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 Chapter 58. 메르바 - 5 >
그곳은 지나치게 깨끗했고, 평온했다.
“마치 이곳만 멸망을 피해간 느낌이 드네.”
“모루의 영력의 잔재가 남아있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그 마병들도……."
강신혁은 츠쿠요의 말에 묘한 기분이 되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간 전체에 은은하게 흐르고 있는 영력.
그것은 건물과 내부의 물건들을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지켜내는 것뿐만 아니라, 주인의 영력을 찾는 마병들까지도 불러들였다.
대장간이 다소 지나치게 느껴질 만큼 멀쩡한 것은, 아마도 그런 강대한 영력을 품은 물건들이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터다.
“이렇게 기특한 짓을 해놓고 정작 내가 나타나니까 살기를 뿜어내면서 달려들었단 말이지.”
“음, 츤데렌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딱딱하게 굳은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클레어 혼신의 농담을 냉정하게 받아치는 강신혁.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킥킥 웃곤, 재차 내부를 한 차례 훑었다.
사실 그리 익숙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전생의 기억은 족히 80년에 가까운 세월에 달했으나, 기억의 밀도로 따지면 히어로 유니버스에 가입하고 난 이후가 짙었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지. 실은 익숙하게 느끼고 싶지 않은 거야.’
기억의 밀도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전생의 모루가 아픈 과거를 잊어버리려 애썼기에 그만큼 기억을 떠올리기 어려웠을 뿐이다.
그러나 동기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아마도 전생의 모루가 그러했듯 강신혁 역시 그리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시절의 기억을 차례차례 떠올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이…… 이곳엔 너무나 짙게 남아있어.’
모든 물건에 짙은 영력이 서려있음을 느낀다.
당시에는 아직 영력의 파편조차 느끼지 못했을 텐데, 지하벙커보다도 긴 시간을 머물렀던 젊은 날의 작업장에는 분명 그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었다.
마치 그가 다시 이곳을 찾아올 줄 알았다는 듯이, 물론 싸가지 없이 덤벼오던 마병들과는 달리, 영력의 근원을 모조리 개방하며 그에게 그간 쌓인 세월의 기억을 전달해왔다.
무수한 정보가 넘실거린다.
그 기억을 지나며 보다 바닥으로, 더 깊은 곳으로 순식간에 의식이 가라앉는다.
이 집기, 연장들, 건물과 모루가 공유했던 시절의 기억들이 그곳에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외면하려 했던 모든 것들을 받아들였다.
가문의 대장장이의 도제로 시작해 그저 땀을 뻘뻘 흘리며 기술을 기억하는데 필사적이었던 청년 시절.
……어린 아내와 만나 풋풋한 사랑을 하고, 덜컥 아이를 임신하게 되어 가장이라는 무게를 짊어지게 된 그때.
이 대장간은 도제의 신분을 벗어나, 간신히 자신의 이름을 간판으로 내걸며 세운 건물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세상이 한순간에 뒤바뀐 듯한 감동을 기억한다.
……그래, 기억해버리고 말았다.
아이가 처음으로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을.
처음으로 걷기 시작했을 때를.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를.
아내와 함께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맞아주던 모습을.
선물을 받고 기뻐하며 폴짝폴짝 뛰어오르던 그 모습을.
몬스터들의 위협이 점점 심해져가던 중, 인간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고.
국가의 다소 강압적인 명으로,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몇날며칠 끊임없이 쇠를 두드리는 신세가 되었던 그때.
간신히 주문량을 맞추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에.
민간인 거주구역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아, 아내와 딸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국가에서도 대접을 받는 대장장이였던 그의 가족들은 일반 시민들에 비해 안전한 곳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거리를 지킬 병력이 비어, 그때 나타난 몬스터들을 빠르게 물리칠 수 없었다…….
국가는 그렇게 변명했고.
그런 몬스터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더욱 열심히 병기를 생산해낼 것을 주문했다.
그 이후로는 끔찍한 혼란과 절망이 이어져, 전생의 기억을 거의 온전히 되찾은 지금까지도 되새기는 것이 어렵다.
아니, 되새기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은, 온전한 전생을 되찾고 한 발짝 나아가기 위해서는…… 떠올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그 당시의 진실을 담고 있는 헤어핀의 기억을 읽어낼 필요가, 있었다.
“모루, 괜찮아요? 한 번에 과도하게 영력을 운용하면……. 안 그래도 이 공간에 남은 당신의 염은 너무 짙어요. 부담이 갈 거예요.”
“괜찮아. 아마…… 다음으로 미루면, 떠올리고 싶지 않아질 거야.”
“모루……."
강신혁은 근처의 의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소 높이가 낮은 이 의자는, 대장간에 딸아이가 놀러왔을 때 만들어둔 것이다.
아직 전쟁의 여파가 피부로 느껴지지 않던 시절, 그 아이는 이 의자에 앉아 양다리를 흔들면서 그를 빤히 보곤 했다.
언제까지고 익숙해지지 않는 손님의 접대에 땀을 뻘뻘 흘릴 때면 킥킥 웃기도 했고, 손님들이 귀엽다는 말을 할 때마다 아내를 닮은 수줍은 미소를 띠며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클레어. 손 좀, 잡아줄 수 있어?”
"응."
슈와 츠쿠요는 강신혁의 바로 옆자리를 차지한 클레어를 무척 부러워하는 듯, 미워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그 이상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강신혁은 일행의 시선을 받으며 다른 한 손에 헤어핀을 쥐었다.
이 행성을 전부 뒤덮고 있던 모래를 응축시킨, 아마도 헤일로의 가지를 꽂아 넣은 극천신주보다도 많은 에너지를 품고 있을 그것에.
다시 한 번 자신의 영력을 뻗어, 물건의 근원까지 깊숙이…… 그야말로 헤어핀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그 시점까지 탐색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딸아이의 미소였고.
그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일그러진 아내의 얼굴이었다.
"......."
“모루, 모루! 괜찮나요!?”
강신혁의 영력을 다루는 컨트롤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수준이다.
이제 막 영력에 눈을 뜬 이나희나 엘레노어라면 막대한 영력을 품고 있는 헤어핀과 접촉하는 순간 정신을 잃어버리겠지만, 그는 그 안에서 순식간에 근원을 찾아내 그 안의 기억을 읽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외면했던 게 무엇인가 싶을 만큼 간단하게, 알아버렸다.
……아아, 분명 그들은 이걸 내게 감추고 싶어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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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 않았던, 하지만 반드시 필요로 했던 마지막 한 조각을 되찾은 순간.
강신혁은 모든 기억을 되찾아, 비로소 온전한 VIP 회원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VIP 회원의 모든 권한을 되찾으며 알게 된 정보에는 그가 예상했던 것들도 있었으며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도 있었지만.
사실 무엇 하나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아니…… 그가 감당해야 할 다른 사실들이 너무 벅차 다른 데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모루……."
“아내와 딸아이는……."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인간의 손에 살해당했어.”
“……미안, 할아방. 그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저도요, 모루. ……죄송해요.”
“자기……."
그래, 모두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전생의 모루를 알고 있던 회원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지간하면 전생에 대해서는 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강신혁과 접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클레어도, 이 세상에 온 후로 강신혁의 행동을, 그가 과거 만들어냈던 마병들을,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얻은 헤어핀을 보며 생각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나는 내가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인간이었어. 국가는 내 존재를 감춰두고 싶어했지만, 병기의 탓으로 전황이 압도적으로 기울게 된 시점에서 적국은 내 존재를 인식하고, 탐구할 수밖에 없었지.”
모루는 단순한 인간이었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무기들을 사랑했지만, 그렇게 대단한 취급을 받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자신의 존재를 과소평가했고, 아마도 그것이 비극을 가속화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
적국은 그의 정보를 쫓은 끝에 그의 가족의 소재를 알아냈다.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대장장이를 자국으로 포섭하고 싶어했으니까.
하지만 납치는 하려고 했다.
모루의 가족을 경호하던 이는 그리 많지 않았고, 그리 강하지도 않았다.
단단히 작정하고 덮쳐온 적국의 병사들을 그들은 막을 수 없었고, 이대로 두면 가족이 적국으로 납치되어 대장장이가 적국의 뜻에 따르게 될 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죽였다.
납치되기 전에, 모루의 가족을, 병사들이 죽인 것이다.
모루가 정말로 이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 비록 처음엔 미쳐 날뛸 뿐이었지만, 그는 이 사건에 수상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늦지 않게 깨달았다.
단순했던 그는 열심히 생각했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에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이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을 알게 된 순간 그는 인간들을 위해 쇠를 두드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인간들은 언젠가 무기를 사용해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며 대장장이를 이용했지만 결국 그의 가족을 해친 것은 인간의 욕심이었다.
그들은 몬스터가 날뛰는 세상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기꺼이 다른 인간의 목을 찌를 수 있는 미치광이들이었다.
그 결과 인간 전체의 입지가 좁아지고 몬스터의 영역이 늘어나도, 그들은 그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지 않았다.
대장장이는, 인간이 정말로 존속해야 하는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평소 서로를 물어뜯고 싸워 죽이는 몬스터들조차, 인간들을 공격할 때는 힘을 합쳤다.
그런데 인간들은 몬스터들의 날카로운 이빨이 제 턱에 드리워진 순간조차 서로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종은 언젠가 반드시 멸망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자신이 만드는 무기라는 것들은, 그것을 가속화하는 가장 좋은 도구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렇게 빙빙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처음부터, 오직, 인간을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도구를 만들어낸다면.
일이 간단해지지 않을까.
그가,
무구가 아닌,
다른 것을,
만들고자,
결심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단순무식한 몬스터들이.
요르문간드라는 집단으로 확고히 성립하게 된 것은.
대장장이 모루가 인간들의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