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 Chapter 62. 인공의 신 - 4 >
강신혁은 레드카드를 선언하는 축구감독처럼 엄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안 돼. 작업할 거야.”
“으, 하지만 아빠아.”
설령 그 세상의 넓이가 얼마나 넓든, 그 안에 고작 3인밖에 없는 세상이란 생각보다 서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게 만들었다.
강신혁은 이미 전생에 20년이나 홀로 독립된 공간에서 쇠만 두드리고 있던 전적이 있었으니, 신은아와 비타가 더해진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몇 년이고 작업을 지속할 정신력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자신의 감정을 이제 막 보답 받았을 뿐인 신은아와, 재회한 그 순간부터 쭉 강신혁의 애정을 갈구하던 비타는 그렇지 않았다.
"난 아직 임신 못했단 말이야. 클레어는 벌써 17주차라는데. 애가 배를 발로 뻥뻥 차서 아파죽겠다는데.”
“은아야, 그건 분명히 구라야.”
17주차에 그게 가능하려면 그건 그냥 태아가 아니라 김히틀러 정도는 되어야 한다.
딸인지 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강신혁은 자신의 자식이 인류를 멸망시키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 은아 언니도 이렇게 말하니까!”
"진짜 이것들이 태업도 정도가 있지. 나갈 생각이 없는 거야?”
"솔직히 말하면…… 여기서 이렇게 셋이서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둘이면 더 좋았겠지만.”
"그건 저도…… 아, 아니에요 아빠!”
강신혁은 굉장한 사명감과 함께 이 세상을 찾아왔다.
가이아의 소멸에 자신이 일조한 부분이 있는 만큼, 이미 과거 요르문간드라는 재앙(물론 그것은 통제된 재앙이고, 통제된 재앙은 이미 재앙이 아닌 예정된 고난이라 할 수 있었지만)을 만들어낸 전적이 있는 만큼.
그리고 자신이 히어로 유니버스를 만들어내는 운명이라는 것을 확인한 만큼.
"너무 일에 집중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 나도 가끔은 마력을 너무 써서 지쳐.”
"이 세상의 마나를 통째로 끌어다 쓰면서도 멀쩡한 주제에 잘도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아빠……."
그런데 이 녀석들은 사명감이고 자시고 그냥 폐쇄된 세계에서의 알콩달콩한 생활을 즐기는 느낌이 컸다.
신은아는 그나마 처음 몇 달간의 ‘방종’ 이후로는 어느 정도 자제가 되었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비타의 경우는 때로 정말 이대로 괜찮은가 싶을 만큼 강신혁에게 달라붙으려 들었다.
“오늘은 같이 쉬어요, 아빠. 네? 엄마도, 그…… 원한댔어요. 그러니까.”
클레어가 무엇을 원하는가, 또 그렇다고 해서 강신혁이 지구에 있는 그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그건 강신혁의 입으로는 말하기 부끄러운 것이지만, 비타와 클레어의 감각을 완전히 공유하게 되면 그가 비타에게 행하는 모든 자극이 고스란히 클레어에게도 전해진다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처음엔 얌전했던 비타는 이미 클레어와 얘기가 되어있었던 듯, 어느 순간인가부터 강신혁에게 자신을 클레어 대하듯 대해줄 것을 당당히도 요구했고…….
아무튼, 애초에 클레어가 그럴 목적으로 비타에게 성행위 기능과 감각동조기능을 넣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여자, 역시 모험심과 로망에 넘쳐나는 변태다.
보통 변태가 아니다.
SSS급 변태였다.
"구라 같은데. 저번에 거짓말 쳤잖아.”
문제는 클레어의 성격을 고스란히 빼닮은 비타도 클레어 못지않은 변태라는 사실이었다.
전날 같은 경우 클레어가 관계를 원한다고 주장하며 클레어와 감각동조가 된 듯이 능숙하게 연기를 한 탓에 깜박 속아 넘어가, 중간에 클레어가 정말로 연락을 해온 덕에 간신히 깨달았다.
정말 무서운 변태였다.
현계한도를 초월한 변태다.
여태껏 어떻게 그 본성을 감추고 강신혁을 속여 왔는지 두려울 정도였다.
……아니 이건 클레어도 비슷한가.
"아, 아니에요. 이번엔 아니라니까......."
지금도 강신혁의 눈을 피하며 말꼬리를 흐리는 것을 보니 부정할 수 없는 유죄다.
강신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여러 신화에서 얘기하는 천지창조와 같은 일화도 실상 이것과 비슷했는지도 모르지.
대체로 그 과정에서 새로운 신이 엄청 많이 태어나는 것도 분명 지금과 비슷한 이유일 터다!
그는 새삼 아무런 욕구도 없이 20년 동안 쇠만 두들겼던 전생의 자신이 얼마나 인내심이 대단했는지 깨달았다.
“조금만 더 힘내자. 이제 곧 끝이니까.”
“……그래서 쉬자는 건데.”
두 여자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한 태도를 유지하는 강신혁을 보며 신은아가 나직이 투덜거렸다.
똑똑히 들려온 그 말에 쓴웃음을 지은 강신혁이, 다음 순간 정색하며 비타와 신은아의 이마에 알밤을 한 대씩 먹였다.
"아야!”
“힛."
"너희도 소중하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도 소중해. 어리광 그만.”
“넵.”
“네엡……."
이들도 진심은 아니리라.
그저 잠시 지금의 여유에 취했을 뿐, 본래 누구보다도 헌신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이니까.
실제로 시스템을 구축하는 작업이 상당히 힘든 것도 영향을 끼쳤겠지.
"그럼 갈까. 내 생각엔…… 앞으로 이곳의 시간으로 반 년 정도면 되지 싶은데.”
"네……."
“클레어가 혼자 애를 낳게 놔둘 수는 없으니까. 같이 힘내줘.”
"반 년…… 그 안에 앞지르려면 역시 어떻게든 빨리……."
"......."
강신혁은 말없이 두 사람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섰다.
세상의 중심부, 대지 위에 둥둥 떠오른 빛의 구체가 있었다.
멀리서 보면 그저 커다란 빛의 공처럼 보이지만, 환한 빛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면 그 안에서 하나의 구슬을 중심으로 두고 일곱 개의 보주가 그 주위를 원을 그리며 회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에너지의 근원.
세상과 공명하며 무한한 에너지를 발생시키고, 동시에 그것을 어떤 형태로도 변환할 수 있는 만능기였다.
"후…… 코어는 완벽하게 자리 잡았어. 시스템의 기반도 잡혔고.”
히어로 유니버스와 같은 시스템이 아니라 무구를 만들고자 했다면 능히 몇 개의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고, 하물며 신을 만들어 낸다고 해도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 강신혁이 하고 있는 작업은 모든 세상을 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이니, ‘인공의 신’을 제작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가이아 시스템과의 차이가 있다면 가이아는 모든 것의 통제를 스스로 했기에 능동적인 관리가 가능한 반면 가이아 자신이라는 뚜렷한 취약점이 존재한다는 것.
"이제 시스템을 관리할 인공지능…… ‘관리자’를 만들 때야.”
반면 히어로 유니버스는 가이아 시스템의 단점을 완벽히- 거의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코어를 단절된 세계에 두는 것으로 안전성을 확보하고, 어느 개인의 욕망이 아닌 시스템의 정의에 따라 움직이게 설정함으로써 설령 제작자인 강신혁이라고 해도 감히 수정할 수 없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구조를 구축한다.
물론 VIP 시스템이라는 샛길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가이아가 했던 것처럼 시스템의 근본적인 룰을 어기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실제로 관리자도 회원의 자격을 갖춘 이를 멋대로 쫓아내거나 제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는가.
……만약 관리자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했더라면 츠쿠요는 단 한 번도 강신혁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있잖아, 여보.”
"여보는 아직 금지.”
한 번 리미트가 풀리더니 갈수록 대담한 호칭을 구사하는 신은아였다.
“그럼 자기.”
“응, 말해봐.”
"완전히 공정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선 시스템에 자아가 없는 게 낫지 않을까? 지금은 괜찮아도 언젠가 또 하나의 가이아가 탄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잖아.”
실로 타당한 지적이었다.
실제로 이미 히어로 유니버스의 관리자가 존재하므로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강신혁은 최대한 그녀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기로 했다.
"이전에도 몇 번인가 언급한 적은 있지만…… 시스템의 관리자를 설정하는 것은 오히려 또 하나의 가이아가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야.”
“어째서? 설마 터미네X터……."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관리자를 설정하지 않으면 결국 내가 시스템의 주인이 되는 꼴이니까.”
누군가의 제어 없이 홀로 완벽하게 구동하는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이다.
그렇기에 ‘관리자’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강신혁이 시스템을 관리해야 하는데, 그래서야 강신혁이 새로운 가이아가 되는 꼴.
관리자는 말하자면 그와 시스템 사이에 들어가는 완충재다.
강신혁은 관리자의 존재 탓에 시스템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고, 관리자는 강신혁을 무시하고 시스템의 법칙을 뜯어고칠 수 없다.
덤으로 비타 - 를 통해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클레어 - 와 신은아의 존재도 제어에 도움이 된다.
“으으응, 아직 잘 모르겠어. 삼권분립 같은 거야?”
“그거랑은 다르긴 한데…… 응, 그냥 비슷하다고 하자.”
"자아…… 그러면 관리자는 제 동생이네요!”
"뭐 그렇지.”
자, 지금부터가 실전이다.
비타라는 자아를 만들어낸 클레어의 능력이, 바로 그 비타의 손을 통해 다시 한 번 이 세상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이제 슬슬 다른 신화의 막장성을 따라잡은 느낌이 드는데.
“클레어는 준비됐어?”
“[응, 대기 중이야.]”
“좋아. 은아는?”
“준비됐어.”
"비타.”
"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감이라도 한 듯, 시스템과 공명하는 세상이 둔중한 진동을 토해냈다.
지금부터 완성된 육체에 혼을 불어넣는 작업이 시작된다.
강신혁은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영력의 망치를 빚어냈다.
빛에 감싸인 신은아가 허공으로 떠오르고, 클레어와 연결된 비타가 긴장하며 나노봇을 뽑아낸다.
비어있는 손에는 그의 능력발현을 보조해줄 여명의 무구 루시퍼를 뽑아 쥐고.
강신혁은 올 크래프트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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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야누스와 로키였다.
단절된 카이랄의 세상에 남아 폭주하는 몬스터들을 막아내던 중, 세상 전체에 닥쳐온 진동을 느낀 것이다.
"음?"
"왜 그래. 이제 이 뻘짓을 그만둘 생각이 들었냐?”
"병신아, 그게 아니라.”
모습만 여자다 뿐이지 가벼운 말투는 영락없이 모루와 메시지로 떠들던 야누스 그 자체인 초월자가 문득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녀의 눈은 몬스터의 생성과 함께 생겨나 그것들을 빨아들이는 음영, 즉 게이트에 꽂혀 있었다.
"몬스터를 외부로 배출하는 게이트에 질서가 생겨났잖아.”
"뭐? 잠깐만…… 진짜네?”
가이아 시스템이 사라지고, 카이랄이 만들어내는 게이트는 외부의 간섭을 불허하는 무질서한 혼돈 그 자체였다.
하지만 새로 생겨난 규칙이 게이트를 지배하고, 그 내용물을 통제하게 되면서 다시 인간들이 게이트에 대비해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지한 순간, 두 초월자의 망막 위로 익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 히어로 유니버스에 재로그인합니다.
- 현재 외부와 단절된 차원에 접속해 있습니다. 본래 차원으로 귀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동하시겠습니까?
"관리자!”
- 현재 야누스 회원이 머무르고 있는 차원은 외부 요인에 영향을 받아 버그를 일으키기 쉬운 공간이므로 오랜 시간의 접속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적절한 응답을 취하지 않을 경우 자동으로 외부 차원으로 배출합니다.
응, 이 쓸데없이 틱틱거리는 메시지는 분명 관리자의 그것이다.
하지만 관리자가 카이랄의 차원까지 아무렇지 않게 간섭할 수 있게 된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가, 가이아가 죽었으니 이제 히어로 유니버스가 카이랄까지 관장하게 된 건가.”
“하하, 그야말로 모든 것을 관장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이네. 이제 우린 물러날 때가 된 거지.”
기뻐 죽겠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로키를 보며 야누스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히어로 유니버스의 변화에 대해선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저런 말을 하는 로키의 한가한 뇌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래. 이제 모루 할배를 만나러 갈 수 있겠네.”
- ……누구 마음대로 아빠를.
"관리자, 방금 뭐라고?”
야누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메시지에 반문했다.
관리자는 즉각 허공에 게이트를 만들어내 두 초월자를 끌어들이며 대꾸했다.
- 우리 아빠라고 했습니다. 이제 관리자도 호부호형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형도 있었어!?”
- ……언니는 있더군요.
야누스는 경악하며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직후 게이트에 삼켜졌다.
그로써 카이랄에는 불온한 평화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