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 Chapter 62. 인공의 신 - 1 >
그럴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들어서는 순간 강신혁은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초월한 세상이 평범할 리가 없지 않은가.
불어오는 바람이, 뿌옇게 이는 먼지가, 박동하는 대지가 모두 격렬히 그를 거부했다.
간단한 이치였는데, 독립된 세상의 독자적인 규율-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이 세계만의 법도를 무시하고 여전히 외부 세계에 종속된 개체로서 남아 있으려 드는 강신혁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세계의 흐름에 순응하면 그땐 제아무리 강신혁이라 할지라도 자아를 잃고 흩어져 세계의 일부가 될 뿐, 결국은 이치를 거슬러 자신의 존재를 이 세계에 새기는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하면 버티면 된다는 얘기다.
"후욱, 후우우우……."
입이라도 열고 호흡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이 세계의 공기를 흡입하고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상당한 각오를 해야만 했으니까.
다만 강신혁은 영력이 어느 정도 성장하고부터 자신의 신체를 관조하는 것으로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능력을 익혔는데, 그것에 따르면 놀랍게도 그가 이 세상에 들어와 처음 호흡에 성공하기까지 무려…… 두 달 정도가 흘러 있었다.
"아니 미쳤나.”
이런 식이면 신은아를 찾을 때쯤엔 100년 정도가 흐르고, 히어로 유니버스를 완성할 즈음엔 1천년 정도가 흘러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물론 외부 시간의 흐름은 이곳의 흐름과 완전히 유리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었지만 그쯤 가면 자신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할 터다.
'은아는 괜찮을까…… 다루는 에너지의 양만 따지면 나보다 훨씬 나을 테니 괜찮으리라 믿고 싶지만.’
방심하면 언제든 의식을 잃게 되리라.
강신혁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영력을 세상에 넓게 퍼트렸다.
동시에 자신의 특성을 전력으로 활성화해, 세계에 간섭해 이치를 비틀었다.
세계를 조율하는 천룡의 힘이기에 가능한 이적이었다.
‘혼자서 작업하는 건 처음이네.’
세상 전체에 간섭해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을 때려 박는 이 짓거릴 작업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환생하고 나서부턴 설령 혼자서 무언가를 할 때라도 늘 관리자의 존재감을 느꼈는데, 그것마저 차단된 지금은 정말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심지어 아차하는 순간에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이 닥쳐와 그의 집중력을 흩트려놓고, 그의 정신을 녹이려 드니.
외롭기도 했지만, 자신이 아니고선 초월자라 해도, 설령 츠쿠요나 야누스라 해도 버티지 못할 터.
지금은 혼자인 것이 다행이었다.
"후, 후우우……."
아무 것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오직 영력과 파천기…… 아니, 천룡기만을 운용해 버티며 1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도 직접 인지할 수 있었던 시간이 그 정도.
그 무엇에도 제약받지 않는 고유영역을 확보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하지만 고생을 한 보람이 있었는지 그것은 비단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이들을 이 세계의 흐름에서 비껴가게 할 수 있는 권능이 되었고, 그때가 되어서야 강신혁은 비로소 비타와 오닉스를 불러낼 수 있었다.
"아빠, 괜찮으세요?”
- 뀨우뀨뀨?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알아볼 방법도 없는) 나 홀로 투쟁을 하다 비타와 오닉스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강신혁은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고 자신만 신경 쓰고 있는 딸과 애완동물을 적당히 토닥여주며 대꾸했다.
"멀쩡해. 오히려 최고조라 봐야지.”
특성이 성장해 천룡이 되었다지만 정작 가이아와의 대결에선 그 힘을 제대로 드러낼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단절된 세계 안에 들어와 존재를 건 영적 사투를 벌이게 되었으니, 특성에 대한 적응이나 능력의 성장만 놓고 보면 최적의 조건이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이제 은아를 찾으러 가야지. ……아, 나한테서 너무 많이 떨어지지 말고.”
"은아? 여기 그분이 있어요? 하지만 아깐 분명히 야누스라는 분을……."
"아…… 그건 해결됐어. 그러니까 야누스는 내가 생각한 것처럼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세상에 나쁜 놈들이 간섭을 하는 걸 막는 역할을……."
강신혁이 비타가 의식을 잃은 후의 일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얘기해주자 그녀는 아득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온 우주를 총괄하는 가이아 시스템의 주인이 죽고, 강신혁이 그것을 완전히 대체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낼 예정이며, 그것이 하필이면 은아가 있는 단절된 세계라는 얘기를 듣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 뀨우뀨뀨웃!
비타가 정신줄을 놓고 있는 반면 오닉스는 잽싸게도 신은아의 기척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녀석에게 동물적인 움직임을 기대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설마 무슨 훈련받은 군견처럼 신은아의 냄새를 기억이라도 한 것일까?
싶었는데 아니었다. 녀석은 단지 신은아가 몸에 지니고 있던 금속의 흔적을 쫓고 있었던 것이다.
- 뀨우우!
“그래그래, 간다, 가.”
마음 같아선 자신이 직접 찾고 싶지만 이미 ‘고유영역’을 만들어내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썼다.
이 세상은 사물 하나하나, 심지어는 뺨에 부딪히는 바람이나 바닥의 모래 한 알 한 알의 권리나 격 따위가 지나치게 높았기에, 그것들의 저항을 일일이 뚫고 신은아의 존재감을 탐색하는 것은 강신혁에게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직 한 가지에 통달한 오닉스에게는 얘기가 달랐다.
녀석은 등 위로 솟아난 무수한 철의 가시를 마치 안테나처럼 활용해 이 세상의 온갖 금속의 정보를 수집, 분석해가며 강신혁과 비타를 이끌었다.
“황무지 뿐......."
"그 외의 것은 이곳에서 버티지 못하겠지. 삶도 없고 죽음도 없어. 우리가 오지 않았다면 계속 이 상태였겠지.”
“아, 아빠. 수신했어요.”
오닉스를 쫓아 움직이던 강신혁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당연히 비타와 영적으로 연결된 클레어의 메시지를 수신했다는 얘기겠지.
어쩌면 보다 더한 것을 수신했을지도 모르고.
"엄마가 지금, 애가 배를 발로 찼다고.”
"벌써!?”
예상대로 그녀의 메시지였는가, 하고 기대하던 그때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외부와 시간의 괴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서야 정말로 애가 다 크기 전까지 못 돌아갈 수도……!
"농담이래요. 딸만 데리고 데이트하러 간 벌이라고……."
"......."
죄 없는 비타를 째려보니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클레어를 닮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지금 이 상황을 두고 데이트라고 말할 줄이야.
할 수만 있으면 그녀를 직접 불러 따지고 싶을 정도다.
아니, 실은 그냥 보고 싶을 뿐이다.
그래도 그녀와 직접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어, 아주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의식을 받아오는 건, 그분과 합류한 후가 낫겠다고 하세요. 이번만 새치기를 봐주겠다고."
"응?"
그때 그의 마음을 읽어낸 것처럼 비타가 말했다.
의식을 받아와?
그 모호한 표현에 눈썹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비타는 그로부터 딱히 더 설명해주지 않고, 그저 제 뺨을 밝게 물들이며 뭔가 기대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
강신혁은 그 표정이 무척 위험하다고 느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위험한지는 알 수 없었기에 일단 그 화제에 대해 더 얘기하는 것을 피하기로 했다.
- 뀨!
"그래, 찾아냈다고. 그럼 이제 곧이네.”
- 뀨뀨웃!
이 세계는 공간의 개념을 초월한 만큼 넓이가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었고 얼마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지만 강신혁의 고유영역의 수호 하에선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한 걸음 떨어진 곳이라도 세계의 이치를 뛰어넘지 못하면 평생 걸려도 도착할 수 없지만.
설령 세계의 반대편에 있는 곳이라 할지라도, 세계의 섭리를 비틀 수 있다면 순식간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
지금처럼.
- 뀨.......
오닉스가 나직이 울음소리를 내며 멈춘 그때 강신혁과 비타의 발걸음도 동시에 멈추었다.
세상은 여전히 빨간 흙과 투명한 바람뿐이었지만 주위와 결정적으로 다른 요소가, 그러니까 고요한 세상에 난입한 강신혁 일행과 마찬가지로 이질적인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아."
외마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앞에 놓인 것은 거대한 황금의 수정이었다.
신은아는 그 안에 잠들어 있었다.
외부와 자신을 완전히 단절하는 마나의 수정에 갇혀…… 아니, 스스로를 가둔 것이겠지.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이 세계의 흐름에 휘말려버릴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 뀨!
"아니, 넌 이렇게 봉인되어 있는 걸 찾은 거냐?”
- 뀨웃!
오닉스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나섰으면 정말로 오래 걸릴 뻔 했다.
강신혁은 수정안에 갇혀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신은아의 모습을 보며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수정 끝에 그의 손가락이 닿는 순간, 잔잔한 수면에 물방울을 떨어트린 것처럼 파문이 일었다.
신은아가 눈을 떴다.
"이제 나와도 돼.”
강신혁의 목소리가 닿았을까.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인 신은아가 앞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황금의 수정이 무너져 내린다.
세계의 흐름에 휩쓸리는 일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는 강신혁의 눈앞에 있었다.
그제야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는데, 그녀는 강신혁의 고유영역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았다.
“……너, 혼자 힘으로도 버틸 수 있는 거야?”
"응. 혼자 있으면 너무 심심하니까, 봉인하고 있었을 뿐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거……."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틀어막는, 마법적인 이치만 놓고 따지면 강신혁은 평생 가도 이해하지 못할 고도의 봉인.
성능이 압도적인 만큼 제한도 있었으니 바로 외부의 자극이 없는 한 영원히 봉인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자아나 육신이 위험해서도 아니고, 혼자 있으면 심심하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봉인하고 있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혼자는 싫었으니까.”
신은아는 가만히 말하며 한 발짝 더 다가와 강신혁의 손을 붙들었다.
매끈하고 시원한 감촉이 그녀의 존재를 실감게 했다.
"이제 더는 혼자 있고 싶지 않아.”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느낌이었다.
강신혁은 하려던 말을 모조리 집어치우고, 그녀의 손을 마주 감싸며 조용히 말했다.
"늦어져서 미안해.”
"으응."
그의 말에 단호히 고개를 저은 신은아가 어째선지 비타에게 잠시 눈길을 주는가 싶더니, 곧 강신혁의 품에 폭 안겼다.
"이제 안 떨어질 거야.”
"그래, 그러자.”
여태껏 내내 그러길 바라왔던 주제에, 그녀는 강신혁이 수긍하자 살짝 놀란 기색이었다.
"진짜 괜찮아?”
"둘이 얘기 끝났다며. 이 지경까지 와서 쳐낼 만큼 나도 배포가 작은 놈은 아냐.”
“……좀 달라졌어.”
아주 잠시 강신혁의 품에서 떨어져 그의 안색을 살핀 신은아가, 이내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다시 그를 껴안았다.
“으응, 아무래도 좋아.”
그 순간.
강신혁은 세상이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물론 외부와 단절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당장 바람에 섞여있던 싸늘한 공기가 은은한 훈풍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퍽퍽한 붉은빛이던 대지 위로 조금씩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뒤죽박죽이던 시간과 공간의 흐름이 새로 정립되어, 세계의 심장이 규칙적으로 박동하기 시작했다.
"은아야, 너……."
강신혁은 직감했다.
그녀는- 가이아조차 어쩌지 못하는 단절된 세계의 주인이 되어있었다.
그것은 인간이라기보단 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리고 그게 의미하는 바가 있었으니.
"혼자 힘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얘기잖아!”
"응."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신은아를 보며 강신혁은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왜 여태 스스로를 봉인까지 하고 있었던 건데? 내가 혹시나 못 찾아왔으면 정말 큰일 났을 텐데......!"
"아까도 말했잖아. 혼자는 싫다니까.”
지극히 당연한 지적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신은아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한쪽 볼을 부풀리고는 드물게도 삐진 척을 하며 그의 가슴팍에 제 머리를 쿵쿵 들이받았다.
"직접 찾으러 와주지 않으면 돌아가 봤자 의미가 없으니까……."
“……강하게 고백해놓고 지레 겁먹어서 숨어있던 거 아니고?”
“윽.”
“할부지는 싫다고, 그런 말을 했었지.”
“으윽.”
아무래도 정곡인 모양이었다.
정신적으로도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서야 도루묵이지 않은가.
아무리 자신의 반응이 무섭다고 해도 그렇지, 단절된 세계에 홀로 스스로를 봉인해놓고 찾아와주길 기다리다니 대체.......
강신혁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눈길을 피하는 신은아의 이마에 딱밤을 한 대…… 튕기려다, 그만두었다.
"그래, 이제 나도 할부지는 그만두려고.”
"......!"
대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해주었다.
자신의 전생, 다섯 살의 어린 소녀와 만났을 때부터 시작된 대환장파티가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막장으로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