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 Chapter 57. 출전 - 1 >
“그래서 현지처를 한 명 추가한 것도 모자라 새로운 여자를 한 명 데리고 오셨다고!? 갱장해여어어아얏!”
일부러 멍청한 목소리를 내고 깔깔 웃으며 박수를 치는 브리짓의 머리통에 강신혁은 인정사정없는 손날치기를 가했다.
“왜 때려!”
“현지처도 없고 내 여자는 언제나 한 명 뿐이거든? 게다가 올리비아 공주는 영국 차기 여왕인데 멋대로 농담하지 마.”
“근데 큰 언니가 신혁한테 반한 건 맞는 것 같아.”
“엘리, 제발 조용히 해.”
브리짓이 좀 얌전해졌나 싶더니 옆에서 같이 얘기를 듣던 엘레노어가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사실 강신혁도 올리비아가 자신을 보는 눈길이 조금 바뀌었다는 생각은 했다.
아프리카에서 봤을 땐 영국의 이득을 위해 자신을 끌어들이고 싶어했다면, 이번엔 뭐랄까, 그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따라오고 싶어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상한 소리가 나오기 전에 후다닥 영국을 떠난 것이기도 했는데…….
- 창여우와 공주 속성이 살짝 겹칠 뿐인 노처녀와는 굳이 말을 섞을 이유도 없죠. 아주 잘하신 겁니다. 1,000,000 HP 보너스!
‘창여우가 누굴 가리키는 건지는 대충 알겠지만, 그거 잘못 발음하면 참사 일어나니까 앞으로 다시는 쓰지 마요. 그리고 노처녀라는 말도 금지.’
관리자의 메시지는 언제나의 농담이라고 쳐도, 이미 지금까지 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만 해도 충분히 많았다.
클레어도 클레어지만 신은아가 돌아왔을 때 덜 혼나려면 지금부터라도 몸을 사려야 했다.
“근데 솔직히 반할 만 하지 않냐? 아빠도 구해줘, 자기 대신 개새끼도 죽여줘, 공도 양보해줘……. 마지막으로 그 필살기 있잖아. 왜곡된 모든 것의 정체를 드러내고……."
“선배도 그런 거 좀 하지 마라, 진짜.”
어째서 필살기란 펼칠 땐 멋져 보이는데 나중에 가서 생각해보면 쪽팔린 걸까.
강신혁이 엘레노어와 이나희의 입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으려니, 브리짓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좋겠다, 나도 인형사 씨랑 꽁냥거리고 싶었는데.”
“그런 건 클레어랑밖에 안 하거든? 그동안 있었던 얘기나 해봐.”
“이미 보고 받지 않았어?”
보고를 받기는 했다.
바로 얼마 전 있었던 신영의 첫 출전에 관한 보고를.
신영의 군사집단화는 진즉 이루어진 일이지만, 아무래도 학교에서 교육만 받고 기껏해야 등급이 낮은 게이트에서 실습을 하는 수준이었던 학생들을 바로 실전에 투입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었던 탓에 당분간은 수업과 함께 훈련에만 집중시켰었다.
그리고 바로 지난 주, 다시 말해 강신혁이 영국과 독일을 한 바퀴 돌고 오는 사이 드디어 학생으로만 이루어진 팀이 출전한 것이다.
“단체로 우중충한 얼굴로 나가는데, 무슨 군대 보는 것 같았다니까.”
“군대 맞지 뭐.”
보통 소규모 게이트 진입은 4명에서 8명, 대규모 게이트 진입은 8명에서 16명 정도로 이루어지는데, 1학년은 무조건 선배를 섞어 16명, 2학년부터는 8명씩 묶어 지난주만 도합 50번의 출전이 이루어졌다.
팀의 구성은 최대한 자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배려했지만 다들 알아서 최대인원을 맞춰서 팀을 구성했다.
지난주에 출전을 하지 못한 팀도 있지만, 그들도 이번 주에는 빠짐없이 출전할 것이다.
한 팀당 최소한 2주에 하나씩은 게이트를 맡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론 어땠어? 사망자가 없었다는 것만은 확인했는데.”
“안타깝지만 중상자는 제법 나왔어. 이레귤러 게이트가 많았거든? 사실 요즘 발생하는 게이트 사태 중 절반은 이레귤러이기도 하고.”
“그건 원래 레귤러인데 이레귤러로 잡히는 케이스가 늘어나서 그래. ……원래 게이트 발생을 탐지하고 구분하던 초인협회가 반 토막이 나서.”
강신혁은 브리짓이 자신의 폰 위로 띄운 화상을 확인했다.
강신혁이 학교 선생들에게 받았던 보고서는 잡설이 굉장히 많았는데, 브리짓이 띄운 화상 이미지는 아무래도 신영 홍보용으로 제작된 것이라 그런지 요점만 간단히 작성되어 있었다.
F급 5개, E급 7개, D급 13개, C급 21개, B급 2개, A급 2개.
지난 한 주간 학생들이 공략한 게이트의 숫자였다.
사실 강신혁이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수치가 낮았다.
한 번 게이트 원정을 마친 학생들이 호소하는 피로감이 그의 당초 예상보다 컸던 것이 원인이었다.
“다들 너무 지구력이 없는 것 아냐……?”
“1년 만에 국제초인랭킹 1위가 된 우리 인형사 씨가 보면 그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이해해. 나도 원래 게이트 한 번 뛰고 나면 한 달은 안 들어갔거든.”
- 이 태만한 불여우는 무시한다고 쳐도, 회원님께서 어린 학생들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회원님께선 본격적으로 게이트를 탐사하기 시작하셨을 때 이미 트롤의 재생력을 갖고 계셨으니까요.
‘아, 그런가.’
관리자의 말에 강신혁은 비로소 자신이 오만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관리자의 말마따나 그는 트롤의 재생력이 있어 어지간한 일로는 지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 능력이 진화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거의 무한한 체력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래서 일반적인 초인이 게이트를 탐사하고 나서 얼마나 짙은 피로감에 시달리는지,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근데 당신은 탑 랭커라서 얘기가 다르잖아. 앞으론 그렇게 여유 못 부릴 줄 알아.”
“……방금 그거, 좀 깔보는 눈으로 보면서 한 번만 더 말해주면 안 돼?”
“난 당신의 변태성의 한계를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어……."
여하튼 그래서 2주간 학생들이 벌어들인 마일리지는 생각보다 적었다.
이진석을 필두로 강신혁의 고아원 동기 세 명이 뭉쳐 구성된 조교 팀이 그나마 포인트가 가장 높은 수준.
이들의 특성 랭크가 낮은 수준은 아니지만, 학생들 가운데에는 이들보다 특성이 강한 이들도 제법 있는데…… 역시 단련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교사 팀은?”
“아무래도 교사 중 절반 정도는 항상 학교에 머물러야 하니까…… 지금 나가있는 팀을 제외하면 대략 10개 정도 공략했네.”
“조교 팀이 두 개 공략했으니까 다 합치면 62개네.”
이 정도면 어지간한 대형 길드는 코로 비웃을 수 있는 수준이기는 했다.
낮은 랭크의 게이트도 많지만, 아무래도 교사 팀은 B랭크와 A랭크의 던전을 위주로 공략하기도 했고, 실적으로는 어디 가도 꿀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학생과 교사를 합치면 대략 1천 명 가까이 되는 규모인 점을 감안하면 조금 미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F급이나 E급 게이트밖에 들어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최대한 빨리 단련시켜야 돼. 하다못해 이런 하급 게이트 정도는 하루에 세 개 정도 클리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어야지.”
“지금도 충분히 대단하지 않아?”
“그 정도로는 안 돼. 우린 대형 길드 수준이 아니라 세계최강의 무력집단을 노리고 있으니까.”
“그럼 어떻게 하게?”
“더 굴려야지. 다들 엄살이 심해.”
사실 지금도 신영에 속한 학생들은 다른 초인들에 비하면 비교적 안전이 보장된 상태에서 게이트 공략에 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게이트에 출입하는 모든 팀은 최소 하나씩 연금술사 클레어 보일이 만든 드론을 대동하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 드론은 던전에서의 모든 것을 관측하고 기록하며, 일부는 상황실로 전송하는 것마저 가능했다.
본래 게이트 안에서는 외부로 통신을 보낼 수 없는데, 나노봇과 강신혁이 직접 주조한 특수금속으로 인해 기적이 이루어진 것.
실시간 보고를 하는 것과 실시간 구조가 이루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 구조 신호를 보낸 팀은 상황실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며 손해를 최소화하고 퇴각할 수 있다.
이 드론은 이제 막 신영의 모든 팀에 배치가 완료되었고, 앞으로 생산되는 분량은 전부 말도 안 되는 고가에 매매될 예정이었다.
“라의 수호병을 하나씩 나눠주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응, 그건 오바야.”
“그런 것 같더라고.”
당장 그 날 오후, 강신혁은 전교생을 대운동장에 집합시켜 재차 버프를 부여하고는 단체전을 실시했다.
게이트를 다녀와서 힘이 없다고 변명해도 용서는 없었다.
과감하게 모조리 때려잡았다.
“아파! 아파죽겠는데 이상하게 쓰러지질 않아……!”
“내가 지쳐서 쓰러지기 전까지는 다 못 누울 줄 알아!”
“운동장에 구름 이거 뭐야, 무서워……!"
강신혁의 파천기가 대운동장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호풍환우 스킬을 발동시켜 세상의 마력을 신영으로 유도해, 그것을 다시 파천기로 바꾸어 지친 학생들의 몸에 주입시켰다.
어지간한 강장제나 회복마법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끓어오르는 기운이 학생들을 아무리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서게 만들었고, 고작 게이트 하나 클리어하고 한 주 내내 훈련도 안하며 쉬고 있던 학생들은 그간 밀렸던 훈련을 한꺼번에 해치운 행운아가 되었다.
“이거 좋은데, 앞으로 한 주에 한 번씩 할까?”
“절대, 싫어……!”
“집에 가고 싶어……."
안타깝게도 호풍환우 스킬에 아직 한계가 있어, 세상의 기운을 지나치게 끌어당길 수는 없었다.
대운동장을 뒤덮고 있던 무지막지한 기운은 대략 1시간 정도가 지난 후 소멸했고, 끝내 강신혁이 쓰러지기 전에 모든 학생이 그 자리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 가운데에는 이진석을 비롯한 조교 팀도 섞여 있었다.
“우, 우린 조굔데……. 게이트도 두 개 클리어했는데……!”
“이진수, 내가 만든 무기 받을 생각 없냐? 용병으로 활동할 때보다 게을러지면 어쩌자는 거야?”
“학생들 앞에서 이진수라고 부르지 마라, 개새야…… 꼬르륵.”
그나마 조교 팀은 게이트를 두 개나 공략했으니, 강신혁은 그 보답 삼아 조교 팀에 B랭크의 악세서리형 아티팩트를 하나 증정했다.
그리고 각 학년의 정예가 모여 A랭크 게이트를 공략한 팀에도 마찬가지로 아티팩트를 증정했는데, 이 팀은 강신혁이 없는 동안 마스크드 바커스로 활동하지 못하는 오혜나가 끼어 있었기에 사실상 그녀의 원맨팀이라고 봐야 했다.
강신혁한테 많이 얻어맞기는 했어도, 실제로 성적을 남긴 팀이 성과물을 챙기는 것을 본 학생들은 다시금 의욕을 불태우게 되었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후, 그럼 다음으로는 교사 팀.”
“우리도!?”
강신혁이 전교생을 집합시켜 치르는 훈련을 지켜보고 있던 교사들이 기겁하며 펄쩍 뛰었다.
그는 특히나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교사인 공준표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이랑 훈련하고 싶기는 한데, 아까 그 능력을 바로 발동하기는 힘드니까 내일로 합시다.”
“혹시 내일 게이트에 들어가면……?”
“그럼 게이트 들어갔다 와서 나랑 개인교습하는 거죠.”
국제초인랭킹 1위(젊음, 잘생김, 미혼, 얘한테 맞으면 많이 아픔)와의 개인교습이라니 이 얼마나 두근거리는 울림이란 말인가.
공준표를 비롯한 전 교사진은 도피를 일찌감치 포기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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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의 독일계 미녀, 라헬 엘마 버트는 정식으로 인가를 받아 신영의 구성원이 되었다.
다만 입지는 조금 묘했는데, 올해 초에 독일의 생산계 초인양성학교를 졸업한 탓에 이진석과 같은 조교가 되었다.
강신혁뿐만 아니라 이나희도 끝까지 그녀의 영입을 반대했지만, 요르문간드가 눈독을 들이고 접근할 만큼의 재능과 실력을 지닌 장인을 받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신영 수뇌부에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가 스승님의 공방.”
“스승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이진석이 전투 조교라면, 라헬 엘마 버트는 생산 조교.
마일리지를 쌓은 학생들에게 지급되는 상품을 생산하는 업무를 이나희, 강신혁과 함께 담당하게 될 예정이었다.
“뭐, 종합적으로 따져보면 그리 나쁜 일은 아닐 지도 몰라. 나랑 나희 선배 스케줄이 맞지 않을 때도 협업이 가능하게 된 거고……. 또 나희 선배랑 대충 실력은 비슷한 것 같기도 했고.”
“와, 사랑하는 후배야. 그 말은 나 좀 상처받는데?”
“스승님, 저도 무시를 당하는 기분이 듭니다. 제대로 쇠를 다루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질 생각은 없습니다.”
의도하기는 했지만 둘 다 지나치게 간단히 넘어왔다.
강신혁은 씩 웃으며 제안했다.
“그러면 어디 한 번 실력을 겨뤄보면 되잖아, 버트.”
“라헬이라고 불러주세요, 스승님.”
“싫어. 한국에서 그 이름은 배신의 상징이거든.”
“그럴 수가!?”
많은 눈물과 분노와 고민 끝에, 강신혁은 앞으로 그녀를 미들네임인 엘마로 부르기로 했다.
덤으로 아티팩트 제작 대결은 결과적으로 둘 다 A랭크 수준에 머무르면서 강신혁이 예상했던 대로 동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