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 Chapter 56. 도마뱀 꼬리 - 3 >
“굉장하다, 어떻게 1년 만에 그렇게 성장한 거야?”
“놀리는 건가요? 결국 이렇게 졌는데……."
무대 아래로 내려오는 에비거 해머의 대표, 금발의 미녀(어딜 보나 성숙한 20대 여성으로 보였으나 작년의 루키즈 크리에이터 경연 대회에 참여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 10대일 터였다.)와 스쳐지나가며 이나희가 꺼낸 말에 그녀는 이를 뿌득 갈며 대꾸했다.
“아니, 그냥 순수하게 감탄한 건데? 작년엔 C랭크였는데 올해 작품은 무려 S+랭크잖아.”
“그건…… 여러모로 지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나희는 그 말을 듣고 무심코 그녀의 뒤를 살폈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팀명은 에비거 해머 그대로였으나 아티팩트 발표를 위해 단상으로 올라온 것은 그녀 혼자였던 것.
지원을 받았다는 것은 아마 재료에 관련된 얘기 같은데…… 이나희는 여전히 무대 한쪽에 올라와 있는 에비거 해머의 작품, 어딘가 검은 빛을 띠는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부분 자세히 물어보고 싶은데, 지금은 급하니까 나중에.”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에요.”
이나희는 단상으로 올라섰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공개되는 물건은 다름 아닌 펜던트였는데, 사각형 형태의 고리가 몇 겹으로 겹쳐져 있는 것이 인상적인 물건이었다.
“모두 기다리셨죠, 여러분 모두 익히 알고 계시는 ‘죽음의 인형사’ 강신혁이 속한, 신영의 아티팩트 제작…… 아, 팀 이름이 있었군요. K&L 팀입니다! 이 팀이 내놓은 작품의 이름은 ‘무한문’! 무려 SS랭크의 희귀도로 완성된, 과거의 대야장 이만우의 작품에 버금가는 터무니없는 아티팩트로, 아, 그런데 강신혁 씨는……?”
“이 작품은 제가 중점적으로 작업해서, 제가 혼자 설명을 맡기로 했습니다.”
이나희는 자신 혼자 올라온 것을 보고 조금 당황해 묻는 사회자를 상대로 뽐내는 것도 없이 담담히 대꾸했다.
하지만 이쯤 되면 이미 모두 깨닫고 있었다.
아직 발표되지 않고 남은 작품이 한 가지 더 있고, 아마 그것도 강신혁의 팀, K&L의 작품일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군요! 그러면 작품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이나희는 사회자로부터 무한문을 받아들어 목에 걸었다.
어디까지나 성능이 중요한 아티팩트이지만, 이나희는 과거로부터 몇 년 씩이나 악세서리를 만들어온 경험이 있어서인지 몇 개의 사각형 고리가 교차하는 형태로 구성된 아티팩트는 외관도 무척이나 훌륭했다.
사회자가 뭐라 질문을 하려는 순간, 이나희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사회자는 자신의 어깨 위에 놓인 이나희의 손을 보고 과장되게 소리를 질렀다.
"꺅!?"
“아티팩트의 성능은 간단합니다. 바로 공간이동이죠.”
사회자의 뒤쪽에서 나타난 이나희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사회자는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공간이동!”
물론 아주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정도로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아티팩트에는 허공을 짧은 시간 걷는 기능도 포함되어 있었고, 연속으로 공간이동을 하는 기능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능력의 발동시간이 매우 빨라 실전적인 운용이 가능하다는 압도적인 강점이 있었다.
이나희가 아티팩트의 기능을 차례차례 시연하자 장내에서 연달아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사회자의 얼굴도 점점 변해갔다.
“공간이동 계열 아티팩트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능력으로는 재현이 불가능한, 게이트에서만 구할 수 있는 희귀 아티팩트였는데요!”
“네. 이번에 발표가 이루어졌지만, 사실은 연금술사 클레어 보일 씨와 저희 팀의 강신혁 군의 합작으로 제작에 성공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탑 랭커들에게 공간을 이동하는 수단이 있다는 것은 암암리에 조금씩 알려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간이동 기능이 달린 통신기를 받은 후로 탑 랭커들의 기동력이 말도 안 되게 뛰어올랐으니,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나 불과 얼마 전 있었던 테러 사태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빠르게 움직이며 사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한 탑 랭커들의 모습은 지나치게 눈에 띄었고, 시기가 무르익었다 여긴 강신혁는 세계 랭킹 1위, 퍼스트로 인정받은 그 날 바로 공간이동 아티팩트의 존재에 대해 발표했다.
물론 아티팩트에 대한 요청이 쇄도했으나 쉽게 만들 수도 없고, 쉽게 만들어지면 안 되는 물건이기에 장차 세계랭킹이 높은 순서대로 예약을 받을 예정이라는 말로 일단 모든 요청을 뿌리친 바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공간이동 아티팩트가 여기서 튀어나온 것이다!
“그렇다는 건 혹시……?”
“네. 연금술사 님은 오늘 이 자리에도 함께해주셨는데……."
이나희가 원래 강신혁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자, 어느덧 나노봇을 조종해 투명화를 풀고 나타난 클레어가 우아하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참고로 이건 사전에 약속되어 있던 일이었다. 잠시 후 일어날 일을 생각해보면, ‘약물’의 전문가인 연금술사가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편이 좋았기 때문이다!
“어머, 어느새! 비밀스럽게 초청이 이루어졌나보네요!”
“네. 사실 저희 팀은 연금술사와의 친분이……."
이나희는 그 자리에서 간략하게, 자신이 클레어에게 공간이동 아티팩트를 만드는 방법을 사사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그것도 사실이었지만, 공간이동 아티팩트는 어디까지나 기술과 ‘원천’이 함께할 때만 제작이 가능한 것.
즉 강신혁이 힘을 담아 가공한 재료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티팩트 또한 하이랭커를 대상으로 판매될 예정인가요?”
“아, 이건 제가 쓰려고 만든 거예요.”
“그, 그렇군요.”
아티팩트 경연은 어디까지나 장인들이 자신이 만든 작품을 알리고 평가받기 위한 자리이지, 그것을 판매하기 위한 자리는 아니다.
하지만 보통 아티팩트 장인들이 그 아티팩트를 직접 두르고 전장에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이나희의 반응에 많은 이들이 실망한 것도 당연한 일.
“하이랭커들을 위한 공간이동 아티팩트는 연금술사와의 주도로 꾸준히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저희 팀 K&L이 만드는 아티팩트는, 한국의 초인양성학교 신영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신영 길드에 우선적으로 공급이 이루어집니다.”
“신영 길드……? 아하!”
사회자가 이제야 눈치를 챘다는 양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째서 이나희가 이 자리에서 신영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가?
그렇다, 바로 신영의 이름값을 높이고 메리트를 극명하게 밝혀, 신영에 속한 이들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신영 길드는 아직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역시나 한국인 중심으로 개편을……?”
“좋은 질문이네요. 하지만 아니에요.”
이건 강신혁와 이나희도 모르는 일이지만, 사회자는 이상하게 이나희에게 말을 잘 맞춰주고 있었다.
이래서야 아티팩트를 발표하는 자리가 아니라 신영을 홍보하는 자리처럼 보일 지경!
당연하지만 그것은 사전에 이만우의 입김이 들어간 결과였다.
강신혁은 늘 믿지 못하지만, 이만우라는 남자가 아티팩트 업계에 끼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했던 것이다!
“신영 길드는 신영에 있고자 하는 이들 모두를 받아들이고 있어요. 길드라는 이름을 새로 내건 이상, 길드 멤버로서 활동할 뉴페이스의 모집도 이루어지고 있죠.”
사전에 미리 말을 맞춘 희극이나 마찬가지였으나, 보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이나희의 말을 듣고 ‘이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가뜩이나 신영에는 국제초인랭킹 1위인 인형사 강신혁이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무력집단으로 봐도 질이 높은데, 거기에 더해 이런 아티팩트 지원까지 이루어진다고?
그렇게 되면 단순히 유력한 길드가 나타난 수준이 아니라, 각국의 정예를 빼가는 흉악한 약탈범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이런……."
“이건…… 그래도 공간이동인가……."
설마하니 학교의 이름을 내걸고 나온 팀이 공간이동 아티팩트를 발표하고, 심지어는 물건을 학교 안에 푼다는 얘기를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시점에서, 설령 이나희가 만든 물건이 대상작이 아니라고 해도, 실질적인 무대의 주인공은 그녀와 신영이 되었다.
강신혁은 그저 랭크가 높기만 하면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나희는 명색이 아티팩트 장인의 손녀답게 어떤 아티팩트가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는지 명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얘기 잘 들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전 세계 미디어의 헤드라인을 장식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면 바로 대상작의 발표로 넘어가시죠.”
“다들 예상하고 계신 것 같으니 그렇게 할까요?”
리허설을 한 것도 아닌데 사회자와 이나희의 호흡은 딱딱 맞았다.
사회자와 이나희는 처음부터 무대 중앙에 놓여있던 테이블의 위에 얹힌, 미사포처럼 새하얀 테이블보를 붙잡고 끌어내렸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점의 티 없이 새하얀 방패였다.
“와, 정말 아름다운 물건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지 아름답기만 한 물건이 아니죠. 여러분,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이 작품의 희귀도는 무려 SSS-랭크입니다!”
“……뭐?”
“SSS-랭크……?”
“뭐라고!?”
“마이너스가 붙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아티팩트가 트리플에스의 영역에……!”
이야, 진짜 반응 좋네. 혹시 할아버지가 관중 사이에 사람이라도 심어놓은 것 아닐까?
이나희는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경악성에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어디에선지 모르게 나타나 무대 위로 저벅저벅 걸어올라오는 강신혁의 모습이 보였다.
대체 뭣 땜에 자리를 비웠는지는 몰라도, 그 짧은 시간 동안 용무를 모두 마치고 그녀의 사랑스러운 파트너가 돌아온 것이다.
“팀 K&L의 두 번째 작품, 아테나입니다! 여신 아테나의 이름을 고스란히 가져오다니 실로 대담한 네이밍인데요, 무려 SSS-랭크라는 전무후무한 희귀도의 작품을 만들어냈으니 이 이름도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사회자가 혼신의 힘을 다해 찬양했다.
관중석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이만우가 슬쩍 엄지를 치켜드는 것을 본 사회자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 어떻게든 손의 힘을 빼고 SS+랭크로 완성시키려던 것이 그만 힘이 살짝 더 들어가는 바람에 이 꼴이 난 것이다.
강신혁은 아슬아슬하게 SS+랭크 수준에 머무르는 방패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지만, 지난 몇 달간 그의 라이트 마스터리가 가파르게 성장한 것을 잊어먹은 탓에 마지막 조정에서 실패해버린 것.
하지만 그렇다고 작품을 새로 만들 여유도 없고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감출 만큼 SSS-랭크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서(강신혁의 눈이 지나치게 높아진 결과였다.) 이대로 출품한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잘된 셈이었다. 뜻하지 않게 쓸 자리가 생겼으니까.
“지금 강신혁 씨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작품의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무대 중심으로 다가온 강신혁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방패를 한 손으로 들고는, 관중석을 향해 섰다.
무수한 이가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왜 아직까지 올리비아를 죽였다는 보고가 없는 거지?’라고 물어보는 듯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윌포드의 시선이 강렬했다.
“이 방패, 아테나는 모든 것을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 빛으로 승화시킨 결과물입니다. 강한 빛과 성스러운 속성을 동시에 품고 있으며, 특히 왜곡된 존재, 대표적으로는 마족이 있겠습니다만, 그들의 힘을 위축시키는 데 효과적입니다.”
“무려! 대(對)마족전에 특화된 아티팩트란 얘기인가요! 그것을 개인의 힘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나요!?”
“소재에 따르지만, 그렇습니다. 요르문간드의 공습이 최근 들어 과격해진 것은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특히나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마족들, 그놈들을 처부수고 싶다는 마음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도……?”
“이 작품은 아니지만, 앞으로 성 속성의 무구를 만들어 신영에 배급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럴 수가!”
이나희와는 달리 강신혁은 사회자가 그들에게 말을 맞춰주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파악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나쁠 것이 없다, 특히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생각해보면!
“그러면 강신혁 씨, 시연이 가능할까요?”
“네. 마침 적절한 대상이 눈앞에 있기도 하고, 방패가 지닌 빛의 정화의 힘을 한 번 시연해볼까 싶네요.”
“네?”
사회자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반문했지만, 다행히도 윌포드를 비롯한 몇몇 이들은 그의 말 뜻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설마, 설마 하는 눈으로 그를 보며 제자리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윌포드에게 강신혁은 씨익, 웃어주었다.
그리곤 방패를 앞으로 내밀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왜곡된 모든 것의 정체를 드러내고 정화하라! 빛의 정화!”
당연하지만 시전어를 딱히 외칠 필요는 없었는데, 죽어도 못 고치는 중2병은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