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 Chapter 57. 출전 - 2 >
강신혁이 제 한 몸 바쳐 신영의 구성원들을 집중단련한 덕분에, 그 주간에는 훈련의 비중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전 주보다 공략된 게이트가 2할은 늘어났다.
덤으로 3학년 중 A랭크의 특성을 갖고 있던 기사학과 학생이 게이트 공략 중 특성을 진하시켜, S-랭크 특성의 보유자가 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신영이 통째로 뒤집어지는 순간이었다. S-랭크면 차후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하이랭커를 노릴 수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슬슬 한 명쯤 터져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다만 그 첫 번째는 백인하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여태까지 특성진화를 겪지 않은 이들 가운데에선 그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 타고난 특성이 S랭크로 높아서 그런지, 그동안의 성장이 특성이 아닌 스테이터스에 집중되어서인지 백인하는 아직 특성 진화의 소식이 없었다.
‘뭐, 그 녀석은 알아서 하겠지.’
한편 엘마의 영입으로 인해 아티팩트 제작 동아리의 무구제작에도 탄력이 붙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엘마와 이나희는 나이도 비슷하고, 수준도 비슷해서 호흡이 잘 맞았다.
더구나 이제 강신혁은 뭘 만들든 S랭크는 가볍게 초과하는 수준이어서, 이걸 아무 학생들한테나 마구 뿌릴 수 있는 것도 아닌지라 그 중간단계를 대량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둘의 존재가 무척 중요했다.
요즘 강신혁은 무구의 품질조차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자신 쪽이 반푼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그것은 회원님의 능력의 기준이 히어로 유니버스에 맞춰졌기 때문입니다. 히어로 유니버스에 속한 회원들이 가볍게 발을 굴러도, 지구의 인간 입장에선 대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걸로 하죠.”
엘마와 이나희의 협업이 잘 이루어진다면, 강신혁은 엘마를 K&L의 직원으로 고용해 이나희와 파트너십을 맺게 할 생각이었다.
이나희는 어디까지나 자신과 함께 가게를 경영하고 싶어 하는 모양이지만 앞으로 강신혁이 걷게 될 길을 생각해보면 그건 무리가 있는 일이었으니까.
- 그렇습니다.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자격조차 만족시키지 못한 어린 불여우가 감히 회원님의 일상에 침을 묻히려 하다니, 천만 년은 이릅니다.
‘관리자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나희 선배가 곧 히어로 유니버스에 가입할 것 같네요.’
- 관리자는 결사반대합니다! 또 새로운 불여우의 이름을 생각해야 하다니!
‘이제 적당히 그건 포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튼 전투와 생산 각 분야에서 안정적인 구도가 확립된 시점에서 뜻하지 않게도 강신혁은 자신이 신영에서 맡고 있는 모든 일을 최소한으로 줄인 셈이 되었다.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게이트 처리에 나서면서 수업이 거의 없어져, 실질적으로 하루나 이틀에 한 번씩 학생들을 영력을 담은 손으로 어루만져주기만 하면 교관으로서의 업무는 완료한 셈이고.
무구 생산의 경우 이나희와 엘마가 쓸 수 있게끔 고위 마법합금을 대량으로 만들어 영력을 불어넣어주는 정도면 마무리가 됐으니까.
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나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는데, 어째 학생일 때보다 훨씬 여유로워진 것이다!
“당분간 마스크드 바커스 활동도 줄일 생각이니까 그렇게 알아둬.”
“어, 왜?”
그날 밤, 강신혁은 언제나의 멤버들이 모인 자리에서 단호하게 선언했다.
“연구해야 할 게 있거든. 그래도 전력에는 별로 문제가 없을 거야. 나 대신 이것들을 보낼 생각이니까.”
강신혁이 그 말과 함께 불러낸 것은 수십 기의 라의 수호병이었다.
여유시간이 날 때마다 숫자를 불려가고 있는 라의 수호병은 지금 단계에서 이미 백 기를 돌파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X-랭크의 오리지널 개체를 조작하는 것으로 다른 기체를 원거리 조작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미 차원을 넘어서도 조종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그가 어디에 있건 라의 수호병단을 마음대로 부려 지구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아니, 이게 있으면 나라 하나는 정복하겠는데……."
이미 영국에서 라의 수호병의 집중포격을 지켜본 바 있는 이나희는 전보다 숫자를 더 불린 기체들을 보며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그러나 강신혁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숫자를 늘려봤자 양산형은 양산형이지. 이렇게 많이 모아도 아직 아스트라페나 프라가라흐에는 못 미쳐. 아직은 말이지.”
“그거 그때 그……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아스트라페는 현계한도를 가뿐히 초월해 X랭크에 이른 물건이고, 프라가라흐는 아직까지 모든 능력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 윗단계에 해당하는 물건.
신은아의 손에 들려 그 야누스와도 얼추 대등하게 싸울 수 있게 해준 문자 그대로의 신기였다.
다만 강신혁은 당시 그것으로는 야누스를 넘지 못한다는 확신을 얻었고, 그 후로는 X랭크라는 등급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 헤일로와 함께 X2랭크에 대한 얘기를 했던가. 당연히 헤일로는 그 이상일 것이고, 그건 아마 야누스도 마찬가지.
‘아비수스와 디스페어를 합쳐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어낸다면…… 그걸로는 가능할지도.’
강신혁은 줄곧 수행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무력적인 면에서는 물론이고, 대장장이로서도 말이다.
요 몇 주간 지구에서 바쁘게 활동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기반을 다져두고 지구인들을 강화시키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엄밀히 말해 자기자신을 갈고 닦기 위해 노력한 시간은 아니었다.
관리자가 말해주기도 했지만, 그 역시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다.
그는 일찍이 지구인들과 비교할 수준을 넘어섰고, 그가 바라보는 영역은 지구에서는 도달할 수 없었다.
‘카이랄을 손에 넣었다고 해도, 그걸로 은아가 있는 곳으로 바로 달려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달려간다고 해서 그녀를 무사히 데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니지.’
그녀를 무사히 데려오기 위해선 그가 강해져야 한다.
최소한 신은아보다는 강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더는 늦장을 부릴 여유가 없었다.
강해져야 한다.
“으앙, 기껏 이쪽에서 같이 움직일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러기야?”
“부탁해, 브리짓. 내가 빠질 수 있게 된 건 당신이 여기 합류한 덕분이기도 하니까.”
“보통 그런 말을 하면서는 찐한 키스를 곁들여주는 게 법도 아닌가 싶네!”
“나는 애인이 있어서 못 해주겠고…… 응.”
“응!”
“응!?”
강신혁은 자기 대신 해주라는 뜻에서 백인하를 돌아보았다. 백인하가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서자 브리짓이 기겁하며 백인하를 걷어찼다.
백인하는 놀라운 속도로 그것을 피했으나 그 뒤에서 날아든 엘레노어의 손날치기까지는 피하지 못했다.
“시뇩아, 왜…… 나 요즘…… 이미지가 이상해진 것 같냐……."
“그게 다 네가 여친이 없어서 그래. 후딱 만들어라.”
“진짜 그럴까……."
“……오빠, 그럴 만한 사람은 있어?”
만약 그럴 만한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직접 나서서 죽여 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오혜나.
백인하는 눈치가 없는 건지 일부러 무시하는 건지 최근 자신에게 관심을 표해온 여자의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강신혁은 부디 신영 내부에서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 오늘은 일찍 일어날게. 아마 며칠간은 연락 못할지도 몰라. 출동할 땐 드론들을 보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 그럼 나도 이만.”
며칠간 연락을 하지 못한다는 말에서 눈치를 챈 건지,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강신혁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그 모습에 이나희가 입술을 삐죽이며 태클을 걸었다.
“언니, 그렇게 여친 티내는 거 그만하면 안 돼요?”
“응~ 불편하면 너도 남친 만들어~.”
당초 모습으로부터 많이 변화하긴 했지만, 이만하면 마스크드 바커스의 멤버 관계도 많이 안정된 느낌이 들었다.
물론 겉포장을 한 겹 걷어내고 나면 그 아래로 복잡한 치정관계로 얼룩진 진면모가 드러나지만, 지금은 그 부분은 애써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강신혁은 클레어와 함께 자리를 나와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신혁아, 혹시 다른 세계로 넘어갈 생각이야?”
“응. 지금은 시간이 필요해.”
카이랄을 연구할 시간.
그 자신의 능력을 끌어올릴 시간.
대장장이로서의 능력을 단련해, 아비수스와 디스페어를 재료로 삼은 검을 만들어낼 시간.
지구가 요르문간드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시간은 충분히 벌어두었으니, 이제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나도 같이 갈 거야.”
“당연하지.”
“후후.”
강신혁의 답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클레어가 그의 팔을 껴안고 뺨을 어깨에 문질러왔다.
하는 짓을 보면 가끔, 아니 자주 고양이 같을 때가 있다.
강신혁은 확고한 고양이파였기에 불만은 전혀 없었다.
“비타한테는 미안하지만 지금 내 역할을 좀 대신해달라고 해야겠네.”
“원래부터 그럴 생각으로 신영에 데려온 거니까.”
“섭섭해할 거야.”
“선물이라도 사다주지 뭐.”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타는 아니나 다를까 둘이 자신을 남겨두고 이세계로 떠난다는 말에 퍽이나 섭섭해 했지만, 무척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지 곧 납득해주었다.
그러나 그 대신 큼지막한 폭탄 하나를 터트렸다.
“동생, 만들어 오실 거예요?”
“……노력해볼게!”
잠시 고민하던 클레어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당연히 농담으로 넘기겠거니 예상하던 강신혁은 일순 경직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제정신을 되찾고 소리쳤다.
“노력하는 거야!?”
“괜찮지 않을까? 이제 자기도 학생 신분에서 벗어났으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아!? 나 아직 미성년인데!”
“생각해봐, 우린 은아를 되찾으려고 이렇게 노력을 하고 있는데, 은아는 우리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도 모르고 있을 거 아냐. 그러니까 작은 서프라이즈 기획 삼아서.”
“그러지 말자……."
서프라이즈고 자시고 하는 문제를 떠나서, 클레어가 아이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만은 그도 염두에 두기로 했다.
평범한 고2였더라면 감당하지 못했을 말이지만, 모루의 기억을 갖고 있는 강신혁은 그것도 언젠간 닥쳐올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아이, 말이지……."
다만 그에게 ‘아이’라는 말은 곧 상실과 동의어이기도 했기에, 큰 기대감과 함께 견딜 수 없는 두려움도 함께 상기시켜주었다.
그의 동화율이 한없이 100%에 가까워져가는 지금, 전생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나 사건 하나하나가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눈을 지그시 감고 제멋대로 되살아나는 기억을 어떻게든 정리하는 데 애쓰고 있자니, 클레어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자기? 그, 너무 신경 쓰지 마. 농담이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농담으로 넘길 생각도 없고.”
자신이 연인을 걱정시켰다는 것을 깨달은 강신혁은 씁쓸하게 웃으며 클레어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클레어는 강신혁에게서 때로는 귀여운 연하 같은, 때로는 든든한 연상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지금은 아마도 후자.
클레어의 가슴을 사정없이 두근거리게 하는,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불안하게도 느껴지는 어른스러운 표정.
그녀는 자신의 손을 붙잡는 강신혁의 손을 힘을 주어 꽉 잡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신의 곁에서 금방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강신혁은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만 지금은 조금, 시간을 줬으면 좋겠어.”
“응. 난 언제든 괜찮아.”
“하지만 확실히, 나희 선배나 엘리는 우리 아이를 보면 엄청 놀랄 것 같긴 하네.”
“으응…… 그건 차라리 걔네를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싶네.”
강신혁은 클레어와 함께 새로운 차원 퀘스트를 받아, 본격적으로 히어로 유니버스 VIP 회원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반년이 흘렀다.
지구에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이 한 명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