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늦잠을 자버린 도웅은 허겁지겁 집을 나섰다. 걸어서 2분 거리에 위치한 덕분에 빨리 도착할 수 있었으나 늦잠 때문에 평소보다 20분이나 늦었다. 불이 켜진 가게는 이미 반죽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사장님 지금이 몇 시예요.”
출퇴근 시간이 같은 오래된 직원 영호가 급히 가게로 들어온 도웅을 구박했다.
“으아. 미안, 미안. 늦게 일어나서……. 아 그건 내가 할게.”
“됐어요. 거기 앞에 파니니 만들어놨으니까 그거나 드세요.”
“어어. 진짜 미안.”
겉옷을 벗어두고 의자에 앉아 파니니를 먹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우물거리는 도웅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검은 옷에 검은 마스크까지 쓴.
새벽에는 유동 인구가 별로 없는 거리였기에 눈에 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남자는 키가 매우 컸다. 뒤통수에 달린 작은 머리 뭉치, 반묶음까지 마치 3201호 같다.
“헉?”
지나가는 차 라이트에 비친 남자의 얼굴은 누가 뭐래도 단골이었다. 계좌번호 알려달래서 알려줬더니 돈을 입금하지 않은 단골.
마스크로 하관을 가려봤자 단골 감별사 도웅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늦게 온 주제에 느긋하게 씹고 있던 파니니를 빠르게 씹으며 창에 달라붙었다.
“저게 뭐야.”
단골은 커다란 짐을 끌고 가고 있었다. 캐리어는 아니었고 바퀴가 달린 커다란 보스턴 백이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에, 인적이 드문 거리에서, 검은 옷과 마스크를 한 남자가 사람 한 명을 접으면 거뜬히 들어갈 법한 커다란 가방을 끌고 있다.
“…여행이라도 가나?”
수상해 보이긴 하나 한국, 그것도 치안이 유독 좋은 동네였기에 도웅은 여행을 가나보다~ 하고 넘겨짚었다.
“사장님, 이거 좀 봐주세요.”
파니니를 입에 욱여넣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 * *
주문 영수증을 뽑은 도웅의 미간이 미묘하게 위로 올라갔다.
투샷 아메리카노 두 잔, 에그타르트, 휘낭시에, 초콜릿 크루아상.
언제나처럼 비슷한 주문 아래 요청사항에는.
[매장 요청 : 가격.]
“……후.”
이번에도 도웅은 얼음을 선별했다. 정성 가득 원두를 내리고 멋진 디저트 중에서 특출나게 맛있어 보이는 걸 골라 포장했다. 이런다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건만 꾸준했다.
심술이 난 도웅은 포스트잇에 20만 원을 적어 보냈다. 본래 2만 원짜리 몽블랑이었으나 그가 매장으로 전화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에 매장 번호까지 친절히 적어놨다.
내가 왜 심술이 났을까…….
자몽잼을 만들기 위해 자몽 속껍질을 제거하는, 엄청난 집중을 요구하는 작업을 하며 도웅의 신경은 포스트잇에 꽂혀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20만 원은 너무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가 가게를 옮겨버릴까 봐 노심초사 걱정했던 주제에 못난 짓이나 하다니. 이러다 sns에 글이 올라오고 그 글은 후끈 달아오르게 된다. 그리고 각종 비난이 쏟아지겠지.
“아, 안 돼……!”
가게 폐업까지 상상을 마친 도웅은 뒤늦게 홀로 나갔다.
라이더 전용 픽업대에 줄지어 올려져 있는 종이 백을 뒤졌다. 그러나 도웅이 원하는 영수증을 품은 종이 백은 보이지 않았다.
“3201호 어디 갔어?!”
포스기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묻자.
“진즉 출발했죠.”
“으악!”
“왜, 왜 그래요?”
“아아……! 나는 망했어. 우리 가게, 망했어.”
비명을 지르며 가게를 뛰쳐나온 도웅은 곧장 로얄 골드 펠리스로 달리려 했다.
띠링.
[입금 13:25 123-456-1xxxxx 어희 200,000원]
이십 만원이 입금되었다. 어희는 뭐지? 어이없다는 건가? 나도 어이가 없다.
도웅은 그 자리에 서서 같은 계좌번호로 18만 원을 이체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제 뿌리깊은 단골에게서 완전히 신경을 끄고 싶었다.
그가 리뷰를 달든 말든 그의 자유가 아닌가. 지금 내 꼴을 보라. 리뷰에 집착하다가 단골을 잃을 뻔한 걸로도 모자라, 가격을 열 배나 뻥튀기해서 돈을 받아냈다. 돌려주긴 했으나 내 평판 내가 깎아 먹는 꼴이다. 요새 악몽을 꾼다거나 밤새 이불을 걷어차느라 잠이 부족했다. 일상이 뒤흔들리고 있다.
도웅은 내리쬐는 햇살을 보며 다짐했다.
돌아가자. 그에게 직접 배달을 하기 전으로. 숨어서 집착했던 과거로 돌아가는 거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요거요를 활짝 개방하기 직전.
[입금 13:25 123-456-1xxxxx 어희 200,000원]
3201호에게 또 돈을 입금 당해버렸다.
이 돈은 대체 뭐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도웅은 요거요를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주문이 올라왔는데.
아메리카노 투샷 두 잔, 얼그레이 마들렌, 치즈 머핀.
[매장 요청 : 몽블랑.]
“미친.”
몽블랑 값이었다.
이 사람, 진짜 몽블랑 값이 20만 원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제 내가 18만 원을 환불해 줬는데?
매장보다 배달 어플이 10분 일찍 오픈되었기에 몽블랑은 다섯 개가 남아있었다.
못 줄 건 없는데, 심술이 난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심술을 자각한 도웅은 아차차, 하고 제 뺨을 스스로 짝짝 두들겼다. 세게 말고 살살.
바로 어제 심술내지 말자고 다짐했으면서 왜 또 심술을 낸단 말인가. 과거, 불과 며칠 전으로 되돌아가자. 그때라면 어떻게 했을까.
“맛있긴 했나 보네. 리뷰 좀 달아주세요, 사랑하는 단골님.”
도웅은 18만 원을 이체해주고 몽블랑을 종이 백에 담았다.
그게 끝일 줄 알았다.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3201호의 주문이 이어졌는데.
[입금 13:25 123-456-1xxxxx 어희 200,000원]
아메리카노 투샷 두 잔, 에그타르트, 블루베리 푸딩.
[매장 요청 : 몽블랑.]
“오. 블루베리 푸딩.”
블루베리 푸딩은 인기 많은 메뉴가 아니다. 가격이 푸딩치고는 비쌌는데, 블루베리를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같은 돈 내고 차라리 다른 디저트나 음료를 선택했다. 그런데 3201호는 주기적으로 블루베리 푸딩을 시켰다.
도웅은 몽블랑을 제외한 모든 디저트를 좋아했으나 블루베리 푸딩에 조금 더 애정이 갔다. 생긴 게 말랑말랑하니 아주 귀여웠다.
오늘도 몽블랑과 함께 챙겨 넣은 종이 백을 픽업대에 올려놓고 18만 원을 환불했다.
띠링.
[입금 13:25 123-456-1xxxxx 어희 200,000원]
아메리카노 투샷 두 잔, 생딸기 타르트, 그린티 아포가토.
[매장 요청 : 몽블랑.]
“드라이아이스도 같이 가야겠네.”
이번에도 도웅은 18만 원을 이체해주고 몽블랑과 함께 메뉴를 종이 백에 포장해 픽업대에 올려놨다.
띠링.
[입금 13:25 123-456-1xxxxx 어희 200,000원]
아메리카노 투샷 두 잔, 8구 마카롱, 갈릭 쿠키.
[매장 요청 : 몽블랑.]
도웅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계속 이런 식으로 몽블랑을 시키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하루에 다섯 상자만 판매하는 상품인데 근래에 계속 단골에게 파느라 네 상자밖에 판매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건 매장 전용 판매 상품이 아니던가. 이건 편애가 아니라 역차별이었다. 오픈 시간에 맞춰서 줄 서 있는 손님에 대한.
20만 원을 고스란히 이체해주고 포스트잇에 글씨를 끄적였다.
[몽블랑은 매장 전용 판매 상품입니다. 하루 다섯 상자만 판매하고 있어서 앞으로는 배달 판매가 어려울 듯합니다. 이체해주신 돈은 도로 이체해드렸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D _디저트ㅇㅜㅇ 올림]
몽블랑 대신 갈릭 쿠키를 하나 더 넣어주는 걸로 포장을 마무리했다.
* * *
도웅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출퇴근 시간이 같은 직원, 영호가 일주일간 휴가를 떠나 당분간은 혼자 디저트를 만들어 놔야 했지만 그 정도는 거뜬했다.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서 어제 여유 있게 퇴근 후 개인 시간을 가진 게 신의 한 수였다. 얼굴에 시원한 팩도 얹고 반신욕을 했으며 뱅쇼까지 만들어 마셨다. 잠도 푹 잔 덕분에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가을에 접어들더니 바람도 많이 불고 새벽에는 날씨가 쌀쌀했다. 다른 직원들과 나눠 마실 뱅쇼를 들고 가볍게 걷고 있는데.
“어?”
불도 켜지지 않은 가게 앞에 웬 남자가 서 있는 걸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작은 움직임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 손끝 하나 까딱이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뒷모습에 귀신인가? 싶었다. 이내 그의 앞에 있는 커다란 가방을 보고 생각을 정정했다.
강도다.
“저기. 무슨 일이세요?”
언제든 긴급 전화를 걸 준비를 하고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가 몸을 돌렸다.
“…….”
“…여기서 뭐 하세요?”
3201호였다.
그의 얼굴을 알게 된 지는 불과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워낙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귀한 이목구비를 가진 단골이었다. 도웅의 기억이 맞다면 가게로 직접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아직 오픈 시간 멀었어요.”
“그…….”
그? 멀뚱히 단골을 보다가 열쇠로 가게 문을 열었다.
“들어오실래요?”
“오픈 시간이, 아니라서.”
“안 들어오실 거면 무슨 용건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도로로 슬쩍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내게 시선을 돌린 단골은 머뭇거리다 목적을 밝혔다.
“몽블랑 사러 왔습니다.”
“우와.”
할 말을 잃었다. 오픈 시간은 오전 9시고 지금은 새벽 다섯 시다. 근래에 계속 몽블랑을 주문하더니 아주 반해버린 모양이다.
“일단 들어와요. 몽블랑 만들어 줄 테니까.”
“아. 역시 직접 만든 거였구나. 그런데 다른 손님이 보게 되면 상황이 좀…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어…, 손님 건 따로 만들면 돼요.”
가게 문을 잡고 눈짓하자 앞에 있는 커다란 보스턴 백을 가게 입구 옆으로 밀어 넣고 들어왔다. 주방 조명을 켜자 홀까지 빛이 닿았다.
“홀도 밝게 켜드릴까요?”
“아뇨. 계속 밝은 곳에 있다 와서 어두운 게 더 좋습니다.”
“아무 테이블에 앉아 있어요. 시간은 두세 시간 정도 걸릴 텐데 볼일 보고 오셔도 되고. 아니면 이따 배달시키실 때 같이 넣어드릴게요.”
“음…… 예정대로 기다렸다가 사 가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그게 더 좋으면 상관없어요. 새벽에 같이 일해주는 직원이 휴가 갔거든요.”
3201호는 주방과 가까운 바 테이블 의자를 빼 앉았다. 오픈 키친이라 어둑한 홀에 앉아 있는 그를 보자 지금 이곳이 디저트 카페가 아닌 분위기 있는 심야식당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