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번째 손님
몇 시간째 깨어 있는 중이지? 열 시간, 열다섯 시간, 서른 시간?
어희는 빠른 걸음으로 인적이 뜸한 거리를 걸으며 피곤을 곱씹었다. 빗줄기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쏟아지고 거센 바람이 불었다. 우산을 쓰고 있어도 바지는 폭삭 젖었고 신발 안에도 물이 흥건했다. 그럼에도 불쾌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덧칠 된 색을 씻겨냈다. 비가 오는 날은 어희가 유일하게 다른 이들처럼 평범하게 세상을 볼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아.”
라디오에서 언뜻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은데 그게 오늘인 모양이다. 어쩐지 비바람이 심상치 않더라니.
어희는 추적추적하게 비가 내리는 한적한 도로와 가로수 뿌리가 뽑힐 듯 바람에 흔들리는 걸 구경하는 와중에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냄새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디저트 ㅇㅜㅇ
하여간 단내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
건너편 오래된 저층 상가 건물에 자리 잡은 디저트 가게에서 풍겨오는 냄새를 맡으며 어희는 길을 건넜다.
동네에 저런 가게가 있었던가, 잠시 생각해보지만 디저트 가게 말고 원래 다른 무엇이 있었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도통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다 보니 잘 모르는 게 당연했다.
어희는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 마지막으로 미용실에 간 게 언제였는지 짚어보았다. 못해도 반년은 더 지났으리라. 기왕 나온 김에 어느새 귀를 덮은 머리카락도 정리하고 싶은데, 어째 문을 연 미용실이 없다.
대강 우산 물기를 털고 들어간 카페는 전체적으로 따뜻한 색이 퍼져있었다. 마냥 달콤한 디저트 냄새와 커피 향까지. 마치 어희가 만든 ‘토끼끼, 카페에 가다’ 작품처럼 이상적인 풍경이었다.
카페는 빈티지한 인테리어와는 어울리지 않게 벽 한 면이 뭉실한 파스텔 톤으로 칠이 되어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이질적으로 보이겠지만, 유독 파스텔 벽에서 설렘이 느껴져, 어희의 마음까지 덩달아 설레었다.
가게를 구경하면서 직원을 기다렸더니 오픈되어있는 주방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
“…….”
직원으로 보이는 어린 남자는 둥그런 눈매를 깜박였다. 손님을 봤으면 인사를 하든가, 주문을 받지 멀뚱히 서 있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작게 솟은 불만이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한 시간 동안 태풍을 뚫고 간신히 발견한 카페가 아쉬워서는 아니고 낯가리는 성격 탓이다.
“아메리카노 투샷 하나랑……, 디저트는 없습니까?”
디저트 카페인데 디저트 메뉴판이 따로 없었다. 진열대도 텅텅 비어있고 쇼케이스에는 흔한 케이크 한 조각 없다.
아무래도 이곳에 오기 전, 다른 누군가가 싹 쓸어간 거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아. 아직 영업 준비 중이라서요.”
직원이 어리벙벙한 표정을 유지하고서 단내가 물씬 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시부터 영업합니까?”
빗물에 젖은 손목시계를 확인하자 눈살이 자연스럽게 구겨졌다.
지금 시간이 오후 다섯 시 십 분인데, 아직도 영업 준비 중이라는 말은 어딘가 이상했다.
지금 내 행색이 그렇게 수상한가? 그건 아닐 것이다. 남자의 색은 호의적이지는 않더라도 적대적이지도 않았으니까.
“아직 가게 정리가 덜 돼서, 다음 주부터 오픈합니다.”
“아.”
아직 오픈도 하지 않은 가게였구나…….
어희는 폭삭 젖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아쉬움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 알겠습니다.”
폴폴 풍기는 단내를 뒤로하고 걸음을 돌렸다. 아예 기대가 없지는 않았던지라 실망감에 어깨가 축 처졌다. 문가에 세워둔 우산을 잡자 뒤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잔 드릴까요?”
지나치게 친절하지 않은, 무심에 조금 더 가까운 어조로 내뱉어진 말에 걸음을 멈춰 세우자 직원은 재차.
“디저트는 크루아상밖에 없어요. 근데 맛있을걸요.”
확신에 찬 목소리는 여전히 달달한 향이 베어 있었다. 왔다 갔다 하는 모양새가 멋없긴 해도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어희는 몸을 돌려 카운터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카페를 찾아서 태풍을 가로질러 왔습니다. 뒷말을 삼키고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투샷이라 하셨죠?”
“예, 예. 아이스로…….”
직원의 입매가 아래로 살짝 쳐지는 걸 보고 말을 바꿨다.
“따뜻한 걸로.”
“아. 다행이다. 아직 제빙기가 안 왔거든요. 예정대로면 오늘 오기로 했는데, 태풍 때문인지 아직 바다도 못 건너고 있나 봐요. 그래서 오픈도 다음 주로 미뤄졌지 뭐예요.”
별로 궁금하지 않은 가게 사정을 듣게 되었다. 어서 커피와 자신 있는 크루아상을 내주면 좋겠다는 초조함에 플라스틱 카드 단면으로 오더 테이블을 톡, 톡 두들겼다.
“얼마입니까?”
가격을 묻자 올라갔던 직원의 입매가 다시금 아래로 처졌다.
이번에는 또 뭔데?
“아직……, 카드 단말기 업체를 안 불러서요. 서비스로 드릴게요. 나중에 오픈하면 또 찾아주세요.”
정식 오픈도 하지 않은 카페에서, 직원이 단독으로 이렇게 결정해도 되는 건가? 직원이 약간 걱정스러웠으나 괜히 물었다가 커피를 얻지 못할 새라 입을 다물었다.
“드시고 가실 거예요?”
“아뇨.”
“그럼 들고 가기 쉽게 포장해드릴게요.”
남자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그리고는 왜 때문인지 돌연 정색하고는 원두를 받기 시작했다. 능숙한 솜씨로 일하는 남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카드를 도로 꽂아 넣고 만 원권과 오만원권 지폐를 가늠하고 있을 때, 마침 직원이 크루아상 네댓 개를 상자에 담는 게 보여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종이 백보다는 비닐이 낫겠죠?”
대답을 듣지 않고 비닐백에 커피와 크루아상 상자를 넣었다. 종이든 비닐이든 상관없는지라 얌전히 기다렸다. 사료를 기다리는 개처럼, 안달복달 조바심을 숨기고 차분히.
“근데 되게 묘하네요. 태풍을 뚫고 온 손님이라 그런가.”
“아. 예.”
손잡이 부근에 리본까지 매단 비닐백이 픽업대에 올라오자마자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려놨다.
“거스름돈은 괜찮습니다.”
왠지 잔돈도 없을 거 같아서 빠른 걸음으로 우산을 챙겨 가게를 나왔다.
“네? 손님?!”
걸음을 재촉했더니 뒤에서 비를 맞으며 직원이 따라왔다. 적당하게 빠른 걸음걸이는 이내 뜀박질을 시작했다.
“손님!”
뭐야, 왜 쫓아와. 무서워!
“손니임!”
태풍을 뚫고 쫓아오는 직원은 솔직히 무서웠다. 더구나 비 때문에 직원의 감정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끝내 우산까지 버리고 있는 힘껏 내달린 어희는 간신히 직원을 떨쳐낼 수 있었다.
“헉, 뭐야.”
이제는 따라오는 이가 없음에도 어희는 조급하게 엘리베이터 닫기 버튼을 서너 번 연타했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구석 자리에 기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층수는 빠르게 올라갔다. 마침내 띵동! 하는 소리와 함께 32층에 다다르자 어희는 빠르게 3201호,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도어락을 걸어 잠그고 현관에 주저앉고 나서야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손에 든 비닐백을 내려놓은 어희는 아직도 쿵쾅쿵쾅 심장이 뛰었다.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는 만큼 방금처럼 갑작스러운 상황은 면역력이 없었다.
“후우.”
집까지 뛰어오느라 얼굴까지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얼굴이 터지지 않은 게 용했다.
신발장 앞에 덩그러니 놓인 비닐백을 챙긴 건 보송하게 샤워를 끝낸 후였다.
그 난리를 피우며 뛰어왔음에도 어찌나 밀봉이 잘 되어있는지 커피는 한 방울도 새지 않았다. 뚜껑을 열고 식은 커피를 벌컥 마신 어희는 디저트 상자를 열었다가, 닫았다.
“잘못 봤나?”
감정은 사람과 사람 간에만 전이되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만드는 음식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방금 눈이 부실 정도로 긍정적인 색을 봤던 거 같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본 어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탕 유산지에 쌓인 크루아상은 매우 예쁜 색을 띠고 있었다. 공장표 빵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색이다. 이런 감정은 오랜만인지라, 어희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었다.
얼마나 정성스럽게 만들었으면 이런 빛깔을 낼 수 있는지. 되새겨보면 무섭게 느껴졌던 그 직원도 비슷한 색이었다. 어쩌면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가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번지르르한 크루아상을 한 입 베어 문 어희는 눈을 끔벅이다 천천히 음미했다.
“맛있다…….”
크루아상은 원래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니었던가? 적당히 달콤하면서 겉은 바삭하고 안은 부드럽다. 흔히 말하는 겉바속초의 표본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크루아상 네 개를 허겁지겁 순식간에 먹어 치운 어희는 커피로 입가심하며 내일 또 이곳에서 디저트를 사 먹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 순간, 어희의 뇌리에 직원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태풍 때문인지 아직 바다도 못 건너고 있다나 봐요. 그래서 오픈도 다음 주로 미뤄졌지 뭐예요.”
난생처음으로 어희는 태풍이 미워졌다. 게다가 그 직원을 다시 볼 생각을 하니까 무서워서 그런지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크루아상은 먹고 싶은데, 직원하고 다시 마주보기가 껄끄럽다.
“으음.”
나쁜 색을 피해 집에 숨은 지도 어언 스물다섯 해. 다년간의 집돌이 생활 끝에 깨달은 건 배달만큼 편리한 서비스는 없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배달이 되지 않는 음식은 없으니까.
어희는 남은 커피를 손에 들고 작업방으로 들어갔다.
어느 한 도시에 아기 토끼끼가 태어났어요. 겉보기에는 다른 토끼끼와 다를 게 없었지만, 그는 아주 아주 특별했답니다.
위로 길게 솟은 쫑긋한 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협을 잘 감지했으며 가로로 그어진 적당한 크기의 입에서는 불필요한 말이 나오는 일은 극히 적었어요.
앙증맞은 코는 자면서도 단내를 어찌나 잘 맡는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답니다. 이 아기 토끼끼에 관한 특별함은 밤새 떠들 수 있겠지만, 제일 특별한 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역시나 큼직한 두 눈이랍니다.
놀랍게도 아기 토끼끼는 감정을 색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어요. 미움은 어두운색. 불행은 그보다 더 어두운색.
날 때부터 지닌 특별함인지라 표정이나 태도가 아닌 색으로 감정을 배운 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어요. 아기 토끼끼는 세상 곳곳에 숨은 사랑스러운 색을 찾아 이곳저곳을 떠돌았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미움, 불행, 우울 같은 부정적인 색만 마주하게 된 토끼끼는 잔뜩 주눅이 들었어요.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 날. 커다란 토끼끼로 성장한 그는 거울을 보고 까무러칠 정도로 크게 놀랐어요. 거울 속에는 자신이 그토록 끔찍하게 여긴 부정적인 색을 얼룩덜룩 묻힌 한 토끼끼가 울적한 눈을 한 채 서 있는 게 아니겠어요?
감정은 쉽게 전이된다는 걸 알게 된 토끼끼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자신을 가뒀답니다. 다시는 나쁜 색에 물들지 않게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