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 Chapter 57. 출전 - 3 >
“뭐야, ID 내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는 거였어!?”
“응.”
“그 관리자란 사람한테 완전히 속았잖아! 어쩐지 후다닥 정하고 넘어갈 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관리자의 계략에 속아 ‘룬여우’로 ID가 고정되어버린 이나희가 진심으로 분해하며 발을 굴렀다.
“게다가 자유게시판 들어가 봤더니 갑자기 뭔가 세트 취급당하고 있는데! 물여우랑 화호는 뭔데!”
“둘 다 선배보다 훨씬 세니까 괜히 개기지 마.”
“넌 왜 그런 사람들을 꼬시고 다니는데!”
“안 꼬시거든? 클레어 있는 앞에서 이상한 말 하지 마라.”
이나희의 특성이 2차 진화를 일으킨 것은 바로 어제였다.
[개화(開花)의 룬(SS+)].
[발아의 룬(S+)]이 진화해 탄생한 특성으로, 이전과 같이 단번에 세 단계나 랭크가 성장해 현계한도에 이르렀다.
물론 강신혁을 비롯한 마스크드 바커스 멤버들은 그 소식을 듣고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이나희의 특성진화를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오늘, 다른 멤버들에게는 비밀로 이나희만을 방으로 초대한 것이다.
“근데 진짜 까맣게 몰랐어요, 언니. 여태 둘만 이런 범우주적인 조직에 속해있었다니……."
“은아도 포함됐었지만.”
“아, 으으, 그래서……."
다만 뜻밖이었던 점이 있다면, [게 볼그(SSS-)]를 갖고 있는 엘레노어도 아직 권한을 얻지 못한 히어로 유니버스의 자격조건을 이나희는 특성을 진화시키자마자 덜컥 얻어버린 것이다.
분명히 엘레노어의 특성 랭크가 더 높은데도 이런 일이 벌어진 것으로 보아 역시 히어로 유니버스는 전투 계열 특성보다 마도, 생산 계열 특성이 우대되는 모양이었다.
당장 클레어만 해도 SS랭크의 특성으로 히어로 유니버스에 가입했고.
“그럼 오늘 나만 따로 부른 것도 그래서? 난 또 혹시 후배가 개인적으로 서비스라도 해주는 줄 알고 기대했네……."
“어쩐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텐션이 확 떨어지더라니……."
계절은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이나희는 은은히 속이 비치는 블라우스에 짧은 레이스 스커트 차림이었다.
이렇게 속내가 빤히 드러나면 오히려 화도 나지 않는다.
아니, 하지만 아마 이나희도 오늘 강신혁이 그녀를 부른 이유를 반쯤 예상하고 있었을 터다.
그녀의 어프로치는 이제 반쯤 약속된 장난 같은 느낌.
오히려 절묘한 타이밍에 기회가 오면 괜히 쭈뼛거리다가 어설프게 실패하는 꼴을 강신혁이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다.
“히어로 유니버스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를 테고, 그래도 우리가 선배니까 제대로 알려줘야겠다 싶어서 불렀어.”
“으응, 기초적인 건 관리자한테 듣긴 했는데. 그래서 여러모로 납득했다니까. 여태까지 후배가 만든 말도 안 되는 성능의 무구들을 대체 어디에 유통시키고 있었는지, 가끔씩 아예 얼굴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나는 건 어째선지……."
“일단 뭐라도 먹으면서 얘기하자.”
클레어는 강신혁과 같은 방에서 살게 되면서 기숙사 내부 구조를 가볍게 뜯어고쳤는데, 그 덕에 방 안에서 자취가 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비타를 포함해 셋 다 적극적으로 요리를 하는 타입은 아니라 평소엔 운유관의 식당을 이용하지만, 클레어가 가끔씩 강신혁에게 애교를 부리고 싶을 때나 둘이서 느긋이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땐 종종 요리를 하곤 했다.
...아니, 실은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둘이서 차원 퀘스트를 여럿 수행하면서 밖에서 요리를 해먹을 일이 늘어나다 보니, 자연히 요리 실력이 늘어나 그렇게 된 것이다.
“후후, 오늘은 일본식 곱창전골이야. 넉넉하게 만들었으니까 맘껏 먹고 가.”
“……언니. 뭔가, 신혼부부 집에 눈치 없이 끼어든 것 같은 죄책감이 장난 아닌데요.”
귀여운 앞치마를 입고 냄비를 나르는 클레어의 모습을 보며 이나희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이나희도 클레어와 만나고 제법 시간이 흘렀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가정적인 모습은 없었는데, 지금 그녀의 모습을 다른 초인들이 본다면 제 눈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분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요염하고도 여성적인 매력이 철철 흘러넘치는 것 같지 않은가. 꼭 강신혁이 그녀를…… 으아아 아아아아!
이나희는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새빨갛게 물든 제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푹 수그렸다. 그 마음을 짐작한 클레어가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사랑이 사람을 바꾸는 법이잖니.”
“언니는 너무 바뀌었어요!”
“너도 너무 바뀌었거든?”
“동의.”
그들은 식사를 하며 본격적으로 히어로 유니버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연하지만 이나희의 관심사는 차원 퀘스트에 쏠렸다.
“그거 나도 따라가면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선배한텐 지나치게 위험해.”
“언니만 따라가고 치사해……."
“나도 거기선 위험할 때가 있는걸.”
클레어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그녀가 나노봇을 다룰 수 있게 되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강신혁도 그녀를 매번 데리고 다닐 순 없었을 것이다.
“뭐야, 그럼 결국 히어로 유니버스니 뭐니 아무 의미도 없잖아.”
“왜 없어. 앞으로는 다른 세계에 있을 때도 연락할 수 있잖아.”
“그래, 포인트도 열심히 모으도록. 거래 게시판에는 희귀한 재료가 많이 올라오니까.”
“어쩐지 후배가 구해오는 재료들 중에 듣도 보도 못한 거다 싶은 게 많더라니.”
이나희는 곱창을 상대로 분풀이를 하며 두 선배로부터의 조언을 뇌리에 새겼다.
강신혁 입장에서도 이나희가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으로 거듭난 것은 굉장히 기꺼운 일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지구에서 반쯤 벗어나 히어로 유니버스에 속한 입장이라고 생각했기에, 이나희를 비롯한 지인들과의 관계가 조금씩 얇아진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된 것이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엘리도 빨리 가입하면 좋겠다.”
“아니, 기껏 내가 리드하게 됐는데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야.”
“하하, 선배도 곧 내 마음을 이해하게 될 거야.”
“나희가 그 마음을 알기엔 아직 좀 이르지 않을까.”
이나희가 섭섭한 기색을 내비치는 와중, 강신혁의 속내를 짐작한 클레어는 고소하며 그렇게 말할 따름이었다.
전골은 무척 맛있었고, 세 사람은 냄비를 싹싹 비우고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거실의 창문 너머로, 어둠에 물든 신영의 본관 위로 소복이 눈이 쌓이는 광경이 보였다.
첫눈이라면 분위기라도 좀 나겠지만 지구가 올 한 해 지나치게 많은 게이트 침식에 시달린 결과 살짝 맛이 간 탓에, 올해 첫눈은 이미 10월에 펑펑 쏟아진 후였다.
“그래도 이젠 눈이 어울리는 계절이 됐어. 벌써 12월인걸.”
“5월쯤엔 진짜 세상이 끝날 것 같았는데, 그래도 결국 한 해가 가네.”
“그러게, 신영이란 이름 자체가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셋은 그럴 나이도 아닌데 새삼스레 감회에 젖으며 멍하니, 창 너머로 내리는 눈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정말이지 격동의 한해였다.
작년에 비해서도 더욱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어째선지 작년에 비해 무척 빠르게 지나간 느낌이었다.
아마도, 아니 분명히 그건 은아가 없었던 탓이리라.
'슬슬 준비가 됐나.’
신영의 대형길드화, 젊은 초인들의 강화, 품질 높은 아티팩트의 대량생산, 브랜드화.
올 한 해, 그가 지구에서 벌인 일들은 전부 탄탄히 자리를 잡았다.
강신혁은 요르문간드와의 결전의 장이 지구가 되리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난 6월 런던과 독일에서의 사건 이후로 요르문간드…… 정확히 말해 요르문간드의 수뇌와의 충돌은 더는 일어나지 않았다.
강신혁 역시 그때쯤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런던과 독일에서 일어난 사건은 전부 요르문간드에 협력하고 있던 인간 측의 배신자들이 갑작스레 그들과의 연결이 끊겨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기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즉 5월에 있었던, 야누스가 주도한 습격이야말로 요르문간드가 지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마지막 공격이었던 셈이다.
물론 지구의 전력이 강화되면 요르문간드 역시 재차 대공습을 감행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적어도 강신혁은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후배?”
각오를 다지던 그때 이나희로부터 날아든 목소리에 강신혁은 제정신을 찾았다.
“응, 왜.”
“내일, SS급 게이트 공략방송 한다는데. 볼 거지?”
“아, 내일이었구나.”
“진짜 신경도 안 쓰여?”
“백인하 있으니까. 사실 걔도 빠져야 되는데.”
“아니 아무래도 그건 좀.”
이나희는 고개를 저었지만, 클레어는 그 옆에서 강신혁의 말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SS급 게이트 공략.
그래, 그것까지 보고 나면 확실히 안심할 수 있겠지.
강신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차를 들이켰다.
클레어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아무래도 그녀 역시 강신혁의 각오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둘이 미소를 교환하는 모습에, 이나희는 자신이 감히 끼어들 수 없는 영역의 존재를 확인하고 입술을 삐죽일 따름이었다.
@@@
게이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과의 통신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기존의 상식이었지만, 올해 인형사와 연금술사의 공동연구로 인해 그 인식이 화려하게 박살났다.
처음엔 단순히 드론을 들여보내 일방적인 신호를 송신하는 수준이었지만 그것이 점차 발전한 끝에, 무려 1개월 전에는 쌍방향 화상통신이 가능한 수준에 이른 것이다.
안 그래도 부자였던 클레어와 강신혁은 이 기술의 개발로 인해 억만장자라는 말도 우스운 수준의 대갑부가 되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아직까지 제작과정에서 영력의 운용을 빼먹을 수가 없어, 강신혁 혹은 클레어가 없으면 실질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것.
즉 지금은 기술을 팔아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그 기술로 만들어낸 통신용 드론을 팔아서 돈을 벌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도 나희 선배도 이제 조금씩 영력을 느끼고 있지?”
“아, 응. 널 볼 때마다 속에서 뭔가 울렁거리길래 난 이게 너에 대한 애정이나 성욕 뭐 그런 건줄……."
“엘리.”
“응.”
“끄악!”
헛소리를 하는 이나희의 등짝을 엘레노어가 시원하게 후려쳤다.
그녀가 ‘먼저’ 히어로 유니버스에 들어간 것에 대한 원망도 섞여 있는 공격이었다.
“엘리도 영력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기 시작한 지는 상당히 오래 됐으니까, 당연히 나희 선배보다 먼저 가입하게 될 줄 알고 설명도 대충해놨었는데.”
히어로 유니버스에 대한 것을 아무에게나 말하고 다닐 수는, 그야 당연히 없지만, 관리자부터가 엘레노어를 반쯤 예비 회원으로 인정하고 있었기에 애매모호하게나마 히어로 유니버스의 존재에 대해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이나희가 먼저 회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주일 안에 반드시 들어갈 거야.”
“엘리, ID는 관리자가 알려주는 대로 하지 않으면 큰 일 나.”
“큰 일이 난 것은 당신의 뇌입니다.”
강신혁 일행은 과거 야누스의 습격이 있었던 바로 그 장소, 제1체육관의 관중석에 앉아있었다.
비단 강신혁 일행뿐만이 아니라 신영의 학생과 교사들도 대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체육관 중앙에는 경기무대 대신 커다란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다.
스크린에 비춰지고 있는 광경은 다름 아닌 SS급 게이트 내부의 풍경. 신영 정예팀 8명이 모여 입장한 게이트의 공략 영상을 실시간으로 방출하고 있는 것이다.
“게이트 공략을 실시간으로 보다니 시대가 바뀐 느낌이 어마어마한데…… 아, 오혜나다.”
“백인하 이 새끼, 철저하게 보호역에 충실하고 있네.”
이번 SS급 게이트 공략에 나선 것은 마스크드 바커스 소속인 백인하와 오혜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신영의 학생으로만 이루어진 팀이었다.
그나마도 백인하는 유사시 상황에 대비해 다른 멤버들을 지키는 역을 맡아 수행할 뿐, 실질적인 공략은 오혜나가 이끄는 일곱 명으로만 해내야 하는 상황.
“문제 없어 보이지?”
“백인하라는 든든한 백이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애들 실력도 나쁘지는 않네.”
“뭐야, 오혜나는 대체 언제 저렇게 강해진 거야.”
팀을 이렇게 구상한 것은 강신혁의 의지이기도 했고, 신영의 의지이기도 했다.
지난 몇 달간 신영은 강신혁의 주도 아래 확고하게 입지를 굳혔지만, 결국 신영에 대한 무력 평가는 강신혁을 빼놓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번 공략영상은 이곳에서뿐만 아니라 각국 뉴스 채널을 통해서도 중계된다. 강신혁은 물론이고 마스크드 바커스의 주력 멤버 대부분이 빠진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SS급 게이트 공략은 그런 기존의 인식을 확고하게 바꿔줄 수 있을 터였다.
"오."
이레귤러 게이트 공략이었으면 더 놀라웠겠지만, 이번엔 신영에 속한 어린 초인들이 얼마나 잘 훈련되어 있는지, 팀웍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증명하는 자리이기도 했기에 이미 몇 번인가 공략이 이루어진 게이트를 대상으로 했다.
공략은 변수 없이 의도대로 진행되어, 학생들은 혼자서는 상대하기 힘든 SS랭크의 몬스터들을 침착하게 협공하여 몰아붙였고, 오혜나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몬스터들을 얼리고 부쉈다.
경쾌하고 확고하다. 영상을 본 누구나가 그런 감상을 떠올릴 수 있을 터였다.
"오."
백인하는 나설 기회조차 없었다.
평균 공략 시간 7시간으로 알려져 있는 소규모 게이트이지만, 오혜나는 무려 거기서 3시간을 더 단축시켜 공략을 완료했다.
특히 막판에 나타난 보스 몬스터를 서리가 낀 대검으로 다짜고짜 일도양단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감히 압도적이라는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팀플레이로 잡으라고 했는데, 저년 저거 안 되겠네.”
다만 처음부터 오혜나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강신혁의 입장에선 그리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니었다.
“봐줘. 아마 자신의 당당한 모습을 자랑하고 싶었을 거야.”
“그 마음은 충분히 알지만 처벌은 별개야.”
“후배, 제자한텐 되게 엄격하구나……."
이나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가운데 클레어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안심할 수 있겠네, 그치?”
“응…… 뭐, 그건 그렇지.”
강신혁은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그래도 이번 건이 무사히 끝난 걸 확인하고 나면 바로 다음 차원 퀘스트에 돌입할 예정이었으니까.
차원 퀘스트의 목적지는 메르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