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 Chapter 59. 시공의 조율자 - 2 >
[자장가(Lullaby)]
[X3랭크?]
[특수능력 - 자장가?]
*자장가? : 모든 것을 잠재운다.
“이건 설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네.”
강신혁은 눈앞에 나타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지구로 돌아와 가이아 시스템의 보조가 다시 기능하게 된 후에 일단 자장가의 스테이터스를 띄워본 것인데, X3라는 생전 처음 보는 등급은 그렇다 치고 자장가의 그 많은 능력이 아티팩트 이름과 같은 ‘자장가’라는 특수능력 하나로 퉁쳐지는 것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게다가 랭크에 한 번, 특수능력에 한 번 붙은 이 물음표는 무어란 말인가.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해석불능이라고 하든가.
‘이건 내 감정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야. 아무리 내가 감정능력이 뛰어나도, 결국 그걸 텍스트로 옮겨 내게 보여주는 것은 가이아 시스템. 그 시스템의 능력이 부족해서야 당연히 알 길이 없겠지.’
원래부터 X랭크를 넘어서는 물품에 대해서는, 그가 감정을 해서 직접 인지하는 것보다 가이아 시스템이 띄워주는 설명이 훨씬 조잡한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확실해진 것이다. 이제 그에게 가이아 시스템은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
“후후, 초월자가 되면 누구나가 겪는 일이랍니다. 가이아에게 의존하는 것보다, 모루가 직접 해석하고 느낀 쪽이 정확할 테니까요.”
“맞아, 할아방한테 받은 팔찌도 쓰다 보니까 멋대로 등급이 쭉쭉 늘던걸. 가이아는 별로 믿을 만한 게 못 돼.”
츠쿠요와 슈는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가이아를 씹어대고 있었다.
이래서야 정말로 가이아가 전 우주를 총괄하는 시스템 따위가 아닌, 실존하는 이인 것처럼 들리지만…….
아니, 그건 새삼스럽지도 않은가.
아주 옛날부터 관리자도 그런 식으로 말하곤 했으니까.
“그런데 당신들 왜 여기 있어?”
클레어가 뚱한 말투로 따졌다.
어찌됐든 메르바에서의 일은 일단락이 되었고, 그들은 메르바가 소멸하기 전에(메르바를 그나마 무너지지 않게 유지해주던 마병들과 자장가가 회수되었으니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무사히 마이 룸으로 돌아왔다.
강신혁의 심신이 많이 지쳐있다고 판단한 클레어는 곧장 해산을 선언하곤 그와 함께 지구의 신영에 있는 숙소로 귀환했는데, 당연히 그대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던 츠쿠요와 슈가 고스란히 지구까지 따라온 것이다.
“그야 당연히 모루가 걱정되어서죠. 관리자가 우릴 같이 보냈던 것도 그 이유라는 걸 벌써 잊었나요?”
“나도 할아방한테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믿기지가 않네, 도움이 됐던 건 인정하지만, 당신들, 지금 이거,”
기가 찬 클레어가 뭐라 말을 더 이으려던 때, 강신혁이 그녀의 손을 붙잡아 진정시키곤 츠쿠요와 슈를 보며 말했다.
“둘 다 날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우선 클레어와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얘기는 그 다음에 하자."
“알겠어요, 모루. 어디에 머무르면 될까요?”
강신혁은 츠쿠요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아무래도 그냥 얘기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당분간 이곳에 머무를 생각인 모양이었다.
관리자는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 터치를 해오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강신혁인 온전한 VIP 회원이 되어, 그의 권한이 커졌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
츠쿠요와 슈가 원하기만 한다면 아마도 제법 긴 시간을 지구에 체류하게 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강신혁은 스틱의 전원을 켜며 그녀에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당분간 둘이 지낼 방을 얻어줄 테니까.”
“잠깐만 할아방, 설마 나보고 이 속이 시커먼 여우랑 같은 방에서 지내란 말이야?”
“참아줘.”
“으응, 할아방이 부탁한다면 어쩔 수 없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조금 불쌍하네.”
“……저를 놔두고 제법 멋대로들 얘기를 나누시네요?”
강신혁은 그 자리에서 교장에게 연락을 했다.
그로부터 5분도 지나지 않아 같은 로열 클래스 내에 있는 방 하나의 사용권한을 얻을 수 있었다.
“아직 로열 클래스의 입주권을 얻은 학생이 얼마 없어서. 당분간은 자유롭게 지낼 수 있을 거야.”
“자기도 권력을 쓰는 게 능숙해졌네.”
“이 정도로 권력은 무슨. 친구들의 편의를 도모하는 수준이지.”
클레어를 잠시 방에 놔두고 셋이 함께 복도에 나오자, 우연인지 마침 밖에 나오던 백인하가 그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시뇩이 너, 어디서 또 그런 미녀랑 미소녀를……!”
“아주 나중에, 너한테 자격이 생기면 그때 얘기해줄게.”
“소개는? 어, 인간적으로 이젠 나한테도 소개를 해줄 때가 되지 않았냐?”
“후후, 귀여운 꼬마네요. 하지만 전 언제까지고 모루만의 것이랍니다.”
츠쿠요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풍만한 가슴을 강신혁의 팔에 밀어붙였다.
옷으로 가리고 있음에도 윤곽이 일그러지는 것이 뚜렷이 보여 실로 자극적이었다.
자신이 감히 앵겨볼 영역을 한참 벗어났음을 그 간단한 스킨십으로 깔끔하게 파악한 그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야, 너, 그, 클레어 누님한테.”
“이미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 나중에 얘기하자.”
“오케이. 모루가 뭔지도 그때 듣자.”
역시 센스 좋은 친구는 가져서 손해가 될 것이 없다니까.
강신혁은 백인하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못하는 데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나중을 기약했다.
"그럼, 여기 머무르면 돼. 시설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
배정받은 방을 둘에게 열어주며 묻는 말에, 츠쿠요는 내부를 슥 둘러보곤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뇨, 보면 대충 안답니다.”
“하긴 영력이 있으니까.”
“……할아방.”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츠쿠요와는 달리 내내 어딘가 쭈뼛거리는 모습을 보이던 슈가 큰 결심을 한 표정으로 강신혁을 불렀다.
"응?"
“힘, 내.”
강신혁이 그녀 쪽으로 돌아서자 그녀는 짧은 한 마디 말을 내뱉곤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발끝을 살짝 들어 강신혁의 뺨에 입을 맞췄다.
"할아방 덕분에 이제 폴짝폴짝 안 뛰어도 뽀뽀할 수 있어. 헤."
- .......
자라난 아이를 보는 듯한 감동을 지금 느끼는 건 좀 잘못된 일이겠지.
강신혁은 대답하기 난감해 대신 슈의 머리를 부드럽게 한 번 쓸어주었다.
“고마워, 슈.”
“할아방은 내 은인이야. 난 할아방을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꼬맹이…… 뭐, 봐주도록 하죠.”
슈의 앙큼한 행동을 굳이 방해하지 않고 지켜본 츠쿠요가 코웃음을 치며 자신도 마찬가지 모습으로 강신혁에게 다가왔다.
“모루, 이전 제가 당신의 능력과 요르문간드에 관해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들이 사실상 요르문간드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던 그거 말이지?”
생각해보면 그 당시 츠쿠요는 그에게 설명을 거의 다 해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히어로 유니버스에 속한 후로 그가 만들어낸 많은 무구는 회원들의 손에 의해 많은 세상으로 퍼져나갔고, 세상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인정하긴 싫지만, 요르문간드 또한 그와 비슷하다.
굳이 차이점을 따진다면 요르문간드 쪽이 보다 규모가 거대하며,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점 정도일까.
“사실 그 당시에 만들어낸 무구들도 완전하지 않았지. 결국 사람의 손에 들려야 의미를 갖는 무구에 불과하니까. 그 결과 본래의 뜻과 다르게 세상을 멸망시킨 무구들도 있고…… 근본적으로는 요르문간드를 만들어냈을 때와 그리 달라지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모루, 당신은 계속 나아가고 있어요. 그러니 이 다음에는, 분명 완성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완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금의 강신혁은,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 정해진 길을 걷고 있을 뿐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더욱이 그것이 완성되어도, ‘결과는 지금 보는 그대로.’
‘인과를 다룬다는 건 정말 지독하네. 정말 짜증나는 건, 어찌되건 그걸 피할 방법도, 피할 생각도 없다는 거야.’
그는 자신이 초월자가 되었음을 인지하게 된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무력함을 실감하고 있었다.
강신혁이 씁쓸히 웃으며 돌아서려던 그 순간이었다.
“응, 역시 못 참겠네요……!”
“아, 여우우우우우!”
“읍!?”
츠쿠요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속도로 그와의 남은 거리를 채워오더니 자신의 입술을 있는 힘껏 그의 입술에 맞대고 눌러 붙였다.
저항하려야 할 수 없는 맹공에 성은 금세 무너지고, 분홍빛의 약탈자는 그 안을 마구 헤집으며 날뛰었다.
강신혁은 평생 그렇게 공격적이고 무식한 키스는 처음이었다.
발버둥을 치던 끝에 간신히 저항에 성공한 그는 츠쿠요를 밀쳐내며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진짜 안심을 못 하겠네! 지금 이 상황에 네 욕구를 채워야겠어?”
“하지만 잡생각은 모두 날아갔죠?”
못내 아쉬운 듯 빨간 혀로 제 입술을 요염하게 핥으며 묻는 츠쿠요.
츠쿠요의 어처구니없는 행동과 말에, 그야 모든 생각이 깔끔하게 날아가긴 했다.
그녀의 말은 어디까지나 상황을 모면하려 대충 둘러댄 말이 아닐까 싶기는 했지만,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
“후……. 고맙다는 말은 안 할 거야, 츠쿠요.”
“고마워하실 이유도 없지요. 저는 모루의 여자이고, 그런 제가 당신과 입맞춤을 나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너, 너 여우!”
침착한 강신혁 대신 슈가 흥분해 날뛰었다.
“나는 뺨으로 참았는데! 참았는데!”
“누가 참으랬나요? 역시 소심한 꼬맹이는 어쩔 수가 없네요.”
가만히 놔뒀다간 이 자리에서 괴수대전이 벌어질 것이다.
강신혁이 급하게 슈를 뜯어말리자, 츠쿠요는 킥킥 웃고는 강신혁에게 한 마디 했다.
“모루, 당신은 아직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어요.”
“무슨 착각.”
“분명 당신은 ‘완성품’을 알고 있지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결과물일 뿐. 그 이후의 당신 자신이 어찌될지는 아직 모르잖아요?”
“너도 모르잖아.”
“물론 저도 모르죠. 저는 처음엔 당신의 환생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는걸요. 전생의 당신이 ‘아직 미완성’이었으리라고는, 당시의 저로선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런가.
츠쿠요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모루가 강신혁으로 환생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 것을 납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순서가 반대였다는 것을, ‘결과와 과정이 뒤집혔음을’ 깨닫게 되었고, 비로소 강신혁을 모루로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누구보다 빠르게 진실에 도달한 이 중 하나였으리라.
그것을 이해한 강신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츠쿠요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생각도 해보셔요, 모루. 인과를 완전히 지배하며, 세상의 기반이 되는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절대자. 그런 인물의 행보를 그 누가 감히 점치겠어요?”
그 말에, 강신혁은 뿌옇던 머릿속이 아주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변화를 알아챈 것인지 츠쿠요도 킥킥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자, 이걸로 당신이 품고 있던 고민 중 일부는 해결된 것이 아닐까요?”
“……역시 넌 여우야.”
“물론이죠. 그것도 그냥 여우가 아니라, 아홉의 꼬리를 지닌 구미호랍니다.”
츠쿠요의 엉덩이 뒤로 아홉 개의 검은 꼬리가 자라나 일렁였다.
그것이 그녀의 힘의 총체. 이전의 강신혁이었더라면 직시한 것만으로 기절했을 것이다.
“그래, 그것도 진즉부터 알고 있었어.”
“그러면 제가 목표물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네요.”
“그 얘긴 처음 듣는데.”
“각오하셔야 할 거예요. 인간의 감각 따위로는 헤아릴 수 없는 긴 세월, 전 당신만을 그리워했으니까……."
츠쿠요가 재차 입술을 핥으며 그와의 거리를 좁히려 들었다.
이대로 있다간 그대로 방 안으로 끌려들어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강신혁은 다급히 그곳을 뛰쳐나왔다.
“하, 할아방, 나 역시 방 따로 줘어어어어!”
“미안!"
슈는 희생된 것이다.
그로부터 이어진 희생…… 그 희생으로…….
@@@
새해가 밝았다.
아직 신은아를 찾는 작업에 진전은 없었지만.
메르바에 다녀오면서 한계를 단숨에 돌파한 강신혁의 능력은 경악스러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으며.
클레어는 기어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
헤일로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그 다음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