가 처음이다 보니 당장 몸까지 바치는 건 어렵겠지만, 차분히 공부하면서 천천히 거리를 좁혀나간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희는 늘 달콤함으로 마음을 달래주고 징크스를 물리쳐 준 사장이 보고 싶었다.
이건 사장의 마음을 알게 되어, 마음이 흔들린 게 아니다. 나는 처음부터 그가 가진 색이 좋았다. 익숙하지 않은 따스한 색을 사랑했다. 좀 더 일찍, 집에 숨기 전에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며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밤 10시.
근처에 살아서 그런지 우연히 가게를 지나칠 때가 은근 있었는데, 지금쯤 대부분의 직원이 퇴근할 시간이다. 물론 사장의 퇴근 시간은 들쭉날쭉하였으나 대부분 제일 마지막으로 가는 거 같았다.
바쁘게 하루를 보낸 가게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게 하루를 끝낸 보상이라고 일전에 말했던 게 기억이 난 어희는 머리끈을 풀어 다시 머리를 묶었다.
과하다, 과하다 했더니 근무 시간까지 과했다. 어린 사장은 과한 사람이다.
급히 겉옷을 챙겨 입고 커다란 하늘색 상자에 완성한 미니어처를 넣었다. 집을 나선 어희는 빠른 걸음으로 디저트 가게로 향했다.
사장, 사장! 내 마음도 당신과 같아!
예상대로 아직 불이 켜져 있는 디저트 카페에는 사장 혼자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기다란 유리창을 노크했더니 시선이 마주쳤다. 놀란 듯 크게 뜨인 눈은 이내 옅은 미소와 함께 둥글게 휘었다. 사장의 표정보다 반기는 듯한 감정이 눈에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장은 잠긴 문을 열어줬다.
“일주일도 안 지났는데 되게 오랜만인 거 같네요. 어떻게…… 고민은 해보셨어요?”
그에게서 처음으로 다른 색이 보였다. 긴장의 색이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와 같은 색을 띠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희는 상자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