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 Extra Chapter 1. VIP 회원정보 열람 - 2 >
"마아아.”
검은 머리에 황금색 눈동자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신은아의 어릴 적 모습을 고스란히 빼닮은 갓난아기.
녀석이 꼼질거리며 뻗어온 손을 꼭 붙잡아주며 슈가 상냥하게 웃었다.
"엄마 여기 있어요~"
"마아아!”
"얘는 자연스럽게 구라를 치고 있네.”
"앗, 선행학습이야, 할아방!”
뒤에서 나타난 강신혁의 모습에도 슈는 떳떳한 자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강신혁 부부보다도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는 듯한 태도 탓에 그녀에게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슈는 강신혁에게 인과의 업을 대신 짊어져주는 팔찌를 선물 받은 이래 겉모습이 꾸준히 성장해 지금은 어느덧 열여덟 살, 성인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을 만큼 성장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아이들을 돌보고 있을 때의 녀석의 모습은 어딘가 성숙해보이기도 했다.
"마침 잘 왔어, 할아방.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뭔데? 어지간한 건 들어줄게.”
"오오오, 여유로워 보이네, 할아방! 색다른 모습이야.”
"이제 나도 좀 여유로워도 되지 않겠어?”
까놓고 말해 강신혁은 요즘 슬슬 한가함을 느끼고 있었다.
인간이란 청년기와 장년기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중년기를 지나 노년기에 접어들면 으레 일을 그만두고 한가로운 노후 생활을 즐기지 않던가?
강신혁이 느끼기에는 그가 지금 딱 거기에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나이로 따지면야 이제 막 청년이 되었다고 해도 좋은 스물한 살이지만, 히어로 유니버스에 접속한 이래 몇 년간은 정말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만큼 정신없이 뛰어다니지 않았던가.
심지어 지구 기준으로 21살일 뿐, 그에게는 전생의 기억이 있을 뿐더러 지구와 시간흐름이 다른 세상에서 활동한 것을 모두 따지면 자칫 수십 년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제 와서 내가 지구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니까 이제 그냥 마음 놓고 쉬는 거지. 얼마 전에 발렌…… 상권종을 직접 움직였던 것도 내 기준으로는 엘로카드 정도야.”
"그래서 그 조무래기는 잡았대?”
“아직 싸우고 있나보던데. 그래도 일단 외부로 나가는 루트는 모두 끊어놨으니까, 최소한 아프리카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거야.”
미즈시마엘라 유키.
과거 봄버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이 여자는 일찍이 신검 오주영과 함께 요르문간드 측에 붙었던 인류의 배신자다.
이제와 추측하자면 그녀와 오주영은 어떤 식으로든 요르문간드의 간부와 접촉하게 되어, 그들이 사실 가이아의 통제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되어 초인이라는 자신들의 임무에 회의감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거기서부터가 문제인데, 이들은 가이아에게 저항하는 대신 카이랄을 얻어 자신들도 요르문간드의 한 축이 되는 길을 골랐다.
하긴 거대한 힘 앞에 무력감을 느낀 이들이 목표로 할 만한 것이라봤자 빤하긴 했다.
선과 악을 나누지 않게 된 그들은 인류를 공격하는 것에 저항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결국 외부인들이 보기엔 지나치게 충격적이고 납득이 가지 않는 배반 행위를 저질렀다.
무수한 일을 겪고 초월자가 된 지금에서야 강신혁은 그들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들이 어리석다는 생각은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특히 가족을 남겨두고 있던 오주영은 특히나.
‘어쨌든 오주영은 대가를 치렀어. 능력이 너무 독특하고 강했던 탓에 야누스가 그를 이용할 생각을 품게 된 시점에서 결말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 다만 미즈시마 엘라 유키, 봄버걸은…….'
딱 잘라 말하면 그녀는 조금 애매했다.
카이랄을 얻어 강화된 것은 확실하나, 어차피 마력보다 더 격이 높은 힘을 쓰는 이들에게 봄버걸의 능력은 일절 통하지 않는다.
그녀가 그 능력을 한참 더 갈고 닦아 승화시킨다면 어쩌면 신은아에게도 필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카이랄에 의지해 인간의 몸을 버린 여자에게 그런 재능이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문제는 그래서 모두가 그 여자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는 거지……."
"야누스가 나중에 정신 찾고 확인해봤는데 신검이라는 애가 만든 검도 하나 사라졌었다고 하더라.”
"내가 나서면 금방 찾을 수 있긴 한데.”
봄버걸은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파악한 시점에서 일찌감치 잠적했다.
살아남기 위한 잔머리만은 실로 비상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문제는 가이아가 죽고 세계가 개편된 이 시점에 그녀가 정신을 못 차리고 헛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이아가 죽고 야누스와 로키가 떠났다.
그렇다면 자신이 요르문간드의 대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로 허황된 꿈.
다행히 요르문간드가 완전히 가이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정상적으로 움직이게 되면서 봄버걸이 카이랄이 있는 세계에 접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지구에 갇히게 된 그녀는 일단 지구의 빌런들을 모조리 모아 마족화시킨다는 야망을 우선적으로 실현시키려 했다.
성가시게도 그녀에게는 마력변질 능력이 있고, 그녀 자신이 마족이 된 지금은 다른 이를 마족으로 변질시키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
심지어는 오주영의 의지가 남은(어차피 큰 조각들은 모두 사멸했으니 비율로 따지면 한 10% 정도 될 것이다.) 검까지 들고 있으니 문자 그대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을 몇 개씩이나 품고 싸돌아다니고 있는 봄버걸 그 자체.
그것이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할아방은 진짜 안 나설 거야?”
"날 시험하는 거냐? 이런 일에 나설 리가 없잖아. 상권종의 능력을 강화시켜주고 힌트를 준 것만 해도 충분히 할 만큼 한 거라니까.”
세계의 균형이란 실로 무서운 것이어서, 그가 제아무리 가볍게 움직였다고 생각해도 반대편이 출렁거리며 요동칠 수 있다.
그가 전생을 기억해내고 활동해온 기록 - 비록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움직여왔을 뿐이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이들도 무수히 많지 않겠는가.
본인의 격이 높아질수록 그 움직임은 신중해야 하며, 자신이 타인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사람들은 나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으니까. 이 이상은 곤란하지.”
"할아방이 그렇게 만들었잖아?”
"그건 최소한의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서였어. ……그렇게 노려보지 마, 조금 과했다는 건 인정할게.”
메르바에서 자신의 전생의 파편을 모두 회수하고, 끝내는 가이아의 목을 따기에 이르기까지 강신혁은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지구에서의 활동이 과했음을 깨달았다.
어차피 이제 신영에서 생산되는 물건은 대부분 제자인 라헬…… 엘마가 전담하고 있는 수준인데다 이나희도 자본금은 벌 만큼 벌었다며 신영에서 손을 떼려 하고 있으니, 앞으로 차차 진정되지 싶기는 했지만.
이미 그의 능력에 영향을 받아 강해진 이들은 어찌 되돌릴 방법이 없지만 반대로 그들에 대한 통제만큼은 확실하니 혼란은 최소화할 수 있으리라.
"거기에다 이젠 히어로 유니버스가 모든 초인들을 서포트하잖아.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아마.”
"다들 어떻게든 최상급 회원이 되어서 최상급 거래 게시판에서 거래되는 할아방의 무구를 사겠다고 벼르고 있던데.”
"최상급은 어디 쉽나?”
강신혁의 친구이자 그와 길게 붙어 다니며 영향을 많이 받았던 백인하조차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이 최상급…… 즉 이전의 세계 기준에서의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인 것이다.
더욱이 지금 판매되는 모든 무구에는 [거래불가] 인챈트를 확고히 새겨놓았으므로, 그의 무구가 풀려 발생할지도 모르는 혼란은 최소화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건 다른 RPG를 참조해 만든 것이었다.
"흐흥, 할아방도 확고해졌구나.”
"그래서? 부탁이 뭔데?”
잡담을 하다 보니 그만 본제를 잊게 되는 것은 나이 먹은 사람들끼리 대화할 때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강신혁은 나이가 많지 않으므로 결코 본제를 잊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 만나러 가자.”
“빠아!”
"그래그래, 우리 시아.”
여태 얌전히 있던 시아가 부모님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며 강신혁을 불렀다.
과연, 벌써 단어의 뜻을 파악하다니 보통 똑똑한 게 아니다.
강신혁은 시아를 품에 안으며 슈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었다.
“너희 부모님을 내가 왜 만나?”
"왜 그래, 할아방. 원래 한 번 만나보기로 했었잖아, 그리고 이 팔찌도……."
슈가 자신의 왼쪽 팔에 차고 있는 팔찌를 내밀어보이며 눈을 반짝인다.
초월자의 신체 일부를 섞어 만든 탓에 무척 완성도는 높지만 결코 현계한도를 초월한 수준은 아니었던 그 팔찌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팔찌 자체의 특성으로 슈의 인과의 대가를 계속해서 먹어치운 탓에 점점 더 격이 높아져 지금은 강신혁이 만들고 싶어도 함부로 만들지 못하는 수준의 터무니없는 아티팩트로 성장해 있었다.
"이걸 갖기 위해서라면 우리 종족은 뭐가 됐든 대가로 지불할 거야. 그 중에는 여태까지 할아방이 만져보지도 못한 고대, 신대의 물건들도 엄청 많을걸?”
"끄응, 솔직히 흥미가 가기는 한다만……. 그 팔찌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건, 너희 종족 기준으로 보면 괜찮은 일이냐?”
“당연하지! 할아방은 구세주가 될 거야! 종족의 역사를 바꿀 거라니까!”
그야 슈의 동족들이 모두 10살 꼬맹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강신혁이 그들의 역사를 바꾼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게 되겠지.
더욱이 딱 봐도 종족 가운데 연장자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 슈가 히어로 유니버스에 속해 대활약을 펼치고 있는 것도 그렇고, 강신혁도 그들과 접촉해 알아보고 싶은 것은 굉장히 많았다.
슈의 종족이 제공해줄 수 있다는 신대의 재료에 마음이 끌리는 것도 사실이었고.
다만.
"그것뿐이야?”
"응?"
이제는 충분히 ‘여인’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성숙한 매력을 뽐내는 미소를 짓고 있던 슈의 얼굴에 아주 살짝 금이 갔다.
"정말로 그것뿐이야? 왜 콕 집어 너희 부모님한테 데려가려고 하는 건데? 혹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냐?”
"에, 에이. 아니야, 그런 거. 할아방! 내가 할아방을 속이기라도 한다는 거야? 나는 그런 사람 아니야!”
그렇지, 그런 사람은 아니지.
그러니까 지금도 이렇게나 그의 눈길을 피하며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겠지!
"일단 묻는데, 어떻게 만나러 가는데?”
"오, 좋은 질문이야! 일단 우리 종족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설명부터 해야 하는데, 거기는 저번에 갔었던 카이랄의 세상처럼 외부와 단절된 세계거든?”
“뭐 대층 예상은 했었어.”
단절된 차원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만약 그녀의 차원이 단절된 것이 아니었더라면 당장 그녀를 포함한 그녀의 종족 구성원 전부가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세상으로 들어가는 구멍이 가끔씩 열려서 그때마다 외부인도 들어갈 수가 있게 되는데, 딱 그때가 가까워져오고 있거든!”
"그래서 나한테 말을 건건가. ……응?”
“왜?”
"그럼 들어갔다가 나오는 건 어떻게 하는 건데?”
“난 또 무슨 걱정을 하나 했네.”
슈가 피식 웃으며 안심하라는 듯 엄지를 세워보였다.
"우리 종족이 인과를 조종하는 건 알지? 어차피 우리 차원 안에 있을 때는 시간의 흐름이 거의 의미가 없어. 그러니까 구멍이 열리는 순간의 시공에 간섭해서 오히려 과거로 여행하는 것도 가능해!”
"즉 아무 때나 나갈 수는 없다고.”
"얘기가 그렇게 되나?”
아무렇지 않게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이야기한 건 놀랐지만, 그녀의 말을 종합해보면 결국.
강신혁을 보쌈해가겠다는 얘기였다.
물론 강신혁은 단절된 차원에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의지로 게이트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므로, 결국 그녀의 고향으로 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