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 Chapter 60. 낳는 자 - 4 >
- 멋진 각성입니다, 회원님!
관리자의 메시지는 그것으로 끊겼다.
지금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도 해야 할 일이 많았던 탓이다.
강신혁은 자신이 열어낸 차원의 문이 무너지지 않게 지키는데 전력을 다해야 했고, 관리자는 최대한 빨리 히어로 유니버스의 VIP 회원들을 그 문 너머로 들여보내야 했으니까.
[모루, 어떻게 자네가 벌써……! 안 돼, 혼란을 조장하다니!]
“가이아 당신이 히어로 유니버스를 이용할 셈이었다면, 반대로 거기에 당할 각오도 했어야지……!”
가뜩이나 상처를 입은 데 더해 강신혁의 능력발현을 돕느라 무리한 야누스는 그에게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칫!”
그때, 무슨 생각에선지 로키가 갑작스레 야누스의 심장을 노리고 대낫을 찍어 내렸다.
그러나 허공에서 솟아난 검은 불꽃이 그것을 부드럽게 받아내 튕겼다.
“츠쿠요……!”
“로키, 설마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나저나 모루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람이 있었네요.”
“그냥 할아방이랑 붙어있고 싶었을 뿐이면서 변명도 잘해요.”
정말로 강신혁의 세상에 머무르고 있던 게 도움이 되었는지 츠쿠요와 슈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두 사람은 VIP 회원 중에서도 강자에 속하고, 설령 가이아라고 해도 쉽게 짓누를 수 없는 이였다.
로키는 더더욱 그랬다.
“야누스에게 납치되었다는 건 파악하고 있었는데, 설마 납치된 장소가 헤일로의 본체가 있는 세상일 줄은 몰랐네요.”
강신혁이 만들어준 - 그리고 그녀가 지구에서 지내는 동안 몇 번이고 재조정을 거친 끝에 처음 만들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된 - 철선을 펼쳐 입가를 가리며, 츠쿠요가 요요히 웃었다.
강신혁에게 기대어있던 야누스는 그녀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츠쿠요…… 오랜만, 히.”
“야누스. 재수 없는 얼굴은 여전하네요. 계집인 척 모루에게 기대는 게 특히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러자 야누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발언을 했다.
“나 원래 여잔데? 카이랄 때문에 생긴 건 남자 쪽이야.”
“어머나, 그건 몰랐어요. 당신을 죽일 이유가 하나 생겼네요.”
[츠쿠요, 그대가 모루를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그가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겁니다.]
츠쿠요와 야누스가 대충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한편’이라는 뜻이 담긴 대화를 길게 풀어 나누고 있던 중, 가이아가 끼어들었다.
가이아의 말투는 또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츠쿠요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전부터 생각했지요. 모루의 능력은 완벽한데 어째서 불균형이 끊이지 않는가. 아무래도 그건 당신 탓이었던 것 같네요, 헤일로. 아니, 이젠 가이아라고 불러야겠죠.”
츠쿠요가 제아무리 대단한 존재라 한들 히어로 유니버스와 관련된 모든 비밀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헤일로의 정체가 가이아라는 것도 그녀는 모르고 있었으며(어렴풋이 짐작은 했던 모양이지만) 야누스가 바로 그 가이아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된 것이다.
착! 철선이 접혔다.
끊임없이 빛을 발하는 점을 제외하면 얼굴이 없는 마네킹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가이아에게 철선을 겨누며, 츠쿠요는 도도하게 말했다.
“가이아, 당신은 너무 욕심을 부렸어요. 공존하고 싶었다면 최소한 히어로 유니버스에는 간섭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전까지는 괜찮은 관리자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당신은 실격이에요.”
[건방지군요. 그대가 처음으로 능력을 얻은 것 또한 내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럴 리가. 제 힘을 얕보고 있나요? 제 능력은 제가 주관한답니다.”
츠쿠요의 등 뒤로 마치 부채가 펼쳐지듯 아홉 개의 꼬리가 솟아났다.
그녀에게서 넘실거리는 짙은 보랏빛의 요기는 마력과도 영력과도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당신은 어디까지나 마력에 기반을 두어 만물에 간섭하고 있을 뿐이죠. 마력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마력을 얻은 존재에 간섭할 뿐. 그러니 당신은 낳는 자가 아닌 관리하는 자에 불과해요.”
[건방진!]
“하물며 마력이 아닌 다른 능력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도 못하죠. 그게 아니라면 어디 제 요력에 간섭해보겠어요?”
그녀의 꼬리가 살랑거린 직후 허공에 검은 불꽃이 피어났다.
빛을 끊임없이 잡아먹는 그 불꽃은 가이아의 공간을 빠르게 침범하며 불어났고, 가이아는 공간 전체를 비틀어 불꽃을 소멸시키며 이를 갈았다.
[츠쿠요!]
“다른 주역들이 오려는 모양이네요. 누가 옳은지는 그들까지 껴서 함께 얘기하는 게 낫겠어요.”
바로 그 순간, 거대한 늑대의 모습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뒤로도 신화에나 등장할 법한 거창한 갑옷을 입고 창을 든 남자와, 강신혁의 손바닥 위로 올라올 만큼 작은 요정, 사람 크기의 매의 형상을 한 자, 빛 속에서도 뚜렷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림자의 형태를 한 자…….
“미랑…… 아스칼딘, 미양, 호루스, 시카투스까지.”
미랑은 처음으로 VIP 회원의 자격으로 강신혁의 차원 퀘스트를 도와주었던 인물이고, 나머지는 채팅으로 여러 번 얘기를 나누었을 뿐더러 차원 퀘스트에서도 함께한 적이 있는 이들이다.
뒤이어 강신혁이 ID뿐만 아니라 본명까지 아는 이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모루, 얼굴 한 번 보기 힘들구나. 결국 내가 이곳까지 쫓아오게 만들다니!”
[도우러 가겠다고 했었지, 모루. 예상보다 긴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때가 왔어.]
“밀리아에…… 콰티까지? 너흰 VIP도 아니잖아?”
“아무래도 관리자가 이 공간에서 버틸 역량이 있는 이들을 전부 소환한 모양이에요.”
츠쿠요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밀리아는 각성을 한 순간부터, 콰티는 그 전부터 한 속성의 극에 이른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빛의 공간에서도 충분히 버틸 역량이 되었다.
특히 그들의 차원에서의 시간흐름이 지구와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강신혁보다 오랜 세월 수련하며 능력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을 터다.
중요한 것은 아마도 저 둘은 무조건적으로 강신혁의 편이라는 사실이다.
[하아, 피곤하게 되었어. 관리자에게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것이지? 이렇게 모여서 시끄럽게 굴 정도인가?]
“관리자에게 듣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난 세상을 전부 태우려 드는 태양을 삼키려 왔을 뿐이니까.”
가이아가 반쯤 기막힌 투로 말하자, 늑대의 형상을 취한 미랑이 으르렁거리며 대꾸했다.
“태양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만물을 비춰주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존재할 가치가 있지. 관심이 지나쳐 지상에 내려오려 든다면 모든 것이 타버리지 않겠는가? 가이아, 당신이 야누스에게 한 일이 바로 그러하다.”
공간이 번쩍였다.
미랑이 끌어올린 기운이 삽시간에 증폭되는 것이 느껴졌다.
가이아는 다급히 그의 기운을 억누르려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이가 하나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이내 그것을 그만두었다.
[오랜…… 아주 오랜 세월 발톱을 감추고 있었구나.]
“히어로 유니버스에 VIP라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였지. 가이아, 너는 몰랐겠지만 말이다.”
“가이아, 당신의 죄악은 그뿐이 아냐.”
미랑의 말에 동의하며 매의 머리를 달고 있는 남자, 호루스가 앞으로 나섰다.
“처음엔 가이아 시스템이 만물을 공평하게 살피고 힘을 북돋워준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건 통제였어. 그것도 못 견딜 일이었는데…… 최근에 당신이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을 알아냈지. 그건 만물에 공평하게 주어져야 할 마나의 흐름을 당신이 멋대로 비틀었다는 거야.”
[.......]
“그로 인해 마나의 혜택을 얻지 못한 이가 존재해. 타고난 영력이 아니었다면 무사히 성장할 수조차 없었겠지.”
기분 탓이 아니다.
호루스는 분명히 강신혁을 돌아보며 그 말을 했다.
“그에게서 구입한 무기를 곰곰이 뜯어보고 나서, 마나는 조금도 깃들어있지 않은 무구를 영력이 강화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이상하지 않아? 마나를 낳은 것이 당신이 아닐진대, 어찌 인위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틀어막은 건지.”
야누스도 그런 말을 했었다.
가이아가 강신혁에게서 마나를 앗아갔다고.
강신혁이 답을 구하는 눈으로 빛의 마네킹을 직시하자, 얼굴이 붙어있지 않은 탓인지 그것은 실로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며 대꾸했다.
[그것은 모두 모루를 위함이었지. 그의 각성을 돕고 영력의 빠른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였어.]
“뭐……?”
그래. 놀랍게도 긍정한 것이다.
강신혁이 마나를 다룰 수 없는 것이 가이아 시스템의 통제 때문이었다고?
“중간과정 다 떼어놓고 초월자의 격을 획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만 놓고 보면 분명 효율적이긴 해. 모루를 무슨 도구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만 제외하면.”
허공에 빛의 입자를 뿌리며 날아든 손바닥 크기의 요정, 미양이 강신혁의 머리 위로 앉으며 덧붙였다.
커뮤니티에서는 늘 모루의 무기가 없다고 징징거리던 녀석은 이제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무기를 쥐고 있었다.
“아니, 그게 사실인가. 모루를 최대한 빨리 키워 잡아먹으려고 했다는 거니까. 자신과 비슷하지만, 더욱 큰 가능성을 지닌 모루를 말이야……."
“뭐라? 모루를 잡아먹…… 이, 이런 파렴치한!”
[물여우, 넌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일단 나서지 말고 뒤로 빠져라.]
미랑과 호루스의 당돌한 고발에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 가이아의 모습에, 강신혁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가이아와 강신혁을 중심으로 긴장감이 서서히 고조되어가던 중, 갑옷을 입은 아스칼딘과 그림자에 가라앉은 시카투스가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겠다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설마 당신들 이 세상을 지탱하는 시스템을 무너트리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요르문간드나 할 법한 짓인데.”
“반대야.”
시카투스의 말에 야누스가 빈정거리며 대꾸했다.
“요르문간드는 가이아를 직접 침범하지 않지. 가이아가 그 우두머리들을 조종하고 있으니까.”
“어머, 야누스 당신 그 사이 제법 괜찮아졌네요.”
“모루가 치료해줬어.”
어느덧 야누스는 제 발로 대지를 딛고 서 있었다.
등을 찔렀던 빛의 창날이 남긴 상처도 아물었고, 그녀가 들고 있는 신살검에 담긴 기운은 오히려 증폭된 것처럼도 보였다.
누구도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지만, 강신혁을 제외한 모든 이는 그 순간 한 가지 공통되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강신혁이 보유한 만능력 - 곧 파천기가, 가이아의 그것과 흡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모루가 다수결을 원한다고 했으니, 어디 가이아 편에 붙을 사람들은 그렇게 해봐.”
야누스가 가볍게 몸을 풀듯 신살검을 휘들러, 빛의 세상의 대기를 재차 그어냈다.
공간 전체에 둔중한 진동이 내달려, 어딘가 불온한 공기를 머금고 있던 침묵을 소멸시키며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야누스, 당신이 당신에게 주어진 숙명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가이아를 베어내겠다니 무리한 일이야. 부모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부모가 아냐.”
“가이아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본 적 있나? 설마 모루가 그녀를 대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한 가지 확실한 건, 가이아에겐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있을 자격이 없다는 거야.”
예상했던 대로 아스칼딘과 시카투스는 가이아에게로 붙었다. 로키가 가이아의 뜻을 따르고 있으니, 가이아까지 포함한다면 총 넷의 VIP 회원을 대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 정돈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이쪽에는 가장 먼저 달려온 츠쿠요와 슈를 비롯해 미랑에 호루스, 요정인 미양과 비록 VIP 회원은 아니지만 최근 탄생한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 중 가장 강한 권능을 가진 밀리아와 콰티까지.
거기에 강신혁과 야누스를 더하면 무려 아홉, 두 배 이상이었다.
“가이아여, 당신의 권능이 있다고 해도 그리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하기는 힘들 것 같군요.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래, 본의는 아니지만 장소를 바꿔야겠네요. 어차피 모든 VIP 회원이 모인 이상, 이 공간에서 더 머무르는 것도 의미가 없으니……!]
- 쾅!
소세계의 바닥에 돌연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중력이라 부르기엔 끔찍하게도 강력한 압력이 회원 전원을 그 밑으로 밀어냈다!
[추방입니다. 당신들에게 걸맞은 장소에서, 걸맞은 모습으로 상대하겠…….]
“가이아아아!”
“어딜!”
그 순간 강신혁은 본능적으로 가이아를 향해 손을 뻗어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 강도의 영사를 쏘아냈다.
그 안을 파천기가 가득 채우고, 다시 그 위를 덮은 영력이 영사를 굵은 다섯 줄기의 쇠사슬로 만들어 가이아의 실체를 속박했다!
[모루, 자네가 내게!]
“도망치는 걸 놔둘 리가!”
가이아는 그것을 끊어내려 했으나 빠르게도 츠쿠요와 야누스가 그가 만들어낸 쇠사슬에 영력을 보탰다.
그것을 끊어내려는 로키, 다시 그 앞을 막는 미랑.
결국 강신혁에 의해 실체를 드러냈던 가이아는 그에게서 도망치지 못하고 쇠사슬에 끌려 함께 하계로 추락하는 꼴이 되었다.
[내 세상에서 나를 끌어내!?]
“나를 막지 못했을 때부터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큭, 이 공기는?”
“그래, 결국 여긴……."
가이아와 함께 추락하며 무심코 바닥을 본 강신혁은 이를 악물었다.
거대한, 아주 거대한 거울이 대지를 이루며, 그 위로 맺힌 무수한 숫자의 검은 이슬이 몬스터가 되어 태어나는 곳.
아마도 이곳은 요르문간드의 본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