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 Chapter 56. 도마뱀 꼬리 - 5 >
라의 수호병은 강신혁이 지닌 빛의 힘을 끌어당겨 한 점으로 응축시키더니, 한 줄기의 굵직한 빛의 선- 라의 창을 쏘아냈다.
일직선으로 내달린 그것은 단숨에 윌포드를 관통하고 아마도 그 너머에 있을, 지구와 이계의 게이트를 잇는 선까지도 박살냈다.
문제는 내부가 뒤틀린 윌포드의 사체가, 마지막으로 대폭발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위험해, 폭발한다!”
“대피…… 모두 대피해!”
“아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강신혁은 괜히 혼란을 가중시키는 사람들을 일거에 침묵시켰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마기의 반응.
바로 이전 야누스의 습격 당시 일어났던 초인협회 본부의 폭발과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젠 강신혁도 그런 대참사를 가만히 놔둘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가 영력을 뿜어내자, 인벤토리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십 개의 크리스탈 형태의 드론, 라의 수호병이 추가로 튀어나왔다!
“몇 개나 있는 거야!?”
“여유가 있을 때마다 부지런히 만들어서 지금은 서른일곱 개. 라의 수호병단 일제 포격!”
강신혁이 최초로 만든 라의 수호병은 [신광]이라는 특수능력을 얻고 현계한도를 초월해 X-랭크로 거듭났지만, 그 후로 만든 라의 수호병은 강신혁의 야금술이나 라이트 마스터리 따위의 스킬이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SSS+랭크에 머물렀다.
그래도 수십 개의 드론이 일제히 쏘아내는 라의 창은 마기의 대폭발을 억제, 소멸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 사아아아아
빛의 창의 폭격에 마기가 씻은 듯이 사라져갔다.
폭주하던 기운이 모조리 소멸하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하나로 합쳐진 자그마한 거울 뿐.
신성이 섞인 빛의 집중포화로 인해 마기는 모두 사라져 지금은 오직 압도적인 권능만이 남아있었다.
어쩌면 요르문간드조차 도달할 수 없는, 강신혁이 이 자리에 있었기에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던 순수한 카이랄 그 자체.
-윌포드와 기사들을 재료로 삼아, 강신혁과 요르문간드의 합작으로 만들어낸 올 크래프트의 산물이었다.
“하......."
강신혁은 라의 수호병들을 인벤토리에 모두 수납한 후 현장에 다가가, 그 기적적인 충돌의 산물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당연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사용해도 될 만한 물건이 아니다.
차원과 차원을 잇는 힘, 현대 인류에게는 완벽한 미지의 영역인 게이트의 비밀을 담고 있는 물건이었다.
‘거울상이라……. 그래. 야누스는 처음부터 나한테 이걸 주고 싶어 했던 건가.’
그와 엮이면 엮일수록 느끼게 되는 기묘한 불쾌감에 강신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야누스가 원하는 건 무엇인가.
그의 양면성에 이대로 놀아나다간 끝이 없을 터였다.
다만 차원을 넘는 가능성 자체는 자신이 목표로 하던 것이기에, 순순히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또 빡친다.
- 회원님, 화를 내는 건 재회 이후로 미뤄도 충분합니다.
‘관리자님한테도 혐의는 걸려있는데 말이죠.’
- 관리자는 그저 회원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애초에 관리자가 일개 회원의 뜻에 따른다는 말을 하는 것도 수상한데 말이지.
하지만 수상한 점을 일일이 따지다 보면 날이 샐 것이다.
강신혁은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그곳에는 윌리엄 황태자와 올리비아 황녀는 물론이고 이 대회에 참가했던 이들 모두가 멍하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아직 뭐가 남았나?”
“아뇨, 그 반대에요. 너무 빨리 해결해서…… 대체, 뭐가 뭔지.”
“어마어마한 마력 반응이었습니다. 런던의 시민들을 모두 대피시키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그런데 그게, 소멸해버렸으니.”
“그럼 문제없는 거죠. 아, 혹시 윌포드를 죽여 버린 건 안 되는 일이었나요?”
“그럴 리가.”
윌리엄 황태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말했다.
“그가 근원을 알 수 없는 수상한 능력으로 왕가 인물들은 물론 국가 주요 인물들을 세뇌하고 있던 건 명백한 사실일 뿐더러, 퍼펫 마스터가 사용하고 있던 방패에 빛과 신성력 말고 다른 능력이 부여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만큼이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신성력을 쬐고 괴물로 변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누구도 퍼펫 마스터를 탓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그리고…… 우리 딸을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윌리엄 황태자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많은 일들이 있었던 탓에 극장 내부가 소란스러웠으나, 그의 간결한 행동으로 신기하게도 장내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이 아이까지 잃었다면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을 겁니다.”
“뭐, 대가는 톡톡히 받아낼 생각이긴 한데요. 세계랭킹 1위를 맘대로 부렸으니까.”
“각오하고 있습니다. 우리 딸은 어떻습니까.”
“아, 아버님!”
황태자의 능청스런 말에 올리비아가 펄쩍 뛰며 뺨을 붉혔다.
그야 한 국가의 공주를, 그것도 왕위를 계승할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이를 내어준다니 그야말로 영국이 지불할 수 있는 최상의 대가가 아닐 수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상이 국제초인랭킹 1위인 강신혁이 아닐 때의 얘기다.
결혼이란 상대의 인생 반을 받고 자신의 인생 반을 내어주는 등가교환이라고 아주 유명한 연금술사가 말하지 않았던가.
대가를 달라니까 이젠 그의 인생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들다니, 과연 신사인 척하는 양아치의 나라 영국의 왕족다운 심보였다.
“아니, 됐거든요.”
“하하, 어쩔 수 없군요. 이미 임자가 있는 모양이니……."
“아, 아버님. 인형사한테 실례예요. 저는……."
그의 단호한 거절에 황태자는 해본 소리였다는 듯 아쉽게 웃었고, 올리비아는 어째선지 조금 섭섭해 하는 모양새였다.
엘레노어만은 그 낌새를 읽어냈는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녀를 째렸다.
“……언니? 설마 열 살은 어린 신혁한테.”
“아, 아니야! 아니니까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지 마!”
“얘네 뭐하는 거야, 안주인은 여깄는데 둘이서 쿵짝 잘 맞네.”
엘레노어와 올리비아가 기싸움을 벌이는 사이 클레어가 코웃음을 치며 다가와 강신혁의 팔짱을 끼었다.
강신혁은 연인에게서 전해져오는 따스한 감촉을 느끼며 작게 미소 짓곤,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클레어, 일은 다 끝났어?”
“이미 나노봇 풀었어. 최소한 런던 안에 있는 것들은 전부 회수가능할 거야.”
“역시 클레어야.”
마기를 머금은 카이랄에 오염되었던 것은 비단 황태자와 올리비아뿐만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왕족들, 그리고 아마도 윌포드가 자기 멋대로 날뛰기 위해 오염시켰을 다른 무수한 이들의 체내에 깃든 카이랄이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이상, 빠른 조치가 필요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아, 아아아……."
"음?"
어째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여성의 목소리에 강신혁이 고개를 틀자,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여전히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는 이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 에비거 해머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팀 에비거 해머의 대표로 나온 젊은 금발의 미녀였다.
“우리가 만든 검이……."
“아…… 과연, 그쪽 방향도 있었구나.”
무대 한편에 처참하게 녹아내린 검의 잔해가 퍼져있었다.
아테나가 뿜어낸 빛의 신성력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이게 뜻하는 바는…… 아마 그것을 만든 본인도 깨닫고 있겠지.
일단 클레어와 팔짱을 푼 강신혁은 그녀에게 다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마기가 섞인 모양인데?”
“몰랐어…… 적어도 오늘 이 순간까지는.”
“재료와 제대로 소통을 안 하니까 그렇게 되지.”
“당신은 그런 게 가능해!? ……가능하니까 그런 말을 했겠지. 크으으윽……."
아무래도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그녀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모양이었다.
강신혁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확실히 해야 할 일 앞에 망설이지 않고 질문했다.
“그 재료, 어디서 났어? 대충 눈치 챘겠지만 간단히 넘어갈 문제는 아냐.”
“협력할게…… 어쩌면 지금쯤 사태를 파악하고 종적을 감췄을지도 모르지만……."
“좋은 자세야.”
“그 대신…… 이라고 하면 염치가 없지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거절한다.”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어째서!?”
그것은 아까부터 등 뒤에서 이나희가 계속 매섭게 째려보는 시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장장이로 보이는 그녀가 무슨 부탁을 하고 싶은지 정도는 그야 강신혁도 빤히 알 수 있다!
“제자로 받아줘! 당신 밑에서 능력을 갈고닦아, 언젠가 반드시 당신을 뛰어넘고야 말겠어!”
“역시 그거구나, 싫어!”
“스승님!”
“싫다니까! 거절한다!”
강신혁은 단호히 거부하며 돌아섰다.
자신의 필생의 역작이 신성력 앞에 녹아내렸다는 충격 탓인가 제정신을 잃은 듯한 그녀는 아예 강신혁의 바지를 붙잡고 매달릴 기세였으나, 그 전에 이나희와 엘레노어가 합심하여 그녀를 붙들어 떼어냈다.
“이 이상 라이벌이 늘어나서 어쩔 건데! 넌 죽어도 안 껴줘!”
“금발의 독일계 미녀, 없던 타입! 안 돼!”
‘아니, 사실 다른 세상에 날 좋아하던 금발 미녀가 있기는 있었는데.’
말하면 살해당할 테니까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안 그래도 요즘, ‘바텐더’가 모루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부터 히어로 유니버스 자유게시판에서 ‘물여우’나 ‘화호’ 따위의 신입회원들과 바텐더의 키보드 배틀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으니까.
기존부터 강신혁과 친밀한 관계임을 과시하던 츠쿠요나 슈 같은 회원들도 끼어들어 난장판이 될 때가 많았다. 다른 회원들은 그것을 ‘정실다툼’이라고 부르며 즐겼다.
……다 때려죽이고 싶다.
“후, 역시 쟤네들이 있으니까 편하네.”
“설마 견제역이야?”
“응. 안 그래도 자기는 인기가 넘치는데, 달라붙으려는 떨거지들을 치우려면 나희나 엘레노어 같은 애들이 있어주는 게 편하지.”
클레어의 발언에 강신혁은 두려워져 몸을 떨었다.
어째서 이나희와 엘레노어에게 그렇게 친절한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었는데, 설마하니 이런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다니……!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과연, 그의 능력이 드러나고 날로 인기가 높아지는 와중에도 어지간한 이들은 강신혁과 행동을 함께 하는 이나희와 엘레노어에게 짓눌려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후, 그럼 바로 독일로 날아가볼까.”
“엇, 바로 말입니까?”
일행이 벌이는 촌극을 멍하니 보고 있던 윌리엄 황태자가 강신혁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당황하며 끼어들었다.
강신혁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무래도 독일에도 영국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서요. 요르문간드 놈들이 전부 도망치기 전에 꼬리를 붙들어야죠. 이번처럼 잘린 꼬리만 남기 전에.”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감사와 대접도 해드리지 못했는데……."
“그건 다음에 받죠. 대가는 알아서 한국으로, 아니지, 신영으로 보내주시고. 덤으로 엘리에 대한 대접도 좀 바뀌었으면 좋겠는데.”
사실 영국으로 넘어오면서 각오했던 것보다는 얘기가 조금 쉽게 풀린 감이 있었다.
강신혁은 엘레노어의 완전한 자유와 권리를 되찾아주기 위해 왕족 전부를 상대할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윌포드 놈이 명백한 악역을 자처하면서, 자연스럽게 황태자를 비롯한 다른 왕족들과는 원만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뇩……."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강신혁이 황태자한테 하는 말을 들은 엘레노어가 감동한 표정이 되었다.
황태자는 둘의 관계가 끈끈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긴장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엘레노어, 우리도 많은 얘기를 나눠야 할 것 같구나.”
“영국으로 돌아올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도망친 패배자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엘레노어의 결연한 목소리에, 역시 강신혁은 영국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강신혁은 엘레노어와 이나희, 이만우를 잠시 영국에 남겨놓고, 클레어와 함께 곧장 독일로 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곳에서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별로 없었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금발 미녀…… 라헬 엘마 버트(Rachel EIma Wirt)가 직접 신영에 소속 신청을 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