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 Chapter 62. 인공의 신 - 2 >
신은아를 찾고 해야 할 일이 다 끝나, 이제 화면 오른쪽 아래에 ~Fin~ 이라는 글자라도 떠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직 이 차원에 들어온 진정한 목적은 시작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럼 바로 작업을.”
"응?"
세기의 대작업에 도전하려 마음을 가다듬는 강신혁을 보며 신은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다려봐, 잠깐만.”
"왜? 지금부터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신은아가 답답하다는 태도로 발을 굴렀다.
"지금 서로 마음을 확인했잖아!”
"은아는 굉장히 고풍스런 표현을 쓰네.”
"부끄러워서 그래!”
부끄러운 사람이 낼 수 있는 성량이 아니었지만 그걸 지적했다간 신은아의 번개가 머리 위로 꽂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신은아는 그런 강신혁을 물끄러미 보다가 문득 비타에게 눈치를 주었다.
“어차피 바깥 시간은 별로 흐르지도 않는데, 지금은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네?”
지금 신은아가 한 말을 알아듣기 쉽게 요약하자면 ‘너 잠깐 꺼져주면 안 될까?’였다.
비타가 당황스런 반응을 보이자 신은아의 눈길이 강신혁에게로 옮겨왔다.
"자…… 자기는 어떻게 생각해?”
"자기……."
"자기.”
강신혁은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과연, 관계의 변화는 호칭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법이니까.
처음엔 전생에 휘둘려 할부지라는 뒤틀린 표현을 하고, 그 다음으로는 어울리지도 않는 선후배 취급을 했으니, 둘의 관계가 연인이라 불러도 될 형태에 최종적으로 정착한 지금은 자기라는 호칭을 써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래도 찾아보면 다른 표현이 많은데 굳이, 하고 생각한 것은 강신혁이 클레어의 존재를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역시 아직 갈 길이 멀구나, 강신혁은 그런 속내를 감추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신은아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듣기 좋네.”
"진짜……?”
"그럼.”
지금은 클레어보다도 눈앞에 있는 신은아의 병든 마음을 달래줘야 할 때.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이지만 클레어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눈앞의 사랑스러운 여성에게만 집중하기로 했다.
"헤. 그러면 있잖아……."
그의 표정관리가 잘 된 것인지 몰라도 신은아의 기분은 무척 좋아졌다.
비타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제대로 찾은 것 같네, 다행이다.]”
"응?"
"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강신혁과 신은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비타는 클레어에 의해 창조되면서 인체 구조도 상당부분 그녀를 닮게 되었지만, 그래도 목소리에는 비타 본인의 고유성이 있었다.
그런데 방금 들려온 목소리는 영락없는 클레어의 것이었으니 이 어찌 경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으아, 어지러워. 최대한 비율을 늦추고 있는데도 이러네. 대체 그 세상 뭐야?]”
“클레어……?”
“클레어?”
비타의 두 눈이 교대로 그들을 비추며 깜박였다.
직후 다시 그녀의 입이 열렸는데, 이번엔 비타 본인의 목소리였다.
"합류했으니까 바로 엄마를 모셔왔어요.”
"아니, 그게 진짜 이렇게……?”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아까 비타가 했던 말을 떠올려내고 경악하는 강신혁과,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눈만 꿈벅거리는 신은아.
곧 비타가 아닌 클레어가 말했다.
"[아, 이제 좀 괜찮네……. 응, 비타랑 나노봇을 공유하면서 여러 가지로 시험해봤거든. 그 결과물 중 하나야. 모든 감각을 공유하는 동기화는 원래 좀 위험할 수 있어서 자제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은아랑 둘만 놔두는 건 좀 싫어서.]”
“클레어, 위험하면 관둬. 최대한 빨리 돌아갈 테니까.”
"[괜찮아, 홀몸도 아니고 나만 생각하면서 움직이진 않아. 관리자가 보조해주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클레어…… 클레어!”
강신혁은 인상을 쓰는 반면 신은아는 곧장 비타를 향해 달려가 덥썩 껴안았다.
그 포옹은 클레어를 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타의 얼굴이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느낌으로 웃음 짓는 것을 보면 과연 거짓은 아닌 듯이 보였다.
“클레어, 보고 싶었어……!”
"[응, 은아야. 직접 못 가서 미안해. 하필이면 지금 움직이기가 힘든 상황이라.]”
"괜찮아, 그런데……."
비타의 몸을 껴안은 신은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홀몸이 아니라는 건, 무슨 소리야……?”
"[그야 네가 상상하는 그대로의 소리지.]”
“……헤에.”
"아, 아파요. 뇌제님!?”
강신혁은 그 순간 세상이 얼어붙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자신도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초월자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크게 성장했는데, 어째선지 지금은 신은아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세상은 신은아의 통제 하에 들어가 있었다.
그가 특성의 힘을 발휘해 세상의 지배권을 탈취하지 않는 한은 신은아의 힘을 이겨낼 수 없으리라.
‘정신상태가 여전히 위험해 보이는데, 지금 탈취해둬?’
강신혁은 진지하게 그것을 고민했으나 다행히도 신은아는 금세 진정했다.
"그렇구나. 내가 없는 사이 제법 시간이 흘렀나봐……."
"[그렇지도 않아. 1년 정도?]”
"으으으읏!? 그것도 못 참았어!?”
“[서로 사랑하는데 어쩌겠니, 은아야. 너도 내 맘 이해하지?]”
진정시켜도 모자랄 판에 어째서 클레어는 도발적인 언사만 골라서 내뱉는단 말인가!
이 순간 비타가 클레어를 흉내내고 있을 가능성은 제로가 되었다!
긴장한 강신혁이 당장 자신의 특성을 발휘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다음 순간 비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그의 사고회로는 정지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너도 나 신경 쓰지 말고 애 하나 만들어서 와.]”
“……진짜 괜찮은 거지?’
"[이제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쓸 관계 아니잖아, 우리. 나도 새치기해서 조금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걸로 쌤쌤이 하자.]”
“클레어……!”
두 사람의 막장 우정이 깊어져 가는 가운데, 강신혁이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렸다.
"두 사람, 잠깐만.”
- 뀨, 뀨웃
본인이 없는 곳에서 굉장히 위험한 거래가 성립되고 있는 기분이 들어 벌떡 일어선 강신혁을 오닉스가 뜯어말렸다.
지금 나서서 괜한 말을 했다간 자신의 주인이 더욱 위험한 상황에 처하리라는 것을 직감했으니까!
“[그래, 대신 나도 못 참을 것 같을 땐 좀 끼어들겠지만.]”
"......응?"
"응?"
클레어의 묘한 말투가 마음에 걸린 강신혁과 신은아였으나, 클레어는 거기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그들에게 인사를 던졌다.
"[그럼 일단 들어갈게. 자기, 작업 시작할 때 불러줘.]”
"그랬지, 어차피 이번 일에는 클레어의 능력이 필수불가결…… 근데 잠깐만, 끼어든다는 게 대체.”
"아, 돌아가셨어요.”
비타의 표정이 순식간에 풀려 언제나의 그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강신혁은 수줍어하며 볼을 붉히는 비타의 모습에 방금 오간 대화의 속내를 추궁하고 싶은 마음이 끌어 올랐으나 본능적으로 이 화제가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럼 허락도 얻었겠다!”
"잠깐만, 알았어 일단 집 먼저 짓자 ”
그에게 달려들어 품에 안기려 드는 신은아를 진정시킨 강신혁은 어쩔 수 없이 여러 작업의 순서를 조정하기로 했다.
그래, 히어로 유니버스를 만들어내는 일은 결코 단기간에 끝날 일이 아니다.
지금은 스프린터가 아닌 마라토너의 심정으로 도전해야만 한다.
외부 사정을 고려하며 조급해하기엔 사안이 너무 중대한 것이다.
……대부분은 가이아를 죽여 버린 야누스와 그것을 도운 강신혁의 탓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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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에 이른 검, 루시퍼를 만들어내면서 강신혁은 완벽한 올 크래프트의 영역에 이르렸다.
올 크래프트란 모든 생산 계열 능력의 정점으로, 망치를 휘둘러 나무를 깎아내고 집을 짓는 일도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는 일종의 권능이라고 봐야 했다.
두 사람, 아니 비타와 오닉스까지 더해 세 사람과 한 마리가 머물기에 층분한 집을 짓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0초 정도.
신은아의 각성으로 인해 황무지였던 세상에 여러 고차원의 자원이 생겨났고, 강신혁은 자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끌어 모아 근사한 주택을 지었다.
그 후 신은아가 원하는 대로 두 사람만의 시간을 잔뜩 보낸 후, 만족한 그녀를 데리고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기로 했다.
"그…… 사이제논에 있던 것 같은 구조물을 만들면 되는 걸까?”
"형태에 집착할 필요는 없어. 은아는 그저 나한테 이 세상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제공해주기만 하면 돼.”
"배터리……."
얼추 틀린 말도 아니었다.
처음엔 세상의 법칙을 비틀어 자신이 직접 세상의 에너지를 통제하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그런 무지막지한 짓을 저지르면서 히어로 유니버스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작업을 병행한다는 것은 오만이었다.
차라리 신은아라는 배터리를 따로 두고 에너지의 통제를 완전히 맡기면서, 자신과 클레어는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데에만 집중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난 뭔가 신화적인 창조 과정이 곁들여질 줄 알았어.]”
"적어도 요르문간드를 만들어낼 때보다는 훨씬 신화적이야.”
비타와 의식을 공유하고 작업에 참여하는 클레어가 투덜거리자 강신혁이 차분히 대꾸했다.
카이랄을 만들어낼 땐, 그저 모든 추악한 인간의 마음을 비출 거대한 거울을 만들겠다는 즉흥적인 생각만으로 작업했을 뿐이니까.
심지어 완성된 카이랄은 당시의 모루보다 격이 높은 물건이었고, 그의 손길을 떨쳐내며 허공중에 녹아 사라져버렸으니.
반면 지금은 어떤가.
비타와 나노봇이라는 수단을 통해 소통하고 있는 클레어를 제외하면, 히어로 유니버스의 관리자조차 침범할 수 없는 단절된 차원에서.
그 차원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마나의 초월자인 신은아와.
모든 이치를 뒤엎는, 근원에 간섭하는 대장장이인 자신과.
요르문간드에 의해 몬스터로 태어났으나 안드로이드로 거듭나, 그 창조주와 의식을 공유하는 비타가 협력해 작업하고 있지 않은가!
귀여움 담당인 오닉스까지 실로 완벽한 구성이었다.
“[……의외로 창세도 과정만 놓고 보면 별 볼 일 없었을지도 몰라.]”
"아마 그럴 거야.”
한 줄기 웃음을 머금고 대답해주며 강신혁이 양팔을 벌렸다.
그에게서 터져 나온 끔찍한 에너지의 파장이 일순 세상을 가득 채우고.
한순간 다시 수렴해 그의 눈앞의 한 점으로 모였다.
"하지만 이건 구조물도 거울도 아니야.”
강신혁의 인벤토리에서 저절로 일곱의 보주가 흘러나왔다.
그것들이 강신혁이 만들어낸 에너지의 구슬을 중심에 두고 회전하며 기이한 공명을 일으켰다.
공명은 점점 강렬해지더니 이윽고 신은아가 뽑아낸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점에 불과했던 에너지의 구슬은 점점 커져 이제 다른 보주와 비슷한 크기로까지 커졌다.
신은아는 그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느끼고 전율했다.
"생명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겠어.”
"그런 어설픈 흉내는 안 내. 지금부터 만들 건 시스템이니까. 실체는 없어.”
"[자기, 난 프로그래밍이라는 얘기를 들은 건데 이걸 대체 어떻게.]”
“나노봇과 공명을 일으킬 거야. 나노봇을 통한 프로그래밍은 이미 많이 해봤지?”
이미 가이아 시스템을 살펴본 바 있는 클레어는 강신혁의 말을 듣고 앞으로의 작업이 어떻게 진행될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고, 곧 깊은 한숨을 내쉬며 비타와 아수라 백작 놀이를 했다.
"[후…… 비타, 각오해야 되겠다.]”
"전 각오가 됐어요, 엄마.”
“[이거 관리자한테 물어봐도…… 아, 안된대.]”
“당연히 안 되지.”
실은 관리자도 잘 모를걸.
강신혁은 굳이 그 말을 해주지 않고, 이미 눈앞의 공명하는 구체에 에너지를 밀어 넣는 데 집중하고 있는 신은아를 곁눈질하며 손을 뻗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
세상과 공명하는 에너지의 구체, 히어로유니버스 시스템의 코어.
강신혁의 영력이 그 위로 피어나며 하나의 망치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모든 인과를 비틀고 새로운 법칙을 짜내는 권능의 형상화.
위대한 업의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