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 Extra Chapter 1. VIP 회원정보 열람 - 1 >
아직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 날을 기억한다.
눈앞에서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는 그를 도망치게 하고 자청해 미끼가 되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던 강신혁은 그저 무너진 폐허 건물의 틈새에 숨어, 민간인을 구출하러 온 초인이 그를 발견할 때까지 숨을 죽이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초인협회가 미숙하던 시절이었고, 한국의 3차 대역류는 인류 역사상 열 손가락에 꼽히는 재앙이었다.
SS랭크는커녕 S랭크만 되어도 한 나라를 대표하는 초인으로 꼽히던 시절.
전력은 부족했고, 사람들의 인식도 아직까지 안이했으며, 몬스터들은 지금과 변함없이 악랄했다.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것도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당시 히어로 유니버스가 완전했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강신혁뿐만이 아니라 그의 부모님까지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두 분 다 살아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인 전력은 무한하지 않기에 필시 다른 곳에서 어떤 형태로든 희생은 일어났을 것이다.
세상은 완벽하지 않기에,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설령 히어로 유니버스를 만들어낸 주체인 강신혁이라고 해도 거기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역시 신혁 씨가 맞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그때의 모습이 남아있네요.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거든요, 당시 근처에 C급 몬스터가......."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오늘 만남 즐거웠습니다. 이만 돌아가 보시죠.”
"아니, 잠깐만요. 정말 확실합니다. 그때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로 진짜 기적적으로 아이가 들어갈 만한 틈이 있었잖아요? 거기가 어디였더라, 분명히 혜화동에서 오크 늠들이……."
"돌아가셔도 될 것 같네요.”
“아, 넵……."
강신혁과 그의 가족이 머무르는 종로구의 저택에 마련된 응접실에서.
나이를 보면 한 40대쯤 되었을까 싶은 중년의 초인이, 냉정한 축객령에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쉬며 자리를 비웠다.
한숨을 쉬고 싶은 건 난데 말이지, 강신혁이 작게 투덜거리며 제 어깨를 주물렀다.
그 손을 치워내고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 이가 있었다.
“어깨가 뭉쳤나요, 모루? 제가 주물러드릴게요.”
"아……."
발걸음도 내지 않고 등 뒤로 다가온 츠쿠요가 조물조물 그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어째 근육을 풀어주려는 움직임보다는 구애나 애무의 성격을 띤 움직임으로 느껴져 기분이 껄끄러웠다.
그리고 그녀가 하는 말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일이 잘 안 풀렸나보죠, 하지만 괜찮아요. 모루, 쌓인 게 무엇이든 제게 풀어주세요. 제 몸 어디에든……."
- 불여우가! 불여우!!
은근슬쩍 그의 등에 밀착해오는 츠쿠요의 풍만한, 특정한 신체부위의 감촉을 느끼며 강신혁은 미세하게 인상을 썼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관리자의 불여우 콜이 시작되지 않았는가.
“……츠쿠요, 당신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원래 세상에는 안 돌아가 봐도 괜찮아?”
"모루의 곁이 바로 제가 있을 곳이랍니다. 겨우 동등한 격이 되었는걸요, 더는 떨어지지 않을 생각이에요.”
- 불여우우우우우!
강신혁은 생각했다.
이 스토커는 위험해도 보통 위험한 게 아니라고.
심지어 함부로 쫓아낼 수 없는 존재라는 시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내가 없는 동안 서울을…… 크게는 지구를 지켜준 은혜도 있고. 아주 교묘하게 변명거리를 만들어놨단 말이지.’
어쩌면 가이아와의 일전을 치르기 전, 지구를 찾아와 머무르고 있던 것조차 모두 지금 이 순간을 위한 포석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츠쿠요 혼자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어쩌면 인과의 힘을 지닌 슈와 합작했을 가능성도…….
그래도 마냥 츠쿠요의 접근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었다.
강신혁도 엄연히 전생의 기억을 모두 수습해 전생의 강철 같은 정신력을 되찾은 초인이었고, 무엇보다도.
"안 떨어져?”
"어머나.”
예고도 없이 날아든 황금의 번개가 츠쿠요의 몸에서 피어난 검은 불꽃과 부딪혔다.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물러설 수밖에 없는 충격량.
초월자인 츠쿠요도 어쩔 수 없이 몸을 물려야 했다.
"흥, 하여간 불여우.”
"누가 누굴 보고 할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은아.”
강신혁에게서 순간적으로 떨어져 나온 츠쿠요의 빈틈을 단숨에 메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신은아였다.
강신혁에게 딱 달라붙어 츠쿠요에게 이를 드러내는 신은아의 모습은 도무지 아이를 낳은 엄마의 얼굴이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녀도 정말이지 성장하질 않는다. 관리자가 처음 불여우라는 말을 누구에게 배웠는지 이제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 충분하겠지.
"여보, 괜찮아?”
츠쿠요와 으르렁거리던 신은아가 강신혁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를 보며 일순간에 표정을 확 바꾸었다.
중국의 변검술이라도 익힌 줄 알았다.
"지금은 안 괜찮을지도 몰라.”
"역시 그 사기꾼 때문에.”
응접실의 창문으로, 저택에서 쫓겨나 정원을 쓸쓸히 되돌아나가는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까 그 중년의 초인, 아니…… 지난날 한국의 3차 대역류 당시 그를 구출한 장본인이라고 주장하던 사기꾼.
그 사기꾼의 그림자를 쫓는 신은아의 황금색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하지만 지금 기분이 안 괜찮은 건 사기꾼 때문이 아니라 눈앞에서 으르렁대는 당신들 때문인데.
강신혁은 굳이 그 말은 하지 않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더는 못 참아. 거짓말을 하는 놈들 모두 초인 면허를 박탈하든가 해야지……!”
"어쩌면 본인은 정말로 나를 구출했다고 믿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까놓고 말해서 당시의 내가 그렇게 눈에 띄지도 않았을 테고, 적어도 저 초인이 그 당시 현장에서 구출작업을 하고 있던 건 사실일 테니까.”
"아뇨, 모루는 분명히 그때부터 눈에 띄는 미소년이었을 게 분명해요.”
갑자기 끼어든 츠쿠요의 말에 신은아가 눈을 샐쭉하게 떴다.
“츠쿠요 당신은 얼굴은 안 보는 주의가 아니던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우연히 절세의 미남이었을 뿐이랍니다.”
그거 완전히 로리콘들이 자주 하는 변명이잖아.
하지만 츠쿠요의 경우 이걸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
"실제로 전 모루와 얼굴을 보기도 전에 그와 사랑에 빠졌는걸요.”
“‘그에게’겠지. 처음부터 끝까지 짝사랑.”
"감히 나와 모루의 사랑을 왜곡하다니 은아 당신이라도 용납할 수 없……."
"둘 다 적당히 해.”
어느덧 2차전에 돌입하려 드는 두 사람을 떼어놓고 강신혁이 선언했다.
"이제 그만 찾아야겠다. 이만하면 수소문할 만큼 했어.”
"하지만 찾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아마 죽었을 거야.”
강신혁이 툭 내뱉은 말에 츠쿠요와 신은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두 사람이 난감해하는 모습에 강신혁은 어깨를 으쓱이곤 대꾸했다.
“처음부터 그럴 거라고 예감은 하고 있었어. 세상일이 드라마처럼 돌아가지 않는 것도 흔한 일이지."
어렸을 적 도움을 받은 은인과 훗날 재회해 은혜를 갚는다.
실로 드라마틱하지만, 그래서 더욱 실제로 보기는 힘든 일이기도 하다.
나만은 다를 것이라 생각해도 실제론 이렇게…….
강신혁은 덧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리고 이제 어떤 식으로든 정리는 됐어. 그러니까 이걸로 끝.”
"어…… 음…… 침실, 갈까?”
"당신은 위로를 그런 식으로밖엔 못 해요?”
강신혁은 지금 이 순간만은 츠쿠요에게 공감했다.
신은아의 성격이 달라진 것은 좋지만 달라진 성격도 썩 성숙하지는 않다는 것이 요즘 강신혁을 고민게 하는 화두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단절된 세계에서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것이 원인 중 하나인 듯한데…….
"애들은?”
"슈가 보고 있어.”
강신혁의 질문에 즉답하는 신은아.
슈가 클레어와 신은아가 낳은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이 저택에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츠쿠요가 오직 강신혁과의 관계에만 집착한다면, 슈는 강신혁과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과의 관계…… 즉 가족의 유대와 같은 것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곤 했다.
어쩌면 그녀의 종족이 타고난 능력과 관계된 것이 아닐까 막연히 상상할 따름이다.
여하튼 슈는 강신혁의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고, 가능하면 늘 녀석들과 함께 있으려고 했다.
"애들 보러 갈까?”
"음…… 아니, 지금 가면 오늘은 못 나가게 될 것 같으니까. 다녀와서.”
"어디 나가려고?”
"납골당.”
"같이 가.”
츠쿠요가 강신혁의 기분을 감지하고 조용히 물러나는 것과는 달리 신은아는 그것을 알면서도 굳이 그와 함께하려 했다.
오늘은 클레어도 일하고 있고 해서 혼자서만 다녀오려고 했는데…… 신은아의 곧은 눈빛을 보고 있으면 혼자 가겠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 같이 가.”
"응.”
- 정말 눈치가 없는 사람이네요.
‘아니, 눈치를 안 보게 된 거지.’
- 이쪽이 더 최악인 것이 아닐까요? 딸과 아빠의 오붓한 데이트를 방해하다니…….
‘관리자도 날 혼자 놔둘 생각은 없구나, 그러니까.’
자신을 창조하는 데 일조뿐이라, 히어로 유니버스 시스템을 보관하는 세상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관리자의 신은아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냉철하기 그지없다.
아니, 그나마도 아니었으면 관리자는 신은아가 강신혁과 함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리라.
"모루, 저녁엔 제가 맛있는 것을 준비해놓을게요.”
"그래, 고마워.”
그는 츠쿠요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보이곤 신은아와 함께 집을 나왔다.
도보로 30분 거리에 대형 길드 회관으로 성장한 신영이 위치하고 있지만, 잘못 발을 들였다가는 그의 관심을 받길 원하는 어린 초인들에게 시달리게 될 터, 공식적인 일정이 아니라면 신영에 갈 일은 없다.
“종로구에 있지?”
"응."
그의 부모님이, 3차 대역류 당시 희생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셔진 곳.
사실 자주 찾아뵙지는 못했다.
여태까지는 온갖 쓸데없는 후회나 집착 따위의 감정 탓에 온전히 두 분을 마주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코 해소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가슴 속에 꾸준히 남아 버티고 있다고 해도, 이젠 그것을 받아들인 채 부모님과 얼굴을 마주 할 수 있었다.
"애들 얘기도 해드리고, 할 얘기 많겠다. 애가 애를 낳았다고 기막혀하실 거야.”
"응."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신은아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거기 갔다가, 스텔라 보육원도 갈 거야?”
"어떻게 알았어?”
"그냥 그럴 것 같아서.”
강신혁의 의중을 헤아리는 데 성공한 신은아가 잘난 체하며 그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하듯이 말을 덧붙였다.
“저번에 혼자 찾아뵀었는데 수녀님이 엄청 잘해주셨다? 선물도 드렸는데 무지 좋아하셨고, 애들도 다 과자 맛있게 먹었고,또......."
그러고도 한참을 자기가 얼마나 보육원에서 잘 처신하고 왔는지를 떠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강신혁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속내가 빤히 보이는 행동이며 말인데 밉지가 않으니 과연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면 틀리지는 않겠다 싶다.
"고마워.”
"뭐가?”
"사랑해줘서.”
"와……!”
순간적인 충동을 이기다 못해 그만 시공이 오그라드는 말을 내뱉어버린 강신혁이 후회하는데 신은아는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나도 고마워, 사랑해……!”
"그래, 그래.”
“……둘째 만들까?”
"왜 은아…… 여보랑은 무슨 말을 하든 종착점이 똑같은 거야?”
"그야…… 헤헤.”
말없이 달라붙는 신은아.
강신혁은 그저 웃고 말았다.
그때 품 안에서 작은 물건이 꼼지락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야누스와 만나 돌려받은 헤어핀, 자장가.
처음엔 자신의 헤어핀을 영영 잃어버리고 만 신은아에게 줄까 했지만 신은아는 더는 그런 것에 집착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녀가 낳은 어여쁜 딸아이, 시아가 조금 자라나면 선물로 주기로 했다.
하지만 문득, 한 아이의 얼굴이…… 핀을 머리에 꽂은 아이를 보며 환하게 웃던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
"왜?”
"아니, 괜찮아. 가자."
아직 정리하지 못한 감정이 남아있지만.
이것마저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게 인생이 아닐까.
짧은 상념을 뒤로 하며, 뇌리에 떠오르는 기억 속 얼굴을 뒤로 하며.
강신혁은 신은아와 함께 거리를 걸었다.
@@@
그리고 츠쿠요는 완벽하게 부엌을 점령했다.
"아니, 오늘은 내 차례라니까? 기껏 새로운 레시피를 배워왔는데……!”
"오늘은 양보할 수 없겠네요. 아시겠어요, 연금술사? 여자에겐 물러날 수 없는 순간이 있답니다.”
“넌 부외자잖아!”
클레어의 주장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히 주방에 버티고 서서.
"오늘 모루는 제 요리를 필요로 할 거에요. 그러니 용서해요.”
"하, 당신 진짜……."
수제요리로 시작해 남편을 애교로 녹여 침실로 끌고 가는 필살(부작용 - 아이가 태어난다.)의 풀코스 레시피를 준비한 클레어가 무슨 말에도 주방에서 비켜날 생각을 하지 않는 츠쿠요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 살랑거리는 아홉 개의 꼬리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자기한테 다 이를 거야. 그이 앞에서만 철저하게 가면을 쓰고 말이야, 거짓말쟁이도 이런 거짓말쟁이가 없다니까.”
“푸훕. 맞아요, 저는 거짓말쟁이랍니다.”
자신을 매도하는 클레어의 말에 어딘가 웃긴 부분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츠쿠요는 웃음을 터트리며 그 말을 긍정했다.
"정말이지 지독한 거짓말쟁이.”
얼굴을 보기도 전에 사랑에 빠졌다니, 완벽한 거짓말이다.
그래.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